탐방 기고/장제모칼럼

[장제모칼럼] 지방선거와 지도자론

금천마을신문 2018. 5. 4. 14:15

지방선거와 지도자론



6·13지방선거 일정이 다가오면서 세상은 시끄러워 지고 있다. 입후보자들이 기회를 놓칠세라 그들이 가진 온갖 역량을 동원하여 자기를 알리고자 시간을 조각내어 동분서주하고 있다. 바야흐로 세상은 입신 영달을 바라는 사람들의 희망으로 온갖 미사여구들이 마치 봄 꽃피듯 자리를 가리지 않고 피는 시간이 전개되고 있다. 

지방선거의 목적은 지역 일꾼을 뽑기 위함이다. 말이야 일꾼이라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주민들의 대표 즉 지도자를 선출하기 위한 과정이다. 주민들을 대표하는 위치인 만큼 지역일꾼은 곧 주민들의 지도자인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주민들은 그것을 알고 있고 그런 취지로 자신의 투표권을 행사한다. 

그런데 선거에 참여하여 누구를 선택해 놓고도 그들을 지도자라 하는 데는 언어적이거나 정서적으로나 저항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다. 선거라는 과정에서 지역 주민의 대표로 뽑았으니 지도자임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이러한 현상은 스스로 투표에 참여하고 누군가를 지지하여 투표를 하고 그가 선출되었어도 지도자로 예우하기는 부족하다고 보기 때문일 게다. 다시 말하면 자기 의사로 구의원이나 시의원 구청장, 국회의원 등을 뽑아놓고도 그들을 지도자로 보는 데는 동의가 쉽지 않는 것이다. 


왜, 스스로 참여한 선거를 통해 선출한 주민 대표를 지도자로 예우하는데 경계를 둘까? 그 답은 아마 뽑힌 자들이 지도자란 단어가 가지는 위상 즉 그것이 가지는 위엄을 부여하기는 부족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듯 지도자란 명칭은 아무에게나 쉽게 부여해서는 안 되는 단어로 이해를 하는 것이 국민들의 보편 정서다. 곧 지도자란 능력에 더하여 품격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 보편적 이해다, 후보들은 물론 기존 정치인들은 주민들이 스스로 선거로 주민대표를 뽑아놓고도 지도자로 보지 않으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이러한 세태(世態)는 그간 공직선거법에 의거 선출된 당선자들의 능력이나 자질에 대한 불신이 있다는 증거인데 이는 지방선거에 국한하지 않는다. 그럴 만큼 우리 사회에서 선거의 결과는 언제부터인가 국민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현상은 따져 보면 후보자나 당선자의 책임도 있지만 그들을 뽑았던 자, 즉 피선거인의 책임도 없지 않다. 다시 말하면 자질이나 능력이 부족한자가 나올 수 있는 선거환경을 만든 당사자는 정치인만이 아니고 주민들도 모두는 아니지만, 저질 선거환경 조성 공동 책임자다. 

주민들은 투표하기 전까지는 후보의 능력이나 자질에 누구보다 엄격한 척 하면서도 막상 선거에 임하여서는 지금까지 견지했던 자세를 던져버리고 시류(時流)를 살핀다. 마치 게임에 이기 위해 기회를 살피기 위해 요리조리 탐색을 하는 어린이들처럼 말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는 합리적 판단인양 ‘찍을 마땅한 사람이 없으니 될 만한 사람을 찍겠다.’고 한다. 이러한 부류는 주로 거대정당의 후보를 선택한 사람들이 하는 상투적 언사다. 마땅히 찍을 사람이 없다는 것은 후보자를 제대로 탐색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찍을 사람을 결정해 둔 부류로 대개는 거대 정당을 지지하거나 선호(選好)하는 사람들이다. 


