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거대 양당 중 한 축인 제1 야당이 21대 총선을 대비하여 위성정당을 만든다고 한다. 선거법 개정에 따라 이번 선거부터 도입되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에 임하는 전략적 대응 차원이다. 정치세력의 목적은 자파 영향력 확대를 통해 국가권력 장악이 목표이고 따라서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그들 나름의 전략을 수립하는 것은 자연스런 것으로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그런데 살펴야 하는 것은 정치세력이 목표를 선택할 때는 그들의 역할이 국가경영인 만큼 헌법정신의 바탕에서 해야 하는데 그렇게 보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새 제도 즉 ‘준연동형비례대표제’의 취지는 민주주의의 확립인데 그들의 목표는 그런 정신이 바탕이 아니다. 이 제도는 기존 제도에 민주주의 본질에 더욱 가깝도록 보정한 것인데 제도가 가진 흠결(欠缺)을 틈 타 취지에 반하는 행위 곧 위성정당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제도 설치 취지에 반하고 더욱이 거대 정당인 제1야당의 모습으로도 마땅치 않다. 선거 전략이라지만 그 발상이 유치하기 때문이다. 이 제도는 그간 거대 양당이 독식하듯 하던 연동형비례대표제의 민주적 불완전성을 보완하는 것으로 소수 정당에게도 비례대표에 의한 의원 선출 기회를 줌으로 정치의 다양성을 구하고 더불어 개개 국민의 선택을 존중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참고 할 것이 있다. 법률은 국가정책 수립을 위해 제정되고 그 시행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필요한 장치를 마련함으로 법적 안전성을 기하여야 한다. 그런데 장치에 빈틈이 있어 법률 목적 달성에 장애를 가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법률의 흠결으로 이해한다. 제일 야당이 설립한 위성정당은 ‘준연동형비례대표제’ 규정 취지에 부합한다 할 수 업스므로 그 설립을 이런 배경에서 살필 수 있다.
정리를 하면, 그들이 의회 다수당이 되기 위해 선거 전략을 꾸미는 것을 잘못되었다 하지 않지만 그를 위해 선택한 수단은 그렇지 않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준연동형비례대표제 설치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가 하면 민주주의를 해(害)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준연동형비례대표제의 취지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불완전성을 보완함으로 더욱 민주주의적인 제도에의 지향이다. 
준연동형비례대표제를 알아보자. 이 제도는 기존의 제도를 개정한 것으로 의석수는 종전(지역구 253, 비례대표 47)대로 유지하되, 비례대표 47석 중 30석에만 ‘연동형 캡(cap)’을 적용해 연동 률 50%의 준연동형비례대표제를 적용한다. 기존의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정당 득표율에 연동해 의석 배정방식인 데 반해, 이 제도는 정당 득표율에 50%만 연동한 것이어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라 한다. 이 제도의 의의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비례대표 의원 선출 조정으로 군소 정당 배려와 국민 표심의 사표(死票) 화를 최소함으로 국민의 주권 행사 존중에 가치를 두고 있다
취지가 이러한데 비례대표 의원 확보를 위해 일회성 위성정당을 만든 후 선거가 끝나면 흡수 합당함으로 전체 의원 수를 늘리려는 행위는 누가 봐도 꼼수다. 그들이 기대하는 방향은 자기 당 지역구 후보 선택 유권자가 정당 투표에는 위성정당에 투표케 하여 의원수를 늘리겠다는 것인데 이는 국민을 우습게 본다는 증좌다.
정당 설립은 관련 법률 조건을 충족하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만든 정당은 스스로 인정했듯이 위성정당이다. 즉 준연동형비례대표제에 의한 의원 확보를 후 이 정당을 합당하겠다는 청사진의 제시가 그것이다. 그들이 이런 해괴한 발상을 전략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이 제도 취지에 반하는 행위를 금하는 규정을 따로 두지 않은는 때문으고 이는 곧 관련 법률의  흠결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 살필 부분이 있다. 법을 해석할 때 당해 법률 제정 취지와 목적을 살펴야 하는데 재판관이 판결 시 중요하게 살피는 대목이다. 헌법재판소가 그들의 위성정당 명칭에 제동을 건 것은 그런 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의원 수를 늘리려 위성정당 곧 가짜 정당을 만드는 것은 엄밀히 말해 이 제도의 취지에 반한다.
기존의 연동형비례대표제는 사표(死票) 최소화와 더불어 다른 목적도 가진다. 비정치인이지만 특정인의 전문성이 국가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경우 국회진입 기회를 주기 위함으로 의회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대부분의 국가가 도입하고 있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이 제도의 장점에 민주성을 추가한 제도임은 이 사태에 즈음하여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렇듯 준연동비례대표제는 국민 표심 존중에 더하여 정치세력의 다양성과 균형을 꾀함으로 정치의 후진성 탈피와 비정상 국회운영을 개선하고, 그를 통하여 민주주의의 발전을 기하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제일 야당의 위성정당 설립은 제도가 지향하는 민주주의 원리 지행에 저항하는 행위고 그것은 또한 국민을 무시하는 오만(傲慢)의 극치다. 
개인이 특정 목적을 두고 행동하는 것은 자기계발을 통해 명예와 부귀영달을 꾀하고자 함이고, 그러 과정은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지켜야 할 도리가 있는데 그것은 공익을  해하지 않아야 한다. 즉 사익 추구는 법 테두리 내라면 간여 하지 않지만 사회 공동체에 해악(害惡)이 된다면 허용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듯 의회 민주주의의 주체인 국회의원이 법의 흠결을 틈타 법률이 취지하는 바에 반하는 행위는 도리가 아니다. 제도에 흠결이 있게 한 당사자들이 그것을 빌미로 그 취지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정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법률은 정의구현에 존재 이유를 둔다. 독일의 법 철학자 ‘구스타프 라드브르후(  Gustav Radbruch)’는 갈파(喝破)하였다. ‘실정법(實定法)은 준수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정의와 심각한 마찰을 하게 되면 실정법은 정의에게 자리를 내어 주어야한다’(♣2020.02.14.)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하고 하며
다양한 마을활동을 펼치고 있다.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의 책이야기]


나는 이 말을 들어본 적이 있고, 내 뱉어 본 적이 있다. 신이란 어떤 존재인가? 전지전능하며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절대적인 존재. 하지만 그런 신을 대체할 수 있는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신성한 신에 빗대어 진 ‘엄마’라는 역할에 고귀함을 느끼는 동시에 엄청난 부담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사실 나는 ‘엄마’로서 사는 것이 힘에 버거웠다. 첫째아이가 어린이집 다닐 꼬맹이였을 때 우연히 영재테스트를 했는데 결과치가 아주 좋다는 학습지선생님의 말에 학습지를 다섯 과목이나 시킨 적도 있었다. 도서관에 더 자주 데리고 가려고 이리저리 궁리한 적도 있었다. 초등학교에 입학 후 교육비를 줄여보겠다고 내가 직접 수학을 가르치다가 안한다는 아이에게 버럭 화를 내며 문제집을 두 동강내어 던져버린 적도 있었고, 시장을 보고 요리를 일일이 다 해서 먹이고 신랑에게는 바깥일에만 매진 할 수 있게 집안일은 전혀 시키지 않았다. 어느 순간 아이와 가정 일에 집중 된 나의 삶에 우울감이 오는데 감당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이 책에서는 ‘60점 엄마’가 ‘100점 엄마’보다 아이에게 더 좋다고 한다. 하루 종일 아이를 끼고 살았던 시절에, 난 스스로 100점 엄마가 되려고 했었다. 처음엔 아이도 그것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이가 커가면서 서로 부딪히는게 많아지면서 차츰 깨닫게 되었다. 아... 아이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커주지 않는 게 당연한 것이구나. 난 나의 삶이 있는 거구나.
페미니즘이 이슈화 되면서 여성의 자립과 평등에 해한 관점이 급속도로 바뀐 것을 느낀다. 사회만 바뀐 것이 아니라 육아는 엄마의 의도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온 몸으로 체험한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예전의 나와 아주 딴판의 말을 한다. “애는 좀 설렁설렁 키워야 서로 편해요, 옆집아이라고 생각하고 키워 봐요.” 이 책의 저자는 이러한 나의 가치관과 일치하는 든든한 지지자이다.

사실 작가는 정말 힘든 육아를 했다. 아이가 소아암에 걸려 많은 위기를 넘겨야 했고 그 과정에서 엄마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있고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어차피 대세에 지장이 없으니 육아를 너무 열심히 하지 말라고 한다. ‘엄마가 얼마만큼 열심히 하든, 아이는 제 운명대로 자랄 것이라’는 말이 엄마로서의 불안감과 죄책감 같은 원죄를 사하여 주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들렸다. 
경력단절을 겪고 우여곡절 끝에 다시 일하는 엄마가 된 지금 아이들은 내가 걱정했던 것 보다 훨씬 잘 해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친구들과 더 사이좋게 놀고, 자유롭게 TV도 보고, 숙제도 나름 열심히 해간다. 이런 과정에서 혹시나 아이가 아프다 해도 그것은 엄마인 내가 옆에 없었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엄마인 내가 행복하고 어른으로서 자립해 있어야 아이들도 그러한 나를 보고 배울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짧게 책의 내용을 남겨본다.

 - 엄마는 다만 가장 가까운 한 어른으로서,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면서 아이에게 ‘이런 삶도 있단다’를 보여 줄 수 있을 뿐이다. -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활동가  이명신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의 책읽는 어른모임 ‘함박웃음’에서 함께  읽고 올린 글입니다.  

