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루트처럼 아름다워... 이라크만큼 슬프다.
시리아처럼 죽음으로 지치다 예멘처럼 파괴되었지.
리비아처럼 상처 곪다가 팔레스타인처럼 잊혀지지.

다른 사람들에게 좋고 나쁨을 날 것으로 들어내는 것에는 아주 오래된 역사와 구조의 비참이 놓여있다. 우리는 백인에겐 관대하고 유색인에게 인색하다. 서구 제국주의 문명, 무엇보다 미국 문명이 지배적 영향을 받은 결과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그 비참의 또 한 장면을 보고 있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와 연관된 ‘중국혐오’다. 바이러스가 만든 혐오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잠재된 혐오가 신종 폐렴을 빙자하여 창궐한 증상이다. 이 현상을 파고들면 우리는 한국 현대사의 민낯을 만난다. 미국의 눈으로 보는 단색의 세상 말이다. 중국혐오 전에 우리는 아랍 이슬람 혐오에 빠졌다. 그 전에는 반공반북의 혐오다. 혐오의 공통점은 미국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언저리 주변으로 찍힌 대상이다. 

미대통령 트럼프가 지난달 28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을 위한 ‘세기의 거래’를 발표했다. 문제는 이 거래가 이스라엘이 원하는 것 다 해주겠다는 것이다. 이 거래가 성사되면 이스라엘은 1967년부터 불법 점령해온 팔레스타인 지역을 병합한다. 요르단 밸리, 동예루살렘, 매년 야금야금 늘려온 불법 유대인 정착촌 등 유엔이 불법 침략으로 규정한 것을 한꺼번에 차지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국제 알 박기에 성공하고 2천년을 산 땅에서 추방된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 영토에 둘러싸인 일련의 폐쇄 도시 구역에 갇힌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국경과 이민, 안보, 영공, 대수층 및 전자기파를 통제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하나였던 악명 높은 반투스탄(흑인 거주 구역 설치)이 부활하는 것이다. 이것은 ‘거래’라 아니라 강도 사기다. 이란 최고 지도자 하이메이는 평한다. “그 계획은 첫째 어리석고, 둘째 사악함의 신호이며 셋째 실행 첫날부터 그들에게 해로울 것이다.. 미국의 그 공작은 트럼프보다 먼저 사망할 것이다”

미국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그 지배의 룰은 오직 미국의 이해관계다. 아니면 세상은 결국 힘이고 억울하면 힘을 가져라 는 야만의 세상이다. 우리는 올해 들어 이른바 한미 주둔군 방위비 논란에서 그 일방적 폭력성을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다. 그 결과 평화 인권 존중 공존을 원하는 이들에게 지금의 세상은 오직 ‘저항만이 의무’가 된다. 왜 그런가하면 트럼프의 정책이란 것이 미국의 이상(異常)현상이 아니다. 미국의 본심이 날 것으로 들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민주당 대선 후보들이 트럼프의 ‘세기의 거래’를 세기의 사기로 규탄하지만 오바마도 클린턴도 이스라엘의 침략 지배에 대해 묵인 동조해 왔다. 양아치나 조폭이나 서민들에겐 그저 상종 못할 폭력일 뿐이란 말이다. 그래서 미국과 친하면 핵을 가져도 남의 나라를 침략해도 그것을 인종적으로 지배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악한 상징이 바로 이스라엘의 존재다. 

인간의 사악함은 종종 자기의 경험을 극단화하고 단절하는 데에서 파생된다. 이스라엘은 히틀러에게 인종 청소를 당한 나찌의 희생자로서 명백하게 폭력의 피해자지만 2천년을 넘게 살아온 팔레스탄인 2천만명을 추방하고 점령하며 청소 중인 가해자다. 하지만 자기들의 오래전 피해는 극단으로 현실화하고 명백한 현실은 눈 감는다. 내가 입은 상처를 이유로 다른 이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그것은 범죄다. 하지만 가능하다고 믿는 순간 상처는 혐오와 비참의 흉기가 된다. ‘비판과 성찰’조차 자기가 받은 상처를 키우는 것으로 본다. 친 팔레스타인이 미국과 유럽에서 반유대주의가 되는 순간이다. 이 무지와 맹목의 사슬에 갇혀 버리면 세상은 혐오하지 않으면 혐오 당하는 지옥이 된다. 이 지옥의 다른 이름이 이기, 경쟁, 탐욕, 배타, 배제, 유대의 파괴가 사회구성의 근본인 자본주의적 체제의 폭력적 완성인 제국주의다. 모두가 모두에게 제국주의자가 되고 싶은 이 참혹함에서 아무도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 현실 인간 존재들, 자본주의형 인간들의 근본적 비극이다. 

 

그래서 오늘도 팔레스타인의 한 청년은 말한다. 
우리는 남아 있을 거야 당신들의 가슴에 담벼락처럼,
그리고 당신의 목에 유리 조각처럼, 선인장 가시처럼, 
그리고 당신의 눈에서 불의 폭풍으로.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소

 

지난 신문에 유성훈 구청장이 여민가의(與民可矣)의 자세로 새해 업무에 임하겠다는 보도가 있었다. 여민동락(與民同樂)이라는 말은 익숙한데 여민가의는 생소하여 찾아보니, 조선조 세종의 말이라 한다. 1425년(세종 7년)은 20년 이래 극심한 가뭄이 들었다. 세종은 벼농사의 형편을 알아보기 위해 도성 서문 밖에 은평구와 서대문구 지역을 살폈다. 세종은 벼가 잘 되지 않은 곳에 이르면 반드시 농부에게 물었다고 한다. 여민가의 정신의 시작인 ‘문어농부’(問於農夫)였다. 그로부터 5년 후 1430년(세종 12년) 경상도 관찰사가 개간 밭에 면세를 하라는 시책에 대해 개간 밭을 구분하기 어려우니 일괄해서 세금을 부가하자는 건의를 했다. 이 행정적 편의주의와 세수 증대를 위한 관료적 건의에 대해 세종은 단호하게 말한다. “어찌 구분을 할 수 없다는 말인가 일이 의심스럽다면 백성과 같이 하면 된다.”고 했다. 백성과 같이하라, 백성에게 묻고 백성의 뜻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여민가의(與民可矣)정신이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여민이 측근도 벼슬아치도 살만한 사람들도 아닌 ‘벼가 죽은 논의 농민, 개간이라는 고난을 견딘 농민’들이란 점이다. 

여민(與民)을 이해하기위해 홍길동의 저자 허균의 ‘호민론’도 상기할만하다. 허균은 ‘호민론’에서 천하의 가장 무서운 존재는 오직 백성이라며 백성들을 항민(恒民)ㆍ원민(怨民)ㆍ호민(豪民)으로 분류한다. 항민은 관에 순종하며 관의 눈치를 보며 굽실거리는 백성, 원민은 관의 착취에 원성(怨聲)을 내며 불만을 갖지만 저항할 줄 모르는 백성, 호민은 잘못된 정치와 사회구조에 대해 지배 질서와 다르게 생각하여 나라에 변고가 생기면 원하는 바를 일거에 이루려고 하는 저항할 줄 아는 백성이라고 했다. 허균은 호민의 모습을 홍길동을 통해 그려냈고, 허균 자신도 체제변혁을 모색했다고 모반죄명으로 형장의 이슬이 사라진다. 

정치가 주목해야 할 민(民)이란 빈민(貧民)이자 난민(難民)이자 저항민(抵抗民)이다. 사회적으로 낮고 가난한 사람들, 어려움에 처해 아픈 사람들, 어려움과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 나선 사람들이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보고 들어야 할 민(民)이다. 문재인 정부가 시작했을 때 유시민은 어용지식인이 되겠다고 공언했다. 노무현 대통령처럼 상실의 큰 슬픔을 예방하기 위해 싸우겠다는 말이다. 나는 노무현 정권 당시에도 대통령 노무현의 성공은 노무현에 대한 칭찬이 아니라 비판에서, 대통령에 대한 옹호로 ‘방어가 아니라 투명한 진실의 공개와 신속한 성찰’이 필요한 것이라 했다. 하지만 최악을 위해 차악은 감수하자는 논리는 진영이 되어 비판은 비난이 되고 다름은 적대로 몰고 만다. 어용지식인이란 선언은 진영논리의 끝판 왕이자 권력을 위해 민과 맞서겠다는 대민(對民) 적대선언이었다. 천박함이다. 

유성훈 구청장은 여민가의를 말하면서 말의 유래와 의미를 깊이 궁리(窮理)했을까? 그러길 바란다. 그렇다면 측근의 말의 달콤함이 아니라 비판자들의 쓴 맛이 진정한 여민의 길임을 알 테니 말이다. 나는 이글을 쓰는 동안 과천 마사회부터 청와대까지 오체투지 행진단에 동참했다. 부산에 경마장이 생긴 뒤에 7명,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서 4명이 동일한 이유로 동일한 죽음을 당했다. 하지만 마사회는 업무를 위탁했다면 책임을 회피하고 사과 한마디 없고, 다시는 동일한 죽음을 반복할 수 없는 유족들은 시신을 이고 광화문에 운구를 모시고 청와대의 해결을 요구해도 청와대는 응답이 없다. 만나고 싶은 이들만 만나면서 여민(與民)이라는 것은 정말 지독한 거짓말이거나 위선이다. 그 거짓말과 위선은 자기들의 정치권력을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적폐를 부활 완성시키는 것이고 자신이 적폐화 하는 것이다.  

금천구도 마찬가지다. 신문을 통해 보면 구청장의 이해관계와 다른 점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별별 이유를 들어 배제되는 경우가 있는 모양이다. 그 과정에서 불거진 몇 가지 소동과 소문은 구청장이 민과 더불어 가는 대신 민과 대립해 진영논리를 완성하고 말겠다는 오기로 비쳐진다. 고인 물이 되고 있는 증거다. 2020년 새해가 시작됐다. 여민가의(與民可矣) 자세를 발굴해 강조한 구청장이니 민과 더불어 살기 위해 측근과 관료와 달콤함에서 벗어나는 쓴 소리와 다름에서 여민을 구현하는 회심(悔心)의 계기로 여민가의정신이 작동되길 기대해 본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소

미국이 이란의 군 사령관을 테러 암살하고 이에 대하여 이란이 국민적 분노를 실어 이라크 내 미국기지에 대해 미사일 타격을 가한 후에 나온 미국 대통령 트럼프의 일성이다. 트럼프는 트윗과 성명을 통해 이란 군 수뇌부의 살해에 비해 미 국민은 아무도 죽지 않았다고 둘러대며 미 이란 간 전운(戰雲)은 경제 제제로 돌린다며 한발 물러났다. 이게 장사꾼 트럼프의 배포 수준이다. 이란은 미국의 비공식 암살 테러에 정식 군사작전으로 대응을 했다. 이라크 정부에 사전에 통보하고 이라크 내 미군기지에 대한 타격을 했고, 아마도 이라크 정부는 이를 미국에게 알려 미리 군인들을 피신시켜 인명살상을 최소화하게 한 과정으로 보인다. 이를 국가 간의 정상적 절차를 볼 것인지 한국의 뉴스처럼 확전을 피하고 싶고 국민들의 분노에도 응해야 하는 이란 정권의 궁여지책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미국의 일방적 폭거와 이라크와 인명을 생각하는 이란의 모습은 참으로 선명하게 야만과 이성으로 대비된다. 


미국은 전쟁국가다. 그들은 전쟁과 전쟁에 준하는 조건에서만 가능한 국가구조, 산업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쉼 없이 적을 만들고 그 적을 사탄으로 만들고 긴장과 전쟁을 키운다. 미국의 전쟁은 전쟁 상대국의 이유에 의해 발생되지 않는다. 있다면 유일하게 진주만을 친 일본 군국주의지만 그것조차 미국에 의해 일본이 석유 금수 등 압박을 받으며 유발된 전쟁이다. 한국에서 베트남에서 그리고 아랍에서 미국의 전쟁은 미국의 이해 또는 정권의 이해득실에 의해 유발되고 조작된다. 이번 이란에 대한 공격도 트럼프 정부의 일방적인 약속의 파기와 압박도 모자라, 있는지도 모르고 더욱이 발생되지도 않는 이유로, 그러니깐 트럼프 정부가 궁예의 ‘관심법’을 동원해 이란군 사령관을 암습 폭사시킨 것이다. 묻지만 국가테러 범죄다. 이에 대해 세계 모든 나라는 유엔은 즉각적인 규탄과 제제를 가해야 한다, 하지만 러시아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나라는 침묵하거나 이란의 자제만 요구했고, 이란이 반격하자 유럽을 중심으로 일제히 규탄 성명을 발표한다. 이런 무도하고 터무니없고 불공평한 행사가 있을 수 있을까? 슬프게도 지금 세상은 불의한 불공평이 일상이다. 북한에 대한 미국과 유럽과 유엔의 폭거가 확실한 증거다. 


이란의 공격에 미국 군인이 죽지 않았고 그래서 확전이 자제되었다니 다행이다. 갑자기 쌍용자동차 77일 파업 투쟁이 생각난다. 도장 공장을 중심으로 노조가 파업을 하고 있었다. 인화(引火)물질이 많아 쌍방 자제가 필요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찰과 구사대는 점거 노동자들을 공격하면서 그 도장 공장에 고의적으로 불을 지른다. 농성 노동자들은 그 불을 끄느냐 정신없었고. 정말 위험한 것은 강폭(强暴)한 힘에 저항하는 약자들이 아니다. 약자를 멸시하며 힘을 과시하려는 강자들의 행동에 진정한 위험이 있다. 오바마의 빈 라덴 이후 미국 대통령들은 국가적 암살 테러, 국내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남의 나라 주권과 인명을 유린하는 이 범죄에 중독된 모양새다. 하지만 제국주의자들의 오만은 상대에 따라 다르다. 수십 명이 압사를 하는 것에도 끌 수 없는 이란 민중들의 분노, 미국의 강도적인 폭력 테러와 억지에 말문이 막힌 세계, 지금 우리가 보는 장면은 명백하게 미 제국주의의 타락이고 몰락 과정이다. 


