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참다운 의미와 가능성은 자연스러운 수단과 탁월한 설득력을 가지고 동화적인 것, 기적적인 것, 초자연적인 것을 표현할 수 있는 특유한 능력에 있다.’ (발터 벤야민)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에게 있어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쉽게 눈에 띄는 질서를 분산시키고 무질서를 가시화하는 것! ’ 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그의 영화에서 드러나는 말과 몸짓과 화면 비율의 구성체계와 사운드는  우리에게 익숙한 획일적인 질서와는 다른, 다소 어수선함을 볼 수 있는데요. 특히 화면이나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그런 연출에 국한된 것 만이 아니라 그가 그려내는 집시들의 무질서한 세계자체가 법도 예절도 상식도 없는 아주 이상한 세계입니다. 있는 것 보다 없는 것이 더 많은 곳!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고 그래서 선뜻 다가서기 어려운 세계! 누가 감히 유럽에서 무질서의 상징인 유랑민. 집시의 세계를 영화로 만들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집시는 유럽인들에게 있어 여전히 금기이고  아직도 동냥하고 소매치기를 한다는.....그 어떤 문명도, 문화도,  그 어떤 교육도...이성도, 상식도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듯 사는 사람들 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세계를 상식을 초월하고 회화처럼, 마술사적인 환상의 세계로 보여준 영화가 바로 집시의 시간이고, 그곳엔 비상식이 만들어낸 상식을 뛰어넘는 가치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우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무질서의 세계 속에는 법과 예절과 상식의 합리적 사고가 가둬놓는 세계에서는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무수하게 더 많은 우리가 모르는 아름다운 것들이 존재한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혼돈과 비이성으로 가득 찬 상식 밖의 세계를 영화로 끌어들여 일상으로 재 구성해내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31살의  '쿠스투리차'  에게 칸느는 자기들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 찬사인 '황금종려상'  을 수여합니다.

 

유고의 어느 집시 마을에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소년 ‘페란’ (데버 더모빅) 이 자상한 할머니 (심령술사) 그리고 다리를 저는 어린 여동생 ‘다니라’와 함께 가난하지만 나름 행복하게 살고있었습니다.  강물 위에 띄운 화려한 불빛을 받으며 죽은 자는 꽃으로 장식하고 강물에 떠내려가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  삶의 즐거움을 구가하는 집시의 축제로 이어집니다.  페란은 이상하게 항상 커다란 칠면조를 안고 다니는데 할머니는 이 칠면조를 언젠가 '페란' 을 장가들이는데 쓸 밑천이라고 생각합니다.  '페란'  은 ' 페란' 대로 이 칠면조가 자기 분신이라고 생각하는지 매일 아끼며 껴안고 자는데 자기에게 정성을 다하는 페란의 심정을 아는지 신기하게도 칠면조는 페란이 시키면 그가 시키는 대로 다 합니다.

 페란은 어느 날 이웃집 처녀 ‘아즈라’를 보고 사랑에 빠져 칠면조를 통해 사랑을 전하는데 그걸 본 아즈라 역시 순수한  테란을 보고 반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페란의 집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하는데 그녀 어머니를 설득하러 간 ‘페란’ 의 할머니는 불쌍한 손자를 보며 칠면조 한 마리가 전부인 자신들의 가난을 저주하며 손주를 달랩니다.  이때, 마을이 시끄러워지며 고급 승용차 한 대가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자 아이들이 차들 따라다니며 차속의 얼굴을 보기 위해 창문으로 얼굴을 갖다 대고  안에는 이곳 출신의 성공한 ‘아메드’ 가  번쩍번쩍한 양복을 입고 부하들에게  담뱃불을 붙이라고 거들먹거리고 있습니다.  마을은  삽시간에 그를 환영하기 위해 축제 분위기가 되고 그 자리에서 아메드가 병에 걸려있는 자기 아들을 보며 걱정하자 심령술사인 '페란' 의 할머니는 심령술로 고쳐주는데 이걸 본 '아메드' 는 자기아들을 고쳐준 대가로 할머니의 손녀이자 페란의 여동생인 '다니라'  를 도시의 병원에 데리고 가 다리를 고쳐주겠다고합니다.

 

천사 같은 다니라를 볼 때 마다 온전치 못한 한쪽 다리 때문에 늘 마음 아프던 할머니와 페란은 잘 되었다며 페란은 다니라를 병원에 데려다주기 위해 함께 도시로 떠날 결심을 합니다.  하지만 도시의 의사는 다니라의 상태가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고 하고 다니라는 오빠에게 자기 혼자 병원에 버리고 가지 말라고 울면서 매달리지만 아메드는  '페란' 에게 동생은 의사에게 맡기고 빨리 가자고합니다. 어쩔 수 없이 동생을 진정 시키며 차에 오르는 페란의  참담한 심경을 아는 지 차창 밖으로 휘날리는 하얀 스카프는 죽은 어머니로 변해 혼자 눈물짓는 테란을 위로합니다.  페란을 태운 차는 이태리로 떠나고 다음날, 페란에게 아메드는 거지처럼 앙상한 고아들을 소개해주는데 아메드는 사업으로 성공한 것이 아니라 고아들을 데려다가 구걸하게 만드는 앵벌이 두목이었습니다. 그는 페란에게 고아들을 데리고 나가서 돈을 벌어오라고 하는데  여동생 '다니라' 가 병원에 있기 때문에 페란은 하는 수없이 아메드의 요구대로 아이들을 부려가며 앵벌이 대장노릇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는 동안 ‘별’ 을 점치고 칠면조와 이야기했던 순수한 청년은 점점 세상의 탐욕을 경험하며 조금씩 타락해가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궁지에 몰린 아메드를 구해주자 아메드는 고마움의 표현으로 유고에 잇는 페란의 할머니에게 큰 집을 지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 말에 조금 위안을 얻어 다시 살 힘을 얻는 페란은 도로의 ‘보도블럭’ 을 뜯어 그 안에  돈 을 숨기며 꿈을 키워 가다가 문득 동생이 보고 싶어져서 병원을 찾아가지만 거기서 ‘페란’ 은 동생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아메드가 동생의 다리를 고쳐주기는커녕 행방도 모른다는 사실에 배신감에 빠져 유고의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거기에도 아메드가 지어주겠다고 약속했던 자기 이름의 집은 없었습니다.  모든 게 거짓이고 자신은 철저하게 이용만 당했다는 사실에 페란은 분노하고 절망하는데 이때 사랑했던 ‘아즈라’ 가  불룩한 배를 가리키며 너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미 깊은 절망과 배신감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페란은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말을 믿지 못 하는데 아즈라가 바로 자신의 삼촌과 놀아났기 때문입니다. 아즈라는 결국 혼자 아이를 낳다가 죽고 페란은  그녀가 아이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페란'  을 보고 할머니는 이런 말 을 합니다.