 


우리사회는 고령 사회를 넘어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고 있고 그 정도도 나날이 심화되고 있는데 금천구는 이런 흐름이 빠른 고장 중에 하나로 보인다. 고령사회는 비단 금천구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나라의 문제다. 그렇듯 우리 사회는 어느덧 고령사회를 넘어 초고령 사회로의 진입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다. 
고령사회에 대한 대책은 국가 정책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만큼 이를 민간인신분에다 사회문제 문외한인 필자가 간섭하거나 채근할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사회는 초고령사회는 두고 고령사회 대책조차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당국의 초고령사회에 대한 정책 전개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현재 보이는 정책으로는 과연 그에 대비하는 정책이 마련 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고령화 사회에서 그리고 고령사회에 이르는 시간에서 본 정책을 보니 그렇다. 물론 변화를 느끼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오늘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노인들의 삶의 질을 볼 때 아직은 여러 면에서 미흡하고 부족하다. 


주지하는 사실이지만 이 시대 우리 사회의 노인 상당수는 빈곤세대고 교육 수준도 낮다. 이런 사정으로 사회의 문화흐름은 물론 현대 문명으로 진화되는 사회 환경에의 적응을 제대로 못함으로 사회적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꼰대’로 표현되는  것과 같은 젊은이들에 의한 모멸적 대우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65세 이상 노령자를 대상으로 하는 노인 일자리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참여자의 대부분은 교육 수준이 낮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분이 삼분의 일도 안 되는가 하면 아예 초등학교도 못 다닌 분들도 있었다. 주로 여자 노인이 그런 사정이었지만 남자 노인 중에도 적지 있었다. 어린이들도 쉽게 다루는 스마트폰을 제대로 쓸 줄 모르고 그래서 아직도 구식 폴더 폰을 사용하는 노인들이 많은 것은 이런 사정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필자를 기준 할 때, 당시 초등학교는 국가정책에서 의무교육이지만 어떤 명목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수업료를 징수했다. 그런가 하면 학령에 달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아도 아무 제재가 없었으니 사실 상 의무 교육이 아니다. 이런 사정으로 농촌은 물론 도시에서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 가정이 적지 않았다. 오늘 노인에 이른 세대들의 교육 문제로 인한 지적 수준에 더하여 빈곤의 이유를 유추할 수 있는 역사다. 


당시는 나라가 가난하니 어쩔 수 없는 사회현상이므로 노인들의 교육 문제와 그것으로 이어진 가난을 이야기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겠지만 이런 사정들은 국가의 노인 정책 수립에 중요한 참고가 되어야 한다.
그렇듯이 오늘 우리 사회의 상당수의 노인은 빈곤한데다 교육수준도 낮아 사회의 문명영역에서 소외되고 있고 그 정도는 시간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즉 문명의 발달에 따라 국가정책도 사회 환경도 변화되는데 노인들의 지적 수준으로는 따를 수가 없고 결과적으로 소외의 벽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다사 밀하면 빈곤도 문제지만 문화 소외로 인한 노인들의 상실감은 더 큰 문제다. 


물론 현재의 노인 정책은 이런 사정을 포함한 여러 상황을 감안하여 마련되고 시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현재의 제도들로 제기되는 문제에 대한 맞춤 정책인가는 의문을 넘어 부정적이다. 노인 정책 문외한이 국가 정책을 평가하는 것은 좀 그렇지만 노인의 신분에서 볼 때 현재의 정책은 못 마땅한 게 많다. 


못 마땅한 점 중 상징적으로 제기하고 싶은 것은 경로당 제도다. 이는 오래 전  노인 정책에 대한 제대로의 이해가 없을 때 수립된 것으로 비생산적 노인 정책의 전형이다. 노인 배려가 기조이므로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지만 문제는 운영주체의 자세다. 긴 설명이 필요하므로 요점을 말하면 노인의 자존을 뭉개버리는 것이 경로당 제도다. 노인을 보살핌의 대상으로 두고 펴는 일방적인 수혜차원의 제도는 복지제도인 것은 맞지만 노인의 자존을 챙기는 즉 노인을 예우하는 제도는 아니다. 물론 우리사회에서 경로당과 같은 시스템은 필요하다. 다만 오늘과 같은 형태의 운영은 바꾸어져야 한다. 이런 내용을 포함하여 노인 정책의 미래를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 우리사회는 도시재생이 주요 국가정책이 되어 전국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 사업은 인간 편익의 추구를 과거와는 다른 방법으로 추구하는 사업으로 이해를 한다. 즉  부수고 새로 만들기보다는 현재를 수선하고 바꿈으로 결과물을 양(量)이 아니고 질(質)로 찾는 것으로 곧 패러다임의 대 전환을 구하는 정책이다. 
고령사회 정책도 이러한 흐름 속에서 진행되게 설계되어야 한다. 노인을 배려 대상으로 하는 것은 다르지 않지만 그 접근을 과거와는 다르게 하는 흐름이다. 즉 노인들에게 스스로 자존을 찾게 하는 형식으로 준비되고 운영되는 것이다. 노인들은 생산성의 주역이고 그래서 활동적이어야 함을 자각하도록 하는 것이다. 


국민들에 대한 평생교육은 국가의 중요정책 지향이다. 이 정책에 노인들을 위한 장을 마련하여 그들을 활동적 고령화(Active ageing), 생산적 고령화(Productive ageing)의 주역이 되도록 자극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도시재생 방향은 양(量)보다는 질(質)의 추구인 것을 앞에서 이야기 하였다. 그렇듯 도시재생의 궁극적 목표는 국민의 행복의 질을 향상시키는 사회 환경 조성이다. 그런 일환에서 전국 곳곳에 노인이 행복할 수 있는 노령친화마을(Aging Friendly Community)을 건설하는 정책을 마련할 것을 제안한다. 도시재생은 그로서 본질적 가치 창출을 하게 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2020.02.05.)



필자는 3동에 거주하고 있으며  다양한 마을활동을 펼치고 있다.

베이루트처럼 아름다워... 이라크만큼 슬프다.
시리아처럼 죽음으로 지치다 예멘처럼 파괴되었지.
리비아처럼 상처 곪다가 팔레스타인처럼 잊혀지지.

다른 사람들에게 좋고 나쁨을 날 것으로 들어내는 것에는 아주 오래된 역사와 구조의 비참이 놓여있다. 우리는 백인에겐 관대하고 유색인에게 인색하다. 서구 제국주의 문명, 무엇보다 미국 문명이 지배적 영향을 받은 결과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그 비참의 또 한 장면을 보고 있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와 연관된 ‘중국혐오’다. 바이러스가 만든 혐오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잠재된 혐오가 신종 폐렴을 빙자하여 창궐한 증상이다. 이 현상을 파고들면 우리는 한국 현대사의 민낯을 만난다. 미국의 눈으로 보는 단색의 세상 말이다. 중국혐오 전에 우리는 아랍 이슬람 혐오에 빠졌다. 그 전에는 반공반북의 혐오다. 혐오의 공통점은 미국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언저리 주변으로 찍힌 대상이다. 

미대통령 트럼프가 지난달 28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을 위한 ‘세기의 거래’를 발표했다. 문제는 이 거래가 이스라엘이 원하는 것 다 해주겠다는 것이다. 이 거래가 성사되면 이스라엘은 1967년부터 불법 점령해온 팔레스타인 지역을 병합한다. 요르단 밸리, 동예루살렘, 매년 야금야금 늘려온 불법 유대인 정착촌 등 유엔이 불법 침략으로 규정한 것을 한꺼번에 차지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국제 알 박기에 성공하고 2천년을 산 땅에서 추방된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 영토에 둘러싸인 일련의 폐쇄 도시 구역에 갇힌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국경과 이민, 안보, 영공, 대수층 및 전자기파를 통제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하나였던 악명 높은 반투스탄(흑인 거주 구역 설치)이 부활하는 것이다. 이것은 ‘거래’라 아니라 강도 사기다. 이란 최고 지도자 하이메이는 평한다. “그 계획은 첫째 어리석고, 둘째 사악함의 신호이며 셋째 실행 첫날부터 그들에게 해로울 것이다.. 미국의 그 공작은 트럼프보다 먼저 사망할 것이다”

미국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그 지배의 룰은 오직 미국의 이해관계다. 아니면 세상은 결국 힘이고 억울하면 힘을 가져라 는 야만의 세상이다. 우리는 올해 들어 이른바 한미 주둔군 방위비 논란에서 그 일방적 폭력성을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다. 그 결과 평화 인권 존중 공존을 원하는 이들에게 지금의 세상은 오직 ‘저항만이 의무’가 된다. 왜 그런가하면 트럼프의 정책이란 것이 미국의 이상(異常)현상이 아니다. 미국의 본심이 날 것으로 들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민주당 대선 후보들이 트럼프의 ‘세기의 거래’를 세기의 사기로 규탄하지만 오바마도 클린턴도 이스라엘의 침략 지배에 대해 묵인 동조해 왔다. 양아치나 조폭이나 서민들에겐 그저 상종 못할 폭력일 뿐이란 말이다. 그래서 미국과 친하면 핵을 가져도 남의 나라를 침략해도 그것을 인종적으로 지배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악한 상징이 바로 이스라엘의 존재다. 