이번 미국의 패악과 이란의 대응을 통해 증명된 것은 무엇일까? 미국의 야만과 억지다. 군사적으로 보면 이란 사령관의 살해지만, 예고된 폭격도 막을 수 없는 미국의 방공망, 미국이 자랑한 패트리어트나 사드 같은 무기체제가 그냥 돈 쳐 바른 쇼윈도라는 것도 있다. 나아가 반미의 이유, 반미가 평화임을 우리는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그래서 트럼프와 달리 우리는 ‘괜찮지 않다’. 전쟁은 언제 어디선지 우리와 무관하게 돈과 권력을 쥔 강자들의 의도에 의해 결정되는 것임을 다시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반전 평화도 반미 반제에서 오는 것임을, 그 방향에서 국제적 연대와 우애가 결집되어야 한다는 것을 깊게 되길 교훈이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소

노동상담센터가 만난 세상- no.208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김용균이란 24살 젊은이가 일하다 목이 잘리고 몸통이 짓이겨져 죽은 지 벌써 1년,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되고 진상이 조사되고 불행이 재발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권고했지만 단 하나도 변하지 않는 시간 1년입니다. 외려 정부와 국회는 죽음의 노동을 강화하는 노동법 개악에 애를 쓰고 있습니다. 용균이 엄마 김미숙씨는 가정만 잘 지키면 우리 가족 행복할 줄 알았는데 우리 이웃을 지키지 못하면 가족도 지켜지지 않는 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아들이 죽고서야 알았다고 눈물입니다. 
그래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죽음의 노동에 맞서 ‘우리가 김용균이다.’다고 외치자 이 산 김용균들을 위해 현실이 주는 절망에 지지 않겠다고 외칩니다. 한 사람의 죽음은 한 우주의 죽음입니다. 단지 하나의 무심한 숫자가 아닙니다. 이것을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 공화제의 전제입니다. 한국의 민주주의의 조국과 박근혜가 아니라 김용균의 죽음을 보는 우리의 자세와 의지가 보여 줍니다. 그 의지가 생생한 시 한수룰 우리 구로공단의 시인 송경동이 1주기 추모집회에서 낭송한 시로 대신합니다.   문재훈 소장(남부노동상담센터)

 

물론 우리는 알고 있다

고 김용균 청년비정규직 1주기에 부쳐
시인 송경동

물론 우리가 개돼지보다
나은 대접이란 건 안다
지난 돼지열병 때
기껏 십 수 마리가 발병으로 죽자
산돼지 25만 마리가 도살당했다
2011년 구제역 때는 128만 마리
조류인풀루엔자 때는 닭 41만 마리가
생매장 당했다. 죽을 위험이 있다고
그 모두를 죽여 버리는 잔인한 세상

물론 우리도 개돼지만한
처우라는 것도 잘 안다
하루 여섯 명씩 일수 붇듯
착실히 년 2500명이 죽어가는
무자비한 산재살인세상이 수십 년이 되었지만
그들은 어떤 예방 활동도 조치도 하지 않았다
원인인 자본가들의 불의와
관료정치인들의 협잡은 격리 차단되지 않았다
백신이 되어야 할
법과 제도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 사이
김용균은 오늘도 죽었다
내일도 모레도 착실하게 죽을 것이다
오늘은 머리가 깨지고 내일은 롤러에 말리고
모레는 터져죽고 치어죽고 깔려죽을 것이다
살처분 당하기 전에 알아서 생을 묻는 이들로
OECD 자살공화국 1위가 된 지는 오래

그 사이
30대 재벌 사내유보금은
해마다 50조씩 공손히 쌓여
2019년 950조가 되었다
시중에 금괴는 없어서 못 팔고
부동산 가격은 2000조가 뛰었단다.

그 사이
일 잘하는 정부와 국회가 나서서
최저임금은 산입범위 확대로 조삼모사
52시간제는 탄력근로제 확대로 누더기
산업재해보상법은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
ILO협약비준과 지소미아 핑계로
박근혜도 못한 노동3권 개악

그 사이
수구보수는 다시 복권되어 널뛰고
다시 실력과 유능이 된 특권과 불공정
제국주의 미국과 대재벌 삼성과
손잡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사냐는 협박
민주당이 20년은 집권해야 민주화되니
그때까지 가만히 있으라는 폭력

이런 세상에서
또 다른 김용균이 오늘도 죽고
내일도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저들이 우리를 개돼지
닭 보듯 않게 하려면 어떡해야 하는가
잃었던 분노를 다시 새겨라
유보했던 저항의 뇌관을 터트려라
새로운 국가는 새로운 인민들이 만드는 법
오직 우리가 진정한 역사의 주인으로 설 때
모든 적폐가 뿌리 뽑히고
해방이 온다는 것을 잊지 말자.

 

노동상담센터가 만난 세상- no.205

 

조국 전 장관의 부인 정경심교수가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짓이 버젓하게 검찰과 법원의 이름으로 자행됐다. 검사의 기소장의 오타까지 벳겨 판결하던 80년대 전두환의 시간이 소환되었나 보다. 그러고 보면 최근 유성 노동자들에 대한 검찰의 보복 조치도 기가 막혔다. 회사와 어용의 지긋지긋한 탄압과 괴롭힘에 견디지 못해 화를 물리적으로 폭발시켰던 노동자들의 형기는 만기를 넘겼다. 그러고 보면 최근 유성 노동자들에 대한 검찰의 보복 조치도 기가 막혔다. 회사와 어용의 지긋지긋한 탄압과 괴롭힘에 견디지 못해 화를 물리적으로 폭발시켰던 노동자들의 형기는 만기를 넘겼다. 그런데 검찰이 상고를 했다는 이유로 만기가 지났는데도 구속 재판을 강행하고 있다.(기자회견 등으로 항의하고 언론에 보도되자 뒤늦게 구속 취소 했다 함) 식민지와 군사독재가 만든 정권의 시녀이자 노동자 민중들에겐 절대 권력인 검찰과 법원의 적폐 DNA가 한치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어 민주주의를 능욕하고 있는 꼴이다. 
그리고 여기 또 다른 본말전도가 있다. 내년 방위비 분담금을 결정하는 11차 한미 방위비 분담금 1차 협상에서 미국은 무려 5배가 넘는 6조원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는 올 최저임금 10%를 올렸다고 세상이 무너진 줄 알았다. 인상분을 실질적으로 없애는 과정을 걸쳐 2020년 최저임금 인상은 2.9%. 참으로 마른수건을 쥐어 짜 식수(食水)를 만들겠다는 심보들이다. 그런데 미국은 방위비 분담금은 무려 500%를 인상했다. 작년 분담금 협상 결과에 대해서도 트럼프는 “브루클린의 임대아파트에서 114.13 달러를 받는 것보다 한국에서 10억 달러를 받는 것이 더 쉬웠다”며 만족했다. 하지만 그는 “한국이 더 많은 돈을 내는 것에 합의를 이뤘다”며 자랑했고 그 결과가 2020년 분담금 500% 인상이다. 그런데 최저임금 인상에 그리 난리를 치던 여야 정치인 우국충정의 언론들이 미국이나 미국 대사의 이런 무리한 요구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거나 구경꾼이 되어 묵인 방조하고 있다. 이 깜깜한 어둠을 찢는 새벽 닭소리가 있었다.  
지난 18일 오후 2시 50분께 대학생들이 사다리를 이용해 미 대사관저 담을 넘어 마당에 진입한 뒤 ‘미군 지원금 5배 증액 요구 해리스는 이 땅을 떠나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펼쳐 들고 방위비 분담금 인상에 반대하는 시위가 그것이다. 이들이 넘은 담은 방관과 침묵으로 세워진 예속의 담이다. 이들이 세운 사다리는 금기와 침묵, 절망의 담을 넘은 용기의 사다리이고, 그들이 외친 구호는 가장 절박한 평화와 통일의 염원이다. 그들은 테러범이 아니다. 그들의 손에 살상의 흉기대신 평화의 구호만 있었다. 그들이 외친 것은 평화이자 자주이자 호혜평등의 인류적 민족적 요구다. 그럼으로 그들에 대한 구속은 자주와 민주와 평화에 대한 구속이 된다. 한국 대사관 담을 넘은 소위 탈북민들을 우리는 처벌하지 않는다. 지금 벌어지는 홍콩시위에 대해 그 과격 과도함을 한국 언론은 탓하지 않는다. 그들이 약자로서 고통스런 현실을 딛고 보다 인간적인 곳으로 지향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미 대사 해리스의 표현대로 그 집 고양이의 평화도 깨지 못한 평화적 항의를 두고 불구속 기소가 아니라 구속을 시키는 것이나, 무슨 배후를 캔다고 시민단체 등을 압수수색하는 것은 지나치다. 이것은 지긋지긋한 군사독재 시절 국가보안법적 인식과 그 폭력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청년 학생들은 항의한다. 1급 마약을 밀수 한 것보다 음주 운전 사고를 내고 운전자도 대체한 국회의원의 자식들보다 ‘주권침해, 혈세강탈’을 항의한 이 젊은이들이 어찌 더 큰 죄이란 말인가? 용기를 낸 학생들에 대한 처벌 구속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들이 희생을 감수하면서 표출한 예속과 굴욕에 대한 항의와 거부, 자주의식 자체다. 종미(從美) 아니면 공미(恐美)라는 우리의 부끄러움에 대한 자각이다. 우리 사회 죽비가 된 그들의 구속은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탓하는 또 다른 본말이 전도된 우리 사법 불의함의 증거다. 구속자를 석방하라. 불구속 재판으로 충분하지 않는가?

문재훈 소장
남부노동상담센터

[기고]역사적 정통성 또는 정체성

 

지난 12일 역사문제연구소와 역사학연구소, 한국역사연구회가 주최한 `국가 정통론의 동원과 ‘역사전쟁’의 함정’ 주제의 학술회의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보수, 개혁 모두 집권 세력이 과도하게 역사인식에 개입하려는 경향이 존재한다.” “‘선한 정치권력이라도 역사 오용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말을 고민해봐야 한다.”며 현 정부의 국가·민족주의적 역사 정책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역사적 사실과 다른 ‘임시정부 신성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다. 이것은 자칫 극우 반공주의자들의 1948년 건국설과 함께 “국가주의를 강화하는 역사전쟁”이 된다는 비판이다. 시쳇말로 ‘내로남불’하지 말자는 이야기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인들이 꼽는 존경하는 위인 1위가 백범 김구다. 상해 임시정부를 지킨 상징에 미국과 이승만의 남한의 단독 분단정권 수립 책동에 반대하여 남북 좌우를 합쳐 통일을 외친 그의 삶이 만든 힘이라 생각한다. 3.1운동 이후 민주공화국이라는 새로운 나라 건설의 상과 평화 통일에 대한 대한민국 국가 정체성을 온전히 보여주는 인물, 그러니깐 반공 반사회주의 분단광기를 넘는 거의 유일한 분단극복의 상징 위인이 백범이란 말이다. 
백범은 분단에는 ‘자주와 민주’도 없고, 대중은 기아에 빠지고, 가정은 이산하고, 동족은 상잔하며 심지어 세계의 평화도 없다고 갈파했다. 한반도에서 통일 독립 정부를 세우는 것은 세계평화의 초석이며, 세계평화를 우리 손으로 창조하는 영광이자, 인류의 행복이라 했다. 
실제로 친일친미의 힘으로 단선단정으로 분단을 획책한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역사적 전통성 차원에서 따지는 것은 항일무장투쟁과 김구를 포함해 좌우를 망라하고 분단반대와 통일을 외치며 수립된 북한과의 비교에서 역사적 양심을 저버리는 노릇이다. 우리 헌법에 국가 정통성의 근거를 3.1운동과 4.19로 두고 있지만 3.1의 반제자주정신과 4.19의 반독재 민주주의 정신이 2019년 대한민국 현실에서 제대로 구현되고 있는지 살펴보면 나는 저절로 얼굴이 창백해진다. 
남한의 현대사는 정통성이 아니라 정체성을 챙겨야 한다. 3.1의 반제자주정신은 미국 등과의 관계에서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지, 4.19 반독재민주정신은 독재와 민주의 역사를 제대로 가르고 기리고 있는지 살피는 것이 역사를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의 자세다. 그래서 나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48년 건국으로 보는 것을 반제 자주 독립의 역사도 거부하고, 반독재 민주화 정신도 목 졸라 죽이는 가장 치명적인 반역사적 행위로 본다. 무슨 역사해석의 다양성이 아니란 말이다. 분단과 독재와 부정부패, 그것에서 권세를 누리는 반칙과 특권세력의 차별에 맞서,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고, 여전히 대한민국이 채우지 못한 진정한 민주주의 자주와 통일을 만들어 가는 우리 민주 시민들, 노동자 민중들의 투쟁의 역사, 4.19, 6.3, 80년 광주, 87년 6월 항쟁과 789 노동자 대투쟁, 97~8년 날치기 총파업, 효순이 미선이 촛불항쟁, 광우병 촛불 그리고 탄핵촛불까지 불의의 적폐를 도려내고 불의정권을 교체하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한발 한발 전진시킨 역사가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과 정체성을 구현해 왔다고 믿는다. 48년 분단 정부수립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발전시킨 면에서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워야 한다는 말이다. 이 글을 쓰는 중에 들려오는 14년간 부당한 정리해고, 그 사법 농단에 맞선 콜텍 노동자 투쟁 승리 소식이 보여주는 ‘끝끝내 포기하지 않는 아래로 부터 약자들의 투쟁과 연대’가 대한민국 역사에서 자긍의 근거, 역사적 정체성의 고갱이라 믿는다.
문재훈 소장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위원회?! 


위원회는(Committee)는 수직 위계적 조직에 비교되는 수평화 된 조직을 통칭한다. 지시 명령 관철이 아니라 다수에 의한 합의결정이라는 점에서 관료적 경직에 치우치는 효율성의 세상에 다양성과 존중이라는 민주주의 제동장치로서 조직이다. 행정의 민주성과 조정력을 제고(提高)하고 전문가의 참여로 행정의 전문성을 더할 수 있는 분권적·참여적 조직이 위원회다. 주로 경제적·사회적 규제업무를 수행한다. 돈과 권력의 일방적 폭력 질주를 막는 수단으로, 유기적· () 또는 반()관료제적 조직이 위원회의 존재 이유다.

 

일전에 국가생명윤리위원회 민간위원 한양대 예방의학 신영전 교수는 위원직 사직서를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대통령소속 위원회인 국생위의 심의 의결 내용도 무시하고 향후 국생위를 우회하려는 전략 (이른바 한발 들여 밀기 기정사실화 전략)으로 국생위를 안전망이 아니라 적폐의 선한 가면, 들러리로 만들고 있다는 것에 항의하여 민간위원으로서 존엄을 걸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위원회의 본연의 본질을 뒤엎어 위원회를 관료와 권력들의 민주주의를 장식물로 삼고 있는 한국적 위원회 현실에 대한 폭로이자, 돈과 권력의 힘, 관료와 정치인들의 거수기로 삼는 것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러니깐 한국에서 위원회는 민주주의의 든든한 힘이 아니라 민심을 왜곡하고 적폐의 등뼈 역할을 한 한국 관료들의 민주주의 치장 가면이 되었다는 말이다. 최근 사회 정치적 논란의 중심에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있다. 돈과 권력은 언제나 자기 손에 피를 무치지 않고 앞잡이를 쓴다. 일본 놈들이 친일파를 육성하는 것처럼, 자본이 무노조를 하다가 노조가 만들어지면 어용화에 목숨을 거는 것처럼 말이다. 노동권의 부정을 유연 안정성이라 부르는 현 정권에서 상여금을 없애는 최저임금, 시간외 노동 수당을 없애는 탄력근로제 개악, 그리고 노동3권을 뿌리 채 뇌사시키기 위한 이 위원회의 위원장은 민주노총 금속노조 위원장이자 민주노동당 당 대표 출신 문성현이다. 자기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배신이자 치명적인 파괴 폭력임도 모르는 이 주구들은 정말 열심히 돈과 권력의 이해에 최선을 다한다. 세상에서 가장 흉측하게 무서운 존재 성실한 기회주의자로 말이다.

