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다니는 우리 마을답사 52 - 학교답사 7편

 

뜨거움이 더 할 수 없이 아스팔트를 달구던 한 낮, 답사는 시작되었다. 그 한참 이던 더위가 8월7일 입추를 지나도 꺽 일 줄 모른다. 믿었건만 믿을 수 없는 게 요즘의 날씨다.
문백초등학교(02-803-4155)는 문일중고등학교 뒤편, 시흥대로47길 43-1에 있다. 시흥대로 위 시흥 홈플러스에서 언덕길을 따라 오르면 남서울 아파트와 롯데힐스테이트 아파트 사이에 숨어있다. 숨고 싶지 않았겠지만 숨겨져 있다. 그리 높은 지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오가다 이 학교와 마주칠 일이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된 순간이랄까.
들어가는 교문도 또 언덕 위에 있다. 그렇게 수고한 만큼 학교 안은 더 평온하게 느껴진다. 첫인상이 작고 아담한 학교였다. 이 주변에 사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이니 아파트 단지의 생성에 따라 학교가 좌우되는 셈이다. 아파트 재건축이 결정되고 하루에 한반씩 아이들이 전학을 가고 다시 입주하면서 하루에 한반씩 아이들이 늘었다는 소문을 들은 적 있다.

 


보완관 아저씨의 말로는 나쁜 사람이 도대체 들어오긴 힘든 곳이란다. 우선 학교가 아파트 안쪽에 있으니(밖으로 노출되지 않았으니) 관계된 사람 외에는 드나들지 않는다고 한다.
또 한 가지는 사방으로 둘러싸인 아파트에서 내려 다 보는 사람이 많아 도저히 나쁜 짓을 할 수 없는  환경이란다. 심지어 하루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주민이 학교로 신고를 해왔는데. 내용인즉 여러 명의 아이들이 한 아이를 둘러싸고 싸우고 있다는 긴급 전화였단다.
보기에 따라서는 “왕따”나 “학교 폭력”으로 오인될 상황이었던가 보다. 학교 선생님들이 바로 현장으로 가보니 아이들끼리 재미있게 놀고 있더란다. 그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있는 눈이 많아 생긴 에피소드이다.  보안관아저씨는 그래서 학교가 안전하다고 덧붙여 말씀하신다.
 하지만 때때로 애정이 지나친 부모님들 중에 뙤약볕에 ‘우리 애를 내보내시면 어떻게 해요!’라는 항의도 있단다. 예전처럼 뜨거운 운동장에서 조회서는 일도 없는 데 운동이나 수업시간 중 운동장에 나와 있는 것 초차 참견하시니 교사들은 참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체육관을 새로 지었으니 체육은 그곳에서 해야지”라고 생각하시는 것도 위험하다. 아이들이 대지와 호흡하며(운동장이 그나마 흙이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자연에 순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유일하게 체육시간인 것도 문제인데. 그것마저 학부모의 참견으로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땀을 흘리며 뛰어놀지 않고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아이들 몸속에 끈기와 인내가 자랄 수 없다.


또 내성이 키워지는 데는 그만한 어려움이, 극복해야할 대상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이 더운 여름에도 햇볕을 받고 놀아야 할 이유가 있는 거다. 아이들은 뜨거움 속에서 충분히 행복하게 놀 수 있다. 믿어보시라.
교문 오른쪽으로 작은 길을 따라 풀과 나무가 어우러져 있다. 그 길을 따라 가면 작은 것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드러나는 학교 숲이 있다. 잡초라 여길 강아지풀과 이름은 있지만 우리가 모르는 야생화들이 어울러더울렁 자라고 한 켠에는 고구마도 자라는 소박한 학교 숲이 있다.

 


 정문 왼쪽에는 학교 야생화 해설판이 세워져 있다. 아이들은 아파트 숲에서, 학교 숲에서 매일매일 다른 자연을 만난다. 그렇게 작은 만남이 소중하다. 아이들에게 생각할 틈과 여지를 주는 만남이 될 것이다.
학교 운동장이 내다보이는 집, 교실과 복도에서 우리 집이 보이는 학교에서 만 가능한 아름다운 공동체가 문백초등학교에서 일어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아마도 이미 그러할 것이다.

 

산아래문화학교
 김유선 대표

 그동안 '걸어서 다니는 우리마을답사'를 사랑해 주신 독자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잠시 재충전 한 후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메시지가 있는 문일중고등학교"

 

 

 뭐, 시대를 그렇게 타고 났다고나 할까. 나에게는 설레는 청춘시절보다 청소년시절이 화려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시절 나의 궁금함의 원천이 됐던 곳 중에 하나가 바로 문일고등학교이다. 이제는 호기심의 대상이었던 곳을 스스럼없이 들어서는 중년의 둔탁한 감성이 남아있을 뿐.
 우선 정문으로 들어서니 육중한 돌 위에 “自主, 自立”이라는 문귀가 보인다. 모든 이의 시선을 잡아끌 만한 교문 앞의 첫 번째 메시지다. 잘생긴 소나무의 호위를 받으며 우뚝 솟은 표석에 교훈은 이 학교 설립자이신 김영실선생의 유훈인듯 싶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근현대의 고초를 겪어온 김영실 선생의 “자주와 자립”은 생존의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2013년 이 학교에 다니는 문일중고교 학생들의 “자주, 자립”은 뭘 말하는 걸까싶다(정말 요즘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이것이 아닐까. 아이들 스스로 서는 것!!! 그렇게 하도록 어른들은 아이들을 놔주는 것!!!).
  운동장 가까이로 오니 또 하나의 기념비와 국기게양대가 있다. 두 번째 메시지가 보인다.
“국혼(國魂)은 살아있다”기념비 뒤엔 백암 박은식 선생의 말씀이라는 해설이 보인다. 어휴 이쯤 되면 오늘 이 시대, 이 교정으로 들어서는 아이들은 국가와 민족에 대해 생각을 좀 하게 될까?
 문일고등학교의 교정은 작은 산(설립자께서 양을 키우기 위해 선택한 곳이 이 곳이었다고 한다)이었을 것이다. 교문까지 언덕을 올라와 다시 운동장쪽으로 내리막으로 스탠드가 형성 되어있고 넓은 운동장이 있다. 운동장을 내려다보니 축구부 아이들인지 청,홍의 유니폼을 입고 경기 중이다.  역시 학교에 생명을 불어넣는 존재는 이들이다.
  수위아저씨 말로는 8월초라 보충학습도 없다하신다. 간혹 보이는 아이들은 도서관을 찾는 아이들이라고 하신다. 운동하는 아이들마저 없었으면 학교가 너무 적막했을 것이다.
 그런데 운동장 저 멀리 강당 쪽에 세 번째 메시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운동장으로부터 축대가 쌓인 곳에 “너희는 세상에 빛이니 한구석을 밝히라”는 문장이 보인다. 아니 “한구석을 밝히라”라니 이건 또 무슨 의미심장한 소린가.
 학교 건물 안에서도 교훈 옆에 꼭 “한구석 밝히기”에 대한 문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뜻은 깊으나 표현이 쉽고 소박하여 겸손하기까지 한 이 메시지는 다가오기는 한다.

  사람으로 태어나 제구실 하면 빛을 얻을 것이니 그 빛이 주변을 밝게 할 것이라는 뜻 아닐까. 주어진 책임을 다한다는 것이 쉽겠는가. 말의 순박함에 비하여 무거운 속내가 있는 메시지다. 
 그밖에 교정에는 일우 선생의 동상과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나란히 운동장을 굽어보고 있다. 이것은 또 다른 메시지다. 이것을 해석하는 것은 아이들과 교사, 학부모의 몫이겠다 싶다. 
  또 다른 메시지는 내가 너무 사랑하는 배롱나무(목백일홍)앞에 떡 하니 버티고 있었다. 이 조형물은 추측컨대 졸업한 동문이 학교 교정에 기증한 작품이 아닌가 싶다. 나무처럼 보이기도 하고 마디마디 사연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만 그 기개가 쭉쭉 벋어 시원시원 하기는 하지만 너무 강한 기세에 바로 옆에 있는 배롱나무의 줄기와 대조를 이룬다. 강한 날카로움이 나는 불편하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 학교 숲에서 다른 메시지를 받고 세상을 바꾸게 될 것이다. 아이들이 이 학교 숲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꿈꾸는 그 한 순간을 맞이하길 바란다.
 어쨌든 배롱나무의 꽃은 붉게 만개했다. 본격적으로 돌아보니 역시나 문일중고에도 오래된 나무가 많다. 그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히말라야시다”이다. 이 나무는 측백과 향나무를 섞어 논 듯하다. 하여 백향목이라고도 한다. 솔로몬이 궁전과 성전을 지을 때 사용했던 신성한 나무로 알려져 있으며 성경 에서는 “힘, 영광, 평강”을 상징한다고 한다. 기독교의 정신으로 설립된 학교인 만큼 “히말라야시다”의 식재는 이유 있는 메시지 인 셈이다. 중학교 건물 3~4층까지 곧게  뻗은 히말라야시다의 줄기가 건강하다. 평범한 나무에 아이들의 힘으로 생명력을 더해 갔으면 하는 바램으로 답사길을 마친다. 익숙한 것이 새로운 것으로 바뀌게 하는 산책, 그것은 늘 우리 가까이에 있다.

 

 

 

 

 

 

 

산아래문화학교
 김유선 대표

(56호 2013.8.9~8.22)

 

 

“어깨동무”라는 교실을 찾아 얼마 전 문성초등학교를 갔었다. “어깨동무”는 학교 안에 교육복지대상 아이들이 머무는 공간이다. 교육청의 지원으로 금천에는 많은 학교에 이런 교실이 생겼다. 수업이 끝나고 어른들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우선 지원하는 곳이다. 이름도 다정한 “어깨동무”는 말 그대로 어떤 아이들과도 함께 하고 싶다는 의지를 표현한 이름이다.
그야말로 선별적 복지보다는 보편적 복지를 지향하는 이 이름이 나는 마음에 든다. 선별적 복지는 기초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의 삶을 우선 지원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해서 나는 무엇보다 선별적 복지가 우선돼야 할 것이라 믿는다. 다만 생활부조의 차원에서는.
그런데 교육차원에서는 나는 효율성을 따져 선별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정말 효과적이냐 묻는 다면 아니라고 본다. “교육”이 우리나라 국민의 기본권으로 명시되어있다면 더구나 보편적 복지 차원의 지원이 되어야 한다. 영유아, 초등학교부터.
학교 답사를 하면서 공간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학교”는 동네 아이들이 만나 공동체를 형성하는 첫 번째 장소이다. 이 곳에서는 이웃으로 사는 “학부모”들이 아이들을 “끈”으로 또 다른 공동체를 만들어 간다. 그러니까 “학교”라는 공간은 어른과 아이 모두가 공동체로 연결될 수 있는 중요한 매개가 되는 곳이다. 이 점을 생각할 때 “학교”는 동네를 이끌어가는 힘을 만들 수 있는 곳이다.
해서 어른, 아이할 것 없이 “힘”을 낼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민하게 하는 공간이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이 고민을 하고 있고 생활에서 실천도 하고 있다. 하지만 원칙을 얘기하면서 보편적 복지 대상 이 아닌 아이들을 골라내서 자존감과 정체성을 흩트리는 교육 현장의 일들이 안타깝다.