인간의 사악함은 종종 자기의 경험을 극단화하고 단절하는 데에서 파생된다. 이스라엘은 히틀러에게 인종 청소를 당한 나찌의 희생자로서 명백하게 폭력의 피해자지만 2천년을 넘게 살아온 팔레스탄인 2천만명을 추방하고 점령하며 청소 중인 가해자다. 하지만 자기들의 오래전 피해는 극단으로 현실화하고 명백한 현실은 눈 감는다. 내가 입은 상처를 이유로 다른 이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그것은 범죄다. 하지만 가능하다고 믿는 순간 상처는 혐오와 비참의 흉기가 된다. ‘비판과 성찰’조차 자기가 받은 상처를 키우는 것으로 본다. 친 팔레스타인이 미국과 유럽에서 반유대주의가 되는 순간이다. 이 무지와 맹목의 사슬에 갇혀 버리면 세상은 혐오하지 않으면 혐오 당하는 지옥이 된다. 이 지옥의 다른 이름이 이기, 경쟁, 탐욕, 배타, 배제, 유대의 파괴가 사회구성의 근본인 자본주의적 체제의 폭력적 완성인 제국주의다. 모두가 모두에게 제국주의자가 되고 싶은 이 참혹함에서 아무도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 현실 인간 존재들, 자본주의형 인간들의 근본적 비극이다. 

 

그래서 오늘도 팔레스타인의 한 청년은 말한다. 
우리는 남아 있을 거야 당신들의 가슴에 담벼락처럼,
그리고 당신의 목에 유리 조각처럼, 선인장 가시처럼, 
그리고 당신의 눈에서 불의 폭풍으로.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소

 

 

 월요분과로 옮기고 나서 처음으로 내 순번으로 정해진 책이다. 겉표지만 보고는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인가보다 하고 가볍게 생각했는데 책을 읽어보니 가난하여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애쓰고 욕심 없이 살다간 진정한 의사 이야기였다. 신앙심이 깊었고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며 무료 병원을 여는 등 많은 사람에게 큰 도움을 주었던 정말 훌륭한 의사선생님의 일대기를 알 수 있는 책이었다.
 동의보감에서 보면 ‘심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심의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늘 편안케 하는 인격을 지닌 인물로 병자가 그 의원의 눈빛만 보고도 마음의 안정을 느끼는 경지에 있다. 그건 의원이 병자에 대해 진실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가짐이 있고서야 가능한 품격이다. 장기려 박사야말로 ‘한국의 슈바이처’ ‘사랑의 의사’ ‘무소유의 삶’을 몸소 실천하며 돌아가실 때까지 수많은 어려운 환자들을 돌봐주셨던 의사였다.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장기려 박사님의 미담들과 중간중간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희생의 봉사 정신을 실천하는 박사님은 멋있고 존경스럽지만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가족들을 힘들지 않았을까? 나 자신도 챙기고 내 가족도 챙겨가면서 주변 사람들도 챙겨주면 좋을 텐데 뭔가 가족들에게는 무심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가지게 되면서 조금 화가 나는 부분도 있었다. 
 의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필독서로 지정되어 읽고 뭔가 가슴에 뜨거운 열정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책이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죽기 전까지 저런 마음으로 봉사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해주는 책이었다. 마지막으로 장기려 박사님이 남기신 시 한편과 좌우명도 공유한다. 

 

 

송도 앞바다를 바라보면서

                              장기려

수도꼭지엔 언제나 시원한 물이 나온다.
지난겨울엔 연탄이 떨어지지 않았다.
쌀독에 쌀은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도 세끼 밥을 먹었다.

사랑하는 부모님이 계신다.
언제나 그리운 이가 있다.
고양이 한 마리 정도는 더 키울 수 있다.
그 놈이 새끼를 낳아도 걱정할 일이 못 된다.

보고 듣고 말함에 불편함이 없다.
슬프게 울고 기쁨에 웃을 수 있다.
사진첩에 추억이 있다.
기쁠 때 볼 사람이 있다.
슬플 때 볼 바다가 있다.
그리고 ........세상에 사랑이 있다.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활동가 임선명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의 책읽는 어른모임 ‘함박웃음’에서 함께  읽고 올린 글입니다.  

 

문재인 정부 2기 국무총리에 직전 국회의장이었던 분이 선임되었다. 우리나라 정부 구성에서 전 국회의장이 국무총리가 되는 것은 선례가 없던 터라 이례적이다. 그래서인지 야당에서는 삼권분립 정신 위배니 국회 경시니 하고 비난일색이다. 그러나 삼권분립인 대통령제 국가라 해서 국회의장을 지낸 분이 국무총리가 되는 것은 야당의 주장대로 잘못된 정부 구성인가는 챙길만한 다툼은 아닌 것 같다. 정부 조직은 헌법 정신에 따른 법률규정에 의하고 그에 따른 인사권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는 점과 피지명자가 지명을 수락한 것이 그 이유다.


새 국무총리는 취임 일성으로 협치(協治)를 이야기 한다. 정치세력 간 서로 협력하는 정치를 펼치겠다는 포부를 말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대통령이 국무총리를 지명을 하면서도 협치를 기대할만한 분이라 하면서 내각이 앞장 서 협치 정치를 펴 주기를 요청한다 하였다. 정치 최고지도자들이 입을 맞추어 협치를 이야기하는 의도는 무엇일까?


공화정치(共和政治)에서 정치의 행태는 협치의 바탕에서 진행되어가는 것이 순리이자 원칙이라 생각한다. 즉 국가의 경영은 정부 조직들은 물론 유관 기관들이 서로 협력하여 수행해 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한편 이상(理想)을 달리하는 정파 간에도 협력해야 할 정책은 비록 비판적이라도 함께 해야 한다. 더욱이 민생이나 안보와 같이 국가의 중대 사안에서는 더욱 그렇다. 


솔직히 우리 정치에서는 이런 부분에서는 부끄럽기 짝이 없다. 정책의 선악(善惡)은 따지지 않고 단지 타 정당에서 제의한 건은 반대를 하는 것이 기본 기조다. 간혹 과정 중에 타협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국민들이 볼 때 공감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정파 간 공통적 이해 문제이거나 더는 물러설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을 때 다른 선택이 없는 것이 그런 경우이기 때문이다. 
국가 정책을 두고 정파 간에 견해를 달리하는 경우 비판적 대립을 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문제는 그것의 국가적 사회적 공익성은 둔 체 자당의 존재감을 내세을 목적만으로 무조건적 반대로 일관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물론 반대 명분이 이해되는 경우도 있으나 그에 맞갖은 현상 즉 현상을 바꿀 마땅한 대안은 거의 볼 수가 없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대부분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우리 정치에서 이런 모습은 상례가 된지 오래다. 
정치라는 무대는 국민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각종 수단을 마련하는 현장이고 정치인들은 그것의 수행이 임무다. 정파 간이던 개인적이던 의견을 내고 주장을 하고 그런 과정에서 다툼이 있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지 나무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다툼에 생산성은 두고라도 정당성 기대를 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협치의 필요성은 비단 정치판만의 문제가 아닌 것은 많은 사람이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는 소통을 통한 화합이 필요한 곳이 너무 많다. 정치세력인 정파와 정파 간은 물론 관과 관, 관과 민 그리고 민과 민이 관계에서조차 그런 필요성은 제기된다. 그렇듯 우리 사회에는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들이 범람하고 그것은 갈등요인이 되어 사회문제로 발전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대상 간 소통의 부재가 그 근본 이유다. 공동체는 이해를 달리하는 여러 계층이 혼재하고 그래서 다양한 의견들이 제기되는데 이의 소통이 원만치 못하고 그래서 이견이 생기고 다툼으로 발전한다. 소통은 서로가 협력해야 할 경우 반드시 필요하고 이해관계일 경우 더욱 그렇다. 공적인 사안은 공동체 구성원이 서로의 고유 영역이라도 함께 의논하고 협력한다면 더 좋은 결과를 더 빨리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소통이 필요하고 그런 과정이 곧 협치다. 
여기서의 ‘협치’는 ‘사회 일반  지역 사회에서 국제 사회에 이르기까지 여러 공공 조직의 업무를 관리하기 위하여 정치ㆍ경제ㆍ행정적 권한을 행사하는 국정 관리 체계. 행정 서비스 공급 체계의 복합적 기능에 중점을 두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요지를 말하면, 정부의 부처나 기관들이 정파 소속에 관계없이 서로 협력하면 성과를 기대할 수 있고 정치권의 협치로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협치 이야기가 회자된 것은 꽤 오래 되었고 특히 주민참여가 이뤄지고 있는 자치구에서는 주민과 공무원이 구성원이 되어 협치 회의를 운영하고 있는 곳도 있다. 민과 관 또는 민과 민이 서로 협력하여 행정 사무 등 현안을 함께 심의하고 시행하자는 것으로 이는 좋은 성과의 기대는 물론 소통을 통한 공동체의 화합도 이뤄내게 된다. 
대통령이 4월 총선 후 야당 인사들을 포함하는 ‘협치 내각’을 구성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언급을 했다. 즉 행정 부처의 장을 임명함에 여·야를 가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지만 평가할만한 결과는 없었기에 기대를 가지는 것은 섣부르다. 그러함에도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그간의 우리 정치판이 후진적인데다 비생산적이라 어떤 형태로던 변화가 요구되는 시점인 만큼 시의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2020년은 21대 국회 구성을 위한 선거가 있는 해다. 아무쪼록 그간의 고약한 정치행태의 개선을 기대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일사불란(一絲不亂)이 선(善)인  우리 정치판의 질서가 재편되고 그로서 패거리 문화에 다름 아닌 진영논리를 깨뜨리는 환경 조성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대통령의 협치 내각 제안은 그런 기회를 만드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2020.01.20.)

