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암산 잣나무 삼림욕장

올 여름은 우울했다. 연거푸 내리는 비(6월1일~12일까지 전국적으로 평균 1000미리에 육박하는 비가 내렸단다)에, 폭우로 인한 침수피해, 치솟는 상추 값과 마를 날 없는 빨랫감 등등...유달리 우울감이 상승했던 2011년의 여름.
그런데 지난 주말부터 날씨가 달라졌다. 하늘도 높아지고, 청명한 날이 며칠째 계속되는가 하면 어느 노래가사처럼 매미소리에 파묻혔던 귀뚜라미 소리가 밤에는 제법 크게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 비에 몸과 마음도 눅눅해진 사이에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있었구나.

그래서, 길을 나섰다.

여름방학을 일주일 남겨놓은 아이와 함께 새로운 계절을 준비해 놓았을 자연을 기대하면서 호압사 입구에 다다랐다.호압사 입구에는 절로 들어가는 아스팔트 길과 숲으로 들어가는 오솔길이 나란히 서 있다.
햇볕 내리쬐는 아스팔트보다 나무그늘 우거진 숲길로 들어서는 건 당연지사.
아이의 종알거리는 얘기를 들으며, 길섶으로 무리지어 있는 작은 들꽃들을 보고 사진도 찍으며 천천히 길을 걷는다. 솔직히 오늘 할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부산하지만, 그렇다고 이 길을 빠르게 지나간다면 이는 숲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길을 따라 남색 꽃잎에 노란암술을 늘어뜨린 달개비와 개여뀌 등이 가는 여름을 아쉬워하고, 마음 급한 도토리와 밤송이가 덜 여문 채로 길에 떨어져 가을을 어서 만나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었다. 그렇게 얼마간 걸었나 싶었는데, 잣나무삼림욕장을 알리는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단지 ‘삼림욕장’이란 글자만 보았는데도 온 몸의 세포하나하나가 상쾌한 피톤치드의 기억을 떠올리며 어서 가자고 아우성이다. 그렇게 반가운 마음으로 200m쯤 가니 사람들이 많이 앉아 쉬고 있는 곳이 있는데, 바로 이곳이구나.

그런데 기대했던 것보다 실망이다. 잣나무삼림욕장은 맞는데 큰 규모는 아니고, 등산객들이 많은 탓에 쉬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 부대껴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앉아보니 아까 느낌과는 다르다. 산골짜기로부터 시원한 바람이 오는 길에 맺힌 땀을 식혀주고 조급한 마음을 무장해제시킨다. 게다가 절에서 들려오는 불경 읊는 소리가 바람과 어우러져 또 다른 풍경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이렇게 삼림욕장에서 산소로 내 몸을 채운 뒤 내친김에 일명 ‘깔딱고개’로 불리는 돌경사를 올라가보기로 한다.

눈으로 어림잡아 45도 정도의 경사가 산등성이까지 이어져있었다. 별 것 아닌 것 같아 시작했는데 중턱 쯤 이르자 벌써 숨이 가빠오기 시작한다. 이 순간 만큼은 잡념하나 없이 내 한 몸에만 집중하게 되는 찰나이고 이 맛에 산을 다시 찾는가보다.

깔딱고개를 오르니 금천구와 안양외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아파트와 집들이 무슨 조형물처럼 안간힘을 쓰며 붙어있는 것 같다. 고개를 오른 후 맞는 바람은 오르기 전 바람과 사뭇 다르다. 그런데 준비해 온 포도를 먹으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정말 반가운 가을손님을 만났다. 바로 코스모스. 한 무리의 코스모스가 바람결에 제 몸을 맡기고 서 있는데 때맞춰 호랑나비가 날아와 날개를 팔랑이며 꿀을 먹고 있는 모양이다. 몇 년 만에 보는 호랑나비의 매혹적인 자태에 한참을 넋 놓고 나서야 다시 오던 길을 되짚어 내려왔다.

호암산 삼림욕장에서 만난 여름과 가을.
오늘 그곳에서 유달리 무거웠던 나의 2011년 여름을 내려놓고 또 다른 희망을 선물 받아 다시 일상으로 내려온다.

김수진 기자


 호암산산림욕장가는길: 금천구청역에서 1번마을버스(파란색)를 타고 '호압사 입구'에서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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