 

문성현은 청년 여성 비정규직 위원들(이들이 얼마나 온화한 친정부인사들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의 가냘픈 경고조차 외면하고, 위원회의 본 의미조차 배제하고, ‘합의는커녕 본 회의 통과라는 형식적 모양도 결여된 탄력근로제 합의(?)문을 국회로 보낸다며, “국회에서는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를 놓고 의제별위원회와 운영위원회 합의결과를 존중해 입법해달라고 요청했다. 이것은 비례대표제를 아예 없애자는 자유한국당 나경원의 말만큼 처참한 민주주의 파괴 부정의 망동(妄動)이다. 한국적 위원회가 국민 눈속임 수단임의 선언이다.

 

정부의 입장을 관철하는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정부의 곤혼스런 부분을 면피하게 해 준 이른바 숙의민주주의의 가면 원전 공론화위원회, 그리고 위원회의 반대에도 우회 관철한 국가생명윤리위원회까지 한국에서는 위원회가 관료들의 면피(免避)와 전문가들의 돈주머니 노릇을 하는 반()이 아닌 반() 관료조직이다. 사탄의 얼굴에 씌워진 인자한 가면이자 사탄의 손에 쥐어진 성경이 되고 만 한국적 위원회다.





문재훈 소장

남부노동상담센터


가엾어라! 고마워라! 눈물이어라!


이소선 어머니의 구수한 이야기를 듣다보면 편하게 웃다가도 나중에 가슴 한 쪽이 시큰한 경우가 많았다. 그 중에서 태일의 뜻을 잇다보니 태일이만 자식이냐는 어떤 소외감에 아픈 다른 자식들에게 소홀했다는 탄식도 있다. 전체 노동자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 실제 자식들의 현실이 붕괴되는 것, 그 붕괴된 고통을 대한 자식들의 비명 신음, 사람들의 눈초리와 시비, 아주 작은 혜택으로 쉼 없이 태일이의 길을 포기하라는 돈과 권력의 유혹... 그 속에서 자식이 산 세상 시간보다 두 배를 넘게 자식의 뜻으로 산 이소선 어머니의 가슴은 얼마나 까맣게 타 문드러지는 세월이었을까? 그리고 2019년 우리는 또 이제 또 한 분의 이소선 어머니를 만났다. 태안 서부화력 발전소에서 비정규직으로 일을 하다 목이 분리되고 몸이 바스러져 죽은 김용균 열사의 모친,김미숙 어머니다.      


두 어머니의 특징은 정말 자식을 사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사회가 강고하게 쳐둔 그물을 찢고 나섰다는 것이다. 열사는 시대의 어둠을 두드리는 자명종 소리다. 새벽을 알리는 닭울음소리다. 누군가의 아침을 깨워 세상의 아침을 열자고 제 몸을 역사로 직진시킨 분이고, 죽음으로 불의 부당한 세상을 바꾼 분이다. 하지만 모든 죽음이 열사의 죽음이 되기 어렵다. 태안 서부화력에서 몇 년간 12명이 죽어 나갔다. 하지만 우리는 11명의 죽음을 알지 못한다. 알 수 없었다. 돈과 권력이 쳐 둔 그물을 찢을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용균 열사는 다행히 노조가 있었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만났고, 무엇보다 자식의 죽음을 자식에 대한 진정한 사랑으로 견딘 유가족들, 특히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 상담을 하는 나는 상담을 온 분들에 대해 기본적인 느낌은 ‘고마움’이다. 우리 상담소까지 왔다는 것은 해볼 것 다 해보고도 아무것도 할 것이 없어 덮친 절망을 한 번 더 이기고 오신 분들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해고는 참 쉽다. 쉽고 흔한 해고를 법대로 하자고 하면 어려운 해고, 노동귀족, 진상 근로자(노동자가 아니다.)가 된다. 실제 해고 통보를 받은 이 중에 부당함에 구제신청을 하는 사람은 30% 미만이다. 구제신청을 하고도 외면을 받아 법원까지 가는 것은 그 30%의 30%도 안 된다. 10%도 안 되는 정말 억울하고 분한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법적 시비를 다툰다. 이것도 많다고 돈과 권력은 ‘경직된 노동시장, 귀족노조’라며 노동유연화라는 마귀의 주문을 외운다. 3% 소금물이 바다의 부패를 막 듯, 10%의 불의에 불평을 한 불편한 사람들이 자본의 탐욕 아래서 최소한의 사람됨을 지키는 힘이다. 이 힘을 만드는 사람들, 그러니깐 생의 한 용기를 낸 사람이 상담을 하러 오신 분이니 어찌 귀하고 고맙지 않겠는가? 한국인은 지배하는 생각은 참 많지만 그 중에 힘이 센 놈이 ‘비겁하게 살라’는 기괴한 사랑이다. 모난 돌이 정 맞으니 용기를 내면 너만 다치고 그도 모자라 온 가족이 피해를 받는다는 공포가 만든 것이, 사랑인 곳이 대한민국이다. 그와 함께 따라 붙는 것이 ‘목구멍이 포도청, 산 사람이라도 살자’는 지독한 현실주의다. 비겁한 사랑과 현실주의가 붙어 버리면 도대체 그 앞에서 남아나는 고귀한 것이 없다. 대의 의리 원칙 그 모든 인간적 존엄들은 그저 생존의 사치일 뿐이다. 그래서 삼성자본은 노조를 따돌리고 유가족을 꼬여 돈으로 열사의 죽음을 화장하고 시치미를 뗀다. 유가족들은 가장 슬퍼 예민한 사람들이다. 노조나 주변 동료가 죽은 이의 동지가 아니라 죽음으로 가는 용기를 만든 나쁜 이들로 원망이 앞서고, 죽음의 사회적 확장에 엄두를 못 내다가 경찰과 자본의 ‘산 사람이라도 살아라.’는 속삭임에 아주 쉽게 용기를 포기한다. 그래서 실은 열사의 죽음을 둘러 싼 투쟁은 끔찍하게 힘들다. 이 힘듦을 견딘 김용균과 그 동료 동지들, 공공운수 노조나 연대 노동사회 단체들 정말 하나하나 우리사회 속에서 고맙고 고마운 존재들이다. 


이소선어머니와 김미숙 어머니의 공통점은 자식에 대한 사람을 자식의 염원 속에서 발견했다는 점이다. 태일이가 ‘내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할 때, 헛되이 하지 않는 것이 이 깜깜한 세상에서 불빛 하나를 만들 바늘구멍 하나 뚫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 말과 약속을 생을 통해 실현한 이소선 어머니의 사랑은 태일에 대한 절박한 존중이다. 김미숙 어머니는 비정규직의 비참을 중단시키기 위해 재벌만 만나는 대통령에게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직접 만나달라는 유언이 된 한 장의 사진에서 용균이의 염원을 봤다. 그 마음으로 여전히 죽음의 조건을 그대로 유지 한 채 돌아가고 있는 죽음의 현장을 보자마자 용균이의 친구들을 죽음에서 구출하는 것이 바로 용균이의 뜻이자 용균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임을 아셨을 것이다. 자식을 가족의 울타리에 가두지 않은 용기, 그래서 돈 몇 푼에 자식의 뜻과 자식의 생이 만들 존엄을 포기하지 않는 곳에서 자식에 대한 사랑을 세운 분이라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다. 어머니는 광화문 장례식에서 “꽃다운 아까운 청춘 가엾어라 내 아들아!” 불렀다. 저 가엾음이 저 애끓는 연민이 바로 우리 사회 어둡고 춥고 약하고 아픈 이들을 향한 가없는 사랑의 뿌리다. 고마워라! 나이 어린 우리들의 어머니, 그 사랑의 슬픈 용기여! 그 날 그 자리에 하늘은 한 없이 푸르렀지만 눈물은 그 푸름마저 다 지워버렸다. 아직 우리가 갈 길은 여전히 눈물길이라고... 


문재훈 소장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정리해고에 맞선 콜트콜텍 해고자들의 12년 투쟁





콜트와 콜텍은 박영호라는 자본가 가족의 절대 지배 속에 있는 기타를 만드는 회사다. 인천의 콜트에 노조가 생기자 대전에 무노조 공장 콜텍을 만든다. 그런데 콜텍에도 노조가 생기자 아예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면서 정리해고를 한다. 노동자들이 부당한 해고에 맞서 투쟁에 나선 지 4300일 넘었다. 2007년 초부터 지금까지 만 12년의 세월이다. 대표적인 장기투쟁사업장이자 부당한 해고에 더해 박근혜와 양승태의 부패한 사법거래/사법농단의 희생양임이 드러난 사건이다. 그 노동자들이 얼마 남지 않은 정년 전에 일터로 돌아가자는 마지막 투쟁을 하고 있다. 행진을 시작하면서 이인근 콜텍지회장은 말한다. “제 기억 속에서 2007년 4월9일 그날이 잊히지 않습니다. 그날도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서 공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정리해고의 길인 줄은 회사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억울함을 법 앞에 호소했지만, 법마저 억울한 노동자의 아픈 마음을 보듬기는커녕, 상고법원 설치를 위한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고통분담이라는 미명 하에 도입된 정리해고 제도가 이윤의 도구가 되어 수많은 노동자들을 길거리에 나앉게 하고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가정이 파탄 났고, 해고자의 삶 또한 파탄 났습니다. 정리해고제도를 폐지시켜야 합니다.”

정리해고제는 기업이 긴박한 위기에 빠질 때 불가피하게 진행되는 인원감축을 법적으로 강하게 제한해야 한다는 취지로 논의가 시작됐다. 기업의 임의적인 잣대와 자의적 해고는 노동자들의 생계를 직접 파탄 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들어진 법은 노동자를 보호한다는 취지는 사라지고 자본가들이 노동자에게 휘둘러대는 (사회적)살인의 흉기, 망나니 칼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해고에 대해 ‘오죽하면 자르겠나’, 투쟁을 포기하지 않으면 ‘회사가 거기만 있냐’며 비튼다. 문제는 살인의 흉기가 여전히 살인자의 손에 있다는 것, 그것을 고발하고 흉기를 제거하지 않으면 살인은 지속될 것이라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 참고 굴종하다 자발적 노예가 되고, 같은 노동자들에게 서로가 서로에게 사탄이 된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 만든 헬조선에 굴복하라는 노예들의 주문이다. 투쟁을 결심하고 저항에 나선 노동자들은 단지 자기만의 생존이 아니라 우리 사회 불의 적폐와의 투쟁에 나선 이들이다. 미래는 좀 달라야 한다는 희망을 향한 가장 큰 노동이자 절박한 노동이다. 

“고용의 여력이 있어도 그들 (5명)을 고용할 수 없다. 그들은 합리적인 노조가 아니다.” 목동 굴뚝 농성을 하고 있는 스타플렉스 사측의 말이다. 어용노조가 아니기에 고용할 수 없다는 것은 노조에 대한 극단의 혐오다.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혐오하는 반 헌법주의가 한국 경영자들의 상식이라는 것이 문제다. 콜트콜텍의 정리해고도 본질은 노조에 대한 혐오다. 혐오를 감추기 위한 내세운 사유는 ‘장래에 올 경영상의 위기’. 고법에서 터무니없다했지만 양승태와 대법원관들은 ‘박근혜 정책 보위와 상고 재판소 설립이라는 실적’을 위해 뒤집었다. 

노동자 계급은 투쟁을 통해 민주공화국을 만들어 왔다. 대표적인 역사적 예가 ‘보통 자유선거’제다. 보통선거 쟁취는 실제 자본주의와 자본가들의 민주주의와 무관하다. 귀족 성직자 돈 많은 남자들의 특권 민주주의를 모든 이들의 민주주의로 만든 것은 가난한 노동자들과 소외된 여성들의 주체적 투쟁이 만든 결과다. 마찬가지로 모든 노동권에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생명을 바쳐 만든 피의 역사가 담겨 있다. 노동권은 크게 보아 ‘해고에 대한 제한’과 ‘노동시간 줄임’ 투쟁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임노동은 노동자들의 생명 줄이다. 맘대로 잘리지 않을 권리와 24시간이라는 고정된 시간 속에 남에게 팔려 소외되고 억제당한 시간을 줄여 자유롭고 인간다운 시간을 확보하여 존엄하여 행복하게 살 권리투쟁이다. 그 결과 우리는 노동자가 잘못이 없는데 자르는 것은 범죄로 부당하다는 기본권을 쟁취했다. 그런데 정리해고는 잘못 없어도 회사가 긴박한 위기라면 목을 잘라도 된다는 법이다. 노동자들에게 100년 이상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발전 시간을 박탈한 것이다. 

그런데 콜트콜텍에서 정리해고의 모든 전제인 ‘긴박한 위기’마저 없애 버렸다. 노동법 없는 시간으로 돌아 간 것이다. 노동자들에겐 어떤 권리도 인정할 수 없다는 노예화 선언이다. 100년도 아닌 200년이 넘는 노동자 민중의 민주와 인권투쟁의 시간을 도려내는 폭거다. 더 큰 문제는 폭거의 주역이 돈과 권력과 그리고 국가 제도의 야합을 상징하는 대법원의 타락이라는 점이다. ‘민주공화국’이라는 정치적 사회적 공간이 붕괴된 것이다. 나라가 몇몇 권력자와 자본을 위해 사유화된 것이니 헌법에 대한 가장 지독한 모독이다. 

그러니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정리해고의 고통은 개인의 해고의 고통을 넘어 우리 사회에서 자행된 민주주의와 인권의 지워진 시간의 고통이며 민주공화국이라는 공간을 파괴당한 고통이다. 그러니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정리해고의 13년의 투쟁은 마치 댐의 붕괴를 막았다는 네덜란드 소년의 팔뚝이 되어 우리 사회 역사를 버틴 고난의 길이었다. 이 아름다운 사람들의 시간과 삶을 우리 사회는 얼마나 존중할까? 풍수지탄(風樹之嘆)이라는 것이 왜 개별적 혈육만의 문제인가? 우리 사회는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운명 속에서 사회적 역사적 풍수지탄(風樹之嘆)을 얼마나 많이 했던가? 역사적으로 준법자는 친일파였고 불법자는 독립투사였다. 준법을 자랑하며 법적 책임이 없다는 자본가들의 모습이야 말로 법이 가진 자들의 무기가 되어 버렸음만 다시 확인한다. 이제 그만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에게 인간의 존엄이 보장되는 일자리를 부여하자. 얼마 남지 않는 정년만은 평생직장인 공장에서 맞겠다는 저 어처구니없이 착한 주장마저 외면하면 정말 사람 사는 세상이라 할 수 있겠는가?


문재훈 소장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불만의 겨울이 왔다. 



'불만의 겨울(The Winter of Discontent)'이 왔다. 