옛 것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야 말로 이 원칙을 잊지 않는 현장이 되어야 할 곳이다.
“살아있는 학교를 만들어 가는 방법은 뭘까”를 고민하는 젊은 복지사를 만나러 가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빠진다.
문성초등학교를 소개하자면 역사가 깊은 학교라고 할 수 있다. 금천구에 진입하는 곳인 시흥대로변에 있다. 주소는 금천구 독산동 시흥대로 460(867-1669). 거의 모든 대중교통 수단이 학교 앞을 지나니 찾기 쉽다.
 너무 대로변이라 거대한 방음벽으로 요새처럼 쌓여있기는 하지만. 높은 요새안의 또 다른 별세계가 펼쳐진다. 학교 개교가 1956년이니 우선 오래된 나무들이 정문쪽에 자리하고 있다. 문성초등학교에 대한 나의 첫 번째 기억은 가산중학교(옛 강서여중)시절이다. 여러 학교 아이들이 모인 중학교에 유독 똑똑하고 좀 “센”아이들이 많았다. 게다가 나는 상상할 수도 없는 “미팅”문화와 다양한 놀거리를 자랑하던 아이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래서 첫 번째 문성초에 대한 기억은 아이들이 기가 매우 셌다는 거. 또 하나는 똑똑했다는 거. 왜그럴까 생각해보면 부모님들의 생활 환경에 영향을 받은 아이들이 많지 않았을까하는 거다. 일찍 감치 사회에 눈을 뜬 아이들, 성숙한 아이들이 많았던 기억이다.


그랬봤자 다 같은 중학교에 입학하면 모두 같은 “친구”가 되지만. 학교는 리모델링이 되어 교사가 커졌다. 강당도 있고 무엇보다 넓은 복도가 있어서 아이들이 쉬는 시간에 놀 곳이 많아졌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갔을때는 살구가 한참이고 포도가 익어가고 있었다. 두 건물 사이 교정(중정)엔 작은 연못과 벼를 심은 큰 통들이 나란히 있었다. 보통 솜씨로 가꾼 것이 아니다. 굉장한 정성을 들여 학교를 가꾸는 분은 어떤 분일까 싶다.
반별로 아이들이 가꾸는 텃밭도 건강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방학에는 이 녀석들을 누가 돌보지? 하다가 안내받은 옥상으로 올라가니 예쁜 간판이 보인다. “하늘공원”이란다. 


“하늘공원”을 가꾸시는 분은 이 학교에서 정년퇴임 하신 전직 선생님이시다. 포도 넝쿨이 참 탐스럽다. 가지와 오이 토마토 할 것 없이 옥상엔 큰 텃밭이 자리하고 있다. 어떤 분이신지 참 고마우신 분이다. 학교를 그만두시고도 아이들을 위해 이 많은 농사를 혼자 짓는다고 하시니.
엄청난 일꾼이다.  학교를 가꾸는 데는 이렇게 선생님과 아이들과 학부모, 동네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겠다. 


그러니 학교를 더 개방해서 푸르게 가꾸고 공간을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담을 높게 쌓아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아이들이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맞다. 아이들의 안전이 먼저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지킴이 역할을 넘어 학교를 더 안전하게 할 다른 방법을 모색할 수도 있어야한다.
개방되고 자유로운 문화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이 성숙한 문화인으로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주 큰 튤립나무와 자귀나무 아래서 나는 동네 사람들이 이것을 함께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옥상하늘공원의 모습

 하늘공원의 포도

 푸른 연못

문성초 중정(중간마당)의 모습-벼가 있는 통과 연못

 


산아래문화학교
 김유선 대표

걸어서 다니는 우리 마을답사 49 - 학교답사 4편

 -가산중학교-

 

나는 1979~1982년까지 코카콜라 뒤편에 있던 강서여자중학교(현재 가산중학교)를 다녔다. 금천 홈플러스 앞 육교를 넘어 독산4동 1025-8번지, 집까지 걸어 다녔다. 학교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우리집은 등하교길에 친구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첫 번째 집이었다. 작지만 고만고만한 집들이 지금은 모두 연립주택이 되어버린 것처럼 학교 주변도 많이 변했다.


끈적임을 더하는 날씨라 살살 산책삼아 길을 나섰다. 동네 학교를 답사하면서 먼저 떠올랐던 것은 내가 다니던 학교에 대한 궁금함이었다. 뛰어놀던 운동장, 소독약 냄새나는 화장실, 언제나 가기 어려웠던 교무실.


한결 같이 성실하고 반듯하고 우수한 아이들만 원하는 학교는 그때나 지금이나 재미없는 곳이었다. 다만 담임선생님에게 신경안정제를 먹게 할 만큼 문제 학급에 다녔던 중학교 2학년 시절은 학교 다니는 게 즐거웠다. 학생주임이 자주 종례 시간에 나타나 으름장을 놓기도 했고 도덕 선생님은 아름다운 음악과 명상으로 달래기도 했다.


어른들의 걱정에 비해 무사태평했던 우리반 아이들은 왕따는 커녕 똘똘 뭉쳐서 남다른 우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실제로 나중에 퇴학당한 친구들이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우리는 으례히 떡볶이 집으로 가 그간에 일들을 재잘거리기에 바빴다. 그 친구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어느 공장에 다닌다는 소식과 남자친구와 함께 도망갔다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우리는 그 친구가 그리 걱정되지는 않았다. 말은 거칠었지만 다정하고 유쾌했던 그가 ‘빨리 어른이 되었구나.’하는 정도. 


홈플러스를 돌아가며 옛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낯선 풍경에 걸음을 멈추었다. 하이마트 뒤쪽 택시회사와 그 옆 분식집은 여전한데 육가공과 유통을 하는 소매점이 즐비하다. 그러고 보니 비릿한 고기 냄새가 난다. 우시장이 가깝긴 했지만 교문 앞까지 상가가 커졌나보다.


우리 동네 대표적인 생산과 노동의 현장인 우시장을 탓하기는 어렵다. 또 고기 소비가 날로 늘어가는 세태로 볼 때 당연한 확장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학교 앞 환경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아, 그래도 교문 안으로 한발짝 들어서는 순간 안도의 숨이 터져 나왔다. 오른쪽으로 아름드리 자란 느티나무가 단단하게 서있는 모습이 반가웠다. 그리고 수업중인지 운동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축구하는 아이들, 농구하는 아이들을 보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담장을 따라 사철나무, 향나무, 졸업사진의 배경이 되었던 단풍나무들이 30년이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가산중학교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양한 공장과 시장통의 어수선함 속에 유일하게 녹지대 역할을 하고 있다. 교실로 들어가는 현관에는 오래된 마로니에(칠엽수)와 장미 덩쿨이 하얀 아치 위로 드리워져 있다. 3개의 아치를 지나다니며 아이들은 잠시 꽃그늘에서 쉬기도 할 것이다. 이제는 거목으로 자란 벚나무 꽃잎이 날릴 때 자신들의 소중했던 순간들의 배경으로 그 모습을 기억하게 될까.


흐드러지게 핀 사철나무 꽃과 바닥에 떨어진 꽃잎을 보면서 장정일의 시 한편이 떠올랐다.


 “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20대엔 이 시가 큰 위로가 되기도 했지만 엉뚱하게도 내가 쉴 사철나무를 찾아 나설 땐 그늘을 드리울만한 사철나무는 없었다. 실제로 크게 자라지 않는 떨기나무인데다가 느리게 자라는 나무라 그 그늘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오늘 나는 가산중학교에 와서 드디어 그럴만한 사철나무 그늘을 발견했다.


 얘들아, 후배들아 이곳에 와서 쉬어라. 여전히 고생하시는 엄마,아빠의 등짐을 대신 지고 있거나  배운 게 없어 어리석은 어른들의 무모함에 시달릴 때, 분함을 풀 줄 몰라 너를 괴롭히는 친구들에게 지쳤을 때. 그리고 생각대로 되는 일이 없다고 여겨질 때, 세상의 끝이 뻔히 보인다고 생각될 때 잠시 앉아 쉬었다 가라.


  40대는 요즘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한다. 공부에 시달리고  희망 없는 미래에 기대어 쫓기는 형국을 걱정한다. 공부는 힘들지만 시달릴 대상은 아니고 미래는 희망이 있어야 오늘을 무사히 살 수 있다.


내가 학교를 답사하는 명분을 오늘은 찾은 것 같다. 40대인 어른에게도 한참 자라고 있는 아이들에게도 학교는 시간을 넘어 푸르러야할 공간이다. 이 공간을 어떻게 공유할 것인가는 차차 풀어갈 숙제이지만 지금 학교를 다니고 있는 아이들에게 공부보다 더 중요한 마음 붙일 곳이 되어주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 함께 나누고 싶다.

산아래문화학교
 김유선 대표


▲ 자신의 학교인 영남초등학교를 소개하던  수아가  교내 앵두나무 밑에 떨어져 있는 앵두를 손에 담아 건네고 있다. 

영남초등학교에 가려면 옛 독산3동 주민센터 정류장에서 내린다. 오늘은 수민,수아 자매와 하늘이와 하진 남매, 윤재와 요한이 형제, 재민이와 경진이가 길동무를 해주었다. 모두 이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은 3월부터 자신이 살고 있는 집과 골목주변 그리고 금천이라는 지역을 알기 위한 답사를 하고 있다.  오늘은 나뭇잎 탁본을 하기 위한 재료를 구하러 학교와 동네 골목을 돌아보기로 했다.  

학교 첫인상은 산을 등지고  운동장과 건축물이 안정적인 구도로 놓여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자신의 학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오늘은 너희들이 학교를 소개해줘.”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서로 얘기 하겠다고 야단이다. 

  평소에도 적극적인 수민,수아 자매가 먼저 우리를 잡아 끌다시피 어디론가 데려간다. 철문으로 잠겨진 텃밭은 자신들이 “생태식물반”이라서 들어갈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텃밭이 아주 예쁘게 다듬어졌기에 “누가 만든 거지?”했더니. 작년에 6학년 오빠들이 달팽이 모양처럼 만드느라고 계속 삽질을 했단다.  물이 잘 빠지도록 배수로를 만들어놓은 텃밭에서는 작물들이 잘 자라고 있었다. 

  아이들 솜씨라고 하기엔 훌륭하다. 자신들의 이름이 새겨진 화분에 고추, 토마토, 쌈채소, 당근, 가지... 옥수수까지 심어져 있었다. 어떤 화분에는 엉뚱하게도 어른들은 달가와 하지 않을 개망초라든가 꽃마리도 한쪽에 심어놓았다. 일명 잡초이긴 하나 지들 보기엔 예뻤던 모양이다. 

 농사짓는 얘기를 재밌게 들려주는 아이들을 재촉하지 않으면 끝이 없을 것 같아 시원한 그늘쪽으로 나가자고 졸랐다. 햇빛을 촘촘히 막아주는 등나무 벤치에서 모두 앉아 쉴 수 있었다. 등나무 숲은 학교 정면으로 바라보는 위치에 있다. 5월 어느날 보라색 향기로운 꽃송이들이 눈처럼 날리고 난 등나무엔 콩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아이들도 새로운 발견인 양 마구 묻는다. “이거 먹어도 돼요?” “어떻게 먹어요?” “언제 먹어요?”, “작년엔 못봤는데…”

 <재크와 콩나무>에 나오는 나무가 바로 이 “콩나무”라고 진지하게 뻥을 쳤더니…아리송한 얼굴이다. 실제로 등나무는 넝쿨식물이라 길이대로 늘어놓으면 길이가 엄청 길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가롭게 학교 숲에서 놀다가 본격적으로 학교로 소개하겠다는 아이들을 따라 두 층으로 나뉘어진 화단으로 갔다. 장난이 심한 6학년 남자 아이들은 어딘가로 숨었다 나타났다 한다. 관심 없는 척 하면서 자신만이 아는 아지트에 대해서는 한참 떠들어댄다. 그렇지. 맞아맞아. 누구나 알지만 ‘나만 알고 있거나 친한 친구끼리만 알고 싶은 그런, 공간이 학교에는 있지’. 