 

‘네가 모든 걸 부정하면 하나님도 너를 모른 척하실거다’ 

이 영화  '집시의 시간' 은 저에게 가슴이 시리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 알려 준 영화였습니다! 페란이 얼마나 순수한 청년이었던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의 타락을 지켜보는 것이 얼마나 가슴시린 것인지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후에 페란은 불쌍한 동생 다니라 를 생각하고 그녀를 찾으러 이태리로 떠나서 온 도시와 국경을 헤매다가 결국 로마에서 두 사람은 기적적으로 상봉하게 되는데  절름발이로 동냥을 하며 힘든 나날을 살아가던 동생 '다니라' 에게 '페란' 은 충격적인 말을 듣게되는데  이후에 영화는 삶 속에 존재하는 작은 기억들은 착각과 망각이라는 비이성이 만들어낸 또 다른 현상들로 인해 자기 기억과는 다르게 삶을  전개해 나간다는 삶의 양면성을  말해줍니다. 


이번에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을 보면서 알파고를 응원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왜 알파고를 응원하느냐고. 물었더니 알파고가 강하니까 강한족을 응원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강한 족을 응원하는 것이 당연하다면 당신이 길에서 권투선수한데 얻어터질 때 권투선수가 당신보다 강하니까 우리가 권투선수편을 들어도 당신은 할 말이 없겠네요? 했더니 조용해지더군요. 강한 쪽을 응원한다고해서 자기가 강한 쪽에 속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힘있는 쪽을 응원한다고 해서 내가 힘 있는 쪽에 속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아니 그럴수록 어쩌면 내 현실은 점점 힘들어 질수도 있습니다. 세계경제는 양극화 현상이 심해져서 잘사는 1%와 나머지는 가난한 99%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치라는 것은 사회를 이끌어가는 힘 있는 1%의 편리데로 구도를 짜기 때문에 힘없는 서민들은 점점 살아가기 힘들어 질 것이라고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해하기 힘든 것은 힘없는 99%가 힘 있는 1%의 정당을 지지한다는 것입니다. 4월13일은 우리나라 20대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가 있는 날입니다. 부디 잠시 기분좋자고 힘 있는 쪽 편을 들지 마시고, 그런다고 당신이 힘있는 1% 되는 것 절대 아닙니다. 냉정하게 현실을 보고 현명하게 투표했으면 좋겠습니다. 젋은이들도 헬조선이라고 푸념만하지 말고 투표에 참가해서 우리나라 정치판도를 바꾸십시오. 젋은이들이 투표에 참여해서 직접 정치판을 바꾸지 않는 한 헬조선은 계속 될 것입니다.  

 영화도 이런 비상식적인 것들로 초월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산문적인 것과 시적인 것들을 넘나들며 완벽하게 균형을 이룬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 글도 모르는 진짜 집시들을 출연시켜 만들었다고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 ‘집시의 시간’ 은 전체 분량의 90% 를 실제 집시의 방언인 ‘로마니어’ 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 작품은 제가 뽑는 명작 베스트10에 들어가는 영화입니다.   

  

영화감독 홍두완 

 뉴욕탈출

1981년작   SF  감독:  존 . 카펜터





B급의 명장!  B급의 명품.

1980년대 당시 한 사람의 감독이 B급 선언을 했는데 그 소식을 듣고 가장 슬퍼햇던 사람들은 헐리웃의 메이저 사장들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헐리웃은 스필버그를 능가할 감독으로 두 사람을 꼽았었다고 하는데요,   한명은 제임스 카메룬 (에이리언, 타이타닉, 아바타) 이고 또 한명이 바로 존.카펜터감독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헐리웃의 대자본주의 체제(자본주들의 간섭)가 싫었던 카펜터는 B급 영화감독을 선언하고 이렇게 해서  그의 5번째 장편영화이자 당시까지 그의 영화가운데 최고의 제작비가 투여된 영화가 바로 이  ‘Escape from New york'입니다. 아름답고 예쁘장하게 미화된 것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다소 어색한 분위기 ’밴티지‘와 ’그로데스크’로 포장한 이 영화에서 그는 당시 자본주의의 상징이자 아메리칸 드림의 본체인 미국의 뉴욕을 핵무기와 온갖 비밀로 추잡하게 으스러진 음침하고 퇴패 범죄도시로 규정하고 자유의 여신상의 모가지를 쪼개서 땅에 떨어트렸습니다.