원래 '불만의 겨울'은 1978~79년 겨울, 영국에서 노동당이 집권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민과 중산층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 상황에서 공공 부문 노조가 광범위한 파업을 벌인 사건을 말한다. 그 귀결은 노동당 정권의 몰락과 대처의 집권이었다. 대처는 집권 후 무엇보다 먼저 노동운동을 무력화 시켰다. 기업의 이윤이 경제의 전부인 그들에게 저항하는 노동조합은 시장의 원활한 작동과 이에 따른 경제회복을 가로막는 사회악일 뿐이었다. 1978년 가을~1979년 겨울, 당시 집권당인 노동당의 소득정책(임금인상률 5% 제한)에 항의하는 파업으로 쓰레기가 거리에 쌓이는 등 도시 기능이 마비되면서 그 책임을 노조에게 돌리는 여론이 득세했다. 이명박근혜시절 ‘종북’이란 말이 죽음의 낙인이었듯이 노조를 비방하고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것은 지지율을 올리는 특효약이었다. 이런 역사적인 사례를 통해 사람들은 노동당 정권에 대한 노동조합의 지나친 요구가 대처정권을 불렀다며 투쟁의 자제를 말한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의 요구는 지나칠 수가 없다. 회사의 조건 자본의 조건에 의해 요구가 결정되고, 사회적 평균이라는 기준에 이해가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동조합의 투쟁은 개악을 막거나 정리해고를 반대하거나 임금인상 제약을 거부하는 수준이다. 당시 노동당 정권은 경제적 혼란을 자본주의 구조적 위기로 보고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적 복지로 풀고, 케인즈 주의 정책 기조를 포기하는 것으로, 결국 시장 만능주의에 굴복하는 것으로 나갔다. 자본의 위기를 노동의 고통을 돌리는 정책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에 대한 저항은 치열했으나 저항의 메시지에 귀를 막은 노동당 정권은 노동자 민중을 향한 눈길을 자본과의 영합으로 돌렸다. 하지만 알아야 한다. 노무현 정권의 친(親)삼성 몸부림에도 기득권에 버림을 받았듯이 이른바 우선회(右旋回)는 재앙을 부를 뿐이다. 


보수 반동적인 대처 정권이 들어 선 이후 대처는 노동조합을 철저하게 분쇄했다. 노동조합에 유리한 조직형태인 클로즈드숍(기업이 조합원만 고용할 수 있는 제도)을 법률적으로 파괴했다. 노조의 모든 쟁의는 반드시 조합원의 투표를 거치도록 법제화 했는데 그 투표용지엔 “파업에 참여하면 고용계약을 위반할 수 있다”는 경고문을 반드시 넣어야 했다. “담배는 당신의 건강을 해칩니다”는 경고 문구와 비슷한 발상이다. 노조와 노조 쟁의를 어떻게 보는지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조합원에 대한 노조의 파업 불참 징계 권한을 불법화했고, 법정최저임금제도를 폐지했다. 노동당의 무능의 결과를 노동에 대한 공격과 배제의 결과는 집권 상실이기도 하지만 인간 사회 전체가 ‘신자유주의’라는 서로에게 야수 악귀가 되는 헬 세상의 시작이었다. 

수치와 통계가 민중들의 삶을 보여주기는커녕 외려 왜곡 악화시키는 돈과 권력의 흉기라는 것은 이미 기초상식이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이 수치의 마법아래 속고 속는다. 그 모습이 조삼모사를 당하는 원숭이와 같고 결과가 조삼모사의 원숭이만도 못하다는 자괴감을 가져온다. 문재인 정권이 만난 경제에서 수치의 수렁은 소득주도의 경제 정책에서 온 것이 아니다. 소득주도의 경제정책이라는 말조차 수용할 수 없는 한국 재벌의 기득권이 만든 것이다. 빈부격차가 죽음을 부를 정도라 유지조차 불가능한 조건에서 나온 자본을 위한 응급조치, 시장만능주의를 케인즈 주의적 관점으로 보완한 정도가 ‘소득주도형 경제정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자본 태업이다. 그 상징이 사내보유금이다. 논란이 많지만 결국 분배되지 않는 구조를 보여주는 사내 보유금이 이른바 개혁 정책에도 줄기는커녕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버렸다. 자본은 눈에 보이지 않는 투자 태업, 자본 식 파업을 통해 수치상의 경제를 강제했고 조중동식 과장과 엄살이 불을 지르면서 마귀가 도래한 것인 양 공포로 세상을 도색한 것이다. 그 결과 통계와 수치가 아니라 실질적인 민생을 보호하자는 문재인식 공약을 완벽하게 무력화 된다. 2018년의 한국의 내적 상황의 결론이다. 


그러니 한국식 불만의 겨울은 영국처럼 이른바 복지가 지나친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미흡한 개혁이 구조적 반동 적폐 세력들에게 잡혀 먹힌 결과로 오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선한 표정으로 웃고 있을 때 구이 역에서 김군이, 제주도에서 실습 학생 노동자가 죽어 나갔다. 태안에서 김용균이 죽을 때 까지 “태안화력발전소는 정부로부터 무재해 사업장 인증을 받고 5년간 산재보험료 22억여 원을 감면받았다. 정규직 직원들에게도 무재해 포상금을 지급했다.”는 보도처럼 안정하고 깨끗한 사업장으로 보고되어 있었을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피땀 흘리다 죽은 시체 위에서 잔치를 벌이는 것이 노동존중 세상의 실체였다. 물론 문재인 대통령도 김용균 사망사건을 언급하며 “공공 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특히 위험·안전 분야의 외주화 방지를 위해 더욱 노력해주기 바란다”라고 했다. 하지만 이 말에 여전히 산업재해 직접 책임자와 지휘계통의 책임자에 대한 처벌이 빠졌다. 더 나아가 죽음의 진정한 원인이 위험의 외주화가 아니라 외주화 자체, 즉 비정규직화에 있음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사건에 대한 책임도 죽음을 막는 진정한 대책도 빠져 있다. 하나라도 제대로 하라. 그 하나는 무엇보다 사람의 생명에 집중되어야 한다. 노동 존중이 아니라 노동의 존엄에 인간의 존엄에 맞춰져야 한다. 우리는 대처가 죽었을 때 ‘사탄이 죽었다.’며 춤을 추며 축제를 벌인 런던 시민들의 슬픔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 부엉이 바위에 선 비극을 보고 싶지 않다.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 촛불의 꽁무니에 섰던 그 위치, 자신들의 견해보다 두발 세발 앞섰던 거리의 촛불, 광장의 촛불에 겸손해야 한다. 문재인 정권이 가는 길은 틀렸다. 그 틀림이 불만의 겨울을 만들고 있다.



문재훈 소장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광주형 일자리’의 속내



이 글을 마무리하는데 충난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24살 젊은 비정규 청년노동자의 소름끼치는 죽음의 소식이 들린다. 민영화되고 분사화 되고 비정규직이 되다가 하청 용역에 그도 모자라 하청의 1년 계약직으로 들어간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의 일자리는 그 단계마다 목과 몸이 분리되는 죽음으로 직진하는 길이었다. 자본의 이윤은 결국 인간의 피땀이고 죽음의 대가다.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완화라는 말이 만든, 이 자본만 화려한 사람들의 ‘생지옥’을 언제까지, 어떻게 견뎌야 하는 것인지... 사는 것이 너무 욕되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현대자동차노조는 우리시대의 주홍글씨 낙인인가보다. 원래 그러려니 하는 역사와 시대의 반동·반공·쓰레기 언론들의 호들갑은 그렇다 쳐도 이제 진보 개혁을 표방하는 ‘한겨레·경향신문’의 사설에서조차 지탄의 대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 대표적인 주제가 이른바 광주형 일자리 창출이다. 광주형 일자리 공장을 정부는 ‘적정임금·적정노동시간·노사책임경영 및 원·하청 관계개선을 위해 공적자원과 민간투자가 결합된 새로운 일자리로, 지역경제 활성화, 일자리 상향균등화를 이루어 해외이전 공장의 국내 복귀를 가져올 것’이라 자찬한다. 그리고 모든 언론들이 이를 고무·찬양하며 반대하면 대역죄라도 지은 것인 양 몰아 부친다. 과연 그럴까?


 광주형 일자리라는 것을 한마디로 줄이면 새로운 ‘현대차 공장을 광주에 짓자’는 것이다. 값싼 인건비를 위해 해외로 나가는 대신 현대 자본에게 그 만큼의 대가 즉, 이윤 손실을 세금과 노동자의 피땀으로 채워주자는 것이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들기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꾸며진 것이 광주시 ‘노사민정’ 테이블이다. 그런데 그곳에는 이상하게도 현대자동차 공장의 직접 당사자인 민주노총 금속노조 현대차 노조는 없다. 현대자동차와 직접 상관이 없는 어용노조의 집결체 한국노총이 ‘노(勞)’의 대표가 되어 있다. 을사년의 한일 늑약도 서러운데 그 주체가 조선도 아니고 ‘미국과 일본’인 꼴이다. 그런데 한국노총조차 노사민정 테이블을 거부했다. 이유를 들여다보니 현대차 재벌의 투자의향서 내용이 기막혀서다. ‘임금·단체협약 협상을 5년간 유예’, ‘기본급과 제수당, 시간외수당까지 포함해 연봉 3000만 원’, ‘근로시간 주 44시간 보장’... 광주시는 현대차 자본의 1차 투자제시안을 공개도 못했다.  


현대자동차 투자 안은 노사단체협약의 최장 유효기간을 2년으로 제한하는 현행 노동조합법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 광주형 일자리가 2021년 이후 적용되는 조건이라면 내년 최저임금 연봉 기본급이 2094만 원이니 현대재벌의 요구대로 물가인상률의 평균치로 최저임금이 인상되어도 이미 최저임금 보다 못한 금액이 된다. 게다가 이를 또 5년 간 유예한다면 광주형 일자리라는 것이 최저임금에 한참 밑도는 일자리가 될 수밖에 없다. 도대체 어디서 일자리 ‘상향’ 균등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현대차는 노동시간을 ‘주44시간’이라 했다는데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최저임금법에 노동 3권을 보장한 헌법을 부정하고 만든 일자리가 광주형 일자리다.  


현대 화물차 노동자들에게 빚더미를 안겨주는 것은 이른바 ‘지입차주제’다. 지입차주제는 운전기사가 운전 차량을 자기 것으로 마련하는 것이다. 버스기사에게 버스를 사와야 버스기사로 일을 하게 한다는 격이다. 그것이 이제는 화물차 회사가 운전기사들에게 차량을 ‘대여’해 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원래 노동의 3요소인 노동대상, 노동수단, 노동력 중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은 자본이 고정 투자로 제공하고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 밖에 없는 노동자들은 노동력만 제공하는 것이 정상적인 자본주의지만 언제부터인가 자본의 기본의무인 노동수단조차 노동자들이 빚으로, 피땀으로 제공해야 하는 ‘기업하기 좋은 세상’이 되어 있다. 당시 이런 심각한 사기(詐欺)의 명분이 무엇이었을까? 동일한 일을 ‘노동자가 아니라 사장님’으로 일하라는 것이었다. 


광주형 일자리 이전에도 기업하기 좋은 나라는 차고 넘쳤지만 대부분이 그것은 값싼 공장부지 제공이나 세금을 깎아 주거나 면제하는 것이었다. 사실 광주형 일자리가 처음이 아니다. 동희오토 공장이 있다. 기아자동차 서산공장은 모든 것이 기아 차의 소유지만 그 공장 이름은 동희오토이고, 그 안은 기아자동차 차를 만들지만 기아자동차 원청 정규직 하나 없는 비정규직 공장이다. 그래도 기아차는 부지, 시설, 기계 등에 대한 투자를 했다. 그런데 광주형 일자리는 아예 세금까지 퍼부어 현대차 부담을 광주시가 대신 지겠다고 나선 것이다. 광주시가 현대차 공장을 돈까지 바치면서 하청공장, 비정규직 공장을 만들고 있는 것이 진실이다. 노사민정이 합의한 것이 정말 적정임금, 적정노동시간일까? 2018년 8월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 임금은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50.7%다. 반값임금과 장시간 노동은 비정규직 차별의 상징인데 광주형 일자리의 전제가 국내 완성차 공장 임금의 딱 절반이다. 대신에 정부와 지자체가 각종 복지 제도를 보충해준다는 것인데 기업이 사회적 책임이자 도덕적 의무로 가져야 할 최소한의 복지비용조차 세금으로 충당한다는 황당한 발상이다. 현대자동차 한 재벌의 공장을 위해 나라를 바치고 노동자를 쥐어짠다는 말이다. 그래서 만든 것이 적정 임금이고 노동시간인데 실상은 ‘적정’이란 말 앞에 자본이 원하는 ‘착취’라는 말을 뺀 것이다. 노동자들을 위한 적정임금이 아니라 자본의 탐욕을 향한 착취의 적정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광주형 일자리에 열광하는 그대들이여, 그대들이 이른바 신자유주의 ‘기업 파시즘의 광신도’다.



문재훈 소장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진짜 소통을 위해 비정규노동자의 말을 들어라 



요즘 언론을 보면 민주노총이 공공의 적이다. 민주노총에 대한 적개심이 얼마나 강한지 똥오줌 가리지 않고 정부의 딴죽만 걸던 자한당비대위원장 김병준 조차 "대한민국이 민주노총의 나라가 되고 있다. 난장판을 만들고 있다. 민주노총과 단호히 결별하고 국민과 함께 개혁을 이루겠다는 대통령의 용기 있는 결단을 하면 어떠한 정치적 의도를 품지 않고 민주당보다도 오히려 더 강력한 우군이 되어 드릴 것"이라 공언한다. 민주노총 전위원장이자 진보정치를 대변한다는 정의당 김영훈, 국내 진보학자의 자존심 교수 김동춘, 진보언론이라는 한겨레 경향까지 민주노총만 사라지면 대한민국이 갑자기 천국이라도 될 기세다. 

왜 이 난린가? 그것은 협치, 숙의 민주주의를 한다는 이른바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 민주노총이 조합원들의 동의를 얻지 못해 불참한 탓이다. 내용을 보니 노동자에게 “탄력근로제 개악”과 “광주형 일자리”를 강제하려는 것이다. 탄력근로제는 특정 기간(3~6개월) 주 80시간을 일을 해도 시간외 수당을 지급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성수기 비수기가 있고, 신상품 발매, 밀어내기 수출 등 특정한 시기에 일과 이윤이 몰리는 기간을 장시간 값싸게 부려먹겠다는 말이다. 이것은 대부분은 IT 전자전기 통신 자본의 이익을 채워준다. 광주형 일자리는 현재 비정규직보다 임금 노동조건이 낮은 정규직 일자리로 현대 차 광주 공장을 짓겠다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삼성, 엘지, SK, KT와 현대-기아차 자본의 이익, 결국 재벌을 위해 노동자들을 과로사 시키자는 의도다. 

김병준이 난장판이라 부른 행위는 빈곤과 차별과 고통의 당사자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죽음에 죽음을 더하는 사기 대화가 아니라 진짜 대화를 하자는 몸부림이었다. 노동자들은 오래전부터 진짜 사장과 진짜 대화를 원했다. 권리와 의무를 일치시키자는 아주 상식적인 요구다. 하지만 진짜 악당은 뒤에 숨고 조무래기만 설치는 조폭처럼, 인신매매 포주인 파견업체 사장, 하청 사장 급조된 자회사라는 ‘바지’들만 설쳤다. 진짜 책임자와 진짜 아픈 자들이 직접 만나, 진정한 문제해결을 하자는 노동자들의 절박함은 가진 자들에겐 그저 ‘난장판’이다.