지지 또는 선호하는 정당이 있다하더라도 후보자가 마을에 들지 않으면 선택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용기이자 지혜다. 선거의 목적은 지도자를 뽑는 것이니 내 편보다는 모두의 편을 선택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모양이 좋기 때문이다. 동어 반복이지만, 선거의 목적은 지도자를 선출하고자 함이다. 자기 이해관계로 지지정당을 두고 있다면 달리 책할 사유는 없지만 선거의 본래 목적은, 내 이해(利害)가 있다하여 그 의의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는 사람들이 선거에 임할 때 두는 선택 기준은 대개 정당 선호도다. 지지와 선호는 구별하기 좀 그렇지만 분명히 다른 것은 선호는 상황적인 것 그러니까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선호를 이유로 거대 정당에 투표를 하는 사람을 탓하고 싶지 않지만 아쉬움을 가진다. 가볍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땅한 후보가 없으므로 거대정당을 외면할 이유가 없다’니 달리 할 말은 없지만 쉽게 공감이 안 되는 건 필자의 편견인지 모르겠다.

유의해야 하는 것은 주민들은 두드러진 후보가 없을 때 유관 후보를 찾고 그도 없을 때 대부분이 거대 정당의 후보를 선택한다. 정치꾼들은 경력자건 초보자건 이런 도식(圖式)을 알고 있다. 그들이 거대정당의 공천을 받고자 이전투구도 마다하지 않은 이유다. 

거대 정당의 존재는 정치인의 시각에서는 별 문제없다고 하겠지만 다수 국민의 눈높이에서는 바람직하지 않다. 우선 규모가 지나치게 크고 지배 구조도 기계적이라 자유민주주의체제의 정당으로서는 바람직하다 할 수 없다. 물론 거대정당이 존재한다하여 그러한 정치구도를 비민주적이라거나 그들이 벌이는 정치행태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신뢰를 둘 수 없다. 그간의 그들 정치행적이 그렇고 특히 인적구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인적 구성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그들 구성원의 면면을 볼 때 그렇고 특히 선거철에 보이는 기발한 후보들을 볼 때 더욱 그렇다. 그들의 후보 선정 기준에서 충성도는 중요하다. 당연한 현상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을 후보 선정 기준으로 하는 것을 합리적이라 볼 수 없다. 충성도가 높은 자들은,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지도자적 자질에 문제가 있는 것이 그간의 정치판 데이터다, 기발한 행동도 기회주의적 모습이고 그런것들은 눈에 쉽게 띈다. 

기회주의자는 후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그들은 말할 것이다. ‘정당에 충성을 하는 이를 배제한다면 어떻게 정당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국민이 정당에 묻는다. ‘그렇게 유지해온 정당이 얼마나 견고하고 민주주의를 실천했는가?’ 거대정당을 싸잡아 비난하고자 함은 아니지만 지금과 같은 정치 풍토에서 지도자를 찾는 것은 무척 어렵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다. 그런 한편 선거에 임하여서는 투표를 제대로 하자는 것인데 선거의 목적은 지도자의 선출임을 유의해야 함을 말하고 싶어서다. 이제 지도자 이야기를 해 보자.

 지도자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가르쳐 이끄는 사람’이다. 남을 가르치려면 지식이나 능력이 있어야 하지만 그에 앞서 갖추어야 하는 것은 도덕성이다. 재능이 있다하여 도덕성을 결여한 사람을 남을 가르치는 위치에 두는 것은 도둑에게 도덕교육을 담당하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지식이 많고 능력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도덕성을 결여한 사람은 남을 가르치거나 이끄는 위치에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 사람은 정의(正義)의 편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덕성은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우리는 사회 보편성 즉 사회적 가치를 이야기 하면서도 이를 행동하거나 지키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렇듯 정의의 실천은 보통사람으로서 쉽지 않은 과제다. 도덕성 그것은, 고도의 객관성이 확보되어야 비로소 실재(實在)를 동의할 수 있다. 

지도자에게 요청해야 하는 것은 ‘사회적 가치의 실현’이다. 그것은 도덕성을 갖춘 사람이라야 창출해 낼 수 있는 가치로 ‘그 사회의 다수가 동의하는 어떤 본질적 가치’다. 그것이 존재해야 그 사회의 통합성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선거의 목적을 지도자의 선출로 이해해야 한다. 그들은 정의로움에다 도덕성을 갖추고 능력도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가치 창출 능력이다. 유념해야 한다.(♣2018.04.25.)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해 다양한 

마을활동을 

함께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