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기동대이전

‘기동대이전! 중학교유치! 주민대책위원회’를 만나다

30여 년 동안 주택가 한복판에서 진압훈련을 하여 주민에게 고통을 준 시흥4동 남부기동대 이전이 확정됐다. 주거환경과 교육환경 개선을 바라는 주민의 간고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그 중심에는 ‘기동대이전! 중학교유치! 주민대책위원회(이하 주민대책위)’가 있었다. 주민대책위 대표 및 집행부들의 헌신과 주민의 주체적인 참여가 일구어낸 주민운동의 승리라고 얘기할 수 있다.

완연한 가을로 접어든 10월 9일 독산4동 교육협동조합 사무실에서 주민대책위 대표단과 인터뷰를 하며, 지난 1년여 대책위 활동을 돌아보았다. 인터뷰에는 주민대책위 김대성 상임대표, 양인찬 공동대표, 오현애 공동대표, 이승현 집행위원장, 민상호 정책팀장이 참석했다.

■ 기동대 이전이 확정됐다. 소감은?

김대성(이하 김): 시흥4동은 30년 동안 살고 있는 제2의 고향이다. 기동대가 주민에게 많은 불편을 주었다. 중학교가 없어서 학생들이 멀리 다녀야했다. 주민 편의와 학생들의 터전을 위해 운동을 했다.

양희찬(이하 양): 2008년에 기동대이전 운동을 했는데 일부 학부모의 반대로 안됐다. 우리 사회가 발전하려면 잘못된 것은 짚어내고, 반드시 수정돼야 한다. 주택가 한복판에 경찰기동대가 군림했다.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이 단합해서 해냈다는데 의미가 있다. 다른 지역에도 유사한 일들이 있을 것이다. 전국적으로 알려서 과거 독재 권력이 강행했던 것을 찾아 바로 잡아야 한다.

■ 주민대책위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여러 활동을 했는데 그 중 기억에 남는 활동이 있다면?

: 관절염이 있지만 산기슭 공원에서부터 난곡중학교까지 일주일동안 아침등굣길 체험을 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꼭 필요한 일이라 했다.

: 등굣길 체험 때 우리 주민들이 다리가 아픈데도 불구하고 현수막을 들고 한 것에 마음이 참 쓰라렸다. 대표로서 존경스러웠다. 학생들의 등하굣길이 얼마나 어려웠을까 피부로 느꼈다. 기금을 마련하기 어려워 현수막이나 밥값까지 모두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주민들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 2008년 시작했다가 중단돼서 부채의식이 있었다. 열심히 할 수밖에...(모두 웃음)

오현애(이하 오): 주민한마당도 괜찮았다. 띄엄띄엄 있었는데 행진하다 보니 좋았다. 아이들과 함께 서명도 하고, 촛불도 들고, 주민 참여가 좋았다. 조혜숙 대표님의 생생한 호소 덕분에 서명이 많이 됐던 것 같다.

■ 대책위 활동을 하면서 가장 신경을 썼던 부분은 어떤 것인가?

: 2008년에 기동대 이전과 중학교 유치를 동시에 추진했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선후를 가려 기동대를 먼저 내보낸 후 중학교 유치를 논의하자고 했다. 그래서 기동대 이전 문제에 많은 주민이 함께 하지 않았나싶다.

: 주민들이 같은 여건에서 같이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신경 썼다.

■ 민관TF팀도 마련되고, 구의회 특위도 활동했었다. 공공기관(구청, 구의회, 경찰청, 교육청, 시청)과 사업하면서 파트너쉽은 어땠나?

: 공무원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이해한다. 서로가 입장이 있으니까 (공무원은)한계가 있지 않을까. 그래도 이것이 추진될 수 있었던 것은 약자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 바뀌어 가는 것이다.

: 주민운동 차원에서 보면 관과 민이 협동해서 풀어가는 것이 정설인데, 초기에는 데모하는 것으로 취급하기도 하고, 기자회견 할 때도 닭 보듯 하고, 그런 과정을 거쳐 민관TF팀이 구성됐다. 이후 활동은 차치하더라도 민관이 함께 문제를 해결하려고 단초를 마련한 것이 컸다.