다른 한편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대통령의 직접 면담 대화를 요구하는 것은 문재인 정권에 대한 충고다. 지난 1년, 우리는 민생적폐 청산의 골든타임을 잃었다. 외려 현 정부는 본격적으로 가진 자들의 이익에 근거한 길을 가기 시작했다. 이런 갈림의 시기에 비정규 노동자들은 대통령과의 직접 면담을 통해 ‘온 길에 대한 평가와 갈 길에 대한 민의 소리’를 알리려 했다. 경제가 어려운 진정한 이유, 우리 사회 생활적폐의 진정한 걸림돌에 대해 말이다. 경영자들이 지나친 규제와 민생 우선 정책, 강성 노조의 존재로 투자의욕을 잃어 경제가 어렵다는 거짓을 근본에서 타파하자는 것이다. 김대중~문재인까지 20년을 넘게 없애고 풀고 혁신했다는 규제라는 것이 사실은 이윤과 탐욕에 쓰러진 안전 보건 복지이자 사람에 대한 존중이었을 뿐이다. 작금의 경제위기가 노동자 민중의 눈에는 대부분이 경제적 적폐청산을 거부하고 복지적 제도 정책을 파탄시키려는 ‘자본의 사보타지, 파업’에 의한 허풍이다. 그 결과 1987년 6월 항쟁, 789노동자 대투쟁, 1997년 총파업에서 재작년 촛불항쟁까지 한국 민중의 민주주의는 ‘잠시 이기고 길게 지며 적폐들의 변태와 잔존과 부활을 보는 피눈물 나는 좌절과 허무의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음을 경고하려 했다. 경제위기라 불리는 지금의 모습이 한국사회 적폐 기득권들의 은밀하면서도 총체적인 반동 쿠데타이자 저들이 짠 ‘물구나무 선 촛불반란’임을 알리려는 것이다. 

민주노총 집회라고 조중동 등이 난리를 쳤지만 국회 법원 검찰 청와대로 이어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행진은 이미 민주노총을 넘어서 있다. 그들은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를 부르며 끝내 어린 여성 노동자 옆에 선 오늘날의 전태일이다. 한국의 정치 학계 언론들이 가진 자들의 이익을 위해 대화니 소통이니 민주주의를 팔 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청와대로 가면서도 손에 수능을 치른 학생들에게 나눠 줄 갑질 예방 노동수첩을 들고 있었다.(사진) 헬 조선에 빠진 지금 젊은이들이 전태일의 어린 누이다. 촛불이 피어난 곳, 촛불의 처음이자 끝이어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4박5일의 노숙 면담 요구 투쟁은 촛불 민주주의가 현 정권에 보내는 마지막 충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문재인 정권과 더불어 민주당은 적폐의 품에 안겨 민주와 인권의 무덤을 파는 길을 멈추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말에 가슴을 열어야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대화 소통하는 길이 촛불의 길이다.



문재훈 소장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새는 좌우 날개로 난다는데...


더불어 민주당만 신나는 잔치가 된 선거가 끝났다. 선거결과를 요약한다면 ‘수구 반동 폭망, 중도 보수 대박, 진보 변혁 깜깜’ 정도 되겠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선출제도인 선거를 ‘귀족제도’라 했다. 선거 결과가 항상, 귀족적 힘을 가진 존재들의 잔치이기 때문이다. 돈 많은 부자들, 정치적 유력 인물들, 아주 유명하고 인기가 많아 돈과 권력에게 쓰임새가 요긴한 인물들의 승리만 있는 뻔 한 경주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혁명의 결과지 타협의 결과가 아니다. 민주공화라는 정치 체제는 노예적 질서, 봉건적 체제에 대한 노동자 민중들의 ‘신민(臣民)에서 시민(市民)’ 혁명적 각성의 과정, 지배자들의 목을 매달고 자른 단두대의 시간을 거쳐 왔다. 민주주의는 신분, 종교가 만든 세습되는 특권과 부정부패한 반칙들에 대한 민중들의 역사적 승리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서구의 정치에서 보듯 신분과 종교를 대신한 ‘돈’이라는 우상이 그 과정과 형식을 지배하면서 다시 한 번 정치를 기득권의 전유물로 전락했다. 그래서 선거는 민주주의 유일물이거나 유일 형식이 아니다. 외려 선거는 ‘면피와 은폐의 기능’이 강력해 가장 유능한 지배계급의 권력 유지의 절차다. 선거가 흔히 조직과 바람의 대결이라 하지만 바람조차도 지극히 조직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이른바 국정원 댓글과 드루킹 소동에서 확인한다. 치장이 아닌 진짜 민주주의를 위해서 이번 선거 결과보다 광화문 광장의 촛불로 태운 시간이 더 소중한 이유다. 

    

한국에서 선거는 4.19를 만들었지만 유신독재의 성립 수단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선거는 양날의 칼이다. 돌아보면 노동자 민중의 거대한 저항이 세상을 흔들었지만 선거를 통해 세상은 다시 옛날로 퇴행한 다람쥐 쳇바퀴가 우리 현대사이기도 하다. 장면 정부 직전에 4.19, 양김시대를 만든 1987년 시민항쟁 노동자 항쟁, 김대중 정부 직전의 날치기 총파업, 노무현 정권 직전의 미군 장갑차에 학살된 여중생 죽음으로 만든 촛불 항쟁, 그리고 이번에 탄핵 촛불항거까지 낡고 부패한 불의의 지배 권력을 붕괴시킨 것은 노동자 민중이었지만 그 성과물은 선거를 통해 기득권을 양분한 보수 야당세력의 몫이었다. 죽 쒀 개주는 시간은 변하지 않았다.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의 승리는 과거와의 투쟁에서 현재의 승리다. 과거에게 뺏긴 현실의 10년을 그 적폐의 세상을, 극단의 세계를 보수라 부르는 것은 반(反)상식이다. 수구, 반동, 전제의 시간은 보수가 아니라 파시즘적 반동이다. 그럼으로 민주당의 승리는 수구에 대한 ‘합리, 상식’적 보수, 기껏 잘해야 흔히 말하는 ‘중도 보수’의 승리다. 민주당을 진보라 부르는 것은 수구세력이 자기를 보수라 주장하는 것만큼 정치적이다. 하지만 박근혜를 보수라는 부르는 것이 민망한 만큼 민주당을 진보라 부르는 것은 혼란하고 뒤틀린 개념이다. 예를 들면 탄핵의 역풍으로 총선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한 노무현 정권이 진보의 최소의 전제, 아니 자유주의적 보수의 최소한의 자부심인 정치사상의 자유를 거부하는 국가보안법을 철폐하지 못한 이유가 당시 자유 한국당의 전신 한나라당의 반대가 아니라 실은 노무현 정권시기 민주당 안에서 조차 국보법 찬성 의원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문재인이 보여주는 일관적인 안보관은 전형적인 ‘보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니 민주당을 진보라 하는 것은 유신 독재와 친일 잔재를 민주와 독립운동 세력이라 말하는 것처럼 터무니없다.


망한 보수를 되살리기 위해 국민을 바보로 여기는 변신 쇼가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데 오른쪽 날개만 단 기형 새가 이승만 정권이다.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운 것이 있다면 분단정부 수립 자체가 아니다. 서구인들의 눈으로 불가능해 보였던 민주주의,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라는 민주주의를 만들어 온 역사를 살았기 때문이다. 분단과 독재와 독점과 부정부패와 반칙으로 이어진 오욕의 역사, 참담한 역사 속에서 근대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위대하다. 1987년 대투쟁으로 만들어진 현행 헌법이 헌법 정신을 반제 자주 3.1운동과 반독재 민주 4.19에서 찾는 것은 그것만이 자랑스러운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본질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문재인 정권의 수립은 70년간의 오도된 ‘오른쪽 날개’의 정립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형성했지만 상처지고 오염된 우익을 치유하고 재활하는 과정이고 지난 대선과 이번 선거라 할 만하다. 한국정치에서 제대로 된 진보 보수 정치의 정립을 위해서라도 자유한국당류의 수구 반동의 부활이 아니라  진정한 보수정치의 역사와 맥이 세워져야 한다. 문재인 정권을 축으로 민주공화국을 만들고 지켜온 그들의 역사를 정립하는 것이다. 상해임정과 김구와 4.19를 계승하고 5.16에 저항하며 유신 독재에 총구를 겨눈 김재규를 품고 양김과 노무현과 문재인으로 이어지는 자기들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이 남한에서 보수정치의 정상적인 구축이다. 


우익, 오른편의 날개가 지나치게 과잉되어 날개를 몸통으로 여기는 몽매가 판을 치는 한국의 정치현실에서 좌익, 왼편의 날개는 돋다 만 존재다. 진정한 좌익이 형성될 최소한의 전제를 부정하는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조건에서 ‘진보’라는 말 자체가 눈물겨운 사투였다. 그 사투를 감당한 것은 조봉암의 진보당 이후 민주노동당 이었지만 수구의 득세가 보수라는 말을 오염시키자 진보라는 말을 자유주의적 보수 세력이 탁란(托卵)을 통해 진보완장을 차고 있다. 박근혜가 진보의 겉, 붉은 색을 날치기 하자 민주당과 그 주변은 아예 진보의 속살을 가로 챈 꼴이다. 그러니 여전히 한국은 좌익이 없이 나는 불완전하고 불안한 외날개 새라는 것이다. 좌우익을 갖춘 정상적인 새가 되기 위해 시민들의 과거 적폐에 대한 적대의 눈과 함께 미래를 새롭게 여는 눈도 떠야 한다. 민중당 후보와 전혀 새로운 정치를 말하는 무소속 젊은 후보가 낙선하는 것을 보며 과거를 보되 미래를 보지 목하는 맹목의 정치, 남한 정치의 본질적 적폐가 그대로 살아 있음을 본다. 절반의 승리를 완전한 승리로 만들기 위해 노동자 민중들의 민주적 진보적 지혜가 더욱 필요한 이유다. 한국 정치에 왼쪽 날개를 만드는 선거제도와 정치를 위해 과거를 보는 눈과 더불어 미래를 보는 눈도 뜨자.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기고]똥 씌운 비단 보자기가 되려는 사법부(司法府)


대법원에 절망한지는 참 오래됐다. 1,2심을 뒤집어 부당하게 해고된 KTX 여승무원들에게 복직대신 빛 1억과 동료의 죽음을 선사한 것이 시작이었다. “통상임금 소송에서는 ‘신의칙’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해괴한 말로 노동자의 정당한 임금청구권을 제약했을 때, 콜트 콜텍 정리해고 사건에서는 장래 경영상 위기에 미리 대비하기 위한 정리해고도 정당하다고 했을 때, 쌍용차 정리해고 사건에서는 고등법원이 회사의 회계조작 사실을 추가 증거 없이 결과를 뒤집어 버렸을 때 내 마음속에서 대법원은 헬 조선의 막장의 위치에서 고사하고 있었다.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효력 집행정지 사건에서 노동부의 재항고를 받아들이면서 ‘청와대, 대법원 양측에 모두 윈-윈하는 결과’라 할 때 대법원은 아예 권력의 시녀가 되었다. 대법원의 타락은 법원 전체의 타락이다. 사법부(司法府)가 사법부(死法府)가 되더니 아예 돈과 권력을 위한 살법부(殺法部))가 되었다. 

 

대법원의 책임은 법의 공정성과 일관성에 대한 수호에 있다. 공정성에는 사회적 균형감각에 의한 관용도 섞여 있다. 동일한 도장이지만 갑의 도장과 을의 도장은 품은 힘에서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난다. 갑은 그의 힘으로 사태에 대한 상황과 증거를 수십 개 만들 동안 을은 진실 된 증거 하나 지키기도 어려워 오직 양심에 호소하여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세상에서 대법원은 법의 정의로움을 민중들에게 보여 줘, 법을 통한 해결이라는 사회적 믿음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보통 1심보다는 2심이 양형을 줄이고, 2심보다는 대법이 조금 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고통을 이해하는 판결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근혜시대 양승태 대법원장의 시간은 이것이 거꾸로 흘렀다. 우리는 대법원 판사들이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개인적 편향의 문제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스스로 그것이 얼마나 조직적이고 음모적이며 더러운 양아치들의 공모였는지가 밝혀졌다.


양승태는 그 기본이 양아치다. 오직 자기의 실리가 옳고 그름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양아치 의식의 최고봉은 ‘돈만 되면 뭔 짓을 해도 되고’ ‘당선을 위해서는 뭔 말을 해도 된다’는 이명박이다. 하지만 그는 본판이 장사꾼이라 그렇게 닳고 닳아 만들어진 생이라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법관은 그러면 안 된다. 선의와 양심까지 바라지 않아도 시쳇말로 직분에 대한 ‘가오’는 있어야 한다는 최저한 중 최저한의 기대조차 저버린 양승태의 ‘재판을 정치권력과의 거래 수단화’는 우리사회에 대한 가장 절망적인 표현인 ‘헬조선’의 ‘헬’조차도 너무 가벼운 은유라 생각하게 한다. 

타락한 힘들, 타락한 명예들, 타락한 권위들이 만들어 논 결과를 보면 그 계급적 선명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번 법란(亂)의 특징은 판사들의 직업적 이익을 위해 스스로 정권에 부역한 것이다. 문제는 부역의 내용이 모두 노동자·사회적 약자의 마지막 법의 호소에 대한 난도질이었다는 점이다. 모든 타락은 부정한 돈과 권력의 흉기가 된다는 말이 선명하게 입증한다. 얼마나 무서운 가진 자들의 계급적 당파성인가?


다행히 법학교수, 법학자, 변호사 등 법률가들이 지난 5일 ‘대법원 사법농단 규탄 법률가 기자회견’을 열고 거리 농성에 들어갔다. 그분들은 말한다. “법원은 우리를 한 번 판결로 좌절시켰고, 재판 거래 의혹으로 두 번 눈물을 흘리게 했다”, “우리 법률가들은 변호사로서 독립성과 공정성을 내팽개쳐 버린 법원에서 재판할 수 없고, 교수로서 스스로 헌법과 법률을 부정하고 독립성을 포기해버린 법원이 권력과 유착하는 사회에서 법학을 연구하고 가르칠 이유가 없다”,며 “시민의 권리를 살피기보다는 절대 권력의 눈치를 보기 바빴던, 동료 판사의 재산과 친구관계를 감시하는 데 여념이 없던, 상고법원 도입하기 위해 무엇이라도 거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이들을 단죄하기 위해 새로이 고발에 나선”것이다. 대법원이 스스로 자폭한 현실에서 다시 대법원을 바르게 세워야 한다는 법조인들의 노력조차 없다면 법이 우리에게 왜 필요할 것인가? 