 닉슨 정부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겪은 후에 그가 느낀 감정을 S.F로 옮겼다는 이 영화는 전 미국의 범죄율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정부는 뉴욕의 맨해튼 섬 전체를 거대한 장벽으로 두르고 도시와 연결된 다리마다 폭탄들을 설치해서 누구도 맨해튼을 탈출할 수 없는 완전 고립된 거대한 교도소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범죄자들을 그곳에 내동댕이쳐놓고 자기들끼리 알아서 생존하도록 감시만 할 뿐이라는 설정인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핵 문제와 관련된 중요한 자료를 가지고 있는 대통령이 타고 있던 에어포스원이 과격한 해방 전선 단원들에 의해 납치되어 추락한 것인데, 하필이면 추락한 지점이 바로 맨해튼 섬 한복판중범죄자들만 모아서 가둔 특별교도소였습니다.    이 거대한 맨해튼 도시 교도소는 현재 듀크라는 대악당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는 대통령을 볼모로 잡고 전 수감자들을 풀어 줄 것을 요구하므로 정부는 이에 맞설 전설적인 용사이자 현재 연방은행 강도죄로 수감 중인 전설 애꾸눈 용사(람보보다 앞선) 스네이크 플리스킨 (커트 러셀)을 침투시켜 24시간 안에 대통령을 구하도록 명령을 내리기로 합니다. 하지만 스네이크 역시 무시무시한 대 범죄자이므로 만약 스네이크가 대통령을 구하지 못할 경우에는 자폭하도록 24시간 후에 폭발 하는 시한폭탄을 그의 목걸이에 같이 세트해버리는데요. 이런 설정은 이후 다른 영화들이 두고두고 써먹습니다.   아무튼 한정된 공간에서 주인공과 범죄자들이 힘을 합쳐 거대 외부세력 (정부)에 맞선다는 내용은 또 다시 (존 카펜터가 숭배하는) 하워드 혹스의 ‘리오 브라보’를 연상하게 하는데 ‘뉴욕 탈출’은 한마디로 B급 영화가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B급 영화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입니다. 

 

 메인스트림이 다루길 꺼려하는 어둡고 칙칙한 배경, 열광할만한 안티-히어로, 캠피한분위기, 그리고 적절한 정치적 풍자까지. 영화에 캐스팅된 배우들도 매력이 철철 넘치는 개성 있는 조합인데, 찰스 브론슨이나, ‘타미 리 존스’를 캐스팅하길 원했던 제작사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존 카펜터는 처음부

터 스네이크 역할에 어울리는 배우는 오직 '커트 러셀' 뿐이라고 믿고 그를 캐스팅했는데, 지금까지도 [뉴욕 탈출]은 커트 러셀이 가장 사랑하는 자신의 출연작으로 손꼽는 작품이기도 합니다.(몇년전부터는  러셀이 아예 리메이크하겠다고 카펜터를 설득하고 있었고 결국 헐리웃의 유명 제작자 저엘실버가 3부작으로 리메이크한다고 최근에 발표했는데요, 

 그 외에도 맨해튼 교도소를 총괄하는 경찰 책임자로는 최고의 컬트 배우인 리 반 클리프가, 맨해튼에서 스네이크를 돕는 지인들 역할로 어네스트 보그 나인, 해리 딘 스탠튼, 그리고 존 카펜터의 당시 아내였던 에이드리언 바보우가, 대통령 역으로는 [할로윈]의 루미스 박사이자 존 카펜터의 페르소나인 도널드 프레즌스가, 그리고 악당 듀크 역할로는 [쉐프트] 의 영화 음악으로 흑인 문화의 상징으로 남아있는 소울의 대가 아이작 헤이즈가 출연합니다. 존 카펜터가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역시 범죄자들의 주거지가 된 뉴욕을 표현하는 것이었는데, 특히나 영화 속 맨해튼은 절반쯤 폐허가 된 죽은 도시로 전기도 통하지 않는다는 설정이었습니다.  존 카펜터가 이렇게 맨해튼을 도시 속 정글로 묘사하고 싶었던 것은 ‘찰스 브론슨’이 주연한 ‘데스 위시’ 때문인데, 이 영화는 평범한 시민이 도시 범죄자들에 의해 아내와 딸이 강간, 살해당한 후 법의 힘을 빌리지 않고 본인이 직접 나서서 범죄자들을 처단한다는 마초 영화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잘 알려진 작품인데요, “테이큰, 아저씨” 등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어찌됐든 폐허가 된 맨해튼을, 특히 열 블록 넘게 도시의 전기를 차단해야 한다는 영화 설정 상, 뉴욕에서의 촬영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존 카펜터는 프로덕션의 로케이션 담당자에게 특명을 내렸는데, 그것은 바로 영화 속 맨해튼을 묘사할 수 있는 미국 내 최악의 도시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발견된 곳이 바로 일리노이즈의 세인트 루이스였고, 그곳의 낙후된 환경 덕분에 존 카펜터는 무사히  ‘Escape from New york' 을 마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놀라운 B급 영화의 전설은 총 제작비가 6백만 불 정도라고 하는데,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5천만 불 이상의 극장 수익을 올렸으니까 ‘Escape from New york' 의 묵시록적인 분위기는 영화뿐만 아니라 문화적인측면에서 여러 나라에 다양하게 후세에 직,간접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게다가 이 영화는 사이버펑크의 태동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뉴로맨서]로 사이버 펑크의 지평을 연 윌리암 깁슨이 바로 [뉴로맨서]에 영향을 준 작품으로 [뉴욕 탈출] 을 손꼽고 있는데요, 또 다른 사이버 펑크의 한 축인 [블레이드 러너]에 사용된 어둡고 컴컴한 도시 세트가 바로 [뉴욕 탈출]의