필자는3동에 거주하고 있으며 
다양한 마을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난 신문에 유성훈 구청장이 여민가의(與民可矣)의 자세로 새해 업무에 임하겠다는 보도가 있었다. 여민동락(與民同樂)이라는 말은 익숙한데 여민가의는 생소하여 찾아보니, 조선조 세종의 말이라 한다. 1425년(세종 7년)은 20년 이래 극심한 가뭄이 들었다. 세종은 벼농사의 형편을 알아보기 위해 도성 서문 밖에 은평구와 서대문구 지역을 살폈다. 세종은 벼가 잘 되지 않은 곳에 이르면 반드시 농부에게 물었다고 한다. 여민가의 정신의 시작인 ‘문어농부’(問於農夫)였다. 그로부터 5년 후 1430년(세종 12년) 경상도 관찰사가 개간 밭에 면세를 하라는 시책에 대해 개간 밭을 구분하기 어려우니 일괄해서 세금을 부가하자는 건의를 했다. 이 행정적 편의주의와 세수 증대를 위한 관료적 건의에 대해 세종은 단호하게 말한다. “어찌 구분을 할 수 없다는 말인가 일이 의심스럽다면 백성과 같이 하면 된다.”고 했다. 백성과 같이하라, 백성에게 묻고 백성의 뜻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여민가의(與民可矣)정신이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여민이 측근도 벼슬아치도 살만한 사람들도 아닌 ‘벼가 죽은 논의 농민, 개간이라는 고난을 견딘 농민’들이란 점이다. 

여민(與民)을 이해하기위해 홍길동의 저자 허균의 ‘호민론’도 상기할만하다. 허균은 ‘호민론’에서 천하의 가장 무서운 존재는 오직 백성이라며 백성들을 항민(恒民)ㆍ원민(怨民)ㆍ호민(豪民)으로 분류한다. 항민은 관에 순종하며 관의 눈치를 보며 굽실거리는 백성, 원민은 관의 착취에 원성(怨聲)을 내며 불만을 갖지만 저항할 줄 모르는 백성, 호민은 잘못된 정치와 사회구조에 대해 지배 질서와 다르게 생각하여 나라에 변고가 생기면 원하는 바를 일거에 이루려고 하는 저항할 줄 아는 백성이라고 했다. 허균은 호민의 모습을 홍길동을 통해 그려냈고, 허균 자신도 체제변혁을 모색했다고 모반죄명으로 형장의 이슬이 사라진다. 

정치가 주목해야 할 민(民)이란 빈민(貧民)이자 난민(難民)이자 저항민(抵抗民)이다. 사회적으로 낮고 가난한 사람들, 어려움에 처해 아픈 사람들, 어려움과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 나선 사람들이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보고 들어야 할 민(民)이다. 문재인 정부가 시작했을 때 유시민은 어용지식인이 되겠다고 공언했다. 노무현 대통령처럼 상실의 큰 슬픔을 예방하기 위해 싸우겠다는 말이다. 나는 노무현 정권 당시에도 대통령 노무현의 성공은 노무현에 대한 칭찬이 아니라 비판에서, 대통령에 대한 옹호로 ‘방어가 아니라 투명한 진실의 공개와 신속한 성찰’이 필요한 것이라 했다. 하지만 최악을 위해 차악은 감수하자는 논리는 진영이 되어 비판은 비난이 되고 다름은 적대로 몰고 만다. 어용지식인이란 선언은 진영논리의 끝판 왕이자 권력을 위해 민과 맞서겠다는 대민(對民) 적대선언이었다. 천박함이다. 

유성훈 구청장은 여민가의를 말하면서 말의 유래와 의미를 깊이 궁리(窮理)했을까? 그러길 바란다. 그렇다면 측근의 말의 달콤함이 아니라 비판자들의 쓴 맛이 진정한 여민의 길임을 알 테니 말이다. 나는 이글을 쓰는 동안 과천 마사회부터 청와대까지 오체투지 행진단에 동참했다. 부산에 경마장이 생긴 뒤에 7명,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서 4명이 동일한 이유로 동일한 죽음을 당했다. 하지만 마사회는 업무를 위탁했다면 책임을 회피하고 사과 한마디 없고, 다시는 동일한 죽음을 반복할 수 없는 유족들은 시신을 이고 광화문에 운구를 모시고 청와대의 해결을 요구해도 청와대는 응답이 없다. 만나고 싶은 이들만 만나면서 여민(與民)이라는 것은 정말 지독한 거짓말이거나 위선이다. 그 거짓말과 위선은 자기들의 정치권력을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적폐를 부활 완성시키는 것이고 자신이 적폐화 하는 것이다.  

금천구도 마찬가지다. 신문을 통해 보면 구청장의 이해관계와 다른 점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별별 이유를 들어 배제되는 경우가 있는 모양이다. 그 과정에서 불거진 몇 가지 소동과 소문은 구청장이 민과 더불어 가는 대신 민과 대립해 진영논리를 완성하고 말겠다는 오기로 비쳐진다. 고인 물이 되고 있는 증거다. 2020년 새해가 시작됐다. 여민가의(與民可矣) 자세를 발굴해 강조한 구청장이니 민과 더불어 살기 위해 측근과 관료와 달콤함에서 벗어나는 쓴 소리와 다름에서 여민을 구현하는 회심(悔心)의 계기로 여민가의정신이 작동되길 기대해 본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소

미국이 이란의 군 사령관을 테러 암살하고 이에 대하여 이란이 국민적 분노를 실어 이라크 내 미국기지에 대해 미사일 타격을 가한 후에 나온 미국 대통령 트럼프의 일성이다. 트럼프는 트윗과 성명을 통해 이란 군 수뇌부의 살해에 비해 미 국민은 아무도 죽지 않았다고 둘러대며 미 이란 간 전운(戰雲)은 경제 제제로 돌린다며 한발 물러났다. 이게 장사꾼 트럼프의 배포 수준이다. 이란은 미국의 비공식 암살 테러에 정식 군사작전으로 대응을 했다. 이라크 정부에 사전에 통보하고 이라크 내 미군기지에 대한 타격을 했고, 아마도 이라크 정부는 이를 미국에게 알려 미리 군인들을 피신시켜 인명살상을 최소화하게 한 과정으로 보인다. 이를 국가 간의 정상적 절차를 볼 것인지 한국의 뉴스처럼 확전을 피하고 싶고 국민들의 분노에도 응해야 하는 이란 정권의 궁여지책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미국의 일방적 폭거와 이라크와 인명을 생각하는 이란의 모습은 참으로 선명하게 야만과 이성으로 대비된다. 


미국은 전쟁국가다. 그들은 전쟁과 전쟁에 준하는 조건에서만 가능한 국가구조, 산업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쉼 없이 적을 만들고 그 적을 사탄으로 만들고 긴장과 전쟁을 키운다. 미국의 전쟁은 전쟁 상대국의 이유에 의해 발생되지 않는다. 있다면 유일하게 진주만을 친 일본 군국주의지만 그것조차 미국에 의해 일본이 석유 금수 등 압박을 받으며 유발된 전쟁이다. 한국에서 베트남에서 그리고 아랍에서 미국의 전쟁은 미국의 이해 또는 정권의 이해득실에 의해 유발되고 조작된다. 이번 이란에 대한 공격도 트럼프 정부의 일방적인 약속의 파기와 압박도 모자라, 있는지도 모르고 더욱이 발생되지도 않는 이유로, 그러니깐 트럼프 정부가 궁예의 ‘관심법’을 동원해 이란군 사령관을 암습 폭사시킨 것이다. 묻지만 국가테러 범죄다. 이에 대해 세계 모든 나라는 유엔은 즉각적인 규탄과 제제를 가해야 한다, 하지만 러시아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나라는 침묵하거나 이란의 자제만 요구했고, 이란이 반격하자 유럽을 중심으로 일제히 규탄 성명을 발표한다. 이런 무도하고 터무니없고 불공평한 행사가 있을 수 있을까? 슬프게도 지금 세상은 불의한 불공평이 일상이다. 북한에 대한 미국과 유럽과 유엔의 폭거가 확실한 증거다. 


이란의 공격에 미국 군인이 죽지 않았고 그래서 확전이 자제되었다니 다행이다. 갑자기 쌍용자동차 77일 파업 투쟁이 생각난다. 도장 공장을 중심으로 노조가 파업을 하고 있었다. 인화(引火)물질이 많아 쌍방 자제가 필요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찰과 구사대는 점거 노동자들을 공격하면서 그 도장 공장에 고의적으로 불을 지른다. 농성 노동자들은 그 불을 끄느냐 정신없었고. 정말 위험한 것은 강폭(强暴)한 힘에 저항하는 약자들이 아니다. 약자를 멸시하며 힘을 과시하려는 강자들의 행동에 진정한 위험이 있다. 오바마의 빈 라덴 이후 미국 대통령들은 국가적 암살 테러, 국내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남의 나라 주권과 인명을 유린하는 이 범죄에 중독된 모양새다. 하지만 제국주의자들의 오만은 상대에 따라 다르다. 수십 명이 압사를 하는 것에도 끌 수 없는 이란 민중들의 분노, 미국의 강도적인 폭력 테러와 억지에 말문이 막힌 세계, 지금 우리가 보는 장면은 명백하게 미 제국주의의 타락이고 몰락 과정이다. 