그런데 더 놀라운 사태가 전개되고 있다. 서울고법 부장판사들이 판사회의를 통해 ‘고발이나 수사 의뢰는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낸 것에 이어 전국 법원장 회의에서 “사법부에서 고발, 수사 의뢰 등의 조처를 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합리적인 근거 없는 이른바 ‘재판거래’ 의혹 제기에 대해 깊이 우려한다”고 하여 진실규명은 필요 없고, 국민들은 이제 그만 떠들라는 경고를 한 셈이다. “사법행정권 남용 행위가 법관의 독립과 사법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했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 하고 그 책임을 통감한다”, “사법부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개혁방안이 신속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으니 문제가 있는 건 인정하는 모양인데 ‘진실규명과 관련자들의 처벌’은 부적절하다는 결론은 어떡해야 나오는 가능한 결론일까? 낡은 집을 부수지 않고 어떻게 새로운 집을 지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이 모습은 참 흔하다. 한국 지배문화의 중심 ‘꼰대들의 전형적인 사태 해결책’이다. 벌거벗은 임금과 그 주변 위선들의 수법이다. 타락한 자들은 타락에 대한 반성과 혁신이 타락을 털어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싫어한다. 새로움은 낡음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대법원 판사와 법원장 그리고 고법 판사들은 양승태의 대법원 양아치화에 덕을 봐 지금 지위에 도달한 이들일 것이다. 운명공동체나 다름없으니 그들은 이미 벌거벗은 몸을 가리는 대신 다른 이들의 눈을 가리려 한다. 기존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진실을 묻거나 외면해야 한다. 그 결과 나오는 흔한 모습이자 바로 지금 저 모습이 타락된 한국 역사가 만든 적폐의 전형이다. 마찬가지로 타락이란 노동자 민중의 입장을 떠나, 가진 자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최저임금을 통해 2500만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을 능욕하는 현 정권도 자기들의 첫 마음에서 얼마나 타락한 것인지 타락하고 있는 것인지 돌아 볼 일이다. 타산지석(他山之石)하란 말이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평화와 통일’로 가는 길에서 우리의 할 몫은?


우리는 지금 평화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 혐오와 증오 대신 존중과 친선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만끽하고 있다. 불과 6개월 전 한반도를 생각하면 상전벽해다. 하지만 이것이 아직 과정에 불과하며 갈 길이 멀다는 것도 우리는 안다. 분단이 만든 혐오와 증오, 전쟁을 이기고 존중과 평화를 위해 남북정상회담이 북미 정상회담으로 넘어가는 국면에서 예상되는 곡절과 부침에 맞서 우리가 단지 박수치는 구경꾼이 아니라 평화가 통일로 이어지는 역사의 주축이 되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김정은은 판문점 회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좋은 합의나 글이 나와도 발표돼도 제대로 이행되지 못하면, 오히려 좋은 결과가 좋게 발전하지 못하면, 기대가 낙심이 된다.” 평범한 말인데 가슴이 뜨끔했다. 김정은은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합의’가 발전하지 못하고 낙심(落心)이 된 것은 미국과 남한의 문제라는 것을 지적했다. 이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남북 북미 관계의 난관이 위장평화 공세로 뒤통수를 치는 믿을 수 없는 북한 탓이라는 것과 다르다. 북에서는 약속의 파괴가 반공반북에 빠져 북한 붕괴만 노린 남한과 미국의 탓이다. 과연 누가 맞을까? 우리는 이런 판단에 참고가 되는 예를 생생히 보고 있다. 미국과 이란이다. 유럽과 유엔 국제 원자력기구 IAEA가 이란이 약속을 잘 지키고 있다고 해도 트럼프는 약속을 파기한다. 미국과의 약속은 미국만 깨트린다. 이것이 현실이다. 


노동운동의 한 선배가 이런 말을 했다. 대한민국 사람은 세 가지를 잘 알아야 한다. 첫째 미국, 둘째 북한, 셋째 우리 자신이다. 미국은 은혜를 베푼, 자유민주의 수호자가 아니라 패권국가로 전쟁원인을 조작하거나 거짓으로도 침략을 하는 나라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전쟁을 일으킨 국가, 모든 전쟁의 배후인 유일한 국가, ‘미국이 곧 세계’라고 믿는 제국주의 국가다. 북한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김정은이 보여 주는 일상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북에도 사람이 사는 세상이라는 것 정도라도 이해를 하기를 바란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는 것이 아는 것의 시작이라는 성인의 말을 새기자. 우리는 북을 아무것도 모른다. 비참한 거지, 아니면 세습 독재에 열광하는 기괴한 괴물로만 볼 뿐이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알고 있을까? 사드를 안보라 믿거나 밀어붙이는 모습, 미군을 신성불가침으로 여기는 모습, 진실을 현실을 이유로 뒤로 밀어 버리는 모습에서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 아는 척 해온 윤똑똑이들이다. 이런 무지와 몽매가 표현된 대표적인 양상, 세 가지만 꼽아 본다.

 

첫째는 북한의 변화만을 말하는 경향이다. 남북정상은 ‘한반도 비핵화’를 말하지만 이들은 ‘북핵 폐기’만 말한다. 남북관계 북미관계를 마치 패배자의 항복 문서 작성하는 것쯤으로 안다. 정상적이라면 북이 우려하는 것에 대해 무엇을 기존과 다르게 할 것인가를 챙겨야 한다. 북의 극단의 전쟁 공포로 몰아넣는 전쟁 연습의 중단, 남북관계를 범죄로 만들어 원천 봉쇄하는 ‘국가 보안법’의 철폐, 평화와 통일을 종북이라 하면 심지어 의원을 가진 합법정당을 해산시킨 우리 안의 야만에 대한 성찰과 반성, KAL기 폭파, 천안함 사태 등 분단을 이유로 의문조차 불온 시 한 무수한 역사적 만행에 대한 진상 규명 등 우리 안의 분단 적폐를 제대로 제거하는 것에 백방의 노력을 해야 한다. 북송을 원하는 평양시민 김련희나, 식당 여성 노동자들은 외면하면서 북에 억류된 남한 사람은 석방하라는 이 기괴한 염치없음을 성찰해야 한다.   


둘째는 평화를 돈벌이 기회로 보는 경향이다. 북한의 광물자원이 어떻고, 북한의 노동력이 어떻고, 시베리아 철도가 어떻고 하는 논리들을 보면 분단의 순기능을 말하는 척하면서 북한의 자본주의화, 경제 식민지화라는 탐욕에 눈이 벌게진 모습이다. 사회주의 구상무역 체제가 붕괴되고 오직 자본주의적 국제 경제만 존재하는 조건에서 안으로 사회주의적 내실을 견지하고 밖으로 자본주의적 국가 경제력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좌우편향과 실패와 실수 그리고 오류 등은 그런 어려움은 반증이다. 문제는 그것을 허점으로 보고 사회주의 체제의 내적 파괴를 노리는 관점을 그대로 연장시키는 것으로 북을 보는 순간, 그것이 이명박근혜 시절, ‘잃어버린 11년’의 연장이고, ‘통일은 대박’이라는 천박함의 계승이며, 무엇보다 ‘북 붕괴론, 흡수통일론’의 내용적 관철이다. 평화를 말하면서 만주를 회복하고 시베리아를 장악한다는 식의 사이비 국수주의자들이 판을 친다. 

 

세 번째로 평화를 말하면서 분단 전쟁 체제를 영구화하려는 경향이다. 미국 스스로 논의하는 미군 문제에 대해 변동 절대 거부라는 한국의 수구세력과 그런 주장에 눈치를 보며 통일 후에도 외세에 예속되자는 미군 지속 주둔론이나 펴는 집권세력들의 모습이다. 남한에서 그럴 듯한 현실주의는 결국 현실 구조에 대한 굴복이다. 통일을 접고 평화체제 유지하는 ‘분단 관리’ 주장들이 그렇다. 목적을 잃은 길은 결국 모든 것을 잃은 길임에도 말이다. 


자본주의는 공짜가 없다. 남북관계에서 최고의 사기이자 거짓은 이른바 ‘퍼주기’다. 남이 북에게 퍼준다는 환상은 북은 가난하다는 편견과 합쳐 부동의 전제가 되었다. 마치 남한이 천사나 된 듯하지만 남한 내 노동자 민중들을 쥐어짜는 그들이 행여 더 먼 타인에게 천사 노릇을 할까? 이윤이 목적인 자본, 하나를 주면 열을 뺏아 가야 하는 자본의 경영법이 엄연한 현실인데 퍼주기는 무슨 퍼주기인가? 우리는 헬 한 남한에 살면서도 북한에게는 상식조차 견지하지 못한다. 그러니 북의 파격만큼 반드시 존재해야 할 남의 파격을 준비는커녕 생각도 않는다. 미국에게는 굴종과 패배, 북에게는 오만과 나태와 싸워 자주와 겸손, 존중과 친선의 힘을 사회적으로 갖춰내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평화가 통일로 흐르고 그 흐름이 자주와 평등의 남북, 차별과 혐오가 없는 해방된 세상으로 이어지는 길임을 제대로 이해하고 견지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할 몫이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당혹스럽고 유감스럽다.

 

< 2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서 최저임금 개악안을 상정하는 국회 본회의를 앞두고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최저임금 개악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노동과세계 변백선


당혹스럽고 매우 유감이다.” 미국대통령 트럼프의 북미 정상회담 취소 서신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첫 반응이다. 한미 간의 조율이 잘 되고 있고, 북미 정상회담은 반드시 열린다는 말을 한지 하루도 넘기지 못하고 뒤통수를 맞았으니 당혹스럽고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당혹의 내용과 유감에 대한 이후의 대책이지만 아직은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트럼프는 김계관과 최선희 북한의 외교 책임자들의 발언을 이유로 회담의 취소 연기를 하며 마치 중학생들이 연애 밀당이라도 하듯 책임을 넘겼지만 김계관의 말 전에 볼턴의 말이, 최선희의 말 전에 부통령 펜스의 말이 있었음을 감춘다. 아주 전형적인 양아치 시비 걸기다. 원인을 외면하고 보이는 한 부스러기 장면만 극대화하여 결국 힘없음은 죽어라는 그 심보 말이다.

 

대한민국 헬조선에서 우리 민중들에게도 524일과 25일을 넘는 밤은 안과 밖, 이중으로 당혹에 유감이다. 트럼프의 야바위 짓에 의해 동요하는 한반도 평화에 당혹과 유감이라면, 안으로는 최저임금법의 사상 최대 개악을 강행하는 문재인 정권의 반동(反動)때문이다. 최저임금은 민주공화국에서 국가가 보장하는 인간 존엄의 최저 기준이다. 인간 생존의 최저기준이 아니라 존엄한 삶의 최저 기준이라는 말이다. 이런 단어(單語)적 뜻을 최소한으로 실현하라는 것의 상징으로 민주노총은 최저임금 1만원을 줄기차게 요구했고, 지난 대선에서 후보 모두가 함께 공약한 약속이 되었다. 특히 촛불의 힘을 업고 당선을 한 문재인 대통령은 수출 경쟁력이라는 유물대신 소득주도 경제력을 앞세워 최저임금 만원 인상이 구체적인 현실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주었다. 그리고 만원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지만 오랜만에 두 자리 수 인상의 최저임금을 올려 촛불을 든 보람을 주는 듯했다. 하지만 이번 최저임금의 개악을 통해 문재인 정권은 촛불 때문에 억지로 쓴 노동존중이라는 가면을 벗었다. 그들은 결국 돈의 편, 강자의 편이었다. 소득주도가 소득(증대)주도가 아니라 소득(감소)주도임을 선포했다.

 

올 초부터 직장 갑질 119’ 등을 통해 가장 극악한 직장 갑질이 노조 없는 회사 직장인들에게 상여금과 식비를 최저임금에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최저임금의 개악을 통해 갑질이라 부르는 패륜적 행위를 ()’으로 보장한다. 정말 노동자 민중의 삶에게 염장 지르는 정권이다. 현대기아차그룹은 사내하청업체에 인상된 최저임금을 주지 않고 법 개악만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번 개악을 통해 문재인 정권이 재벌들에게 통상임금으로 해온 임금 도둑질이 못하게 된 것에 대한 보충으로 계열사, 부품사, 사내하청, 수 천 곳의 상여금 복리후생수당을 날로 먹게 해 준 것이다.

 

이번에 환노위를 통과한 최저임금 법안은 그 전까지 민주노총 등이 반대한 최저임금 개악보다 더 나쁘다. 상임위 통과 30분 전에 급조된 법이라고 하는데 내용을 보면 재벌에게 치밀하고 친절하고 노골적이라 아주 오래 재벌들의 민원에 의해 준비된 법안으로 보인다. 정기상여금을 최저임금에 산입한자고 간을 보다가 복리후생비를 전부를 포함시킨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상여금 말살 전략으로 보인다. 자본에게 기본급만 주면 모든 노동조건에서 자본의 사회적 의무를 해방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가장 괴로운 분들은 살 곳과 먹을 것을 제공하지 않으면 일 자체가 어려운 이주노동자들이다. 환노위 개악론자들은 연소득 2,500만 원 안팎의 저임금 노동자는 산입범위가 확대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연봉 2,500만 원 이상을 주는 기업에게 혜택을 준다는 의미다. 게다가 상여금 없이 복리후생비만 받는 노동자의 경우 최저임금액의 7%만 산입범위 예외이고 그 이상은 무조건 해당됨으로 연봉이 2천만 원 수준이어도 산입범위에 포함되게 된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근로기준법의 대원칙인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원칙도 훼손했다. 이들도 지금의 조치가 노동자에게 불리한 조치임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하려면 과반수 노조 내지 노동자 과반수의 집단적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조항에서 최저임금 산입 조항을 예외 조항을 만들었다. “‘쉬운 해고’‘저성과자 해고를 불이익변경이 아니라며 노동개악을 추진한 박근혜도 하지 못한 것을 문재인 정부와 집권여당이 자행한 것”(민주노총 성명서 중)이다.

 

문재인 정권 들어 ‘2인 이상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1년 전보다 3.7늘어 4년 만에 최대 폭으로 뛰었다고 해서 최저임금 인상 효과인가 했다. 그런데 이것이 정책 효과라기보다는 대기업이 사원들에게 보너스를 많이 지급한 영향이란다. 그래서 상위 20와 하위 20소득은 더욱 커져 양극화가 역대 최악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이 양극화를 줄이기 위해 현 정권은 대기업 정규직들의 임금을 헐어기로 했나 보다. 남미의 어느 독재다가 빈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빈민을 학살했다는 짓과 같다. 하위 소득을 늘려 불평등을 줄이는 상향 평준화가 아니라면 수치적 평등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우리 노동자 민중들은 하루아침에 안팎으로 봉변을 당하고 있다. 왜 그런가? 밖으로는 한반도 평화의 문제에서 주인이 아니라 기껏 중재자 아니면 미국의 조력자가 되어 주체적 평화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촛불을 들어 만든 정권조차 노동자 민중의 주인이 아니라 가진 자들의 정권이기 때문이다. 노동자 민중이 주인이 되는 정치가 없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의 바지사장 돌격대 홍영표라는 작자는 민주노조운동을 했다는 자다. 그가 앞장 서 노동권을 파괴하는 것은 사대 망국노가 아니면 출세를 위해 변절과 배신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한국 근현대사의 극단의 적폐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최저임금법의 개악을 통해 노조도 단체협약도 심지어 취업규칙의 개악에 대한 노동자들의 최소 저항권도 파괴하려는 문재인 정권의 속셈이 문재인 정권의 본질이다. 노동자 민중의 염원을 집권의 도구로만 악용하고 결국 신자유주의 헬 조선을 만든 정권, 과거를 청산한다며 결국 미래만 파괴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한계가 더 기괴하게 되풀이 되고 있다. 당혹(?!)스럽고 유감(?!)스런 날들이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장

‘갑질’ 학대(虐待)



<출처 : MBC 뉴스>


근로계약서를 쓸 때 자본은 갑이고 노동자는 을이다. 원청과 하청이 계약을 할 때 원청이 갑이고 하청이 을이다. 전세계약서를 써도 주인이 갑이고 세사는 우리는 을이다. 갑을관계는 책임의 순서를 말하는 것이지만 현실에서 권력적 위계질서의 표현이다. 거기에 ‘질’이 붙으니 갑질이란 ‘힘 센 자가 약자에게 퍼붓는 폭력과 범죄의 학대’ 행위다. 