것을 재활용한 것이기도 하다면 두 작품 모두 사유화된 사회가 개인을 통제한다는 공통된 모티브를 가지게 되는데, 존 카펜터가 [뉴욕 탈출]을 쓴 계기가 닉슨 정부의 도청사건이라는 사실을 상기해본다면 참으로 재미있는 연관성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역시나  전설의 범죄자 애꾸눈 '스네이크'는 정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대통령을 무사히 구출해내지만. 그동안  주인공은 겉으로는 뉴욕의 죄수들과 싸워 대통령을 구출해내야하고  속으로는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목에 폭탄 목걸이를 장치해놓은 정부와 심리전도 벌려야합니다. 특히 뉴욕탈출의 마지막 장면은 그 옛날 30년 전에 만든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명장면입니다.  도널드 플레전스가 연기한 비열한 대통령이  겁에질려 소리를 지르면서 기관총을 쏘아대는 장면이나 폭탄목걸이를  푸르고 백악관 정문을 나서는 주인공 스네이크가  대통령이  발표할  '세계 제 3차 대전' 이 일어날만한 단서가 녹음 되어 있는 카세트 테이프를 쭈욱 뽑아버리며 “세계 3차 대전? 그런 건 개나 줘버려!” 하며 쓰레기 통에 던지는 장면은 정말 통쾌했습니다.  덕분에 대통령이 연설할 세계 제 3차 대전 어쩌구 하는 부분에서는 철지난 컨트리쏭이 확성기에서 흘러나와 대통령은 물론 그 자리에 모인 많은 와신기자들과 백악관 관계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영화에서처럼 권력이 사유화된 정부의 공무원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보다는 사유화된 권력의 이해에 충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2015년 7월 서울 구로 노인복지관을 방문할  당시 의전을 위하여 엘리베이터를 잡아두고서 노인들은 계단을 사용하게했다는 사진이 올라와 논란이 되었던 황교안 국무총리가  이번엔 또 다른 과잉의전 때문에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2016년 3월 21일 황총리는 세종시 공관으로 가기위해 KTX171 편을 탈 예정이었습니다.  황총리는 서울역에서 열차를 탈 예정이었는데 다른사람들과 같이 걸어서 온 것이 아니라 차를 타고 플랫폼까지 들어왔습니다. 서울역 플랫폼 일부 공간에는 차량이 진입할 수 있는데 이 공간으로 황총리를 태운 총리실 소속 공무차량 2대가 진입하여 황총리를 내려주고 되돌아갔습니다.  총리실에서는 경호차원에서 한 조치라고 해명했지만 이런 갑질이 어디있을까요? 이처럼 특정집단의 이익에만 철저히 사유화된 권력의 "도둑정치"는 한국 사회의 윤리와 정의, 그리고 민주주의와 시민들의 참여 시스템을 무너트리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같은 서민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날이 다가옵니다. 4월 13일 대한민국 20대 국회의원 선거,, 차마 입에 담지못할 지저분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우리모두 선거에 참여하여 부패한 권력에게 따끔한 국민의 힘을 보여주었으면 좋겠숩니다. 

                               


영화감독 홍두완 

노스트라다무스

1994년 프랑스 감독: 로저 크리스티안  장르:  드라마



이번 영화는 세계의 종말을 예언한 사람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 의 생애를 그린 영화‘노스트라다무스’ 입니다. 1503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미셸 노스트라다무스는 철학, 문학, 역사, 의학에 정통했고 연금술, 점성술을 배우며 불어로 된 4행시 12 예언시집들을 출간했습니다.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아래 이루어진 당시의 중세시대에 그는 과학과 실험정신을 굳게 믿으며 진정한 진리를 찾고자 힘썼던 진보적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페스트가 전 유럽을 휩쓸던 그때 따뜻한 마음으로 환자를 대하며 ‘신 앞에서 만인은 평등합니다.’ 를 외치며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었던 성직자의 병까지 치료해주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어쩌면 그가 인류를 위하는 예언능력을 갖게 된 것도 온갖 어려움에 맞서 진정한 진리를 추구하는 인도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때는 페스트가 전 유럽을 초토화시킨 16세기 초의 중세 말, 거대한 재앙으로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가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심이 하나님으로부터 재앙을 멈추게 하는 것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조금씩 신앙에 의혹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런 사회정치의 분열속에서 교회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게 되는데 사람들을 이단으로 몰아 화형에 처하면서 그들의 마음에 공포심을 조장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시키는 이른바 ‘마녀사냥’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노스트라다무스 (체키카료) 는 자신을 키워준 유모가 마녀로 몰리면서 길거리에서 화형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데 이때 그는 처음으로 기독교 윤리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진지한 의구심을 갖게됩니다.

       

그리고 12년 후, 노스트라다무스는 ‘몽벨리에’ 대학에서 의학을 배우지만 교수들이 언제나 고대 문헌에만 집착했고, 환자 개개인의 상태를 들여다보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교수가 강단에 서서 문헌을 읽으면, 학생들은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적는 중세의 수업방식에도 의혹을 품었는데 문헌을 그대로 줄줄 읊는 교수들도 문제지만 학생들이 그것을 아무 비판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진보적인 ‘노스트라다무스’ 에게는 개개인의 독창적인 실험정신이 결여된 ‘몽벨리에’ 대학의 수업방식은 알맹이 없는 껍데기 같아서 이런 교육현실이 안타까왔습니다.

   

그러던 도중에 한 교수가 갑자기 쓰러지는데, 노스트라다무스가 상태를 보니 흑사병이었습니다. 흑사병은 중세 유럽 사회를 붕괴시킨 커다란 원인 중 하나일 만큼 당시에는 큰 재앙이었고 그래서 길거리에는 사람들의 시체로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의사이기도했던 노스트라다무스는 사람들에게 위생을 강조함과 동시에 장미꽃잎으로 제조한 자신의 환약을 주려고 했지만, 성직자들과 교회는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지하지 않고 의학에 의지하는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며 " 예수 그리스도의 힘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에 어찌 자네가 손을 대는가? " 라고 반문합니다. 


이 때 노스트라다무스를 이단으로 몰던 성직자가 페스트에 감염되고 노스트라다무스는 그를 치료하던 중, 우선 감염을 막기 위해 먼저 그의 옷을 태워버려야 한다고 말하자 감히 신성한 성직자의 옷을 태운다는 그의 생각은 기존의 기독교인들은의 거센 반발에 부딪힙니다. 게다가 페스트에 감염된 성직자는 "십자가에 입을 맞춰 보시오. 당신은 악마요. 그러니 당신의 입술은 타버릴 거야. 만약 당신의 입술이 타지 않는다면 나를 치료해도 좋소! "  라고 말하고 노스트라다무스는 십자가에 입을 맞추고 그를 치료해줍니다.