이번 미국의 패악과 이란의 대응을 통해 증명된 것은 무엇일까? 미국의 야만과 억지다. 군사적으로 보면 이란 사령관의 살해지만, 예고된 폭격도 막을 수 없는 미국의 방공망, 미국이 자랑한 패트리어트나 사드 같은 무기체제가 그냥 돈 쳐 바른 쇼윈도라는 것도 있다. 나아가 반미의 이유, 반미가 평화임을 우리는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그래서 트럼프와 달리 우리는 ‘괜찮지 않다’. 전쟁은 언제 어디선지 우리와 무관하게 돈과 권력을 쥔 강자들의 의도에 의해 결정되는 것임을 다시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반전 평화도 반미 반제에서 오는 것임을, 그 방향에서 국제적 연대와 우애가 결집되어야 한다는 것을 깊게 되길 교훈이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소

한쪽 눈을 내놓을 만큼의 간절함이 있는가?

 

결혼하고 3년쯤 된 어느 날이었다.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신혼 일기’라는 제목으로 원고 청탁이 들어왔는데 해보겠냐고 했다. 무슨 용기가 났는지 해보고 싶어졌다. 
노트 한 권을 앞에 놓고, 첫 문장과 싸움이 시작됐다. 그동안 주고받은 편지 이야기로 시작하면 좋을 듯한데, 멋진 문장으로 만들어지지가 않는다. 극적인 상황을 만들어야 될 것 같은 조바심 때문이었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가, 대청소를 하며 발견한 편지 뭉치로 서두를 잡았다. 첫 문장이 잡히자 수월하게 글이 써졌다. 여러 번 고치고 다듬어진 글을 남편에게 내밀었다. 전체적으로 내용은 괜찮은데 도입부가 너무 작위적이라며, 솔직하게 고쳐보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솔직하게라.’ 이 글을 시작한 최초의 사건은 한 통의 전화다. 전화를 받는 것으로 시작해 빛이 바래가는 편지를 찾아 읽으며, 새삼 추억에 잠겼던 상황으로 바꿨다. 글이 자연스럽고 읽기에 편했다. 
신문에 활자화되어 나온 글은 무척 매혹적이었다. 글도 쓰냐고 하는 지인들의 말도 나를 들뜨게 했다. 그 낯선 느낌이 좋아 지금까지 놓지 못하고 이렇게 밤을 밝히고 있는 것이리라. 그 작은 사건을 통해, 글을 쓰는 것은 남다른 체험과 깊은 사색과 통찰력으로 무장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하고 독창적인 작업이란 생각을 버리게 되었다. 좋은 글감이나 주제를 만나면 짧게 메모하는 습관도 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소한 일상을 나만의 느낌과 감각으로 풀어보는 연습도 했다. 점차 첫 문장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고, 생각의 흐름을 좇으며, 그 물결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게 글자로 묶어 놓았다. 편집 과정을 거치며 주제가 달라지는 일도 있었지만, 그 역시 자연스런 일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한걸음씩 나아가다보니 책을 출판하게 되었고, 인터넷이나 신문에도 꾸준히 글을 쓰게 되었는데, 어느 순간 내 글이 나아지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상품성 있는 글을 쓸 수 있는 깜냥이 되는지 알고 싶어졌다. 출판사 편집장에게 두어 편의 글을 보내며, 비평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단편소설 정도 길이의 글을 기대했다는 회신이 왔다. 내 글은 점점 짧아지고 간결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순간 당황했다. 
잠시 글을 배운 적이 있는데, 그 영향력이 컸다. 선생님은 자주, ‘소피아 씨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요. 하나의 주제에만 초점을 맞춰 보세요.’ ‘지금 쓰신 글을 두 개의 글로 나눠 봐요.’ 라는 주문을 하시곤 하셨다. 스마트 폰으로 글을 읽는 시대이기 때문에 길면 지루해져 읽히지 않는다며, A4용지 반 정도로 줄이라는 말과 함께. 나 역시 너무 긴 글은 읽다가 말던 경험을 자주 한터라 그 말에 동의했다. 형용사나 부사를 최대한 줄이고 문장 역시 복문은 지양하고, 단문으로 고쳐 쓰는 연습도 병행했다. 글은 점점 군더더기가 없어졌다.
편집장의 말은 그동안의 내 글쓰기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나의 주제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이해력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깊이 있는 글을 길어 올려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변해갔다. 그 후, 글을 쓰는 게 다시 어려워졌다. 때론 간결하고 짧게, 때론 풍성하고 깊이 있고 길게, 왜 그렇게 자유자재의 글쓰기가 안 되는 것일까?
꽃꽂이를 하면서도 늘 느끼는 감정이다. 여백의 미를 추구하고, 선을 살리는 동양 꽃꽂이를 무척 좋아했다. 지나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간결함을 즐겼다. 덜어낼수록 좋았다. 그러다 전례 꽃꽂이를 접하며 많이 변했다. 다양한 소재와 색상의 꽃들을 사용해 풍성하고 화려하게 장식을 하기 때문이다. 뭐가 더 낫고 나쁜 게 아니고,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소재와 색상, 꽃의 크기를 염두에 두고 장소와 분위기 등을 고려하며 자유자재로 나를 표현해야 하는 데, 그만큼의 역량이 되지 못하는 탓이다.
얼마 전에 북유럽 신화 속의 오딘과 만났다. 그는 지혜에 목말라했다. ‘지혜의 샘물’을 얻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지혜의 샘에 도착해, 자신의 한쪽 눈을 바치고 그토록 원했던 지혜를 얻는다. 그러고도 모자라 ‘내세의 지혜’까지 갖기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이라 여긴 목숨마저 기꺼이 내놓는다. 9일후 다시 살아난 그는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까지 알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애꾸눈이 부끄러워 항상 넓은 챙을 가진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고 한다. 내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도 지혜다. 나는 얼마나 간절한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고 해도 지혜를 위해서라면 도박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한쪽 눈을 내놓진 못할 것 같다. 평생 넓은 챙 모자를 쓰고 다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다양한 경험, 많은 습작만으로는 임계점을 치고 올라가기가 어렵다. 타고난 그릇이 작은 나로서는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정녕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거인의 어깨를 빌리는 방법 밖에 없는 것인가?

탄자니아에서 소피아




 

노동상담센터가 만난 세상- no.208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김용균이란 24살 젊은이가 일하다 목이 잘리고 몸통이 짓이겨져 죽은 지 벌써 1년,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되고 진상이 조사되고 불행이 재발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권고했지만 단 하나도 변하지 않는 시간 1년입니다. 외려 정부와 국회는 죽음의 노동을 강화하는 노동법 개악에 애를 쓰고 있습니다. 용균이 엄마 김미숙씨는 가정만 잘 지키면 우리 가족 행복할 줄 알았는데 우리 이웃을 지키지 못하면 가족도 지켜지지 않는 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아들이 죽고서야 알았다고 눈물입니다. 
그래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죽음의 노동에 맞서 ‘우리가 김용균이다.’다고 외치자 이 산 김용균들을 위해 현실이 주는 절망에 지지 않겠다고 외칩니다. 한 사람의 죽음은 한 우주의 죽음입니다. 단지 하나의 무심한 숫자가 아닙니다. 이것을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 공화제의 전제입니다. 한국의 민주주의의 조국과 박근혜가 아니라 김용균의 죽음을 보는 우리의 자세와 의지가 보여 줍니다. 그 의지가 생생한 시 한수룰 우리 구로공단의 시인 송경동이 1주기 추모집회에서 낭송한 시로 대신합니다.   문재훈 소장(남부노동상담센터)

 

물론 우리는 알고 있다

고 김용균 청년비정규직 1주기에 부쳐
시인 송경동

물론 우리가 개돼지보다
나은 대접이란 건 안다
지난 돼지열병 때
기껏 십 수 마리가 발병으로 죽자
산돼지 25만 마리가 도살당했다
2011년 구제역 때는 128만 마리
조류인풀루엔자 때는 닭 41만 마리가
생매장 당했다. 죽을 위험이 있다고
그 모두를 죽여 버리는 잔인한 세상

물론 우리도 개돼지만한
처우라는 것도 잘 안다
하루 여섯 명씩 일수 붇듯
착실히 년 2500명이 죽어가는
무자비한 산재살인세상이 수십 년이 되었지만
그들은 어떤 예방 활동도 조치도 하지 않았다
원인인 자본가들의 불의와
관료정치인들의 협잡은 격리 차단되지 않았다
백신이 되어야 할
법과 제도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 사이
김용균은 오늘도 죽었다
내일도 모레도 착실하게 죽을 것이다
오늘은 머리가 깨지고 내일은 롤러에 말리고
모레는 터져죽고 치어죽고 깔려죽을 것이다
살처분 당하기 전에 알아서 생을 묻는 이들로
OECD 자살공화국 1위가 된 지는 오래

그 사이
30대 재벌 사내유보금은
해마다 50조씩 공손히 쌓여
2019년 950조가 되었다
시중에 금괴는 없어서 못 팔고
부동산 가격은 2000조가 뛰었단다.