  비밀스러운 본부에 대한 이야기로 한참 수다를 떨다가 모두 앵두나무 앞에서 내 눈치를 본다. ‘순진한 녀석들 같으니라고’. 나는 잘 익은 걸 하나씩만 따 먹자고 제안했다. 기다렸다는듯이 너도 나도 자기 것이 젤 잘익었고 크다고 자랑하면서 먹었다. 과연 어떤 맛이었을까?

  물어보나 마나 너무 달콤하고 맛있다고 한다. 함께 먹는 맛이니 더 맛나고,  우연한 발견에서 얻은 것이니 더 달고, 하나만 먹자고 하니 얼마나 귀한 맛이겠는가. 하나씩 맛을 보고 나니 한결 같이 아쉬운 얼굴로 앵두 나무를 뚫어져라 본다. 

  해서 나무 아래 바닥을 한번 보라고 하니 아이들 탄성이 튀어 오른다. 나무 아래에는 탐스러운 앵두알이 잔뜩 있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 아이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선생님을 드리겠다고 하고 어떤 아이는 엄마 드린다고 한 웅큼씩 주었다. 

 과일 나무 한그루가 우리들을 행복하게 했다. 뒤쪽 화단엔 호두나무가 단연 눈에 띄였고 주렁주렁 호두가 많이 달렸다. 아이들이 아직 익지않은 호두에 손을 대기도 했으나 가을에 잘 익으면 저절로 떨어진다 하니 기다릴 밖에. 보안관아저씨도 다정한 걱정 한마디를 건넨다. “얘들아, 옻올라. 손으로 만지지 마라.”하신다. 간혹 그런 일이 있기도 하니 조심스럽게 지켜보기로 했다. 아이들에겐 새로운 숙제 하나가 생긴 셈이다.



산아래문화학교

 김유선 대표

걸어서 다니는 우리 마을답사 47 - 학교답사 2편

연못을 보면서 크는 아이들

 

 

이번 5,6월에 흥일초등학교에 갈 일이 많아졌다. 흥일초등학교는 산기슭 공원 맞은편에 있다.  작고 아담한 학교라 찬찬히 둘러봐야 많을 것을 볼 수 있다.


학교라는 공간은 드넓은 운동장(요즘에는 예전과 상황이 매우 다르긴 하다)과 정돈된 조경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이 공간을 학부모와 동네사람들, 아이들이 공유할 수 있었으면 하는 단순한 생각에서 학교 답사가 시작됐다. 


공유되려면 먼저 알아야 하겠기에. 여러 학교를 가보고 무엇이 학교의 공간을 제대로 기능하게 하는 가 알아보고 싶다. 우선 문교초등학교가 열린 담장과 숲으로 둘러싸인 장점이 있었다면 흥일초등학교는 단연 연못이 그것을 대신하고 있다.  생태연못이 키우는 생명은 상상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모든 생명이 물에서 시작됐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지구 역사상 획기적인 변화는 가스덩어리에서 물이 생성되는 단계에 있다고 본다. 눈에 보이지 않던 작은 생명체는 물과 더불어 생성되고 확장될 수 있었다. 지금과 같은 동식물의 진화는 물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찰방거리는 물을 좋아하는 본능이 인간에게 남아있는 생물학적 진화의 증거라는 얘기도 같은 이유에서 이다. 


학교마다 매우 비슷한 조경을 가지고 있다.  아이들이 이 학교 저 학교 옮겨 다닐 것도 아니니 같은 들 문제가 되지는 않겠다.  다만 학교가 위치해 있는 주변 환경, 건물과 얼마나 조화로운 학교숲을 갖고 있느냐는 중요할 것이라 생각된다. 간혹 학교에 숲이 있는 학교가 대한민국에 얼마나 있겠냐고 하시는 분도 있다. 숲은 거대한 숲도 있고 몇 그루 나무에도, 풀에도 있다. 풀숲이나 몇 그루 나무 안에 또 다른 생명을 키우는 생명력이 무궁하니 “숲”의 범위를 넓게 보면 되겠다.


흥일초에는 아주 아담한 연못이 하나 있다. 작으니 만큼 자라는 동식물의 개체도 작다. 물풀 종류와 붕어가 있다. 하지만 새들이 오가며 목욕을 하고 물을 마시는 걸 보니 우리가 안보는 사이엔 엄청난 동물들이 다녀갈 것이다. 그렇다. 연못은 생명체의 보금자리면서 먹이터, 살림터인 셈이다.


아이들이 이 연못을 보는 듯 안보는 듯 오가며 뭘 상상하고 호기심을 갖게 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연못이 있는 숲과 없는 숲의 차이는 엄청나다. 관리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작은 연못을 가꾸는 정성은 대단한 것이다. 관리가 어려울 걸 생각하면 너무 욕심껏 큰 연못을 만들 일은 아니다. 방치하는 것보다 작게라도 가꾸어 가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금 연못엔 노랑어리연꽃이 한참이다. 그 옆으로 말벌 한 마리가 왔다갔다 하더니 목을 축인다. 덩치 큰 나를 경계하며 살금살금 왔다가는 것이다.  또 여기 학교숲에는 텃밭 작물이 한참 자라고 있다. 그것을 먹이 삼는 나비 애벌레들이 오물거리고 있다. 그러다 거미줄에 걸린 배추흰나비도 있다. 호박,오이,고추,토마토,감자와 쌈채소 들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다.


큰 느티나무 둥치에는 무당벌레가 알, 번데기, 유충형태로 제각각 살고 있다. 사이사이 개미가 쉴 새 없이 오가고 있으니 진딧물도 어디쯤에선 살고 있을 것이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체육수업과 전래놀이 수업이 한창이다. 뜨거운 햇빛을 피해 나무 아래로아래로 다 모인 것이다. 1-1반 아이들은 모두 물총을 들고 신나게 운동장을 뛰어다니고 있다.  선생님의 과감한 시도에 아이들이 유쾌하게 웃는 소리가 운동장 가득하니 이것처럼 싱싱한 여름이 어디 있을까 싶다.


운동장 한쪽에선 아이들이 왁자지껄 모여 생태수업을 받고 있다. 점심시간에 먹겠다고 한움큼씩 채소를 따서 교실로 간다. 그렇다. 학교 숲은 바라보는 숲에서 체험하고 경험하는 숲일 때 그 가치가 더 빛날 것이다.

 

 

 


산아래문화학교
 김유선 대표

안양시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초입에 박미고개가 있다. 박미는 밝산(밝은산), 박산이라 불리던 산에 있던 고개를 말한다. 밝은 산이라 함은 백산白山을 가르 키는 말로 시흥3동 성당과 금천문화원에서 시흥유통상가로 넘어가는 산을 말한다. 마을 뒤를 감싸는 진산이 바로 이 백산이다.  국립예술학교와 백산초등학교가 높은 곳에 자리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 고개 주변을 행정구역상 시흥3동으로 분류하고 박미마을이라고 한다.
  요즘 한참 뜨는 마을이 여기다. 서울시에서 지정한 휴먼타운(seoul human town)이 박미고개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2011년 “human town?” (인간적인 동네)이 지정된 후 ‘다른 동네는 인간미가 없거나 비인간적인 동네가 돼버린 건가?’ 싶지만.  


  서울은 이미 주택과 골목이 사라지고 아파트 문화가 대신 하면서 동네가 삭막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런 문제들을 있는 그대로의 저층 주택가 중심으로 동네를 재생하는 것이 “휴먼타운”이라는 거다. 조금 더 보탠다면 보안과 방법, 생활편의시설을 아파트처럼 갖추자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동네의 역사성과 정체성이 저절로 드러나는 문화가 만들어지지 않겠냐는 것이 서울시의 생각이다.


 벌써부터 “휴먼타운”이라는 얘기꺼리가 생긴 이 동네에선 “박미사랑마을”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골목축제를 기획하거나 동네 사람들이 모여 공통의 관심사를 나누는 자리를 만들 계기가 되었으니 일단은 의도한 바가 이루어진 셈이다. 마을회관이 만들어지니 더 많은 사람들이 교류하고 재미난 일들이 일어날 것 같다.
박미고개는 지금의 금천문화원자리에서 보면 훤하게 고개를 오가는 사람들과 동네 안팎을 볼 수 있다. 쉼 없이 오가는 차량이 10차선 도로 위를 달리고 옆으로 난 고갯길 위엔 하교하는 학생들이 보인다. 고개 아래에 시흥중학교, 금천고등학교가 있으니 고개를 넘어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많은 가보다.


 고개 위에는 몇 해 전 만들어진 인공폭포가 보인다. 서울과 안양을 오가는 길목에 폭포수가 흐르면 시원하겠다는 생각에서 만들어진 모양이다. 워낙 박미고갯길이 심한 정체가 일어나다 보니 차에 갇힌 운전자들에게 눈요기는 될 수 있을 것 같다.
 동네 사람들이 즐기기엔 이 인공폭포보다 골목길에 만들어진 보도가 아닐까 싶다. 골목길에도 인도와 차도가 구분된 곳이 박미고개 아래 시흥3동에 있다.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주민들이 많은 불편을 겪기도 할 것 같다. 집 앞에 자신의 차를 세워두면 편하겠지만 자신과 다른 이웃을 위해 차를 집 안 마당에 들여놓거나 공영주차장에 세울 때만 가능한 일이다.


 지금 골목은 어디나 사람을 위한 길이 아니라 차를 세워 둔 주차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아무리 많은 행정가들이나 교통 전문가들이 나서도 좁은 서울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주차이다. 그런 현실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온통 골목길에 즐비한 자동차에 밀려난 사람들은 불안하게 차량 사이를 뚫고 걸어야 한다. 이렇게 되니 악순환이다. 위험하니 차를 타고 다니는 게 낫다고 하니.
 골목길은 동네 사람들과 공유하는 공간이다. 걷다보니 사람들과 만남이 이루어지고 “인간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것 아니겠는가. 유모차도 편안하게 지나다닐 수 있는 그런 골목길이 박미고개 아래 마을에 있다. 걸을 수 있는 권리가 지켜지는 곳, 누구나 걸으면서 행복해질 수 있는 골목으로 가보시라.

 

 

산아래문화학교
 김유선 대표

걸어서 다니는 우리 마을답사42 - 고개답사5편

“ 돌아오라, 말馬들아! - 조마고개 ”

조마고개는 가산동 148-1에서 150-2번지 어딘가에 있는 곳이다. 가산동이든 독산동이든 워낙 산지에서 내려오는 지형이라 여기저기가 다 고개다. 오늘 찾아가는 조마弔馬고개는 활자로만 남아있는 듯하다. 여러 자료를 찾아보고 가산초등학교가 있는 남부순환도로 육교에서부터 인근보다 조금 높다 싶은 길을 여기저기 헤매다가 이름이 남아있는 “조마공원”으로 가게 됐다.