상황은 악화되어 한시라도 빨리 치료를 해야 하는 시점에서 성직자는 노스트라다무스도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이렇게 묻습니다. ‘나는 루터파인데 당신은 어떤파요?’ 그러자 노스트라다무스는 ‘ 저는 카톨릭입니다.’ 라고 답합니다. 중세 말, 조금씩 분열의 조짐을 보이던 교회가 ‘루터파’와 ‘칼뱅파’ 로 나뉘었던 시점입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대학을 졸업한 후, 당시의 저명한 과학자였던 ‘스캘린저’ 박사 밑에서 공부를 하게 되는데 어느 날, 스캘린저 박사는 노스트라다무스에게 자신의 저택 지하를 보여주고 거기에는 당시 입에만 올려도 이단으로 몰려 처형당할만한 금기 서적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물론, 현재는 위대한 자연과학계의 서적들로 여겨지는 것들이었지만 아무튼 스캘린저 박사의 조수였던 ‘메리’ (어섬터 세너 분) 와 결혼한 노스트라다무스는 혼인 후 메리에게 지하실을 보여주게 되고 메리는 과학서적에 푹 빠져 결국 스캘린저 박사와 노스트라다무스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게 됩니다.

       

중세의 유럽은 거의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했고, 때문에 신앙과 이성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과학이라는 학문은 객관적이고 올바르게 논의될 수가 없었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과학은 이단, 금기시되었습니다. 이런 점 때문에 노스트라다무스의 과학과 실험정신은 언제나 억압받았고, 교회가 ‘아니다’ 고 할때는 어떤 과학도 입에 담을 수 없었습니다. 흑사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치료할 때도 기독교 때문에 반대에 부딪혔고 이런 속에서 노스트라다무스는 점점 불안한 미래를 예측하게 되는데 당시 프랑스의 국왕이었던 앙리 2세의 죽음과 여러 왕족들의 죽음을 미리 예측해서 맞추자 사람들은 그에게 예언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두려워서 ‘사탄’ 이라며 없애버리려고합니다. 하지만 야심많은 캐서린 왕비는 그를 구하고, 그녀의 후원아래 자연과학과 의학 연구를 계속해서 1000여편의 예언시를 수록한 ‘예언시집’ 12권을 출간하게 됩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그는 ‘나는 인류의 미래를 보았다’고 말하는데요, 그의 예언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예언보다 더 궁금한 것은 노스트라다무스가 과연 ‘인간 이성의 역사’ 에 있어서 암흑기나 다름없던 중세에 태어나 죽음 앞까지 몰고 가는 위기 앞에서도 도대체 무엇을 지키려고 그토록 피를 토하며 움켜쥐었던 것일까요?  

페스트로 도시가 사라질 만큼 매일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되고 그러자 기독교 지도부에서는 이 불안을 극복하고자 마녀사냥을 통한 공포정치를 시작하는데 공포정치는 지도자의 불안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나라도 수순이 기가막힌 것이 황교안 국무총리가 어느 날 느닷없이  애국을 말하더니 박근혜 대통령은 일언지하에 개성공단을 갑자기 중지한다고 발표합니다. 얼마나 큰 피해가 생기는지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 피해보다도 더 중대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겠지요? 그리고는 사드를 배치 해야한다고 날뛰기 시작합니다.  오히려 미국은 북한의 핵만 포기시킬 수 있다면 한반도의 사드배치는 백지화 할 수도 있다고 발표해서 우리 정부를 멀쓱하게 만듭니다. 


아무튼 정부는 총선을 앞두고 국가위기 상황이라며 국가가 테러위협에 처할지도 모르니 테러방지법이 필요하다면서 대통령은 국회의장에게 직권상정을 합니다. 결국은 공포분위기를 조장해서 테러방지법이라는 명목으로 국정원에 더 강력한 힘을 실어주기 위한 일련의 수순같은데  국정원이 어디입니까?

서울시 공무원이던 유씨를 간첩으로 몰아세우기 위해 그의 여동생까지 협박했던 곳입니다.

이 사람이 간첩으로 적발이 되어 재판을 받았는데 무죄가 선고되었고, 이때 검찰이 증거로 제출한 유씨의 중국과 북한 사이의 입출경 기록은 국정원이 조작한 서류라고 중국정부가 밝혔습니다. 그리고 작년에는 선거에 개입했다고 의심받던 국정원 해킹팀 직원이 자살하는 소동까지 일어났었습니다. 이런 곳에 더 힘을 실어준다면 이들이 할 일이 무엇일까요? 

테러방지법의 주요 내용은 국정원장이 국정원 소속의 테러통합대응센터를 운영하며 정부 소속 테러대책상임위원장까지 맡게 됨에 따라 대테러 활동을 총괄하는 사실상 국정원이 대테러 활동을 모두 가져가게 되는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대목입니다. 세월호 사건 이전이 국정원 최대의 위기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런 점에서 세월호 사건의 최대 수혜자는 국정원 일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경제자문회의에서 희생, 불안,위기 세단어를 힘주어말햇다고합니다. 불안과 공포는 박근혜 대통령을 설명하는 키워드입니다. 그런데 공포정치는 사람들의 불안의식을 정치적 자원으로 삼아 사람들의 순응을 유도하므로써 목적을 실현하고자하는 정치를 뜻 한다고 합니다.  바로 중세시대의 암흑기처럼 말이지요, 


영화감독 홍두완 

몬스터 (2003)

감독: 페키 젠킨스


 " 옛날 옛날에 아주 어여쁜 공주가 살고있었답니다. 공주는 그녀의 미모를 질투하는 왕비의 미움을 받아 독사과를 먹고 깊은 잠이 들었는데 어느날 숲속을 지나던 백마 탄 왕자님의 키스을 받고 잠에서 깨어....... "

이 영화는 실화이며 미국 최초의 여성 연쇄살인범 이야기입니다. 좌절에 빠진 한 창녀와 그녀에게 다가온 레즈비언 소녀의 비이성적이고 맹목적인 동성애, 그리고 무차별적인 살인 이야기, 델마와 루이스’ 같은 화려한 결말이나, 의중을 벗어난 반전을 기대하는 관객이라면 

'뭐 이래? 할 수 있는, 한 여자가 자신의 불운한 운명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비참하게 죽었다는 아주아주 상투적인 건조하고 뻔한 내용, 하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묘미는 바로 이런 무미건조함 속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감독은 왜 하필이면 세기의 미녀인 ‘샤를로즈 테론’ 을 세기의 추녀로 만들었을까요?