이승현(이하 이): 기대했던 만큼 관의 협조가 부족했다. (관에)기대가 컸을 수도 있고.

■ 다른 지역의 주민운동 사례를 보더라도 실질적 성과를 거두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기동대 이전이라는 성과를 냈다. 가장 큰 요인이 무엇이라고 보는가?

: 초등학교 바로 옆에서 진압훈련, 괴성 등 30년 동안 고통 받아왔던 주민의 요구가 결국 표출됐다.

: 주민의 주체역량 부분은 평가해야 한다. 객관적인 열악한 상황도 있지만 중심점이 없으면 일을 해결하기 어렵다. 대책위가 구성되고, 이를 중심으로 (주민이)의견 표출했다. 가장 큰 부분은 주민의 주체역량이 형성되어 이것이 공동대표, 주민대책위로 표현됐기 때문에 성과가 나타날 수 있었다.

: 주민의 힘이 제일 크다. 공무원이 보수적이고, 탁상행정으로 해서는 해결하기 어렵다.

앞으로의 일도 주민의 의견대로 추진돼야 한다.

: 집행위 활동도 크게 작용했다. 전략적인 접근방법, 다양한 문제해결 노력들이 중요했다.

인궈위 제소, 국정감사, 시장 면담, 구청장 면담, 기획재정부 방문 등 관련 부서를 모두 찾아갔다. 그러면서 이승현 집행위원장과 민상호 정책팀장의 역할이 상당했다.

■ 이후 대책위는 어떻게 되는가?

: 기동대 이전 도장이 찍혀지는 순간 (대책위는)해체한다. 시흥4동 발전을 위해 지속적으로 주민과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겠다. 시흥4동 발전을 위해서도 중학교가 유치돼야 한다. 바람직한 학교 설립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 기동대에 구청 땅이 있다는 것, (기동대가)건축법, 도로법을 위반한 것을 찾아 낸 것도 민상호 정책팀장이다. 고생 많았다.

: 어려운 문제, 복합적인 문제도 힘을 모으면 해결할 수 있다는 경험을 얻었다.

: 대책위는 절실한 주민의 요구를 실현했다. 최근 마을 만들기 열풍이 세다. 전체적인 마을 만들기 사업 중에서 (기동대 이전 운동이)여러 가지 갈등의 소지가 있지만 화합해 마음을 모아 추진됐다는 것이 소중하게 평가돼야 한다.

□ 주민대책위 활동경과

<주요사업>

▣ 2011년도

▪ 7월 2일 : 마을신문 금천in 주최 ‘민선5기 1주년 기념토론회’ 이승현 씨 사업 제안

▪ 7월 23일 : 금천풀뿌리자치연구모임 주민운동사업으로 결정

▪ 7월 26일 : 주민대책위(준)결성

▪ 8월 18일 : 주민대책위 구성(공동대표 : 김대성, 양인찬, 조혜숙, 오현애, 박봉영)

▪ 주민 12,000여명 서명 받음

▪ 8월 27일 : 주민한마당(100여명 참석)

▪ 구청장면담(3회)

▪ 9월 7일 : 국가인권위원회 제소

▪ 9월 16일 : 국민권익위원회 제소

▪ 9월 21일 : 기획재정부 진정

▪ 9월 22일 : 경찰청 국정감사 질의

▪ 10월 5일 : 서울경찰청장 기동대 방문 (이전 및 대체부지 물색)

▪ 10월 6일 : 금천구의회 특위구성

▣ 2012년도

▪ 2월 14일 : 주민대책위 활동재개(2012년 사업계획 수립)

▪ 3월 2일∼9일 : 등굣길 걷기체험(년 33명 참가)

▪ 3월 22일 : 김형주 서울시 정무부시장 방문

-서울시를 중심으로 서울경찰청 및 서울교육청과 TF팀 구성약속.

▪ 4월 27일 : 기동대 이전 민관협의체 T/F 구성

▪ 6월 30일 : 박원순 서울시장 면담

▪ 7월 18일 : 경과보고 및 학부모간담회

이성호 최복열 기자 공동취재

gcinnews@gmail.com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