몇 년 전 세일중학교 친구들과 학교와 주변을 답사하고 조사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다 우연히 알게 된 곳이다. 학교 주변에 유일한 공원이기도 하다. 우선 공원 안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조마고개가 어디인 줄 아니?” 물었다. 모른단다. 이번에 바로 옆 노인정에서 나오는 어르신께 여쭙는다. “나는 아는 게 없으니 애들한테 물어봐라” 하신다.

주소로 보면 탁주연합(막걸리공장)에서 세일중학교 사이의 고개이니 공원자리가 분명 고개가 맞기는 하다. 다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고개의 존재를 아는지 궁금했다. 오가는 몇 분에게 “조마고개가 근처라는 데 어디인 줄 아세요?” 묻는다. 처음 들어본다는 표정이 대부분이다.

공원을 빠져나와 주변 지형을 살피니 공원자리가 높기는 하다. 어떤 개발로 인하여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고개가 됐을까. 내리막길로 내려오다 보니 유난히 간판에 한자어가 많다. 중국교포들이 운영하는 식료품가게나 음식점이다. 이곳 주변에 얼마나 많은 교포가 사는지 모르겠지만, 식당이 이렇게 많으니 서로 경쟁도 심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국에서의 삶도 주변인으로 내몰린 소수의 폭폭한 삶일 것이다. 골목 안을 채우는 중고 전자제품과 여기저기 쌓여있는 재활용품 더미가 그걸 말해주고 있다.

그나저나 조마공원에 이름이 붙여진 이유가 있을 터인데. 서울문화사학회에서 펴낸 “금천향토문화지”에 조마고개를 이렇게 설명한다. 가산동 노인정 아래 기다랗게 자리한 모아래澤下 마을 뒷등성이 너머에 있는 작은 고개이다. 고개의 형체는 찾아보기 어려우나, 용마혈龍馬穴은 청룡혈과 이어진 고개산으로 이곳에 위치한 마을이 그 기운을 받아 서울까지 뻗쳐 마치 서울을 수호하는 형국이었다고 한다. 이 고개이름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서울로 진격할 때 용마혈을 지키는 용마를 죽여 버렸으므로 이를 애도하기 위해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마을을 지키고 나라를 보호하던 말馬은 사라졌다. 동네 이야기를 알만 한 사람을 찾아 여기저기 기웃기웃한다. 헌 옷을 파는 집도 많고 수선집도 많아 이야기를 나눠줄 만한 곳을 찾아 들어선다. 동네 토박이인 “비발디 패션”은 사계절 모두 대박의 신화를 누리고자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의자에 앉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자식 키우는 이야기를 하신다. 알고 보니 우리 동네에서 아이 셋을 명문대에 보낸 장한 어머니시다. 명문대에 보낸 것도 대단하다할 만하지만 아이들이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기죽지 않고 자신들의 꿈을 키워갈 수 있도록 뒷바라지한 어머니의 의지가 대단하다.

깨알같이 자식 자랑하는 어미의 행복한 얼굴을 대하니 한겨울 난로보다 따스하다.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사위 준다고 뜨개질을 쉴 줄 모른다. 딸과 사위에게 줄 커플 스웨터라고 한다. 자신의 일터에서 손을 놓지 않고 일하는 엄마의 억척스러움이 이 조마 고개위의 삶들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우리가 앞으로 더 만나지 않겠느냐고 인사를 나누고 돌아 나온다. 어느새 어둑어둑해지는 골목위엔 일터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저마다 사연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김유선 대표(산아래문화학교)

걸어서 다니는 우리 마을답사41 - 고개답사4편

“ 이야기 따라 넘어가는 - 문성고개 2 ”

그렇게 문성고개는 이야기들로 넘쳐난다. 고갯마루 “한양수자인”아파트입구엔 반유구화역(盤遊仇火驛)이라는 표지석이 서있다. 이 표지석은 이곳이 반유역이라는 말해주고 있다. 반유역은 반시라고도 하는데 이는 반수의 변음으로 마을 모습이 마치 대야에 담아 놓은 물처럼 고요하여 조용한 마을이란 뜻으로 붙여졌다. 반수마을은 큰 마을로, 서쪽은 서촌, 위쪽에는 웃말이 있었고, 가운데 있는 마을은 가운데말이라고 불렀다한다.

고갯마루위에서 보니 위쪽은 둥그렇게 대야(또는 소쿠리반盤) 엎어놓은 모양이고 아래쪽은 바로 놓은 대야모양이다. 그것이야 고개가 있다면 다 비슷한 모양이었으리라 예상되지만 아래쪽 어디로 물이 고여 있는 곳이 있었으니 “반유(盤遊)”라 하지 않았겠는가?

또 표지석에는 마패를 상징하는 그림이 새겨져있다. 중앙 관아의 공문을 지방 관아에 전달하거나 외국 사신의 왕래, 벼슬아치의 여행과 부임 때 마필(馬匹)을 공급하던 곳. 즉 역참驛站이 있었다는 소리다.

문성고개에는 서울로 가는 길목에 하루쯤 묵어가는 역참, 여관, 주막이 있었을 법하다. 정조의 능행이 있었다는 '정조실록 39권 정조 18년 4월2일'1795년 을묘년 행에 대한 기록에도 이 문성고개 그림이 나온다. 100리길(창덕궁에서 건릉까지 100 里로 이것은 대동지지의 수원別로와 일치) 능행에 과천로를 따라 행차를 하다가 을묘년부터는 시흥로로 다녔다한다.

이때의 기록이 환어행렬도로 남아있다. 《화성행행도팔첩병 [華城行幸圖八疊屛]》중에서 가장 멋스러운 그림이 이것이 아닐까한다.

금천의 갈지(之)자 구불구불 고개길에 어가 행렬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군상들이 보인다. 남녀노소, 농공상인을 불문 제각각 행렬을 반기며 즐기는 모습이다. 이 그림은 능행하는 행차의 권위를 보여 주기보다 손님을 맞이하는 마을 사람들의 유쾌한 놀이가 보인다. 예상대로라면 어사가 지나도 머리를 조아리고 언감생심 행차구경은 생각도 못 할 텐데. 이 행차도를 보면 왕에게도 머리를 조아리고 눈치 보는 사람은 없다. 잔치를 즐기러 모여든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개혁군주 정조의 의지는 그림에도 있나보다. 나는 이 그림이 근대를 여는 또 하나의 상징이 아닐까한다. 218년 전 바로 시흥대로 위 문성고개에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금천문화원 원장(박종우)님의 말씀으로는 문성골(문성고개)까지 시흥행궁에 있던 관아 소속의 나인들이 능행을 마중했다는 기록에 대해 이야기 하신 적이 있다. 맞다. 분명 그러했을 것이다. 우리는 손님을 맞이하러, 거대한 행차를 배웅하러 고개길 위에 서 있었을 거다. 다만 그 때 우리는 어떤 모습이었나? 또 지금 우리 모양은 어떠한가? 권력에 쫄지 않았는가? 비굴 하지 않았는가? 고개를 넘다가 어떤 당당한 이를 불러본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背景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 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황동규 “즐거운 편지”중)

                                                            행렬도의 혜경궁홍씨 가마주변

 

                                                                 정조능행길

 

김유선(산아래문화학교 대표)

걸어서 다니는 우리 마을답사40 - 고개답사3편

“ 이야기 따라 넘어가는 - 문성고개 1 ”

문성고개는 문성초등학교에서 오르면 시내 방향으론 내리막길이다. 한동안 LG패션고개라고 불리기도 했다. 중앙차로가 생기면서(버스정류장의 이동은 유동인구의 동선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개길을 오가던 사람들이 나눠졌다고 한다. 상행 하행이 마주보는 위치에 정류장이 있었을 때보다 상권이 죽었다고 한다.

이 동네사람이면 알 수 없는 얘기를 들으러 기억을 더듬어 본다. 처음 찾아간 곳은 고개 바로 아래 버스카드충전소 겸(예전에 토큰판매소) 노점이었다. 이 노점은 늘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듯해서이다. 아니나 다를까 20년이 훌쩍 넘었다는 노점 사장님은 언뜻 봐도 칠순은 넘기셨을 듯하다.

아주 아주 매우 오랜만에 신문을 하나 사고 이런 저런 말씀을 여쭙는다.

“‘이 고개위에 가장 오래된 상가는 어디예요?, 댁은 어디세요?, 혼자서 일하시기 힘들지 않으세요?” 두서없는 질문에 차분히 얘기를 해주신다.

고개를 넘기 전 유난히 시대를 넘어서는 색다른 양복점이 바로 제일 오래된 곳이라 한다. 나머지는 언제 생겼는지, 사라졌는지 모르게 주인이 바뀌어서 모르겠다고 하신다.

이번엔 고개 마루에 그 양복점을 다시 둘러본다. 아무래도 맞춤 양복점이 아니고서는 기성복이 흉내낼 수 없는 디자인과 색감의 남성복이 가득한 “엘리트양복점”. 무수히 지나다니던 버스 안에서 무심히 보면서 어떤 사람들이 저 옷을 입을까, 맞출까 궁금했었다.

이 과감한 옷을 만든 분은 누구신지 호기심은 컸으나 화려한 의상만큼 문을 열기는 쉽지 않았다.

남자 양복맞춤집에 내가 또 갈일이 언제 오려나싶어 “확”문을 열고 들어가기로 한다. 말끔하게 양복을 입으신 사장님은 보통 멋쟁이가 아니시다. 대뜸 어떤 분이 이 양복을(그중 눈에 가장 띄는 것을 가르키며) 만드시는 지 궁금해서 들어왔다고 고백했다. 예상대로 이 양복점은 이 자리서 30여년 가까이 됐으나 본인은 은행나무 사거리에서 다른 사업을 하다 여기로 오셨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옷을 만드신 건 아니라는 뜻?’

이 자리에 오랫동안 양복을 만드셨던 분은 사정이 있어 그만두셨다고 한다. 이 불경기와 기성복시대에 자리 지키기 어려웠으리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강한 경계를 보이시니 바로 옆집, 빵집으로 자리를 옮긴다. ‘난 고개 답사을 온거지?’지 싶지만 오늘은 이 고개에 살았던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그런데 여기 또 문성고개의 산 증인이 계셨을 줄이야...

정갑희 파리바케트 독산점 사장님은 20살 청년시절부터 삼립빵의 전신인 삼미당에서 제빵을 시작하셨다고 한다. 대기업 대리점이라 기대 없이 들어갔던 바라 깜짝 놀랄 수밖에.

자리부터 권하시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황송하게 커피까지 내려주시며 아주 겸손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을지로 삼미당에서 대림동 삼미당을 거쳐 67년 삼립빵으로 옮겨와 지금까지의 역사를 얘기하신다. 참 대단한 역사다.

정갑희 사장님의 이야기가 그대로 우리 동네의 이야기가 되는 순간이다. 정조의 능행길로 알려진 이 고개길에 역참도 있었다고 하고 고갯마루에서 아래쪽으로 가구거리가 있는 사연도 좀 들어봐야 하는데 오늘은 순한 얼굴의 정사장님과 이런저런 얘기로 고개를 넘어본다. 남은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하자.

