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상담센터 칼럼 ]저항의 촛불, 광장의 정치, 그리고 대선, 그 이후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상황에 ‘적응 순응’하는 대신, ‘적응 극복 조화’롭게 살아  간다는 점이다. ‘이성과 생각’의 힘을 가진 존재, 다른 말로 생존의 문제 삶의 문제를 생각하고 문제해결을 공동체적으로 모색하는 인간적인 노력, ‘노동을 하는 존재’라는 말이다. 노동이 사람을 만들었고 노동으로 사람이 완성된다는 말의 의미이다. 하지만 사유재산과 계급이 발생하고 그리고 돈과 권력이 사람다움의 잣대를 뒤틀면서 기생충적인 삶, 부정과 부패와 반칙과 특권의 삶이 함께 사는 조화로운 사람 공동체를 압도 파괴한다. 빈곤과 차별이 사회적 전제가 되고, 지배와 군림이 능력과 효율의 잣대가 되는 생지옥이 열렸다. 그 절정을 우리는 황금만능의 세상, 자본주의라 부른다. 


비인간적인 면에서 극단의 자본주의는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 후 인류에게 몰아친 ‘신자유주의’다. 승자독식, 사회적 관계와 공동체적 해결이 없는 경쟁과 능력이라는 아귀다툼, 경쟁과 능력이 태어날 때부터 결정된 새로운 신분제 헬 지옥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다. 헬지옥의 특징은 생산적이고 물리적 노동에 대한 극단적 배제 ,천시 체제다. 한국에서는 신자유주의 생지옥은 청년들의 실업과 전체 노동자들의 비정규직화, 그리고 부정부패 특권 반칙세력들의 헌법 유린과 국정의 농단으로 표출되었다. 헬조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 ‘세월호’ 참사다. 역설적으로 세월호는 민중들의 각성을 촉구한 비참한 죽비소리였다. 어차피 희망도 없는 세상에 스펙이나 쌓으며 나라도 살자는 허무와 냉소와 이기적 삶에 대한 자성과 분노와 용기의 회초리였다. ‘이게 나라냐? 이럴 수는 없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의문은 촛불과 광장의 길을 통해 우리는 ‘이게 나라다.’라는 새로운 결론에 나아가게 했다.   


촛불은 박근혜 적폐세력과 조선일보 등 수구반동진영이 재집권의 불안이 만들어낸 알력으로 빚어진 것이 아니다. 계급 내 찻잔속의 태풍을 광야의 들불로 번지게 한 것은 권력의 탄압과 통제, 야당의 비겁과 눈치를 뚫고, 해고자, 비정규 노동자들의 쉼 없는 장기 투쟁, 세월 호에서 이화여대 성주로 이어지는 백성들의 들끓는 투쟁, 철도노동자를 선두로 공공노동자들의 총파업, 모든 노동자 민중들의 저항 의지를 모아 폭발된 민중 총궐기 투쟁과 백남기 농민의 죽음과 저항이 합쳐 만든 역사적 필연이다. 그 필연의 중심에 불의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항거, ‘촛불정신’이 있다. 


돌아보면 한국의 현대사는 거리의 항쟁이 만든 민주주의 역사다. 이승만을 물리 친 4.19, 박정희를 물리친 부마항쟁, 새로운 자주 민주 통일의 혼이 된 80년 광주, 그리고 전두환 군사독재를 몰락시킨 6월 항쟁이 그랬다. 보수야당의 집권조차 체제 내 합법적 틀에 갇히지 않는 항거가 필요했다. 김대중 정권과 노동자들의 97년 날치기 총파업, 미 전차에 죽은 여중생죽음에 항거한 촛불과 노무현정권이 그랬다. 그러나 민주주의 역사는 위대했지만 그 결과는 비극이었다. 과거는 타파했으나 새로운 미래는 열지 못했다. 저항은 광장을 열고 새로운 세상을 요구한다. 민생이 파탄 나고 민주주의와 평화가 유린되면 민중들은 청와대와 여의도 정치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하게 된다. 질문은 이권(利權)을 나누는 정치, 불의와의 타협을 통합이라는 정치가 아니라 옳고 그름이 분명한 정치, 민중이 행복하게 주인 되는 정치를 요구로 나간다. 그 과정이 바로 ‘광장의 정치’다. 