 어쩌면 감독은 그런 지루함속에서 처음부터 그런 여자들의 뻔~한 인생이 숙명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은 아닐는지? 뭔가 색다른 반전과 화려한 이야기를 기대하는 영화형식에 길들여진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런 감독의 낯선 문법때문인데요, 하지만 무엇보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바로 ‘샤를리즈 테론’의 캐스팅입니다. 연기를 잘하는 못 생긴 배우라면 얼마든지 있을 텐데 감독은 왜 하필이면 모든 남자들의 선망의 대상인 세기의 요정, 샤를로즈 테론을 20kg 더 살찌게 하고, 20살은 더 늙은 분장을 시키며, 20배는 더 추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런 질문을 해 봅니다. 과연 여자의 미모는 누구를 위해 필요한 것 일까요?

자 자신을 위해서?  아니면 남자들을 위해서? 젠키스 라는 여성 감독의 눈에 비친 남자들  이란 가부장적 사고로  예쁜 여배우만 나오면 그저 어쩔 줄 모르는 발정난 수캐들이고,   여자들이란 그런 남성 이데올로기의 혜택에 빌붙어 스스로 노예의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백설공주와 신데델라의 후예들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그런 세상, 혹은 그런 미국사회의 남성이라는 상징에 총알을 박아 넣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영화 속 ‘린’ (샤를로즈 테론) 은 남자들을 하나씩 거세해 나갑니다. 하지만, 감독은 그 곳에 머물지 않고  ‘샤를리즈 테론’이라는 절세 미녀를 보기 위해 영화를 찾은 남자 관객들까지도 거침없이 거세합니다. 세기의 미녀 ‘샤를로즈 테론’ 을 추녀로 만든 이유는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감독은 '테론' 을 남자들의 연인이 아닌  모두의 '엄마' 로 만들고 싶었던 겁니다. 우연히 ‘린 (샤를리즈 테론)’ 에게 나타나 유일하게 그녀의 친구가 된 동성애자 ‘셀비 (크리스티나 리치)’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호기심에 이끌려 클럽에서 만난 뒤 서로 위로해줍니다.  호기심으로 시작된 그 만남이 린에게 최초의 살인이 된 쇠몽둥이 사건이 있은 후, 린은 셀비에 게 비정상적인 집착을 보입니다. 젠킨스 감독에게 쇠몽둥이와 살인은 어떤 의미이길레 그 사건 이후로 ‘린’ 은 ‘셀비’ 에게 그토록 강한 집착을 보이는 걸까요? 린에게 있어 셀비는 동성애자가 아니라 다만 그녀가 13년 전에 자신의 부모에게서 잃어버린 보호받아야할 자신입니다. 동시에 쇠몽둥이로 상징되는 남성의 성적 폭력에 의해 잉태된 자신의 딸이기도 하지요. 그때의 유린으로 인한, 린의 각성은 그녀를 폭력이 있기 이전,  자살하고 싶을 정도로 지치기 이전 상태인 최초의 아기를 임신했을 때로 되돌려 놓았고, 당시에 방치했었던 어머니로써의 본능을 발동시키게 됩니다. 

비록 폭력에 의해 수태된 자식일망정,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셀비와 그리고 그 절체절명의 어미로써의 의미가 그녀의 정신세계를 채우기 시작하는데 그래서 그녀의 사랑은 결코 동성애적인 문제가 아니라 어미와 자식 간의 보호의 대상이자 애절한 집착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린은 셀비라는 새끼를 밴 암캐입니다. 새끼 밴 암캐에게 다가가 본 적이 있나요? 암캐는 자신과 새끼의 공간에 발을 들이는 누구에게나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심지어 누구라도 물어뜯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린의 남성 살해는 남성 사회의 폭력에 대한 적극적인 반격이 아니라, 새끼를 보호하기 위한 여성으로써의 공격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영화에서 린은 셀비를 수태한 이후로 남성들과의 섹스를 철저히 거부하고 있습니다. 린은 자신을 위해 집을 나온 상처 입은 '셀비' 를 위해 폭력이 철저히 배제된,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공간을 제공하기를 원했고, 그 목적을 위해  스스로 몬스터가 되어갔습니다.  그러므로 백설공주는 몬스터였습니다!  

옛날 옛날  아주 특별한 <백설공주> 에서 사실 백설공주의 구원은 남성 권력에 순종한 보상이며, 반대로 마녀의 멸망은 여성에게 주입된 남성 권위에 저항한 ‘징벌’ 이라는 이야기 . 

린은 쇠몽둥이로 당하는 그 순간, 모든 것을 깨닫는데요. 어릴 적에는 자기가 공주가 될 줄 알았고, 왕자가 나타나 자기를 데려가 줄 줄 알았지만, 삶의 결과는 단지 5달러에 스스로 옷을 벗어야 하는 창녀가 되었습니다. 레즈라는 이유로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셀비와, 여자라는 이유로 아버지로부터  도망나온 린은 그렇게 세상을 등지고 서로를 이해했지만  현실에서 쎌비는 경찰들에게 린을 팔아넘겼습니다. 냉혹한 현실 앞에 쎌비는 스스로  살기위해 린을 배반했지만 그걸 알면서도  끝까지 쎌비를 지켜주려는 린을 보면  인간이 세상을 살면서 진정 의지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대체  인간을 지탱하게 해주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 일까요?  하지만 반대로 말한다면 대체 무엇이 우리의 눈을 멀게 만드는 것일까요? 

허구와 현실. 세상의 온갖 그럴듯한 구호들이 사실은 그 속에 추한 리얼리티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엄마의 본성이 성모마리아의 그럴듯한 아가페적 모성애가 아니라, 때로는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미친 암캐처럼 이빨을 들이대는 괴물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사랑, 이성, 희망 따위의 단어가 갖는 진정한 의미가, 때로는 몬스터라는 불편한 진실을 깨달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마더에서 원빈의 엄마인 김혜자는 아들이 살인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들대신 살인자로 잡혀 온 한 청년을 물끄러미 바라만 봅니다. 엄마의 자식에 대한 절대사랑이 누군가에게 괴물이 되는 순간입니다. 