문성고개는 지하철2호선 구로디지털단지역에서 도보로 5분 천천히 걸어도 10분 안에는 도착, 또는 구로디지털단지역에서 안양방면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문성고개”정류장에서 하차한다. 새로운 주소로 시흥대로 150길 위에 있다

 

김유선(산아래문화학교 대표)

걸어서 다니는 우리 마을답사39- 고개답사 편

“발견의 즐거움이 있는 - 말미고개”

1번 국도 위에 또 하나의 고개, 말미고개를 가다. 차를 타고 넘다 보면 야트막한 동산이지만 예전에 걸어서 다녔던 사람들에게 시흥고개 넘어 바로 고개를 넘어야 하는 곳이었으니 고단한 길이었겠다. 시흥고개에서 군부대 지나 말미고개까지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제법 풍광이 좋았다는 30여 년 전 이야기를 들어보셨는지.

동네 오래 사신 어르신 옛이야기를 뒤로하고 추위가 가시질 않는 오후, 한 가닥 햇볕을 동무 삼아 걸었다. 동네 사람뿐 아니라 금천구를 좀 안다는 사람은 다 아는 고개가 여기다. 고개이름은 末 말의 형상을 닮은 山 산이라는 “말뫼”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고개 마루에서 한번, 고개 양쪽 아래에서 두 번 내려다보고 올려봐도 말 모양은 찾기 어렵다. 당연하지 않겠나. 고개를 깎아 이미 도로가 됐으니. 하지만 어쩌랴. 그렇다고 말미고개가 없어진 것은 아니니. 계속 가 보자.

고갯마루 근처(현재 농협 앞)에 있는 표지석엔 서울과 지방의 관문을 드나들었던 사람들이 말을 쉬게 하거나 먹이를 주던 장소라고 쓰여 있다. 한양으로 들어서기 전 한달음에 갈 수 없는 거리라 말도 쉬고 주인도 쉬어가던 곳이라는 뜻이겠다. 먼 길에 나서는 사람들이 우마차를 한번 점검하고 목도 축이면서 요기도 하는 휴게소 자리가 이 고개에 있었나 보다.

나도 답사를 나서기 전 단단히 준비를 했다. 추위에 내성이 생기길 바라기엔 피부나 관절의 상태가 노후된 관계로. 그래서 선택한 방법은 어떤 바람도 이길 수 있는 옷을 무조건 껴입는 수밖에 없다. 오늘은 바람도 잠잠하니 걷기에 딱 좋다.

그렇게 걷다 보니 발견한 것들! 오홋, 이게 뭔가? 하이마트 상가건물 옆으로 나란히 나란히 보이는 타이어타운, 독산자동차공업사, 카모토, 파인드라이브, 금천MTB 가게가 있다. 와, 지금도 말미고개는 예전처럼 우마차를 쉬게 하거나 고치는 곳인 게다.

이건 우연인가? 필연인가? 자동차를 고치는 공업사에 타이어가게, 내비게이션 가게까지 쭉 모여 있으니 재밌다. 우연이라면 우연이지만. 우연 속에 그럴만한 이유를 찾아보면 또 필연이 되는 게 아니겠는가? 그게 뭘까?

언제부터 사람들이 이곳에서 우마차 대신 자동차를 돌보고 자전거를 돌보기 위해 모여들었을까.

고갯마루로 올라가는 길에 이 가게들을 보면서 시대를 넘어 현재, 지금으로 이어진 “끈”이 여기에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뭐, 대단한 것이라도 발견한 양 배시시 웃음이 났다.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들, 나 혼자 알기엔 아까운 것들을 소소히 밝혀가는 것이 이번 답사 길에도 있다. “말뫼 삼겹살집”처럼 고개이름이 남아있는 흔적들도 그 중에 하나다. 마치 퍼즐을 찾아가듯 “말미”에 맞는 장소와 사람을 찾아 걷는다. 다음 고개에는 어떤 사연이 있을지 기대해본다.

말미고개는

지하철1호선 독산역에서 도보로 5분 천천히 걸어도 10분 안에는 도착, 일반버스는 구로공단역에서 안양방면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말미고개”정류장에서 하차한다. 새로운 주소로 시흥대로 100길 위에 있다

 

 

                                                    김유선(산아래문화학교 대표)

걸어서 다니는 우리 마을답사-고개답사 1편

“그리운 것은 고개 너머에 있다 -시흥고개”

시흥고개는 대한민국 제1번국도 위에 있다. 예전부터 산이 유난히 많은 지형을 따라 산등성이, 계곡에 고개 길이 생겨났다. 산을 돌아가기엔 거리가 멀어 고갯길을 따라 길은 낸 것은 지금이나 예전이나 마찬가지였다. 독산동이 생활터전이었던 나는 시흥고개가 정확하게 어느 위치인지 관심 밖이었다. 이번 답사를 통해 고개 마루가 어디인지 고개 옆 산은 어디였을지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시흥고개는 현재 주소로 말한다면 시흥대로 77길 위 보리밥집과 주유소 사이가 고개 마루가 될 것 같다. 연일 맹추위가 계속되는 한겨울에 길을 걷기란 다소 힘겨운 일이다. 잠시 추위를 잊고자 고개 길에 밝은 인테리어 가게 찻집에서 몸을 녹이고 지나는 사람들을 본다. 추운 날씨에도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얼마 전 제주 사는 친구가 시흥동 부모님 집에 다녀갔다. ‘이 곳에선 내가 바보가 되는 것 같다.’고 하면서 사람 많고 길 복잡한 고향 금천을 낯설어했다.

사람이 많으니 하나하나 눈 마주하고 살기 어렵고 그렇다 보니 무관심한 이웃살이가 재미없기도 하겠다. 사람냄새 나는 시골로 가겠다는 데 말릴 이유가 없다.

금천의 사람살이는 복잡하고 그러다 보니 악다구니치고 무심한 듯 무례하기도 하지만 그런 가운데 피어나는 동네의 정서가 있다. 칼로 벤 듯 정확하지는 않지만 사람사이에 거리가 좁았다가 넓어졌다가 “유두리(융통성을 이르는 일본말)”굉장히 많다. 그야말로 불완전한 “사람”의 전형이 동네에 숨어있다.

내가 볼 때 도시 살이에 어설프고 서투른 사람들이 모여 살기에 적당한 곳으로부터 이런 정서가 태어난 것이 아닌가싶다. 우리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60년대 70년대 이곳으로 이주한 대부분의 동네 사람들이 타향살이의 어려움을 나누고 부족한 도시 살림을 시작하기에 적당한 곳이라 자리 잡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어려운 사람들 끼리 서로의 부족함을 위로하고 희망을 꿈꾸던 삶이 시작되던 시기, 시흥고개는 새로운 운명을 맞이한다. 이 시흥고개에 큰 도로가 생긴 것이다.

52년생이신 윤부섭씨가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라고 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시흥사거리 한복판 집들이 있었는데 이 곳 몇몇 집을 시흥대교 입구 파출소 부근으로 이주시키고 지금의 도로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때는 변변한 보상절차도 없이 무조건 집을 비워줘야 하는 시대였다고도 전한다. 대한전선 사택(지금의 무지개 아파트)앞 길이 국도 1번과 이어지던 도로였는데 이 무렵 교통량이 많아지면서 왕복10차선 50미터 길이로 확장 되어 시흥고개에 도로가 놓이게 되었다. 그 전에는 한 참을 올라가야 하는 고개였다고 한다. 지금의 산돌교회와 주유소 뒷길이 추정컨대 작은 산이었고 그 사이로 시흥고개가 있었으리라.

이렇게 시흥고개에 도로가 놓이기 전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서 서울로 남쪽 어느 지방으로 넘나들었으리라. 시흥초등학교(당시 시흥공립보통학교)로 통학하기 위해 몇 개의 고개를 넘어 난곡에서부터 걸어 다녔다는 이야기가 어느 한 집에만 있으랴. 이 시흥고개엔 수많은 이야기가, 다 알 수도 없는 애절하고 고달프지만 신나고 살 만했던 이야기까지 얼마나 있었겠는가. 시흥고개 너머 멀리 말미고개 마루를 내다 보며 흑백영화를 되돌려 보듯 그리운 사람들의 옛이야기를 그려본다.

산아래문화학교 김유선 대표

가을이 깊어가면서 자주 비를 만난다. 고운 단풍이 순식간에 날아가는 안타까움. 

월요일부터 계속 비가오니 바람은 더 차고. 동네 공원을 더 돌아볼 요량으로 우산을 받치고 걷는다. 여기 시흥3동 윗동네(윗 박미마을) 빌라촌으로 들어서면 골목이 고요하다. 한적하기도 한 골목 사이사이로 은행나무, 단풍나무, 느티나무가 제각각 잎을 떨구고 있다. 까치공원을 들어서는 골목길 주소는 시흥대로14길 12이다. 

지난번에 갈 때만 해도 공원에 나무들이 단풍丹楓 들었나 싶었다.  이제는 나무는 빛깔 뿐 아니라 낙엽을 떨구거나 떨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내년을 기약하며 그나마 나뭇잎에 남아있던 영양분을 가지와 줄기와 뿌리로 내보내고 잎은 기꺼이 떨어질 준비를 한다. 반질반질 물기로 반짝이는 나뭇잎들도 겨울을 준비하느라 바짝 말라있다.  그동안 광합성이라는 것으로, 그러니깐 충분한 노동의 댓가로 얻었던 초록의 엽록소는 서서히 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뭇잎의 사라짐은 나무를 살리는 일이다. 함께 겨울을 나자고 나무에 붙어 있다가는 통통한 수분이 얼어 그냥 죽어버릴 수도 있다. 올 겨울은 유난히 춥다고 한다. 때 이른 추위에 맞춰 지금 잎들은 부지런히 떨어지고 있다.

공원에 도착하니 그렇게 떨어지는 나뭇잎을 바지런히 쓸어 모으시는 할머니가 있다. 나는 늘 비슷한 생각이 든다. 봄이 되어 새순이 돋아 계절을 알려주는 것처럼 나뭇잎이 좀 떨어져 있으면 얼마나 시기적절한 가을을 표현 하는가 싶다. 하지만 어느 공원 어느 가로수에서나 낙엽 쓸어 모으는 일로 바쁘신 분 들을 만난다.

운동하는 분들이 바람에 날린다고 싫어하신다고 한다. 이미 비에 젖은 나뭇잎은 바닥에 착 달라붙어 비질에도 꿈쩍 않는다. 보다 못해 “오늘은 그만 비가오니 나뭇잎을 쓸지 않아도 되겠어요.” 말씀드렸더니. “아휴,  비질이 안되네. 낼 아침 일찍 영감하고 와서 해야 할 모양이야.”하더니. 비질은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지나가던 할머님이 나와 같은 맘이셨는지. “오늘은 그만 해도 되겠어요.”하신다. 묻지도 않았는데 이번 달까지 까치공원에서 일하신다고 한다.  공공근로 작업을 하시는 모양이다. 공원입구 분리수거함 옆에는 그동안 쓸어 모은 낙엽자루가 제법 많다.

무엇이 아쉬운지. 계속 낼 아침 일찍 와야겠다고 다심을 하신다. 이렇게 비가오니 놀이터에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아닐까싶어 이렇게 저렇게 말을 여쭙는다. “까치공원에는 아이들이 많이 오지요.” “그게 어린아이들 몇몇이 따로따로 왔다가 공차거나 하지.” “여자아이들은 4학년이나 됐을까하는 아이들이 같이 그네 타러 와서 잠깐 놀다간다”고 한다. 덧붙여 하시는 말씀은 요즘아이들은 바빠서 노는 아이가 없는 것 같다고. 