그 사이
일 잘하는 정부와 국회가 나서서
최저임금은 산입범위 확대로 조삼모사
52시간제는 탄력근로제 확대로 누더기
산업재해보상법은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
ILO협약비준과 지소미아 핑계로
박근혜도 못한 노동3권 개악

그 사이
수구보수는 다시 복권되어 널뛰고
다시 실력과 유능이 된 특권과 불공정
제국주의 미국과 대재벌 삼성과
손잡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사냐는 협박
민주당이 20년은 집권해야 민주화되니
그때까지 가만히 있으라는 폭력

이런 세상에서
또 다른 김용균이 오늘도 죽고
내일도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저들이 우리를 개돼지
닭 보듯 않게 하려면 어떡해야 하는가
잃었던 분노를 다시 새겨라
유보했던 저항의 뇌관을 터트려라
새로운 국가는 새로운 인민들이 만드는 법
오직 우리가 진정한 역사의 주인으로 설 때
모든 적폐가 뿌리 뽑히고
해방이 온다는 것을 잊지 말자.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책이야기 208

 

수레바퀴돌듯 일상이 돌아가지만 차 한 잔 잠시 마시거나 하늘 한 번 올려다 볼 여유 정도는 갖고있어서 다행입니다. 거기에 조금 더 호사를 부려 책을 보거나 그림감상을 하며 사색에 빠지고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연말이 다가오며 마음은 들뜨고 몸은 바빠져 어수선하기만하고 책이 눈에 들어올리 만무합니다. 그런데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이 와중에 우연히 이 책을 만나다니... 햇살이 드는 창가에 여유롭게 앉아있는 한 여자가 있는 표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작가는 매일 그림을 그리고 매일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글만, 아니면 그림만 그리는 경우가 더 많으니 이 사실 또한 책을 더 특별하게 만든 이유였습니다. 이 책은 ‘방’을 매개로 펼쳐지는 여러 삶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 에세이인데, 작가는 마치 그 그림 속으로 들어가서 그 안의 주인공과 만나고 온 것처럼 당시의 상황과 뒷이야기와 주변의 작은 소품들이 흩어진 연유까지 섬세하게 글로 담아냈습니다. 가끔씩은 어디부터가 작가 개인의 감상이고 어디부터가 그림에 대한 이야기인지 경계선이 모호하게 느껴졌고 그것은 오히려 이야기에 더 깊게 빠져들게 만드는 요소였습니다. 그리고 미술 교과서에 나온 유명한 인상파화가정도만 알던 나에게 네이버에 검색해도 자료가 쉽게 나오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화가들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작가의 감상적인 이야기와 그림에 대한 해석을 들으면서 어느새 저도 공감하고 위로받고 있었습니다.

그림이란 것은 우리의 삶과 절대 떨어져있을 수 없고, 우리가 스쳐지나가는 모든 일상들은 한폭의 그림으로 담아 영원히 남길만한 가치가 있는 중요한 장면들인 것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 이불자락을 움켜쥐고 꼼지락거리는 아이의 모습도, 식구들과 한자리에 앉아 담담하게 밥을 먹는 모습도, 퇴근길에 슈퍼에 들러 아이들을 생각하며 아이스크림을 고르는 저의 모습도 소중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란 것을 말입니다... 소확행과 비슷한 말일 수 있을까요. 우리의 일상 자체가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인데 화려하거나 색다르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그 가치를 모르고 살았구나 싶었습니다. 작가가 말하는 ‘방’은 우리의 일상과 기억, 희로애락이 녹아있는 수많은 시간과 사건의 공간을 말합니다. ‘방’에서 우리는 숨기도 하고, 지키기도 하고, 도전하기도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책을 보다보면 또 하나의 재미난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예전과 지금을 비교해보는 것입니다. 프랜시스 루이스 모라가 1914년에 그린 「뉴욕시티의 지하철 탑승객들」이란 그림 속에서 사람들이 하나같이 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신문. 이 광경을 너무나 익숙하게 어디서 본 것 같았습니다. 신문을 핸드폰으로 바꾸니 영락없이 지금과 똑같습니다! 그림을 다시 들여다보며 혼자 웃었습니다. ‘시대가 이렇게 바뀐 것이었네,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바뀐거네.’ 하면서요. 이 그림은 유난히도 제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항상 미래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이 있는데 그 변화가 근본적인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동굴에 살았던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집에 살고, 마차를 탄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차를 타는 것처럼 말입니다. 

올해가 끝나가는 이 즈음 짧은 여유의 시간이 난다면 이 책을 살짝 들여다보세요. 
우리의 소소한 일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까지 얻을 수 있을 꺼예요.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활동가 이명신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의 책읽는 어른모임 ‘함박웃음’에서 함께  읽고 올린 글입니다.  

저자 우지현 출판 위즈덤하우스

 

“통일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노희재/ 금나래 초등학교 6학년
기자단 활동을 하기 전까지 나는 통일이 되면 대한민국이 북한을 먹여 살려야 해서 세금을 많이 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굳이 통일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평화 통일 날개 기자단 활동 하고 난 후 휴전 상태를 유지하는데 드는 국방비가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통일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든다는 사실도.  하지만 통일이 되면 지금까지 쓰였던 국방비, 통일비용 보다 훨씬 많은 경제적 이익이 생긴다고 한다. 강의를 듣고 나서 ‘굳이 통일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 대신 ‘꼭 통일이 돼야 한다’는 마인드를 가질 수 있었다.

“평화 날개 기자단에 대한 나의 생각” 
박소은/ 두산초등학교 5학년 

 오늘은 평화 ‘날개’ 기자단 마지막 날이다. 나는 사실 평화나 통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지금도 관심이 많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자단 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경험과 지식을 쌓을 수 있었고  평화와 통일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많은 것을 배워서 좋았다. 그래도 아직 모르는 것이 있어 조금만 더 배우고 싶다. 기자단에서 여행도 가고 모르는 걸 가르쳐 줘서 좋았다. 하지만 과제를 하는 건 조금 힘들었다. 
 기억에 남는 건 강화도에 가서 전망대로 북한을 보았을 때 기분이 제일 좋았다. 기회가 되면 또 가보고 싶다. 기자단을 하면서 여러 활동들을 해서 재미있었지만 기자단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선생님과 친구들을 못만나서 아쉽다. 다음에 또 이런 기회가 있으면 참여하고 싶다. 

“내가 생각하는 기자” 
노희원/금나래 초등학교 5학년

  기자단 활동 후 느낀 점은 기자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안 것 같다. 왜냐하면 예전에 기자라고 하면 그냥 글 쓰고 사진 붙이고 돌아다니면 되는 쉬운 직업인 줄 알았다. 그런데 평화의 날개 기자단을 해보니 글을 쓰는 것은 힘들지만 보람차고, 사진을 찍는 것 역시 힘들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걸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어서 좋았다. 기자라는 직업이 힘들지만 뿌듯하고 행복한 직업이라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됐다.
 그렇다고 기자가 쉬운 게 아니다. 왜냐하면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하는 과정을 여러 번 거쳐야 기사가 만들어진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기자가 된다면 사람들에게 정직하고 특별한 기자가 되고 싶다.

“평화, 통일에 대해 좀더 생각할 수 있게 됐다”
이채원/ 두산초등학교 5학년 

 벌써 평화날개 기자단 7회 수업을 마쳤다. 평화 날개 기자단을 하면서 평화와 통일의 의미를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또, 8월 강화도 기행을 갔다온 후 원래 북한은 멀고 다른 나라만 인줄 알았는데, ‘우리가 수영을 해서 갈 수 있는 나라’라니, 신기했다.
  나는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북한의 자원에 남한의 기술력을 합치면 정말 우리나라도 강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 소녀상의 관련된 인터뷰를 했을 때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게 잡혀간 할머니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이해되고 공감이 되었다.
이렇게 많은 활동을 하고 나는 평화의 뜻이나 평화통일의 뜻 그리고 북한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긴 것 같다. 이 평화 날개 기자단이 끝나고도 평화와 통일에 대해 더 알아볼 것이다.  내년에도 만약 이 평화통일 기자단이 한다면, 신청해서 평화 통일에 대해 지금보다 더 배우고 싶다. 내가 지금까지 활동했던 것 중에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강화도에서 평화 전망대에  간 것이다. 다음에는 가족들과도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정말 재미있었던 기자단 활동이었다.

