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꽁 언 한강 위에 항아리 같은 폭탄 쏟아져

'7.27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전쟁을 기억하다'


7월 27일은 휴전협정이 이루어진 지 65년이 되는 날이다. 지난 4월 판문점에서 남북 두 정상 역사적인 선언을 했지만 여전히 길고 긴 협상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끝나지 않은 것은 전쟁만이 아니다. 여전히 한반도의 수십 수백만명의 사람들에게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다. 본지는 당시 한국전쟁을 겪고 피난을 갔던 시흥1동 주민 임유순 할머니(87세)와 박용각 할아버지(90)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전쟁 전  생활

임유순 할머니 : 종로 누하동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고향이 연기군(현 세종시) 이셨다. 어렸을 적에는 집이 넉넉해서 중학교까지 다닐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박사(이승만 전 대통령)가 우리집 땅을 소작인에게 다 줘버렸다. 돈 조금, 지가증권 주고. 그 때 아버지가 홧병이 났다. 등록금을 낼 수 없게 되니까 지지배가 공부해서 뭐하냐며 3학년, 15살까지 다니고 그만두었다. 그 해 12월에 아버지 친구 분이 소개시켜줘서 남산에 있는 통계국에 입사했다.  


박용각 할아버지 : 수원에서 태어나 학교를 서울에서 다녔다. 생활이 곤란해서 고등학교 졸업은 못했고 20살이던 50년에 측량기사로 취업을 했다. 전라도 화순에 있는 탄광으로 발령받아 일을 하고 있었다. 


전쟁 발발 직후

임유순 할머니 : 전쟁은 19살 때 났다. 6월 25일은 일요일이라 회사엔 안 갔고 전쟁이 났다는 소식은 집에서 라디오로 들었다. 다음 날인 26일부터 회사 안가고 집에 있었다. 어디 갈 수도 없던 게 이 박사가 새벽 4시에 한강 다리를 끊어놓았다. 지프차타고 한강까지 가면 무조건 죽는다고 했다. 빨갱이가 들어온다는 소문이 자자했는데 28일 (공산당이) 싹 들어왔다고 했다.

밖에는 차도 안 다니고 전차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 궁금해서 몇 시간을 걸어 회사에 가봤다. 정권은 다 빨갱이 정권이 되었는데 회사 사람들 일부는 계속 회사에 다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무서워서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얼마 있다 동에서 젊은 사람들을 호출을 해서 다 데려갔다. 나는 안 불러서 안 갔다. 그렇게 여름이 다 갔는데, 서울 사람은 어디 피난도 못 갔다. 

 

박용각 할아버지 : 탄광일을 하면서 회사에서 직원 집에서 하숙을 했다. 전쟁난 날은 일요일이라 집에서 라디오로 전쟁 소식을 들었다. 회사가 정부에서 하는 국영기업이라 일이 바로 중단되었다. 거기서 한 달을 지내다가 7월에 부산으로 회사 전체가 다 피난을 가서 따라 갔다.


그 후에는 어떻게?

박용각 할아버지 : 부산에 간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방에서 자고 있는데 갑자기 새벽에 군인들이 쳐들어왔다. 빤스만 입고 있었다. 다 나오라고 해서 끌려 나갔는데 그대로 징병이 되었다. 나처럼 끌려나온 사람들 다 바로 아침에 배를 태웠다. 일본 요코하마 상륙해서 군반현 (군바켄) 군대에 유엔군으로 들어갔다. 미 7사단 4구 야포대대에 경비병으로 배속 되었다. 8월 20일까지 훈련을 받고 인천상륙작전, 9월 15일에 투입되었다. 배타고 24시간 하루정도 걸렸다. 그때 인천 내려서 기차타고 지금 구로동에 내려서 걸어서 행군을 했다. 시흥 이 동네까지 왔는데 그 때 여기에 군부대가 있었다. 그렇게 안양에서 있다가 또 차를 타고 부산에 갔다. 부산에서 훈련받다가 10월에 배를 타고 하루를 걸려 이북에 있는 함경남도 북청군으로 갔다. 거기로 경유해서 육지로 또 차를 타고 풍산, 갑산, 해산진(압록강)까지 갔음. 총 쏜 건 이때 한번 있었다. 경비병이라 특별히 뭐 하는 건 없었다. 먹으라면 먹고 걸으라면 걷고, 2-3일을 체류하고 있는데 그때 중공군 쳐들어왔다. 후퇴를 해야 되니까 걸어서 함흥까지 갔다가 배타고 (동해시) 묵호로 갔고 해안에다 하선했다. 12월 10일쯤인데 이때까지도 미군에 속해있었다. 그러고 나서 강릉 한국군 제1군단에 배속되어 4개월 가량 근무했다. 그 후 1951년 4월 부산에 있는 육군 종합학교 입교해서 8월 18일 육군 소위로 임관되어 강릉 속초에서 53년까지 있었다.  

소대장 되고 일주일 되가지고 경비를 서는데 밤에 인민군이 침투했다. 인민군 소령하고 사병이 넘어왔다. 부대에서 잡아서 후방으로 보냈는데 그 결과는 내 임무는 아니어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종전시기에는 중대장이어서 지휘를 해야 했다. 그렇게 한국군에서 소대장, 중대장, 거쳐 대위까지 하고 1956년에 제대를 했다. 