갑질은 오래된 문제다. 최근에 다시 대두된 것은 병원 안에서 이른바 ‘태움’이라는 비정상적인 관행에 목숨을 잃은 간호사와 대한항공 조씨 일가의 막무가내 패악질이 폭로되면서다. ‘태움’현상은 신참 간호사에게 기합을 주듯 빠르게 일을 습득시킨다는 명분으로 여러 이유로 손이 둔하거나 일을 쉽게 배우지 못하는 신참을 괴롭혀 쫓아내는 폭력이다. 갑질에 대한 자각이 없는 시기에는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이를 당연시하다가 사고가 생기면 ‘못된 고참이나 못난 신참’의 개인적인 문제로 돌려졌다. 하지만 세 살배기도 안다. 이런 참사는 개인의 성격이 아니라 병원자본이 ‘최소의 인원으로 최장의 시간의 일을 통해 최대의 이윤을 모색’하는 과정의 필연인 것을. 인력 확충이라는 정상적이 통로를 통해 환자와 노동자의 안전을 높이는 대신 마른 수건 쥐어짠 돈 중심의 경영이 만든 참극이다. 이 과정이 묵과 되는 것은 병원은 비용 줄이고 노동자들끼리 화합단결을 파괴하니 꿩 먹고 알 먹고 이기 때문이다.


조현민 대한항공 여객마케팅부 전무가 광고제작을 맡은 업체와의 회의에서 광고대행사 직원에게 화를 내며 유리병을 던지고 물을 뿌렸다. 태움이 직장 내 괴롭힘이라면 조현민의 패악은 원하청 사이에서 벌어진 갑질이다. 이후 대한항공 회항의 땅콩언니와 그 엄마까지 갑질 패악이 폭로되면서 일파만파의 사회적 충격을 주고 있다. 이에 대해 노조는 예견된 일이라며 조씨 일가의 전횡적 지배가 관철되는 회사의 구조와 관행, 자정을 위해 필요한 노동조합 활동 중 파업권을 ‘필수유지업무’라는 이유로 원천 봉쇄한 법의 허점이 만든 비극이라 지적한다. 민주노총도 성명을 통해 한화그룹 김승연의 보복폭행, SK그룹 최철원의 맷값 폭행과 같은 재벌들의 어이없는 반사회적 범죄를 환기하면서 ‘재벌의 제왕적 족벌경영체제’가 문제라 지적한다. ‘계열사 순환출자를 통한 불법 경영승계, 일감몰아주기, 내부거래, 납품단가 후려치기 등 끝없는 불법 경영과 비자금 조성, 뇌물공여로 불법경영을 보호해 온 정경유착이 본질이고 실체’라는 것이다. 대한항공 뒤에 숨어 웃지만 삼성의 반 헌법적 노조탄압, 보수우익 단체에 자금지원까지 하며 세월호 진실을 가리려는 패륜, 장충기의 문자가 확인해 주는 ‘청와대, 검찰, 법원, 언론, 국정원’을 아래동생 다루듯 관리해온 삼성그룹 등 재벌 일반의 문제임을 지적하고 있다. 


갑질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인권적 차원에서 지독한 폭력이자 범죄라는 것이다. ‘갑질’은 갑을이든 노자든 자본의 원하청의 문제이든 동등한 존재로서 존중이 깨졌다는 증거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민주주의 기초 전제가 무너졌다는 말이다. 이는 인간관계가 근대 이전 ‘봉건적’ 영역으로 퇴행되어 버렸음을 의미한다. 그 시작은 노동을 인간 존엄의 근거가 아니라 일회용 휴지나 ‘하인 하녀’처럼 부림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에서 부터다. 신자유주의가 노동자들의 인간다움 모든 것을 공격해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을 강요한 것이 그 시작이다. 정리해고는 잘못도 없이 추방당할 수 있다는 것이고, 비정규직은 권리도 없이 의무만 지는 노동을 감수하라는 것이다. 자본에게 의무 없는 권리, 이유 없는 차별의 권력을 준 것이다. 이런 반칙과 특권이 보편화되고 세습화 된 세상이 헬 조선이고 그 구체적 현상이 ‘갑질’이다. 


‘약육강식 승자독식’ ‘권한의 상속과 세습’ 속에서 사라진 것은 민주주의다. 권력이 강요한 수직적 인간관계는 노동에 대한 존중, 인간 존엄에 대한 존중대신 복종과 굴종을 원한다. 갑질은 우리 사회가 신분사회로의 퇴행이자, 서로가 서로에게 늑대가 되자는 사회, 노예적 노동이 가능한 사회가 됐음을 보여준다. 그러니 갑질의 진정한 해결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수직적 권력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존중의 관계로 돌릴 때 가능하다. 모든 관계에서 민주주의를 확보하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제도적으로 비정규직을 없애는 일이다. 그래서 최소한 권리와 의무의 쌍방관계가 있는 사회를 회복시켜야 한다. 나아가 일터에서 민주주의가 만들어져야 한다. 노사관계에는 평등이 없고 회사 안에서 공평이 없는 한국의 기업문화에서 민주주의가 티끌만큼이라도 가능한 것은 노동조합의 존재다. 대통령도 의원도 뽑는 우리가 회사의 과장 부장은 뽑을 수 없다. 회사 문 앞에서 멈춘 민주주의를 회사 안으로 진입시켜야 한다. 그것은 바로 노동조합 할 권리의 보장이다. 모든 산업과 사업장에 ‘민주’노조 활동의 자유로운 보장이 있어야 탐욕의 화신 자본의 광란의 질주를 막는 최소한의 제동 기능, 최소한의 자정 기능이 유지된다. 


촛불이 광장을 이루고 정권마저 교체하면서 사회적 과제로 대두된 것이 ‘적폐청산’이다. 한국사회 적폐는 한국 현대사 자체다. 일제 매국노와 부역자들을 고스란히 부활시켜 독립 운동가들을 배척한 미국의 분단 정책 이후, 박정희식 군사독재, IMF 경제난 이후 승자독식의 헬 조선을 만든 돈의 독재, 그 사이를 부정부패와 반칙과 특권으로 촘촘히 엮어 이득을 챙긴 ‘정경유착’된 지배자들, 그들 중 최고의 부정한 힘은 재벌이다. 재벌은 한국형 적폐의 심장이다. 그래서 박근혜 권력을 끝장냈듯이 재벌이라는 적폐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 재벌은 우리 사회 만악(萬惡)의 근원(根源)이다. 재벌은 경제 영역에 남은 유신정권의 몸통이다. 개혁이나 개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해체가 필요한 대상이다. 우리 경제는 재벌이 대단해서 유지된 것이 아니다. 반대로 반칙과 특권의 재벌과 부패 지배 세력의 패악질에도 버텨온 우리 노동자 민중이 대단한 것이다. 박정희가 없으니 한국은 발전했다. 마찬가지로 갑질의 몸통, 경제계의 박근혜, 적폐의 본산, 재벌을 없애야 민주와 인권이 확보된다. 재벌 해체가 정도다.공사이고 그 결과는 더 치명적이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칼럼]늦은 밤에 다니지 않아야 하는 이는 누구인가?



간통이라는 죄가 있었다. 이 죄를 적용할 때나 폐지할 때나 남성 그리고 노인층 조금 더 나가면 이른바 보수 기독교계가 반대를 했다. 간통죄가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1905년이다. 대한제국 형법은 기혼여성이 간통한 경우 해당 여성과 그 상간자(相姦者)를 6월 이상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하지만 당시 처벌 대상은 기혼여성만 이었다. 이후 1953년 남녀 모두 처벌 대상이 되는 간통죄가 만들어졌다. 간통죄를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부인의 간통만을 처벌하는 불평등 주의와 남편에 축첩 관행을 용인하는 차별주의에 대한 단절이다. 그래서 바뀐 것들을 보면 서얼의 폐지를 비롯해 동성동본불혼제도 폐지, 소유 불분명한 부부재산에 대한 부부의 공유, 이혼 배우자의 재산분배청구권, 협의이혼제도의 합리화, 부모의 친권공동행사, 적모서자관계와 계모자관계의 시정, 상속제도의 합리화, 이혼 및 사별 여성의 재혼금지조항 폐지 등 가족관계의 현대적 개선이 있었다. . 


하지만 시대가 발전하고 변하면서 여성의 권익을 신장시켰던 간통죄는 다시 여성들의 권익에 족쇄가 됐다. 간통의 문제가 형사적인 문제인지 사생활의 영역으로 문제가 있다면 민사적인 문제인지, 그것에 대한 통제가 양심과 관계에 대한 책임인지 국가의 역할인지에 대한 무수한 논쟁을 불러왔다. 결과적으로 간통죄는 세계적 흐름에도 맞지 않고, 여성에게 불리한 차별과 부담을 가중시키는 통로가 되었기 때문에 폐지가 된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통해 법의 사회적 특징을 이해할 수 있다. 절대적인 법이란 없다는 것이다. 무수한 많은 변화와 관계 속에서 이전에는 순기능을 하였지만 이제는 역기능이 된 것이 많다. 이에 대한 사회적으로 약자나 소수자의 입장에서 권익을 넓히는 것이 진보적인 입장이 되고 현실을 고수하려 하면 보수적 입장이 된다.  


간통죄를 도입할 때도 간통죄를 폐지할 때도 보수적 입장을 가진 이들은 가족의 보호였다. 간통죄가 도입돼도 간통죄가 없어져도 세상이 개판이 될 것이라 말했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족쇄를 풀은 여성들의 권리는 ‘미투운동’이라는 새로운 길을 열어젖히고 있다. 물론 그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메갈리아 논쟁에서 보듯 상처투성이 전진의 길이다. 대놓고 공격을 가해 직접적인 상처를 주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그 아타(我他)의 색이 선명하며 공격도 방어도 혼란스럽지 않다. 문제는 변화 자체에 대해 적대시하는 감정과 행위는 극단의 행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게 좋은 거지’로부터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고’ ‘화해와 용서’가 필요하다고 이들이 있다. 참 좋은 말이지만 이것이 순서와 방향이 뒤틀리면 가해와 피해가 뒤집히는 참사를 만난다. 대표적인 경우가 한일위안부(일본군성노예)에 대한 일본 아베 정부의 적반하장이다. 가해자가 화해와 용서와 미래를 이야기하다 못해 이제 불가역적으로 논의조차 하지 말자는 말을 하는 지경이니 말이다. 선의가 악의가 될 수 있는 대부분의 5경우는 서 있는 곳, 그곳이 어디인지 모를 때 발생한다.         

 

어느 학교 캠퍼스에서 야밤에 강간 성폭력이 발생했다. 이에 대해 학교당국은 순찰을 강화하고 각종 경계를 챙기면서 여성들의 늦은 밤에 홀로 다니지 말 것을 홍보했다. 소중한 나를 내가 먼저 지키자는 것이었다. 다들 짐승 같은 범인을 욕하면서 신속하게 대처를 한 학교당국을 칭찬했다. 그 중 하나가 여성 기숙사에 대해 경계 강화와 함께 밤 열시 이후의 출입을 관리한 조치였다. 대다수의 여성 기숙사의 학생들은 학교당국의 보호 조치에 안심하며 순응했다. 다시 세상을 평화로워 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여성 기숙사에 있던 한 여성주의자가 대자보로 이의를 제기했다. 


“이상하다. 잘못됐다. 범죄는 남자가 저질렀는데 왜 피해자인 여성에 대해 절제와 조심과 통제를 가하는가? 여성이 혼자 출입하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니라 남성들의 출입을 제어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폭력의 원인을 막아야지 왜 폭력의 피해자들을 관리하는가? 과연 타당한가?” 과연 누가 한밤중에 출입을 자제해야 하는가? 


우리는 일상에서 많은 것을 포기한다. 그런데 그것은 주로 힘에 대한 굴종이다. 그 힘이 사람의 생존과 연결될 때 그 위력은 말도 못하게 커진다. 대표적인 것이 ‘남성의 사회적 진화의 지체에 의한 어떤 폭력성, 또는 야만성에 대해 우리는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포기가 있다. 예를 들면 수컷들의 ‘성욕’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동물적 본능과 사람으로 본성을 혼동한다. 그래서 식욕 색욕 등의 본능을 사회 문화적으로 절제하는 것에서 ‘짐승과 다른 인간으로서 정체성’이 만들어 진다. 아니면 그것이 ‘야만 = 짐승’의 상태다. ‘야만 = 인간적 존엄의 부재’를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미친개를 그냥 방관하는 것과 같다. 내가 물리지 않아도 누군간 물린다, 그럼으로 대처는 당연히 회피가 아니라 몽둥이로 미친개를 제압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 반대였다. 군대라 어쩔 수 없이 광주시민에게 발포한 군인들, 명령에 어쩔 수 없어 살인 진압이나 불법 선거, 댓글 조작에 동원된 경찰, 공무원들, 회사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상사의 부당한 지시에 순응한 회사원들, 나라도 살기 위해 남에게 영혼 없는 좀비 아니면 사탄이 되는 것을 불사하는 무수한 일탈들이 당연한 듯 자행된다. 이 당연해 보이는 것 속에 웅크린 것이 바로 우리 사회 지배구조다. 봉건적 굴레, 식민지적 굴종, 군사독재정권의 억압, 신자유주의가 만든 돈에 대한 열정적 자학이 만든 총체적 적폐다. 


