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진열사를 기억하다

32주기 추도식 경기도 마석모란공원에서 예정


박영진 열사의 32주기 추도식이 오는 3월18일 마석모란공원에서 열린다. 

고 박영진 열사는 1985년 당시 구로공단 내 (주)신흥정밀에 입사한 후 1986년 3월 17일 임금투쟁 중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살인적인 부당노동행위 철회하라, 삼반세력(반민족, 반민주, 반민중) 타도하자”를 외치며 분신한 열사다. 열사추모사업회 측은 매년 기일에 맞춰 마석모란공원의 열사묘역을 선례하고 열사의 뜻을 기러왔다.

고 박영진 열사는 1960년 생으로 충남부여에서 태어서 1971년에 서울에 올라와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배문중학교를 다녔으나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배움의 꿈은 검정고시 공부로 이어졌으며 책을 사러 책방에 들렀다가 야학에 들어가게 됐고 그곳이  ‘씨앗글방’과 ‘한얼야학’이었다. 이곳에서 사회의 모순에 대해 깨닫게 된다. 

1984년 1월 시흥시에 동도전자에 입사한 후부터 공장생활을 시작한 후 1984년 7월 동일제강으로, 9월 신흥정밀에 입사한다. 1985년 4월30일 신흥정밀 노동조합 결성에 성공하지만, 회사와 구청, 노동부, 경찰 등의 야합으로 설립신고증이 반려 당하고 지속적인 싸움을 전개한다. 그러던 중 이근 동일제강이 1985년 5월7일 파업에 돌입하고 열사는 해고자로 지원을 담당한다. 이 투쟁의 시기는 최초의 정치연대파업이라는 구로동맹파업이 일어난다.


박영진 열사는 활동의 중심을 현장에 두고 1985년 9월18일 독산동에 있는 신흥정밀에 입사하여 구로, 독산 지역의 노동자들과 공동투쟁을 계획하다 1986년 3월17일 임금인상 파업을 주도하여, 식당을 점거했다. 사측 관리자와 경찰이 돌과 각목으로 식당에 난입했고 열사와 동지들은 옥상으로 올라가 투신과 분신을 경고하며 저항했다.


열사의 경고에도 조소와 자극으로 일관한 경찰과 사측을 향해 열사는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살인적인 부당노동행위 철회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고 외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강남성심병원으로 이송된 열사는 그 다음날 분신 13시간 만인 18일 새벽 3시30분에 “전태일 선배가 못다한 일을 내가 하겠다. 1000만 노동자의 권리를 찾겠다.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라는 유언을 남기며 운명했다. 열사의 나이 27세였다. 4월30일 마석모란공원에서 장례식에는 청량리에서 마석까지 노동자와 경찰 간의 치열한 투석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성호 기자



<이하 사진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동 연구소 참조>  



1986년 장례식 모습







<이하 박영진열사 추모사업회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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