임유순 할머니 : 인천상륙작전으로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갔다가 중공군이 들어와서 후퇴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1월 3일 피란준비도 제대로 못하고 가지고 갈 것도 없고 세 가족이 무작정 집을 나섰다. 이종오빠가 남대문 옆 서소문 쪽에 살았는데 그 집에서 하루 저녁 자고 나선 게 1월 4일 아침이다. 거기서부터 걸어서 꽁꽁 얼은 한강까지 갔다. 한강 얼음 두께가 팔뚝 길이만 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 추운 건 아무것도 아니다. 그 후로 지금까지 그렇게까지 추워본 적이 없다. 한강에 피난민 걸어가는 노선이 있어서 따라가 건너갔다. 아주 사람이 끝도 없었다. 나중에 보니까 거기가 흑석동이었다. 그렇게 걸어서 과천 넘어가는 고개, 남태령까지 갔는데 그 때부터 비행기가 폭격을 했다. 과천읍 넘어가는 남태령 고개에서 한강까지 훤히 내려다보였다. 미군 비행기가 항아리 같이 생긴 폭탄을 한강에다가 쏟아 부었다.


왜 미군이 한강에 폭격을 한 건가?

중공군 못 건너오게 하느라고, 미국 비행기가. 개성사람들처럼 위에서 온 사람도 있는데 많이는 못 왔다고 한다. 서울사람들도 강만 건너면 일단 살 줄 알고 강을 건넌 거였다. 고 새우젓독 만한 폭탄이 다 얼음을 깨느라고..인민군 못 건너오게, 사람들 못 건너오게. 하늘에서 펑펑 쏟아졌다.

 

한강을 건넌 이후는 어떻게 되었나?

그러고 해가 저물어서 그 남태령 근처 길가에 아무 집이나 들어갔다. 집이 없으니까. 서울은 인민군이 다 점령해버렸다고 한다. 그 집도 밤에 그렇게 총질을 당했는지 옷이 빵빵 뚫어져있었다. 집 다락에 있었는데 거기 살던 사람은 다 죽었을 것이다. 율동치마에 콩알같은 구멍이 나있었다. 다음 날이 눈보라 많이 쳤는데 인민군이 여자는 다 집어먹는다고 해서 어머니, 아버지 같은 노인만 남고 나를 내보냈다. 연기군에 있는 어머니 친정으로 가면 외삼촌이 있어서 거기로 가라 했다. 치마 안에 30원을 쥐어주셨다. 너무 추웠다. 나만 피난민 따라서 백운산을 넘어 수원을 갔다. 배가 너무 고팠다. 그 와중에도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 주먹밥을 사먹었다. 피난민들 짐차 타래서 사다리타고 지붕에 올라가서 타고 천안까지 갔다. 가니까 새벽이었고 천안에서는 또 화물차 타고 조치원을 갔다. 새벽에 조치원에서 내려서 50리를 걸었다. 하루 종일 주먹밥 하나 먹었다. 그렇게 걸어서 금남면 진영울 외갓집에 혼자 들어갔다. 외숙모는 돌아가시고 외삼촌이 반겨주셨다. 거기서 석 달을 살았다.


친척집에 얹혀살다  

열두 살인 외삼촌 손녀딸이 와서 살림을 하고 있었는데 요것이 보통내기가 아니라서 텃세를 엄청 부렸다. 석 달 살고 외삼촌이 대덕군(현재 대전)에 사는 고모네로 가게 되었다. 배타고 20리 걸어서 동쪽으로 가서 또 배를 타고 30리 걸어서 배타고 가니 해가 너울너울 지고 대덕군 구직면 고모댁이 나왔다. 작은 아가씨 왔다고 반가워가지고 제 식구처럼 대해줬다. 거기도 딸 하나있는데 그 사촌언니가 몰래 쌀 퍼다 주고 떡 퍼다 주고 잘해줬다. 두어달 지냈는데 6월 달에 어머니, 아버지가 진영울(외삼촌 댁) 왔다고 했다. 고모댁 왔던 길 따라 다시 외삼촌댁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부모님을 만나서 대성통곡을 했다. 


그 후로는?

그 때는 인민군이 쫓겨 가고 국군이 다 수복을 해서 서울로 다시 돌아갔다. 7월 되기 전에 집에 다시 돌아왔다. 오니까 우리 집 다 죽은 줄 알고 무당이 들어와서 무당집이 되어있었다. 내보내고 다 수리를 하고 고치고 사는데 이듬해 54년에 아버지가 나라에 땅 뺏길 때 홧병과 피난 때 얻은 고생 때문에 혈압으로 쓰려지셨다. 그 다음해 55년에 결혼을 했는데 <12면에 이어>

아버지는 거동을 못하셔서 결혼식에 오지도 못하셨다. 그리고 그 해 67세로 돌아가셨다. 


한국전쟁은 해방 이후 혼란과 갈등이 폭발하는 한편 세계적으로는 강대국들의 냉전이 시작되는 전초전이나 대리전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한반도를 넘어 중국, 일본에서 이 땅에 살아온 사람들의 처참한 희생으로 남았다. 체제갈등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된 사람들은 물론 평생 가족을 못보고 살게 된 이산가족들, 아직도 조국에 돌아오지 못한 수백만의 사람들, 전쟁으로 트라우마와 장애를 얻은 사람들, 빨갱이 낙인이 찍혀 고문당한 사람들 모두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전쟁에 희생당한, 여전히 자유를 얻지 못한 난민들이다. 곧 종전협정과 평화체제가 들어선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제 다가올 세상에서 이들의 아픔과 고통은 결코 반복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박새솜 기자

gcinnews@gmail.com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