또 노인부부와 할머님들이 번갈아 걷는 운동을 하시는데 그 정도가 까치공원의 단골 이용자라는 거다. 

그러고 보니 까치공원도 지난 번 갔었던 비둘기공원처럼 윗부분은 흙을 밟을 수 있는 곳이 있다. 그 흙바닥 위로 낙엽이 차곡차곡 쌓인다. 한참을 바라보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그 순간을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무와 나의 역사가 같이 가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냥 순간과 순간이 만났으니 감격스러웠다. 그리고 떨어져 있는 나뭇잎의 흔적을 쫒아 어디에서부터 떨어졌나 어미 나무를 찾아본다. 

까치공원에는 느티나무가 일곱 그루- 가장 화려한 단풍을 보여주고 있다. 열매가 아직도 달려 있는 꽃사과나무엔 잎이 거의 다 떨어졌다. 우람하기 짝이 없는 버즘나무의 거대한 잎은 아직도 건재하다.  은행나무, 단풍나무, 모과나무, 향나무, 개나리, 화살나무, 철쭉, 회양목, 사철나무가 여는 공원에서 봤던 대로 익숙한 자리에 있다. 하지만 익숙한 그 나무들이 오늘은 달라 보인다.  어쩌면 그 나무들은 매일매일 다른 모습이었으리라. 내가 눈여겨보지 않는 틈에 조금씩 자라고 조금씩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었을 거다.  하루도 같은 날이 없는 사람들처럼 나무도 그러 했을 것이다. 

익숙한 것들이 다르게 보였던 까치공원. 거상빌라102동, 미도빌라7동, 유정빌리지, 미도빌라8동, 미도빌라9동, 미도빌라11동, 거상빌라101동이 호위하듯 공원을 감싸고 있다. 건물도 쉼쉬게 하는 공원이 거기 있다. 





 

산아래문화학교 김유선 대표 

우당탕탕 마을버스 가는 길 위에 사람들 

-08번 마을버스를 타고 마을을 답사하다- 마을답사 : 열아홉번째 이야기



‘워워’, ‘캬아~’ 절로 롤러코스터를 탔을 때처럼 탄성이 나온다. 이 소리는 봄 쑥이 어느 새 땅위로 올라와 고개를 내미는 속도와 같다. 함께 마을버스를 탄 사람들은 몸이 절로 들썩들썩. 우右로 쭉 밀리다가 좌左로 확 땡겨지는 원심력을 따라가는 놀이기구를 탄 것이라. 그렇게 여기면 행복한 마을버스 08번의 길 위에서 벌어지는 광경이다.

 시흥4동 남부여성발전센터를 좌로 산기슭공원을 우로 두고 마을버스가 가파르게 올라가다 금천구립도서관에서 아슬아슬 좌로 회전과 동시에 내리막길을 타다 금천문화체육센터 입구에 이르기 전 급경사를 쭉 내려가며 정심초등학교 앞에서 다시 위로 사정없이 오르다 금천창의공작플라자부터 내리막을 달리면서 동시에 우로 회전하는 이 길. 

독산3동 영남초등학교 앞까지 빠져 나오기까지 20개 이상의 방지턱도 넘어야하는 고난이도 고갯길을 달리는 08번 마을버스. 기사님말로는 그래도 신호등이 없어 운전할 만 한 길이란다. 가히 우리나라의 교통사정을 고려한 말씀이랄 밖에. 그 말씀에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하는 것은 누가 그러게 산을 깍아 도로를 만들라고 했나. 생긴 것이 애초에 산이었으니 오르막내리막 길을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예로부터 산을 끼고 학교를 두었으니 금천구청에서 독산고등학교까지 가는 08번 버스 길 위 엔 학교가 즐비하다.  신흥초등학교, 문교초등학교, 정심초등학교, 영남초등학교, 문성중학교, 한울중학교, 독산고등학교, 난곡중학교. 그렇다 보니 도로엔 온통 “어린이보호구역” 노란 안내글이 무늬같이 새겨져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안하무인 불법주차장인 된 도로 위를 아슬아슬 달리는 차를 피해 등하교를 하고 있다. 

이 “어린이보호구역”에선 특별히 아이들을 보호하기는 어렵겠다. 뭐,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하루10시간을 이 길 위를 달리는 기사님 말씀을 전하자면 “불법 주차”를 싹 없애는 것이다. 불법주차를 없애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단다. 우선 모두 끌어가 견인하는 방법이 최고다. 점잖게 구청 체면을 살리면서 해결하려면 중앙분리대를 세우는 방법이 좋단다. 분리대에 따라서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드니 빨간색 “봉”만 쭉 박아줘도 중앙선을 넘어 좌우 주차로 도로를 점거하는 일은 없앨 수 있단다. ‘아’ 정말 그렇까? 이상은 08번 어느 기사님의 말씀이시다. 명쾌한 답을 주신 기사님 감사합니다! 

그러나 08번 마을버스 길엔 숙제가 많다. 아이들이 성실하게 숙제를 다 하길 바라는 것처럼 어른들도 숙제 완수는 필수다. 08번 버스가 많은 사람들을 나르다 보니 겪는 기사와 손님간의 갈등. 등하교 길이 출퇴근 시간보다 붐벼 버스 안이 가히 폭발 직전인 상황. 주택가다 보니 좁은 골목길에 주차가 이웃 간에 정리를 저버리게 하는 엄청난 문제. 기동대 이전 터에 중학교를 유치하여 지역학교를 고르게 분포 시키는 문제.... 쌓여있는 숙제들이 참 많다.  이 숙제는 혼자하기 힘든 공동의 숙제이다. 함께 풀어갔으면 좋겠다. 

08번 길 위에 숙제가 막히면 잠시 봄쑥 캐는 사람들의 어깨위로 따뜻하게 떨어지는 햇볕을 느껴보시라. 남부여성발전센터 마당에 흐드러질 꽃구경 가셨다가 맘에 맞는 강좌도 발견해보시라. 우리동네 최고 도서관 “금천구립도서관”에 들려 영화도 한편보고 “금천문화체육센터”뒤쪽 산책로에서 겨울 몸을 가볍게 털어보시라. 감로천 생태공원의 계수나무 잎눈이 하트모양으로 퍼지는 구경도 하시라. 옛날엔 다랭이논이었다는 만수천생태공원에 가서는 “이제 개구리가 알을 낳았나” 찾아보시라. 만수천 위로 50미터만 올라가면 “그렇게 멋진 소나무 숲이 있다는 걸 몰랐다”는 동네 사람 고백에 맞장구 칠만한 숲을 만나시라. 이렇게 여기, 08번 마을버스 길옆으로 지친 우리를 위로 하려고 준비된 무엇이 있었다는 것도 잊지 말자. 




산아래문화학교 김유선 대표

23호  2012. 4. 6 ~ 4.19

여행 같은 삶, 삶 같은 여행  그렇게 금천으로 가자 

-07번 마을버스를 타고 마을을 답사하다 (마을답사 : 열여덟번째 이야기)


내일이 춘분이다. 春分, 이름 하여 봄을 나누는 계절이 온 것이다. 지난 주말부터 날이 “확”풀어졌다. 여기저기 바라 볼 것이 많아져서 “봄”인가. 뒷산에 가지마다 물이 올라 잎눈이 벌어지고 물가에 얼음도 풀린 지 오래라. 제 갈 길로 떠난 철새들의 빈자리에 물소리가 잔잔하다. 소리 없이 봄이 다가오니 땅이 부풀어 오르듯 맘은 벌써 산으로 들로 물가로 향한다. ‘2월 바람에 김칫독 깨진다.’ 이 말은 이렇게 마냥 들뜨는 철모르는 사람에게 자연의 질서를 일러준다. 해서 바람이 여전한 월요일 누구 말대로 팔자 좋게 마을 여행을 떠난다. 

어린이보호구역이 표시된 시흥 홈플러스 옆길로 07번 마을버스 종점을 찾아가는 길이다. 07번 마을버스는  문일고등학교에서 가산디지털역까지 오고간다. 학교 앞이다 보니 여기저기 학생들이 눈에 띈다. 아니 가만 바라보니 삼삼오오 모여 있는데 남학생들 옆에 이쁜 여학생들이 제법 많다. ‘남학교 앞에 왠 여학생이 많다싶다.’했지만 봄이지 않나. 입춘을 앞둔 춘삼월에 당연 하겠지. 음양의 조화로운 이치이기도 하거니와. 그래도 남학교 앞에 당당한 여학생들 차림새는 놀라운 따름. 아니 겨우 낮과 밤이 반반이라는 계절에 허연 다리를 다 내놓고 용케 교복치마를 미니로 고쳐 입었다. 남학생들 또한 만만치 않게 스타킹바지로 멋을 한껏 부렸다. 부모들은 속 터질 노릇이지만 난 그만 웃음이 픽 난다. 지들은 멋이라고 한껏 차려입었으나 한결같이  똑같으니 개성 없는 패션이 어디 축에나 끼나. 

아이들을 뒤로 하고 07번 버스 정류장으로 간다. 정류장 앞엔 노인보호구역이라는 표시가 보인다. 종점을 향해 걸어가니 빗물펌프장과 노인복지센터가 보인다. 기사님 말로는 손님들 중에 어르신이 많단다. 한참을 기다려야 버스에 오르는 거동이 불편한 어른들도 많단다. 5분정도 기사님과 종점에서 쉬었다가 다시 가산디지털단지 역으로 향한다. 잠시 후 백산초 5학년짜리 사내아이가 탄다. 자기는 무지개아파트에 7살 때부터 살고 있고 친한 친구(아이 표현으로는 베스트프렌드)가 삼척으로 전학을 가서 너무 외롭단다. 아니 그래서 어쩌라고. 07번 버스 볼 때, 학교 앞에서 떡꼬치 먹을 때, 심심할 때 친구 생각이 난단다. 본인 말대로 단단히 외로운 모양이다. 시키지도 않은 말을 줄줄이 토해낸다. 07번 버스는 이렇게 초등생 아이가 지 인생을 토로해도 될 만큼 한가롭게 운행되고 있었다. 

출퇴근시간도 잠깐 동안 사람이 있고 대체로 한 낮엔 사람이 없단다. 버스기사 아저씨와 아이가 아는 척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니 맞는 말인 것 같다. 무지개 아파트에서 아이가 내리고 다음 정류장에서 내릴까 하다 그냥 한바퀴 더 돌기로 한다. 내가 망설이는 걸 아셨는지 아저씨는 심심하니 다음에 내리라 한다. 

주춤주춤 주저앉아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대학생 막내가 있고 정년이 따로 없는 마을 버스를 시작한지 이제 3개월째란다. 금천구청역에서 독산역을 지나 가산디지털단지역을 돌아도 한산하긴 마찬가지. 손님이 적어 한때는 폐쇄되었다가 2009년에 재개되었지만 지금도 적자 운영되는 유일한 마을버스란다.  05,06번에서 번 돈을 07번 적자에 메운단다. 