광장의 정치는 현실의 힘으로 되지 못한 것이 남한 현대정치의 최대의 비극이다. 그 반동의 힘은, 수구 지배세력들의 오도 오염된 여론 조작과 그 조직, 보수 여야를 지탱하는 토호들의 이권과 돈이 엉킨 기성의 정치 구조 자체다. 촛불과 광장의 요구를 계승하는 새 정치 대신 오직 선거라는 형식을 통해 민을 구경꾼이나 동원된 머슴으로 만들고, 차선 차악이라는 외상의 정치를 강요하여 촛불과 광장의 정치를 실종시킨다. 똥과 물을 섞어 놓고 똥이 묽어졌다며, 그게 개선 개혁이라니 촛불을 놓고 광장을 떠난 백성들을 다시 속인다. 죽 쒀 개주는 역사였다. 그 결과 독재자의 후손이 독재자의 이름으로 정권을 쥐는 꼴을 당한다. 어둠은 깼지만 새로운 빛은 나오지 않는 비극은 이번 대선에서도 달라져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미국의 전쟁위협에 전쟁을 가중시키는 사드 배치가 묵인되는 선거판이 될 리 없다. 광기의 적폐와 비겁의 야당, 그들의 장악한 현실정치는 대한민국 현대사 최악의 적폐다. 


정권교체는 좋은 일이다. 그런데 유력한 대선 후보들의 생각과 정책은 아무리 봐도 촛불민중들이 요구를 담아내지 못한다. 왜 그런가? 표를 구걸로 얻으려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결코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절망과 패배가 세상을 바꾸자는 촛불과 광장의 요구를 배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대선도 진정한 새로움은 낳지 못한다. 새로움은 대선과 그 결과가 아니라 대선 이후 구성될 것이다. 촛불이 거리의 저항을 놓치지 않는다면, 청와대 여의도 정치를 넘어 정치의 중심으로 광장이 우뚝 선다면 말이다. 87년 6월 항쟁이 78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진 결과 우리 사회를 이만큼이라도 살게 만들었다. 대선보다 대선 이후 촛불은 민중들이 행복한 세상을 위해, 자기의 요구를 들고, 자기의 조직을 구축하며, 그 힘이 다시 연대의 광장, 전진의 광장으로 나아가야 한다. 거부의 촛불이 민생과 민주와 평화 통일과 평등을 향한 본질적 요구의 횃불로 타오르는 것이 진정한 새로움이다. 


촛불광장의 진정한 의미는 젊은 세대에게 승리의 경험을 남긴 것이다. ‘함께 하면, 끈질기게 하면 이기고 바꾼다.’는 생생한 경험은 이기(利己)의 우물, 경쟁의 늪을 벗고 함께 살자는 꿈을 현실의 과제로 만드는 용기를 주었다. 돈 중심의 세상을 사람 중심의 세상으로 바꾸자는 진정한 꿈으로 기성의 것을 거부할 자유의 빛을 보게 했다. 촛불 초기에 청소년들이 펼친 혁명의 꿈, 가난하고 아프고 외로운 젊은이들이 여는 혁명의 세기가 만들어 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작금의 대선은 역사의 작은 징검다리에 불과하다. 대선보다 대선 이후, 돈이 아니라 사람, 이윤이 아니라 생명을 우선하는 새 세상, 그 진정한 꿈을 추구할 때 새로운 세상은 이제 시작인 셈이다.  보내는 2017년 대선의 명제다.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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