미투 운동은 이 위선과 거짓으로 강제된 세상의 판을 뒤집자는 양심의 소명이다. 미투 운동은 피해자들의 연민의 호소나 가해자 개인의 복수가 아니다. ‘특권과 반칙’으로 뒤집힌 세상에 대한 전면성찰이다. 그러니 개인적인 용서니 화해니 하는 말을 가해자들이 할 말은 아니다. 더 많이 아파하며 보고 듣고 안으로 성찰할 일이다. 그렇게 심장으로 응답할 때 남성들도 피해자의 손을 잡고, 잘못된 세상의 판 자체를 바꾸는 길에 동참할 수 있다. 여기에 미투 운동의 혁명성이 있다. 낡은 것을 부수고 난 뒤에 새로운 것을 짓는 법이다. 아니면 부실공사이고 그 결과는 더 치명적이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한반도의 봄을 봄답게 만들자!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을 느낄 수 없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 지 참으로 자주 만나는 말이자,  탄식이고 절망이고 원망이다. 다된 밥에 재 뿌리고 남 잘되는 꼴은 물론 제 민족 평화롭게 통일하자는 것도 배가 아픈 종자들이 많고도 많으니 봄은 매년 오건만 아닌 봄만 온 것이 한반도의 최근 현실이었다. 그래도 어쩌랴. “안 된다 안 된다 하면 되는 것도 안 되고, 된다 된다 하면 안 되는 것도 된다.”는 늦봄 문익환 목사님의 말씀, 매년 되살리며 살 수 밖에. 방북 후 돌아오면서 구속만 남은 상태에서 기자가 후회하지 않는가를 물었을 때 목사님은 ‘후회는 일 자체의 부정인데 통일로 가는 길에 후회는 없다. 반성을 할 뿐이다. 더 잘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더 찾는 성찰 말이다.’라고 하셨다. 이후 문 목사는 “통일은 됐어.”를 외치고 사셨는데 그 완성형에 담긴 간절함이 아직도 절절하게 심장을 울린다. 

그리고 2018년 봄이 왔다. 증오와 혐오대립의 영구 동토가 될 듯한 한반도에 봄바람이 불고 있다. 봄바람에 봄나물들이 겨우내 언 얼굴을 편다. 한꺼번에 돋는 초록의 혁명에 어떤 드센 겨울도 견딜 수 없는 자연이지만, 사람의 일만 항상 자연의 법칙을 뒤틀었다. 평화와 통일은 종북 몰이의 먹이가 되고, 증오와 전쟁은 애국이 되었다. 항복을 먼저 하지 않으면 대화마저도 안 된다는 불통의 칼바람만 ‘전략적 인내’니 ‘적극적 관여와 압박’이니 하는 이름으로 한반도를 덮었다. 이랬던 한반도의 겨울이 드디어 깨지고 있다.  


오는 봄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가장 큰 변화는 결국 북한이다. 북한 김정은 체제는 아주 전략적으로 한반도 정세를 재구축했다. 아무리 노를 저어도 제자리인 역류에서 노 젓기 식 6자회담이나, 미국의 변덕과 중국의 오만이 만든 수동적 상황을 때려 치고 판 자체를 바꿨다.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 - 먼저 산 다음에 상대를 공격하는)' 전략이다. 아생(我生)은 북의 핵 무력의 완성이다. 이후 우리민족끼리라는 본래의 힘을 극대화하여 기존 정세의 흐름을 갈라 치며 살타(殺他)가 아니라 상생(相生)의 길을 개척했다. 6자회담으로 상징되는 대국적 꿈에 빠져 역사적 동지를 외면하는 기존의 중국 통로가 아니라, 우리민족끼리라는 남한 통로로 평화의 길을 내고 있다. 이것이 김정일과도 다른 김정은 식 변화의 요체인데 통미봉남이라는 있지도 않는 유령과 한미동맹이라는 악령에 귀신 들린 남한사회에 대한 능동적 대처이기도 하다. ‘남한을 통한 미국 다루기’의 청사진은 김정은의 신년사에서 그린 그림이다. 

이것은 남한에게는 한반도 운명의 운전대를 잡은 역할의 힘을 실어 주고, 미국에게는 남한의 어법으로 트럼프의 심기를 마사지하는 효과를 얻으려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과정은 분단을 이권의 숙주로 삼아 부귀 권세를 누리는 분단 세력들에게 혼란과 자기 부정 그리고 자기 파괴의 계기를 만들 수 있다. 미국과의 교섭의 난관을 남과 함께 분담하는 효과를 기대하면서 분단 적폐들을 타격할 수 있는 일거다득의 묘수다. 이런 북의 전략이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에는 또 다른 결정적 힘이 있다. 2017년을 가른 ‘촛불 광장’의 힘이다. 남한 민중의 힘이 분단 반동의 쳐 둔 정치적 절망을 때려 부쉈기 때문에 가능했다. 북의 핵무력이 보이는 파도라면 한반도의 봄을 부르면서 미투 운동을 통해 차별과 혐오의 근저를 휘젓는 촛불광장의 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을 결정하는 해류와 같다. 


봄바람의 현실적 발아(發芽)는 물론 평창 올림픽이다. 올림픽의 대의명분이 이렇게 훌륭하게 작동되어 위선(僞善)을 진선(眞善)으로 만든 경우가 있을까? 남북 특사 방문을 통해 이렇게 전쟁을 평화로 돌리는 전격(電擊)이 이전에 있었던가? 전격적인 변화의 꽃이 남북정상회담이라면 그 열매는 평화협정을 만들어 낼 북미 정상회담이 될 것이다. 이 와중에서 북이 남을 얼마나 깊게 이해하고 있는지도 알아야 한다. 3차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미국이 가진 현실과 명분의 충돌에 대한 완화, 남한 내부의 통미봉남과 위장평화 적화통일의 두려움, 분단을 지배의 토대로 삼는 이들에 대한 남한 내부적인 견제까지 어느 것 하나 빼 놓지 못하는 명수를 던지는 김정은은 애송이가 아니라 말 그대로 능력과 감각을 갖춘 외교의 명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평화로 한반도 정세를 푼다면 우리 안의 비극과 상처를 돌려 올림픽의 대의명분을 제대로 살린 것처럼 세계 체제적 문제를 한반도로부터 푸는 쾌거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흥분만큼 내부적 냉철함이 필요하다. 그것은 역사에 대한 기억과 책임을 다시 점거하는 일이다. 우리는 일본의 군국주의 만행과 이로부터 받은 민중들의 고통을 두고 역사전쟁을 하고 있다. 우리가 명예롭기 위해서 일본군 성노예를 조성하고 그것으로 부귀(富貴)를 챙긴 친일의 무리와 그 후예들, 미군기지와 위안부 문제, 무엇보다 월남 참전을 통한 남한 군사독재정권의 만행에 대해 제대로 된 인식과 반성을 해 내는 일이다. 남의 티끌을 보기 전에 내 눈에 들보를 들어내야 한다. ‘일본 장교 출신들에 의한 주도된 한국군’의 무도함은 유신 독재와 특히 광주에서 시민에 대한 학살을 통해 확인했다. ‘제 국민에게도 저리 흉악한데 하물며 외국에서 고삐도 없이 저질렀을’ 만행을 생각하면 베트남 민중들의 고난에 식은땀이 흐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절박하게 할 일은 한반도의 봄을 지키기 위해 한국 군부의 사대 망국성과 흉포함을 그대로 정치화한 세력에 대한 응징을 하는 일이다. 최근에 태극기에 성조기 그리고 이제는 일장기 까지 내 건 역사적 흉물들, 히틀러 나치의 폭력보다 더 잔인한 사적이고 증오적 폭력을 자랑하는 극우반동의 기독교를 참칭한 세력이나 공개적으로 반동을 체현한 자유한국당류의 정치에 대한 단호히 거부하자. 독재와 그 후예에 대한 역사적 불관용만이 불안한 민주주의를 지키는 진정한 안보다.  


4월 남북 정상회담, 5월 트럼프의 북한 방문, 한반도에 거대한 환절기가 시작했다. 안양천 길에서 막 파릇한 새싹위에 하얗게 덮인 서리를 보았다. 봄이 완숙되기 전에 꽃샘추위도 창궐할 것이다. 노동자 민중의 힘으로 우리의 평화 통일을 향한 봄을 봄으로 느끼지 못하는 한탄의 한반도를 이제 마감하자.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미투MeToo, 위드유WithYou


노동상담센터가 만난 세상- no. 165





“스웨덴은 제도를 통해 평등을 선언하고 있지만, 일터를 비롯한 직장과 가정에서 발생하는 성희롱과 폭력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은 여성의 책임인양 인식되어 왔다...강간 사건이 발생하면 당시의 상황, 여성의 옷차림 등에 대한 문제가 항상 불거졌다. 다른 범죄에서는 없는 일이다.” (스톡홀름 대학 교수) 아빠와 엄마를 구분하는 차이는 모유가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 뿐이라는 스웨덴조차 미투운동이 열풍이다. 하물며 기껏 있는 인권 조례마저 없애는 한국에서 미투운동은 열풍을 넘어 쓰나미가 되어야 한다. 일전에 한국사회엔 메갈리아 논쟁이 있었다. 그 결과 메갈리아로 상징되는 ‘행동하는 페미니즘’은 사회적 역풍을 맞았다. 역차별이라며 분노한 남자들의 분기로 갑자기 한국은 남녀평등을 넘어 여성우위의 세상에 되었다. 가련한 남성들이라니. 마치 순종하는 피해자가 아니라 빗자루 들고 저항하는 피해자를 만난 불쌍한 강도 꼴 아닌가? 그런데 서지현 검사의 폭로가 나왔다. 아니 검사도? 우리나라 최고의 권력자 또는 권력자의 칼도 여성이라면 희롱당하고도 눈치를 보며 침묵을 해야 한다니. 남성 중심의 지배 질서와 문화는 얼마나 은밀하고 강고한 것인지...


대한민국의 지배 문화는 곰팡이 문화다. 진실의 빛을 싫어한다. 진실 앞에서 용기를 내는 것을 혐오한다. 용기는 ‘배신자요 개돼지 자식’들의 짓이다. 그러니 옳고 그름의 용기를 내는 것은 바보다. 용기를 내는 순간 모난 돌이 되어 정을 맞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가족 동료 등 주변 관계에 피해를 주는 공적이 된다. 진실에 비겁하고 윗선에 비굴하고 아래 것들에 잔인 하라는 것이 대한민국 문화의 숨겨진 아니 공공연한 비법이다. 물론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불과 10년 전의 상식으로도 지금의 여러 가지 사회적 개념을 따라 잡을 수 없다. 대표적인 것인 성소수자들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확장이다. 80년대 초중반만 해도 진보적 사상과 이론을 배우면서도 성소수자들의 문제 등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계급의 문제, 체제의 문제, 빈곤과 배제의 문제로서 대강 볼 뿐, 현실적 과제나 이해로 다가오지 않았다. 오직 피해 당사자들의 분투 속에서 우리의 눈은 조금 더 멀고 깊게 볼 수 있었다. 그래서 한국 사회는 ‘역동적 혼돈사회’다. 전진과 후퇴가 한꺼번에 진행된다. 후퇴를 전진이라 믿는 자들이 있고 전진(변혁)은 불가능하다며 현실에 안주하는 이들이 다수다. 이 엉거주춤 체제가 87년 이후 한국이다. 지난 20여년 혼돈 속 패자는 인간이고 승자는 돈이었다. 공동체적 관계, 사회적 발전은 기업과 개인의 승자독식의 탐욕에 분쇄됐고, 민주주의를 내세웠던 이들은 기껏 좌파신자유주의가 되었다. 87년 6월을 넘어 7~9 노동자 대투쟁이 보여준 민주주의 실질적 과제는 낡은 유물로 내쳐졌다. 민주노조운동을 죽이고 진보정당 운동을 죽이고 변혁적 운동을 죽이고 평화와 통일을 죽이며 민주주의가 개살구가 되는 과정이었다. 진보적 미래가 삭제된 한국사회가 되는 것은 개인의 열정이 사회적 역사적 진보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기껏 저만 살려는 죽음의 경주자가 되는 것으로 낭비됐다. ‘총체적 퇴행!’, 그것이 우리가 만난 지난 20년의 세상이다. 그 퇴행의 일면을 보여 준 것이 메갈리아 논쟁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동으로 확인된 반 여성주의는 변혁적 전투적 노동운동을 탄압 타락시키는 그 논리 그대로다. 노조가 자긍(自矜)이 아니라 기피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페미니즘은 혐오의 다른 말로 취급되었다. 이런 사회적 퇴행 현상으로 변화가 아니라 ‘변질’은 평창 올림픽의 남북 단일팀 문제에서도 발생했다. 촛불로 우리 사회는 퇴행은 막았지만 물꼬는 트지 못했다.  


미투운동은 일반적으로 ‘폭력의 고통과 수치와 책임을 피해자가 뒤집어 씌고 사는 것에 대한 저항’이다. 고통의 가해자에게 가해의 책임을 묻자는 것은 가해자 중심의 체제 인식 그리고 두려움에 대한 절대 저항이다. 우리에겐 촛불 이후 더욱 깊숙하게 변혁해야 할 한국 사회 적폐의 본령을 파고드는 일이다. 형식에 갇혀 죽은 실질적 민주주의를 다시 부활시키는 일이다. 비정규직 노동의 문제, 최저임금을 둘러싼 사회적 논쟁, 갑 질 지배 종속 문화에 대한 앙칼진 저항, 평화와 통일을 향한 새로운 모색 그리고 작금의 미투운동까지 기존 사회 정치 구조로는 담을 수 없는 새로운 변화를 시작하자는 의미다. 가해에 대한 정당한 응징은 가해와 피해를 정면으로 뒤집어 죄의 무게를 통해 평등의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미투운동은 우리 사회의 근본적 변혁의 불가피함을 보여 주며 촛불의 동력이 퇴행을 막는 것을 넘어 역사적 물고를 트자는 외침이다.  


미투MeToo는 ‘나도 피해자’요로 번역하면 안 된다고 한다. ‘나도 고발한다.’가 맞는다고 한다. 80년 광주시민이 역사의 희생자가 아니라 역사의 열사요 전사인 것처럼 미투MeToo를 외치는 이들은 약한 희생자가 아니라 억압과 탄압에 맞서 용기를 낸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의 상처에 머물며 상처를 감싸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그들이 상처와 고통을 딛고 일어선 용기와 함께 해야 한다. 이것이 폭로 고발자들이 용기를 낸 진정한 이유인 가해에 대한 처벌과 함께 ‘다시는 이런 일을 통해 고통 받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는 바람의 진정한 의미다. 그럼으로 위드유WithYou도 피해자 약자에 대한 연민과 동정의 개인적 위로가 아니라 사회적 변화를 향한 동반, 동지의 약속이자 외침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것은 진보적 인물의 개인적 위선이나, 권력형 관계에서 개인의 변태적 일탈이 아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생각 구조 체제와의 투쟁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별짓을 다한다는 ‘목구멍이 포도청’ 논리에 담긴 사이코패스적 인성을 강요하는 자본의 성공 중심의 위계질서와의 싸움이다. 우리 안의 위선적 체면 문화, 문제를 정면으로 보지 않고 기피하는 방관을 통한 묵인 문화를 뒤집는 투쟁이다. 법제도만으로 사람의 존엄이 지켜지지 않음을 확인하며 평등한 인간들에 의한 사람 중심의 사회적 변화를 위한 투쟁이다. 사회적이고 주체적인 자성과 각성의 ‘아픈 매’로 미투MeToo운동을 보고 옹호하자. 불편하고 어색해도 그 불편과 어색이 만든 것이 지금의 현실임을 직시하자.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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