“평화 기자단은 내게 너무 고마운 존재”
두산초등학교 6학년 임유빈

  평화날개 기자단에서 지금까지 했던 일은 별로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쓰려고 떠올려보니 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전쟁기념관도 가보고, 비록 직접 가보진 못하고 바라만 봐야 했지만 강화도에서 강건너 북한도 볼 수 있었다. 교실의 평화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 지 생각하는 시간도 가졌고, 평화의 소녀상에 대해 알아보기도 했다. 이외에도 많은 활동들이 떠올랐다.  지금까지는 숙제도 많고, 주말에 제한이 많아 힘들다고 느꼈는데 솔직히 보고 느낀 것이 훨씬 많고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인 것도 늘은 것이 더 많았다.
 의미 없이 보냈던 토요일을 평화통일 기자단이 뭔가 의미있게 바꿔 준거 같아서 뿌듯함 마저 든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많은 것들을 보여주고 느끼게 해주고 깨닫게 해준 평화 기자단의 모든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평화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어요!”
권서현/ 두산초등학교 6학년

 평화의 날개 기자단 수업도 마지막이다. 그동안 우리는 소녀상, 강화도, 전쟁 기념관, 인터뷰 수업을 했었다. 수업을 하는 동안 나는 통일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고 평화에 대한 생각이 더 많아졌다. 처음에는 ‘통일이 꼭 필요할까? 통일이 핑요 없을 것 같은데’ 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통일이 빨리 되었으면 좋겠다. 통일이 언제 되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평화에 대해서는 ‘그냥 아무 일 없이 잘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친구, 사람 간에 사이가 벌어지지 않는 것’이라고도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기자단 수업을 하면서 제일 재밌었던 것은 소녀상 인터뷰 수업이었다. 왜냐하면 질문을 뽑아야 해서 힘들기도 했지만 내가 물어보고 싶었던 것을 마음껏 물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평화 날개 기자단 활동 후”
장서윤/ 두산초등학교 6학년

  그동안 평화통일 기자단 수업을 하면서 처음으로 내 글을 써서 신문에도 나가고 새로운 경험들도 많이 해서 나는 즐겁게 수업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평소 쉽게 하지 못했던 경험들을 기자단 친구들과 하게 되어 기뻤고 다음 수업이 기다려졌다. 
 그런데 그 수업들을 몇 번 놓쳤던 게 너무 아쉬웠다. 그동안 우리 수업을 즐겁게 하려고 노력해주신 선생님들께 감사드리고 같이 수업 들었던 기자단 친구들도 잊지 않을 것이다.
 모르고 지냈던 기자단 친구들과 친해질 수 있게 되어서 좋았다. 제일 기억에 남는 일은 내가 쓴 글이 신문에 실린 걸 보았을 때와 강화도에 가서 전쟁을 직접 겪으셨던 이발소 아저씨의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기자단 활동을 마치며...
장서희/ 금나래초등학교 6학년 

 나는 평화 통일 날개 기자단을 하면서 힘들기도 했지만 뿌듯했다.  먼저 힘들었던 건 날개 기자단이 한 달에 한두 번이지만 주말에 모이는 것과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말에는 더 놀고 싶고 자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고 나가야 하고, 이런 주제의 글들을 많이 써보지 않아서 막막하기도 하고 어려워서 기자단 활동 내내 힘들었다. 그래도 글을 쓰고 그 글들이 신문에 실렸을 때는 즐겁고 뿌듯했다. 그리고 신문에 실린 나의 글을 보고 가족들이 칭찬을 해주셨을 때는 사람들이 일할 맛이 난다고 하는 것처럼 나도 글 쓸 맛이 났다.
   내가 기자단을 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평화 소녀상이다. 우리 기자단은 평화를 주제로 배우고 글을 쓰는데, 나는 배운 주제 중 평화 소녀상이 가장 인상 깊었다. 


평화 소녀상은 그냥 동상인데 그 동상에 숨겨진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었고 평화 소녀상을 세우는데 동참하신 선생님들을 내가 직접 인터뷰한 것도 기억에 많이 남았다. 무엇보다 그 동상을 만드는데 쓰인 돈과 시간, 노력이 너무 값진 것 같아서 평화 소녀상을 잊지 말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것은 남북한의 추석 생활이다. 남한과 북한이 한 민족이지만 추석이 생각보다 달라서 기억에 남았다. 특히 추석 제삿날 때 차리는 음식이 달랐는데 북한의 추석은 나라가 가난해 지면 조상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 제삿날 음식을 더 화려 하게 차린다는 것이 특이했다.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북한 사람들이 이해가 되면서 통일이 되어 나도 북한에 가서 추석을 지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기자단을 하면서 가장 달라진 것은 이전에는 글을 대충 썼는데 기자단을 하고나서부터는 글에 나의 생각이 많이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이 만큼 글 실력이 늘게 해주신 선생님들께 너무 감사하며 함께한 기자단 친구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기자단의 추억”
금나래초등학교 6학년 : 이수영

  처음 수료식 했던 날이 생각난다. 엄마가 신청해서 온 기자단이었고 온 친구들 중에서도  스스로 원해서 온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기자단을 하고 평화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평화를 위해서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일 크나큰 추억이 있었다.
우리는 용산에 있는 전쟁박물관도 갔다왔다. 우리는 6.25관을 둘러봤다. 6.25전쟁의 아픔과 상황이 다 담겨있는 곳이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마음이 먹먹했다. 전쟁박물관을 가서 어떻해 하면 통일을 이룰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통일을하면 안 한 것 보다 좋은 점이 많다. 내가 죽기 전에 통일되는 모습을 봤으면 좋겠다. 
 우리는 평화에 대해 토론도 하였다 “평화를 실천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저는 양보,배려 등등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라고 얘기한 게 아직도 생각난다. 기자단을 해서 즐거운 추억도 만들고 글쓰기 실력도 향상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고, 좋은 선생님들과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한 이 시간을 잊지 않겠다. 마지막으로 “남북한의 통일과 평화로운 날들을 기다리며… 감사합니다.” 

“평화와 기자단의 할 일”
이윤수/ 금나래초등학교 6학년
  
평화라는 것은 늘 거창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자단 활동을 통하여 평화는 모든사람들이 염원해야만 이루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현재 자신들의 삶을 만족하며 살고 있다. 이런 살마들의 생각을 바꾸는 게 기자단의 일인 것 같다. 사람들이 기자들을 ‘기레기’라고 놀린다고 한다. 기자들은 사실 확인을 제대로 안한 채 기사를 쓰기 때문에 피해자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기자단 활동 후 기자들이 그런 기자들만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이 든다. 모든 기자들이 기자로서 사명감을 느끼며 글을 쓰면 좋겠다. 

* 평화날개 기자단 여러분 올해 1년 동안 수고가 많았습니다. (주_편집자)

[장제모 칼럼]

 

서울시 자치구 중 주민자치회를 먼저 시작한 금천구의 2기 주민자치회가 12월부터 시작된다. 주민자치위원회가 주민자치회로 바뀌어 1기 임기 2년이 지난 것이다. 주민자치회가 되면서 달라진 게 있느냐고 물어 본다. 당국의 대답은 어떨지 모르지만 필자의 대답은 ‘명칭 밖에 없다’고 대답 할 수밖에 없다. 물론 달라진 것이 명칭 외에도 없지 않지만 질문 의미에 답을 하자면 그렇다.
주민자치위원회가 주민자치회로 바뀔 때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주민자치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을 했다. 즉 행정과 관련하여 과거 주민자치위원회에서는 하지 않던 사업이나 임무들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다. 이는  2년 전 주민자치회가 되면서 당국이 주민들에게 설명한 바로 이를테면 그간 주민자치위원회에서 하지 않거나 할 수 없었던 사업이나 행정사무의 위탁 등으로  주민의 행정참여가 확대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 기대는 아직은 시기상조(時機尙早)인가 보다. 임무 내용에 따라 약간의 발전적 변화가 있고 또 과거와는 절차 등이 달라진 것이 없지 않지만 그것으로 주민자치의 변화를 말하기는 어렵다. 외양 상 일부 시행들이 주민자율에 의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도 있지만 행정 질서의 선후를 따져보면 여전히 관의 지휘 범위 내에 있어 주민들의 권한은 과거와 별 차이가 없다. 결국 주민은 관이 맡긴 임무를 수행하는 수동적 존재일 뿐이다. 
이러한 현상은 당국이 이 제도 그러니까 주민에 의한 주민자치회 제도로 새로  만든 질서(규정)에 의한다.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현재의 제도를 보면 관(자치구로 본다)은 주민에 의한 자치(自治)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제도를 만들면서 주민자치로 간주할만한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유추가 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현재의 주민자치회는 이 제도의 본래 취지에는 부합하지 않지만 다만 그렇게 볼 수 있는 의제(擬製) 기구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행을 두고 당국을 비난 할 의도는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 주민자치 제도가 가진 현실이기 때문이다. 즉 현 제도로는 자율적으로 주민자치를 수행할 역량을 가진 주민구성이 어렵다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성원들에게 봉사만 요구 될 뿐 그에 따른 반대급부가 없으므로 역량을 가진 주민을 위원으로 두기는 어려운 것이 현 제도가 가진 한계이다. 솔직히 말해서 현 제도에 의한 주민자치회는 은퇴한 노령자나 직업이 없거나 특별히 할 일이 없는 분들이 주 구성이 되게 되어 있는 것이 그 설명이다. 물론 직업을 가지거나 다른 임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참여하는 사명감을 가진 주민도 없지 않지만 그런 분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를 바탕으로 하여 현 구성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따지고 본면 이런 구조를 만든 것은 당국이다. 주민자치 제도는 20년 전에 시작하였고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며 현재에 이르렀는데도 명칭만 바꾸었을 뿐 제 걸음만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당국은 주민에 의한 자치를 오래 전에 정책방향으로 삼아 제도를 만들어 운영하면서도 그것이 합리적으로 시행될 기반을 만들지 않은 채 지금에 이른 것이다. 오늘의 주민자치회는 이런 배경으로 이해가 되듯이 그 시행은 주민에 의한 자치를 내세울만한 모습을 보기가 어렵다. 
이유 중 하나를 들어보자, 주민자치회 회의에 토론이 없다. 물론 모두는 아니지만  대개의 회의는 집행부(와 행정)가 준비한 데로 진행되고 결의된다. 반론은 거의 없고 설혹 있다하여 진행이나 결과에 영향을 주는 경우는 드물다. 행정이 포함된 집행부에 반기를 들 용감한(?) 위원을 찾기 어렵고, 반론이 있다 해도 다수결 의결이라는 전가의 보도와 같은 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찬성 위원 다수로 결정이 되니 회의 결과는 하자가 없지만 과연 이러한 회의 운영이 민주주의가 기조인 주민자치를 이야기할 수 있는가는 자문(自問)해 보아야 한다.
또 다른 문제가 있다. 현재 주민자치회 구성원은 엄밀히 볼 때 주민 대표성을 가지지 못하다. 위원의 선임에 민주성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민주적 진행이라고도 말할 수도 없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지역 주민의 대표성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이 지역을 대표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현재의 주민자치회는 법률 규정에 맞추기 위한 의제(擬製) 기관일 뿐이다. 행정당국은 이를 알면서도 주민자치기구라 주장하고 있다.
또 다른 중요한 문제를 보자. 마을의 공동사업을 의결하는 구성체로 마을총회를 두고 있는데 이 구성이 불합리하다. 마을총회 성원 조건을 거주 주민 수의 0.5%로 두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1%도 안 되는 수를 공동체의 의결 정족수를 두고 주민자치를 거론하는 것은 공감할 수 없다. 이는 민주주의를 퇴행시키는 나쁜 제도다. 
금천구 소속 동 주민자치회 두 곳이 전국단위의 주민자치회 경연에서 작년과 금년에 각 우수상과 최우수상을 받았다. 해당 동으로서 자랑스러운 일이고 또한 다른 동에서는 그 시상 내용을 살펴 귀감을 삼을 만한 하다. 그러나 유의하여야 하는 것은 이 상은 현 주민자치회를 기준으로 하는 평가일 뿐 이를 주민자치회의 본래 취지에 부합한 평가로 이해되는 것은 경계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현재의 주민자치회 운영 모습 평가를 미래 주민자치회의 방향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결론을 하자. 현재의 주민자치회는 주민자치회 본래 취지를 충족할 수 없는 구조이고 따라서 현재의 평가를 주민자치 방향으로 삼는 진행은 수정되어야 한다. 주민과 행정당국에 물어본다. 주민자치 이대로 계속 진행할 것인가?(♣2019.12.12.)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하고 있으며 다양한 마을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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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지역아동센터의 청소년 대상 전국 일주 프로그램으로 애벌레(愛(사랑)하는 그대들, 벌떡 일어나 레디 고!)가 경주에 다녀왔다. 이 이야기는 발 닿는 모든 곳이 살아있는 박물관인 경주를 방문한 김채림(한울중 2), 박은미(세일중 2), 손정은(세일중 2) 청소년들의 여행기이다.

