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관영 시흥교회 원로목사 별세
억눌리고 가난한 이웃들의 벗으로 평생 살아
<생전의 차관영 목사. 지난 2004 시흥교회 100주년에 맞아 홍보물을 들고 있다. 출처 : 뉴스앤조이>
고 차관영 목사는 1927년 12월 용인에서 태어났으며, 1959년 5월 21일 군을 제대한 이후 시흥교회에서 시무를 시작하였으며, 1994년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고인은 7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져 휠체어에 의존하며 투병해 왔다.
고 차관영 목사 추모예배에는 시흥교회 성도들과,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지역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임형광 시흥교회 장로는 기도에서 “고 차관영 목사는 평생을 가난한 이웃들의 벗으로 살아오셨다, 홀로 사는 노인과 고아들을 그냥 보지 못하고 무엇이라도 들고 집을 자주 방문하였다.”며 고인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다.
고 차관영 목사는 억눌린 사람들에게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70년대에는 군부독재 정권에 탄압을 받았던 도시산업선교회를 후원하였고, 군부독재시절 우리나라 민주주의 운동을 주도했던 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장을 엮임 하였다.
1980년대에는 시흥교회 교육관을 구로공단의 노동자들이 배움을 통해 주인의식을 찾도록 하는 노동야학을 하는데 사용하도록 하였다. 1986년 3월 신흥정밀(마이크로) 임금인상투쟁 과정에서 경찰의 현장 진입으로 옥상으로 쫒겨 나는 과정에 분신한 고 박영진 열사도 시흥교회 노동야학 출신이었다.
임형광 장로는 “당시 남부경찰서 형사들이 일요일 예배를 드릴 때에는 2층에서 목사님의 강록을 매주 녹음 할 정도로 목사님은 사회적으로도 적극적이셨다”며 울먹였다.
과거 시흥야학을 활동했던 노웅희 씨는 “70년대 도시산업선교회가 있었는데 그때 인명진 목사가 위원장이었고 차 목사님이 부위원장과 고문의 역할을 했다. 과거 독재시대에 시흥교회의 청년교인들 수십명이 감옥에 갔다. 숨겨주시도 하고 잡혀가는 사람들을 막아주기도 했다. 당시에는 야학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잡아가서 3년형을 구형하던 시기에 야학을 할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그 암울하고 혹독한 과정에서 시흥지역 청년들에게는 큰 울타리를 쳐주셨다.”고 고인을 회상했다. 이날 추모예배 내내 울먹이던 초로의 노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내내 눈물을 흘리시며 “목사님은 평생 내삶의 정신적이 지주”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한 평생 금천구에서 억눌리고 가난한 이웃들의 벗으로 살아오신 고 차관영 목사님의 명복을 빈다.
최석희 기자
nan761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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