 

얼마전 황교안 국무총리가 국가공무원법 개정안의 공직가치 조항에 민주성·다양성·공익성 을 삭제하고 ‘애국심’ 등만 넣으라고 지시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일고 있고있습니다. 손석희 앵커는  28일 JTBC <뉴스룸>앵커브리핑을 통해  헌법이 정한 국민의 4대 의무(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 교육의 의무, 근로의 의무)를 다하느라 군대에 가고, 세금 꼬박꼬박 내고, 교육을 받고, 지금 이 시간에도 열심히 일하는 우리들에게 누가 애국을 말하는가 ”라고 반문했습니다. 각종 위장전입과 해괴한 질병으로 군면제를 받고 자녀들 병역논란에 진 땀 흘리고 있는 그들이 과연 애국을 말할 자격이 있을까요? 그들이 말하는 애국은 애국을 위해 어느 정도 사소한 희생은 감수해라! 그것이 충성이고 애국이야! 라고 말 하고 싶은 것일테고 이것 역시 “의도된 희생” 을 말하는 ‘괴물’ 이라고 보기에 충분 할 것입니다. 

 이번엔 한반도에 사드를 들여온다고 난리인데 어느 지역 할머니가 ‘나라를 팔아먹어도 박근혜를 밀어준다’ 고 말하는 동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박근혜를 밀어주든, 새누리당을 밀어주건 상관은 없는데 당신 손자, 손녀들이 밥 굶고 직장 못 구해 힘들어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느냐고, 박근혜를 밀어주는 것이 당신에게 어떤 혜택이 돌아가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결국 백설공주란 한낱 남성들의 편리한 노리개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을 깨달을 때, 누군가에게 계획되어진 사랑, 희망같은 단어들이 때로는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는 몬스터라는 진실을 받아들일 때, 영화 <몬스터> 는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영화감독 홍두완 



[영화이야기] 인랑-1999년   감독: 오키우라 히로유키



늑대들이 한 소녀를 발견하고 달려갑니다. 빨간 두건의 소녀, 후세를 사랑하는 .... 더 정확하게는 후세의 외로움을 사랑하는 ‘아마미아 케이’.

 철창이 그녀와 후세를 막아서고 늑대들은 그녀를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옷과 살을 잔인하게 뜯어 금새 지하를 흐르는 물은 핏빛이 되는데 아마미아가 후세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결코 올 수 없어요." 어디에 올 수 없다는 것일까요?  후세를 막아선 철창 너머, 아마미아가 있는 그곳이 어디이기에 그녀는 울부짖는 후세에게 당신은 결코 올 수 없다고 하는 걸까요? 후세 카즈키는 수도경의 주력 부대인 특기대의 정예 요원입니다. 특기대의 임무는 과격한 도시 게릴라인 '섹트'를 진압하는 일이고 그래서 '섹트'의 폭탄을 운반하는 빨간 두건의 소녀를 발견하자 쫒아가서 총을 겨누지만 막상 자길 보고 자폭하려는 소녀에게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왜? '라고 묻습니다. 그 짧은 물음은 철갑으로 무장되어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집단으로부터 극도의 공포감에 떨던 소녀가 대답 대신 도리질치며 폭탄 끈을 잡아당기게 하는데 주목할 것은 빨간 두건의 소녀가 폭탄을 운반하며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과정 속에서 보여주는 그녀의 '무표정'입니다. 인형같은 무표정 속에서 운반된 폭탄이 데모 진압군 내로 떨어지고 수많은 자치경 사람들이 죽는데 '죽음'을 운반했던 소녀의 무표정은 사실상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며 죽이고 싶었던 특기대원들의 철갑 속 무표정과 동일한 의미를 갖습니다. 특기대원들의 철갑. 그것은 인간의 형상과 감정과 사고의 다양성을 차가운 쇳덩이 속에 가두어버리고 철갑이 둘러 채워진 순간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특기대라는 '늑대의 무리' 속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늑대가 됩니다. 그처럼 '빨간 두건'의 무표정 역시 특기대 의 철갑과 같은 맥락을 지니는데,  빨간 두건이 둘러 씌워진 순간 소녀는 더 이상 소녀가 아니라 섹트라는 '늑대무리' 속에서 소녀의 형상으로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한 마리 늑대일 뿐입니다. 이 영화에서 인간늑대는 소수를 핍박하는 권력집단인 후세와 자치경, 수도경 사람들만이 아니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에게 저항하는 빨간 두건의 소녀 역시 인간늑대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소급되는데요.   ‘ 늑대란 무엇인가?’


후세가 '왜'라고 묻자 소녀는 도리질을 칩니다. 후세가 '왜'라고 묻는 것은 '왜 자살해야만 하는가, 왜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조직을 지켜야 하는가?'일 테지만 그러나 그 '왜'는 후세에게도 해당됩니다. 그는 왜 소녀를 죽여야 하는가? 왜 섹트들을 죽여야 하는가? 영화는 섹트의 이상이나 특기대의 당위는 부각시키지 않고 이렇듯 인간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후세를 특기대로부터 구원해내고 소녀를 섹트로부터 구원해 냅니다. 그러나 이 구원은 해답이 될 수 없겠지요. 그 해답에 대한 탐색이 이 영화 전체의 몫이니까요! 소녀의 도리질은 자신이 왜 자살해야 하는 지 알 수 없다는 것인지, 아니면 자폭을 멈추지 않겠다는 부정의 표시인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소녀의 죽음이 진정 그녀가 원하고 스스로 택한 결단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소녀는 도리질이 아니라 그녀가 알고 있을 섹트의 목적과 이상을 '왜' 라는 질문의 답으로 말했을 테니까요.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이념이 자신의 의지나 이념과 무관하게 자신을 규정한다는 이 비극적인 의미는 이 영화 전체를 통해 확산되며 집단 속에서 부속품에 불과한 한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순간,  그는 그 집단에서 가장 불온하고 위험한 인물이 되어 버린다는! 그러나 그 의문을 제기하는 철학적인 이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고귀한 순간임을 확인시키는 영화, 인랑에서 우리들은 늑대로써의 인간이고 고독으로서의 인간입니다.