한신IT빌딩에서 마리오사거리로 나오는 길은 주말엔 대책 없단다. 게다가 선거 때라 그런지 신호등이 안보일 만큼 프랭카드 많단다. 그러고 보니 온갖 선거관련, 부동산 관련 현수막이다. 2012년 봄을 보내면서 우리들의 최대 관심사는 선거와 집인가 보다. 하지만 2012년 총선이 우리의 미래다. 총선을 어떻게 치를 것이냐가 나의 부동산 뿐 아니라 내 미래를 책임질 것 아닌가. 













산아래문화학교 김유선 대표

22호  2012. 3.23 일 기고

-06번 마을버스를 타고 마을을 답사하다-

경칩을 맞으면서 계속 날이 궂다. 어디 쉽게 봄이 오던가. 올 듯 말 듯 주춤주춤 우리 몸이 봄의 리듬에 풀어질 때 쯤 오겠지.
오늘 맞은 차가운 빗속에 분명 봄은 들어있다. 봄비를 차분히 바라본다면 봄이 보일 것 같은 날, 06번 마을버스를 탔다.
“지역과 함께 하는 미술 워크샵”을 마치고 서로 다른 동네에 사는 초등생1명, 어른 3명이 같은 버스에 올랐다.
우리는 사는 동네는 다른지만 같은 마을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중이다.
마을버스에서 그런 경험이 있으셨는지? 오랜만에 소식 모르던 이웃을 만나 놀랐던 적 말이다. 마을버스에서, 골목길에서, 목욕탕에서, 약국에서, 미장원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경험은 사소하지만 소중하다.
아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내가 그 마을에 속해 있고 그 마을이 나를 알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게 한다.
물론 불편했던 적도 있다. 불친절한 슈퍼아저씨나 어디서나 싸움닭 같은 시장통 아줌마를 보는 건만으로도 불쾌감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태만상의 이웃을 가진 나, 개인은 그래서 든든한 배경이 있는 것 아닌가. 동네에서는 외롭지 않을 뒷배경과 자유롭지 않은 대신 서로의 지킴이가 되는 “관계”가 얽혀있는 것 아닌가.
금천구청역에서 구로디지털단지를 오가는 06번 마을버스는 이 동네 저 동네 참 다른 동네를 지난다. 06번 버스는 아주 많은 소규모 아파트를 간다.
그런데 이 수많은 아파트의 이름은 어떻게 정해질까 궁금해졌다. 라이프아파트, 해가든아파트, 금천현대홈타운 아파트, 독산현대아파트, 진도아파트3차, 진도2차아파트, 청광아파트, 두산아파트가 06번 노선길에 있다.
건설사 이름을 딴 경우가 많겠지만  진도모피와 관계된 진도아파트, 코카콜라나 동아출판사와 관계된 두산아파트는 우리 지역의 정체를 그대로 드러낸다.
이 아파트들 사이로 여전히 공장들이 보이니 산업공단, 생산 공단의 현장은 여전하다.
삶터와 일터가 같은 동네에 있는 셈이다.  다만 진도모피나 두산동아의 흔적은 사라지고 아파트만 남아 있는 현재 그 곳엔 어떤 직장인들이 모여 살까.
큰길가 시내버스 정류장이나 전철역에서 집까지 걸어가는 출퇴근길,  통학길,  시장가는 길에서 만나는 마을사람들을 이제는 마을버스에서 만난다.
대부분 혼잡한 버스 안이라 인사 나누기도 민망할 따름이지만. 집 가까이에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으니 시내버스나 지하철 환승하기엔 편리하다. 특히 급할 때는 내발이 되어주니 고마운 마을버스다.
하지만 마을길을 걷을 필요가 없게 한 것은 아닐까(마을버스 조합에서 알면 큰일 날 소리지만). 마을을 산책삼아 걸어 다닐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 같다.
걷고 싶거나 구경하고 싶어서 동네 길을 걷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게다가 이유 없이 걸으면 기분 좋게 하는 마을길이 있다면 어떨까.
수많은 마을길과 골목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서로를 알아보는 눈길을 주고받는 것이 얼마나 안심되는 일인가. 
06번 마을버스가 가는 길에 있는 소규모 아파트들은 세대가 적으니 머리를 맞대고 동아리나 부녀회나 이런저런 모임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이미 그렇게 자주 모이는 이웃사촌이 되어 있는 아파트도 있을 수 있겠다.
그렇다면 마을버스타고 가다 마을을 만날 수 있지 않겠는가.
번듯한 집이나 평수가 큰 아파트의 주인보다 “이웃”과 사회적 관계를 갖고 사는 주인공이 되어 보는 건 어떨까.
마을버스를 타고 가다 우리 마을은 어디까지 일까? 내 정체를 밝혀줄 마을은 있을까?
뭐, 이런 생각을 한다.
2월 25일자로 마을버스 요금도 올랐으니 오늘은 회차하여 마을을 한바퀴 더 돌아 찬찬히 마을을 본다.
오래된 가구거리 있는 독산고개를 넘어. 경기민요 교습소와 대비되는 안마시술소 간판이 요란한 건물을 지나 서울막걸리 공장 건너편 두산아파트 후문으로 마을버스는 간다.
자동차 정비소와 고물상을 지나 얼마간 리모델공사 중인 롯데마트 옆으로 양복 짓는 공장과 공책 만드는 공장을 지나면 우시장이 보인다.
마을버스는 천천히 동네 여러 슈퍼들을 지나 마을 사람들을 하나둘 태우고 마을을 돈다.
마을버스가 가는 길엔 마을도 있고 마을사람들도 있는 거다.

산아래문화학교 김유선 대표


안천초등학교에서 출발하는 마을버스를 탔다. 이 05번 마을버스는 광명시와 금천구를 오가는 버스다.
지난주 오후에 05번을 타고 길 건너는데 바로 건너편은 하안동이라는 주소가 보인다.
그렇다면 노란색 중앙선을 중심으로 시도를 넘나드는 건가? 애매하네. 이런 답사엔 ‘애매한 것을 딱 정해주는 최효종과 함께 하면 좋을까마는.’
약국, 슈퍼, 대중탕을 같이 이용하는 사람들은 동네사람이다. 행정구역상 시도를 달리해도 생활을 나누면 동네사람이 되는 거다. 어, 그런데 대낮이라 그런지 버스 안에 동네 사람이 없다.
왜 그럴까 기사님께 여쭈었더니 이 버스는 출퇴근용이란다. ‘출퇴근용이라...’ 금천교를 건너 공단 지역으로 들어서니 무슨 말씀인지 알겠다.
2공단과 3공단과 오가는 마을버스 05번은 지하철역과 일반버스를 연결해서 일터로 향하는 무수한 사람들의 통근버스였던 거다. 얼핏 비슷한 공장과 얼추 비슷한 건물들 사이로 많은 정류장을 순환하는 05번 마을버스엔 한낮에 사람이 없을 수밖에.
버스 차창으로 보이는 삐까번쩍한 건물들 사이로 드물게 옛 공장들의 모습이 보인다.
아, 참 낯설다. 근대유형문화재가 될 법한 오랜 역사가 보이는 낡은 공장 건물 안에는 어김없이 향나무가 보인다. 겨울이라 빛깔이 더 칙칙한 게 먼지를 뽀얗게 쓰고 있다. 어떻게 된 것이 내가 초등학교 때 보던 그 모습 그대로 그만 그만하게 서 있다.
‘아니, 세월이 얼마인데.’ ‘자라지 않고 화석처럼 서있는 나무들만 성장을 멈추었을까.’ ‘건물과 역사가 같은 직함 향나무엔 어떤 혼 불을 태우던 향이 남아 있는 듯하다.’(제를 올릴 때 쓰던 향나무에 지상의 염원을 하늘로 올려 보내는 연기의 숭고함이 깃들여 있듯이.)
사연 많은 공장들의 기록 되지 않은 많은 공순이, 공돌이들의 개인의 삶은 어디에 있을까.
이제는 추모사업회나 기념사업회의 구술, 사진 기록으로 남은 억울한 노동자들의 죽음은 온 데 간 데 없다.
후에 열사로 기록되었지만 살아서는 불온자로 분류되었던, 개별의 삶을 운동의 마무리로 바쳤던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그 때는 불온자로 낙인찍히는 게 두려워, 지금은 살기가 팍팍해서 아무로 보편적으로 그들을 위로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기록된 것도 사문화 되고 있다. 역사는 누군가에게 읽혀질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돌아보지 않는 박물관에 한 줄의 기록으로 남아서는 그 역할을 할 수 없다.
어렵지 않게, 무겁지 않게 죽은 자들도 바로 보는 문화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민심이 중심을 잡게 될 것이다.
공단이 디지털단지가 된다고 해서 우리 동네의 정체가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착각. 강남8학군을 꿈꾸고 잘나가는 어는 신도시의 아파트 단지만을 꿈꾸고 있다면 우리 동네는 없다.
다 같은 동네에서 다 같은 문화를 누리고 어떻게 내 인생이, 나만의 삶이 있을까. 다름이 주는 다양함이 개별의 삶도 풍요롭게 한다. 누구와 닮은 모양이라고 그 사람과 같은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 아닌가.
내 것을 찾고 내 것을 소중히 하는 것이 나를 지키고 개별의 삶을 빛나게 할 것 이라 믿는다. 우리 동네도 마찬가지다. 내 동네이니까 의미가 있는 것.
동네에서 경험한 것들이 나와 동네와의 관계를 규정짓는다. 세상의 중심에 서서 외치자.
“내가 소중하다”고. 나와 우리 동네와 친구와 이웃과 부모님...또 나와 관계된 모든 것이 소중하다! 05번 버스로 공단을 유람하다 나는 문득 나를 그 전보다 더 이해 할 수 있었다.

산아래문화학교 김유선 대표

 

마을답사 열다섯번째 이야기  - 충남슈퍼 정류장엔 충남슈퍼가 없다


마을버스 3번은 가산디지털단지에서 구로디지털단지역을 오가는 노선이다. 노선표만 보면 그야말로 디지털화된 빌딩과 빌딩 사이를 누빌 것 같지만 천만에 말씀이다. 구로디지털 단지 역에서 독산동 고개를 넘어 골목골목 앞서오는 차를 피해가며 조심조심 다니는 마을버스다. 
그러다 보니 겨울에 눈이라도 오면 골목을 꽉 메운 차들과 엉켜 출퇴근길이 전쟁이라고 한다. 03번 버스를 타볼 일이 없던 터에 오늘은 길잡이해주는 후배를 따라 쉬운 걸음으로 답사를 시작 하게 됐다.

답사초입의 세일중학교 정류장 근처엔 새로운 풍속의 식당가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중국식 한자가 새겨진 간판이 많이 보인다는 것. 그 만큼 조선족 인구가 많다는 얘기다. 옛 쪽방촌의 흔적이 남아있는 집은 거의 없지만 대림동과 가리봉동에 이어 이곳도 그들의 삶터가 되고 있다. 

칸칸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엔 또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똑같은 집들의 옥상위로 뛰어다니며 놀던 그 동네가 바로 여기다. 아, 따라나선 길 위엔 비눗방울 같은 추억이 방울방울 피어오른다. 추억을 따라 걷다가 ‘여기가 그 두부 공장이야’, ‘여기쯤은 공터라 아이들하고 엄청 뛰어놀았고’, ‘여기쯤이 내가 살던 집이었던 것 같아‘하고 나만 아는 얘기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발견한 두부공장. 두부공장은 어쩌면 하나도 변한 게 없다. 쌓여있는 두부판이나 드나드는 짐차들이 꽁무니를 대고 서있는 모습이 똑같다. 이거 완전 시간의 되돌림! 두산아파트를 지나니 모아래공원이다. 못(저수지)아래 사람들이 모여 살아 “못아래”라는 지명을 얻었다가 지금까지 살아남아 공원으로 꾸며진 곳이다. 작은 공원이지만 좁은 골목길엔 숨쉬는 여백이 된다.