후세는 박물관 안에 박제된 늑대들을 응시하며 이런 질문을 해봅니다. 어째서 나는 인간의 형상이면서 늑대들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그들과 같이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 것 일까?

늑대는 '집단'을 상정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집단'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섹트와 자치경, 수도경, 특기대의 비밀 결사 조직인 인랑, 모두가 포함됩니다. 그 모두가 '집단'으로서의 늑대이고 집단은 집단의 일원을 '독립된' 개체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며 그래서 후세의 '왜'라는 질문과 아마미아의 사랑은 모두 다 집단속에서는 불온한 것이며 이러한 집단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개인의 감정과 사상은 비극적인 결말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고 영화는 말합니다.

후세가 철창에 갇혀 갈 수 없었던, 아마미아가 후세에게 '당신은 결코 올 수 없어요' 라고 했던 그곳은 '집단(늑대)'이 아닌 '인간' 이 살고 있는 세계를 말하는 것이지요, 어둡고 축축한 지하의 세계 속에서 아무리 울부짖는다 해도 후세가 포함된 세계, 혹은 그 세계 속의 후세는 아마미아를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세계는 인간, 개인의 이름을 허락하지 않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한 때, 빨간 두건이었던 아마미아는 체포된 후 포섭되어 수도경의 공안부가 시키는 대로'뭐든지' 했다고 고백합니다. 심지어 한때 자신의 동지였던 이들이 죽고, 사랑하는 남자가 죽게 되더라도 그렇게 했다는 말인데요. 그건 죽음이 두려워서가아니라 삶에 대한 어떤 집착도 없기 때문으로 묘사됩니다. 자폭했던 빨간 두건의 소녀와 아마미아의 동일성을 확인시켜주는 이 장면에서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으므로 시종 무표정으로 지금의 무의미한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잔인한 집단 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 갈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마도 개인으로써의 '외로움' 때문이겠지요. 외로움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고 집단 속에서의 희생을 무릅쓰게 만듭니다. 아마미아가 후세를 사랑하는 것도, 후세에게 집단과 거리를 두며 생겨나는 (즉, '왜'라는 질문과 동시에 생겨나는) 외로움에 대한 사랑일 것입니다. 외로움에 대한 동질성이야말로 사랑의 기원이 아닐까요? 하지만 후세는 결국 늑대의 무리 속으로 돌아가고 마는데,아마미아의 사랑을 확인하고 후세는 결국 그녀를 총으로 쏘며 늑대의 가면인 철갑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맙니다. 동시에 영화 속에서 그토록 집요하게 병치되던 빨간 두건의 동화는 결국 이렇게 완성됩니다.  ‘엄마, 이빨이 왜 이렇게 커요?’ 빨간 두건의 동화에서 희생자는 빨간 두건일까요? 영화는 늑대와 빨간 두건은 동일하다고 해석합니다. 비록 늑대가 꼬이기는 했지만 빨간두건은 왜 그것이 엄마의 살과 피 인지 의심하지 않았을까요?  이 엽기적인 잔인성은 '무지'라는 이름으로  제외되어도 되는 것 일까요? 엄마 늑대의 이빨만 큰 게 아니라, 빨간 두건의 이빨 역시 크고 잔인한 것은 아닐까요?  아니, 정작 우리 자신의 이빨은 어떤가요. 누군가를 물어죽이기에 충분히 크지 않은가요? 또 나를 향한 세계의 이빨은 어떤가요? 결국 아마미아는 '엄마 왜 이렇게 이빨이 커요'라고 부르짖으며 죽어갔고 ' 늑대 엄마'인 후세는 고통으로 일그러지며 쓰러지는 그녀의 죽음을 끌어안고 이렇게 되뇌입니다.  ‘ 


당신은 결코 올 수 없어요!’ 


국민의 당의 창당준비위 공동위원장 한상진교수는 성찰적 진보라는 개념을 발제했습니다. 이른바 계파정치, 패권정치,486의 권력화등 낡은 진보를 대치하자는 의미입니다. 한상진교수는 1890년대에 ‘중민’이라는 중산층과 서민등, 보다 광범위한 국민과 대중들의 역할을 중요시한 비교적 온건하고 점진적인 비혁명적 개혁주의를 말했었습니다, 중민개념은 당시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면 어떨까요? 중산층과 민중을 합쳐 만든 중민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정한 지위와 부를 쌓았으면서도 민중적 가치관과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의식을 지닌 계층을 말합니다. 트위터나 소셜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정치,경제,권력에 대한 견제를 활발히 펼치는 계층 역시 상당수가 중민이라는 것인데 특정 이념을 바탕으로 한 개념이 아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계층인 이들 중민이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계층이라고 기대하는 것 입니다. 이제는 그런 중도개혁의 스펙트럼이 필요한 것 아닐까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필자는 그래서 합리적 중도가 극우보수를 대체하고 진보에게는 성찰의 변화를 요구하는 대한민국이 탄생하기를 기원해봅니다. 


결국 집단으로써의 늑대는 개인인 인간에게 다가올 수 없다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어둡고 축축한 지하의 물 속에서 오열하며 죽어가는 아마미아의 투명한 눈물을 보여주는데요, 시종 영화의 배경이 되는 지하의 어둡고 축축한 물이 죽음과 암울함을 상징한다면 아마미아의 눈물은 따뜻한 생명과 희망을 상징하는 것이겠지요. 너무도 도식적인 결말과 달리 뜨거운 감동으로 다가오는 애니메이션 ‘인랑’은 3년의 제작기간과 80억 원이 넘는 제작비, 그리고 1천여명의 인력이 투입된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표적 작품입니다.  

 


홍두완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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