어린시절 동네 공원이나 놀이터라는 곳에서 놀아본 기억은 없지만 사방이 놀 수 있는 터가 되었다. 지금생각해보니 크고 작은 공장들 틈에 주택가가 있었고 그 사이를 우리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휘젓고 다녔다. 공장에서 나오는 폐자재를 갖고 놀기도 했는데 특히 인형공장의 이국적인 장난감은 신기하기 만 했다. 어딘가 부족한 인형이 집집마다 몇 개씩은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인형을 갖고 놀기보단 아무데나 나있는 풀들을 따 모아 소꿉놀이를 했다. 그 때는 이름은 몰랐지만 까마중, 여뀌, 질경이같은 풀들이 참 많았다. 공장들 틈새에도 풀들이 허락된 공간이 있었다. 지금은 공원화단이나 화분에서나 볼 수 있는 풀들. 풀들도 자유롭게 살 수 없는 환경이니 사람은 말해 뭣하랴.
여기저기 날아다니다 내려앉으며 살 곳이 되었던 풀씨들의 주거이전의 자유는 이젠 완전 박탈당한거다. 풀들의 야성은 도시에선 무용지물.

빈틈없이 메워진 아스팔트 길을 따라 걷다가 충남슈퍼 정류장에 머문다. 여기는 오랫동안 노사분규로 힘겨웠던 골목, 옛 기륭전자 앞이다. 농성천막도 컨테이너박스도 사라진 곳엔 가산동 “지식산업센터” 공사 중이다. 뭐하는 건물인지 모르겠지만 공사대금이 문제가 되어 유치권 행사 중이라 공사는 쉬는 중인가보다.

골목을 되돌아 나와 충남슈퍼를 찾는다. 타지에 나와 본향의 이름 새기고 생업을 하는 곳이 유달리 많은 곳이 우리 동네 아닐까. 고향에서 야무진 꿈을 안고 상경한 우리 부모들이 어렵게 마련했을 삶터들. 젊은이들은 공장으로 어른들은 시장판이나 작은 가게로 삶의 대이동이 있었던 70~80년대. ‘그 때쯤 자라잡았을까’ 충남슈퍼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충남슈퍼 정류장에 더 이상 충남슈퍼가 없다. 그 자리에 편의점이 자리잡고 있다. 작년6월부터 충남슈퍼 자리에 편의점이 생겼단다. 그 주인장은 어디 가셨는지. 아마 고향에서 보다 이 동네 와서 자리 잡은 세월이 더 길었을 텐데. 이젠 좀 살만해서 자리를 뜨셨다면 좋으련만. 

’누구처럼 허리와 다리를 제대로 쓸 수 없어 자리를 파하시진 않았을 꺼야.‘ 오후만 있던 일요일, 봄날 같은 햇빛을 받고 다시 그 길을 걷는다. “걷지 않고 떠오르는 말을 믿지 말라!“는 어느 분의 말씀이 문득 길을 나서게 했기 때문이다.




<가산정보도서관 정류장 앞>

<노선 중간중간에 보이는 작은 카페들>



<두부공장>

<옛 기륭전자 사옥은 재건축중이다>

<충남슈퍼 정류장. 옛 슈퍼자리에는 GS25시 편의점이 들어와있다>

산아래문화학교
김유선 대표

[기고] 마을버스 타고 마을답사를 하다

연말연시를 가볍게 건너는 방법은 없을까. 별 일 없는데 한해를 보내고 맞이하는 마음은 복잡하다.
‘나 잘 살았어?’, ‘올해는 뭘 했더라?’, ‘내년엔 다르게 살 수 있을까?’하는 생각부터 ‘올해는 부지런해져야지!’라는 다부진 결심까지 이 맘 때면 인생 숙제를 다시 펼쳐든다. 뭐, 다분히 형식적인 의례라고나 할까. 생각을 많이 한다고 어디 저절로 일이 되는 법인가. 머리와 손발의 거리가 가까운 사람은 예외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그것이 어디 저절로 되는 것인가.

몇 안 되는 가슴과 머리와 손발이 통일된 지식과 지혜가 균형 잡힌 온전한 위인이나 가능한 것이지. 나 같은 범인은 돌고 도는 속세를 따라 자탄을 안고 허우적거리며 살 수 밖에. 오늘도 마찬가지다. 바쁘지도 않은데 부랴부랴 늦은 오후 마을버스 답사길에 오른다.
벽산3단지에서 독산한신아파트까지 가는 마을버스 2번은 그야말로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대장정의 버스다. 금천의 동서를 가로 지르는 마을버스다. 노선이 길지는 않지만 재미난 구석이 또 있다. 금천과 안양천을 사이에 두고 광명시가 있는데 이 마을버스가 두 도시 사이를 오간다. 

안양천을 직강하 하천으로 재정비 하면서 지금의 모양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어째 좀 어색하다. 하천을 사이에 두고 동네하나가 뚝 떨어져 섬처럼 떠있는 모양새다. 독산 한신아파트, 안천초등학교 안천중학교가 그렇게 생겨나 행정구역상 금천이다. 우르르 하교 길에 청소년들이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간다.‘집으로 가는 거겠지’.  교문 근처는 학원버스가 대기 중이라 한 무리는 그 버스에 오른다.

그 버스가 집어 삼키는 아이들이 좀 안쓰럽다.  요즘 내게 충격적인 뉴스는 자살한 청소년들과 가해 학생들의 구속이다. 청소년의 비관 자살은 어제 오늘 일 이 아닌 터라 무서운 현실을 정면으로 보는 끔찍함이 있다. 반면 가해 학생들의 구속 소식을 전하는 뉴스화면을 접하면 화가 치민다. 아직도 ‘우리는 그들의 문제를 구경하는   어른이구나.’하는 자책감이 든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진지하고 성실한 태도보다는 이슈화에 그치는 무지막지한 폭력의 행사자이다. 학교 폭력이나 따돌림문제를 풀어가는 어른들이 “체벌 강화”나 “조용히 덮고 가는 방식”이니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겠는가.

이제 14세인 청소년 가해자들을 인터뷰하는 방식이나 뉴스에 내보내는 내용을 보면 어른들은 여전히 책임을 미루기만 한다. 꿈을 꾸지 못하게 하는 입시 경쟁과 돈이면 만사형통이라는 물질만능을 조장하는 분위기에서 자라는 불쌍한 영혼들이 우리 사회의 미래이다.

곧 그들이 우리의 현실이 될 것이다. 지금 현재 대한민국의 청소년이 얼마나 불행한가를 알아봐야한다. 어떻게 참고 견디라고만 하나. 모두가 이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미래의 현실을 외면하면 우리 모두는 자멸하고 말 것이다. 어려움 속에서 가족애가 빛나듯 “대한민국”이라는 형제애를 발휘하고 정면 승부하기를 바란다. 새해부터는 좀 심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또 무거워졌다.

버스를 기다리는 아이들을 보면서 생각이 길게 이어졌다. 저녁이 되어 ‘가방도 없이 버스를 기다리는 걸 보면 여자친구랑 약속이 있나.’ 마을버스 정류장엔 중학생인 듯 보이는 아이가  보인다.
그래 본래의 풋풋한 소년, 소녀로 돌아가라. 미안하다, 얘들아.





산아래문화학교
김유선 대표



 


마을답사- 열세번째 이야기



W몰, 패션아일랜드, 팩토리아울렛, 마리오아울렛.... 화려한 간판이 빛나는 밤거리의 디지털 2단지. 이곳이 바로 도시 안에 자체 발광 도시. 금천구 안에 화려한 섬이다.

2단지 사거리가 마리오 사거리가 되고 패션문화의 거리 입간판이 랜드 마크가 된 곳. 몇 달 전  지인이 마리오 근처로 공장을 옮겼다 길래 올해의 물난리에 괜찮은 곳인지 먼저 물었다. 

뭔 소리인지 어리둥절한 그 분에게 초등학교 시절, 물난리로 종종 공장들이 물에 잠겼던 이야기를 했다. 허벅지까지 옷을 걷어붙이고 그 사거리를 건너던 어른들 모습이 뉴스에도 나왔으니 당연히 우리 초등생은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시절을 살았던 터라 그런 기억 속에 사거리라 올 여름 엄청난 비에 무사한지부터 물었던 거다.

정말 촌스러운 걱정이다. “IT 패션문화 존”으로 부르는 마당에 웬 걱정. 주말 하루 유동인구가 어마어마한(약 20만) 까닭에 이제는 교통마비가 문제다. 이사했다는 그 분도 주말엔 주차장이 돼버린 주변 도로 때문에 물류가 들고 나는데 고통이 있단다.

그렇지만 이런 교통마비도 조금 거리를 두고 멀리서 보면 화려한 네온 싸인 만큼 멋진 도시를 수놓는 그림이 된다.  그 유혹에 못 이겨 나도 모르게 그 곳에 간다. 별 일 없이도 간다. 때로는 식구들 선물 산다, 누구누구 생일이다, 심지어 멀리 제주 사는 동생 대신 자처해서 그 곳에 가고 만다. 50-80%로 물건 값이 싸다니...이거 앉아서 돈 버는 일인데 당연히 가야하는 거다.

난 불안한 일이 있거나 걱정되는 일, 우울한 일이 있을 땐 많이 걷는 편이다. 특히 심리적인 불안정을 느낄 땐 나도 모르게 이곳에 간다. 언제 가는 쇼핑홀릭 아닌가 할 정도 자주 갔던 적도 있다. 그럴 땐 내가 정말 도시인이구나 싶다. 화려함속에서 안정을 얻는 도시인말이다. 이제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물건구경 보다 사람구경이 앞선다.

그래도 나는 그 곳이 좋다. 나의 도시적 욕망을 채우는 탈출구 같은 곳이다. 넘보지 못하는 물건을 보더라도 그 아름다움에 취하는 게 좋다. 마치 ‘언제가는 입고 말거야’ 하고 넣어둔 사이즈가 턱없이 모자란 정장 한 벌 같은(이제는 구닥다리라 살이 빠져도 입기는 어려울 듯하지만). 약간은 묻어둔 사치스런 나의 속내가 그 곳엔 있다.

의류, 섬유 공장이 이제는 저 멀리 중국으로, 동남아로 떠난 자리. 국내 최대를 자랑하는 쇼핑타운이 그 곳엔 있다. 수많은 노동자의 노동으로 만들어낸 땀내 나던 현장의 수출 공단에서 현란한 소비 시장의 쇼핑타운으로  탈바꿈한 곳이 그 곳엔 있다. 음악만 들으면 경쾌하기 짝이 없는  노래 “사계”같은 곳이 그 곳엔 있다.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 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중략)” 가사처럼 계절이 바뀌는 것과 상관없이 돌아가는 미싱사의 일상이 그려진 이 노래. 신나는 가락 속에 애잔한 노랫말처럼 우리네 인생이 간단치 않을 때 공단 오거리를 지나 마리오 사거리를 가면 화려한 섬을 만날 수 있다.

산아래문화학교
김유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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