 

경주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대중교통 없이 지도만 보고 목적지를 향해 걷는 진정한 뚜벅이(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걸어 다니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여행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대릉원에 방문했다. 대릉원 지구라고도 불리는 대릉원은 신라시대의 왕, 왕비, 귀족 등의 무덤 23기가 모여 있다. 또한 대릉원 내부에는 세계문화유산인 천마총과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고분은 모두 평지에 자리 잡고 있는 신라시대만의 독특한 무덤이다. 무덤이라고 하기엔 커다란 언덕 혹은 작은 산과 같은 대릉원의 무덤들은 나무 덧널, 돌, 흙을 차례로 쌓아 올려 만들어진 돌무지덧널무덤이다. 경주에는 묘지가 많아 지역 전체가 대릉원이라고 불려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Q1. 대릉원에는 두 개의 묘지와 나무를 배경으로 한 대표 포토존이 있다. 으스스한 느낌이 드는데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진을 찍는다. 직접 보고 온 사람으로서의 이러한 현상 또는 전체적인 분위기 대한 생각은?

 박은미 : 대릉원을 들어갔을 땐 낮이라서 묘지보다는 언덕 사이라는 느낌이었다. 밤이 돼 숙소로 돌아가는 길, 아무도 없는 길에 솟아나있는 묘지를 보니 맞에 우리가 사진을 찍었던 곳이 맞나 생각이 들 정도로 무서웠다.

 손정은 : 나는 조금 급하게 다녔던 터라 유명한 포토존은 잘 보지 못했다. 대릉원 안은 나무들이 무성하고 고개만 돌리면 묘지라서 무서운 기분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낮에 갔었기 때문에 무서운 느낌이 덜 했지만 밤에 가면 확실히 들지 모른다.

김채림 : 묘지라는 이름 자체가 으스스한 느낌이다. 낮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저녁에는 나무와 묘지가 모여 있어 무서웠다.

 대릉원의 다른 문으로 나가면 황리단길이 있다. 사람들이 밀집되어 있는 황리단길은 차량도 많았는데 교통정리를 해주는 장치가 없어 조금 위험했다. 첨성대로 가기 전, 황리단길의 흑백사진관, 작은 서점, 기념품가게 등을 둘러보며 자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Q2. 경주의 황남동, 황리단길에서 소개하고 싶은 곳이 있다면?
 박은미 : 가장 추천하는 곳은 ‘대릉원 흑백사진관’이다. 사진관 자체는 협소하고 방문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그런지 빠르게 진행돼서 정신이 없을 수 있다. 하지만 흑백에서 우러나오는 편안하고 아날로그스러운 감성 사진을 가질 수 있다. 가족, 연인, 친구, 누구든 이곳에서 사진을 찍는다면 경주에서 특별한 추억을 하나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
 김채림 : 황리단길에 간다면 그림책 서점 ‘소소밀밀’에 들어가보는 것을 추천한다. 소소밀밀은 따스한 분위기에 동화책을 판매하고 소개하는 곳이다. 소소밀밀에는 유명한 책은 아니어도 어린이와 어른이 모두 좋아할 수 있는 책들이 많다. 사장님도 친절하시고, 책방 앞 벤치에서 사진도 찍을 수 있다. 이곳은 나이 구분 없이 모든 사람이 즐길 수 있다.
 손정은 : 경주의 황리단길에 간다면 작은 상점에 다 들어가 보면 좋겠다. 잠시만 머물러도 따뜻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가장 좋았던 상점은 ‘어서 어서’라는 책방이다. 서울에 있는 책방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종류나 분위기의 책들이 있었고, SNS에서 많이 보던 읽는 약이라고  쓰여 있는 봉투에 책과 이름을 넣어주어 알게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다. 이곳에는 어떤 사람이 와도 좋아할 것이다.

 걷다 보니 첨성대에 도착했다. 빛나고 있는 첨성대와 분홍빛 물이 든 핑크뮬리가 어우러진 풍경은 아름다웠다. 신라 천체관측소인 첨성대를 만든 돌의 숫자는 365개 안팎이다. 몸통은 27단인데 이는 선덕여왕이 27대 왕이라는 것과 관계가 있다. 꼭대기의 ‘井(정, 우물)‘자 모양 돌을 합치면 28단이다. 28수라는 별자리와 관련이 있다.

Q3. 경주만의 이색적인 점이 있다면?
 박은미 : 경주만의 이색적인 점은 아무래도 군데군데 둥글게 되어 있는 묘지라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안에도, 길 곳곳에서 보이는 묘지는 낮에 봤을 땐 작은 언덕으로 보이지만 밤에는 으스스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이 이색적인 매력인 것 같다.
 김채림 : 건물과 도로가 많고, 식물들이 적은 지금의 서울과 달리 경주는 전체적으로 건물이 낮고 식물과 어울려서 다른 관광지와는 다른 것 같다. 그것이 경주의 장점이자 이색점이다.
 손정은 : 무조건 현대적으로 개발하려는 느낌보다 관광지와 장소에 어울리는 식물이나 나무로 꾸며놓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거부감이 들지 않았고 예쁜 풍경과 유물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이것이 경주의 이색적인 점이라 생각한다.

 대릉원과 첨성대를 지나오면 동궁과 월지 또는 교촌마을을 향해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우리의 마지막 장소는 동궁과 월지(구 안압지)이다. 신라시대 화려함의 끝을 보여주는 궁이다. 신라의 태자가 머물렀던 곳이며 중국 전설의 산인 봉래산을 본 따 만든 궁과 인공연못이 있다. 달과 함께 빛들이 연못에 비치는데 빛으로 물들어있는 느낌이었다. 아주 웅장한 궁을 배경으로 멋진 야경을 보고 왔다.

Q4. 경주에서  꼭 들려야 할 곳은?
 박은미 : 경주에 여행을 간다면 대독장 김치찌개에 가는 것을 추천한다. 가을과 겨울에는 김치찌개와 밥 한 끼 먹는 것은 힘든 여행을 따뜻하게 녹여줄 것이다. 무한리필 계란프라이와 함께 찌개에 밥을 말아 김가루를 뿌려 먹었던 그 맛은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다. 정말 맛있는 별 다섯 개 맛집!
 김채림 : 경주에서 밥을 먹는다면 대독장 김치찌개에 가는 것을 추천한다. 배고팠던 배를 맛있게 채워주었고, 직접 해먹는 계란과 같이 먹으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맛있다.

 손정은 : 경주에 여행을 왔다면 동궁과 월지에 꼭 가봤으면 좋겠다. 해가 지고 깜깜한 밤, 아름다운 불빛이 들어온 안압지의 모습은 입이 떡 벌어지게 예뻤다. 특히 불빛이 들어온 후에 호수에 비치는 안압지의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다시 경주에 가게 된다면 이른 아침에 한 번, 늦은 저녁에 한 번 보고 싶다. 

 

Q5. 국내와 해외 등 많은 여행지를 다녀왔다. 나만의 여행팁을 소개한다면?
 손정은 : 애벌레 여행 동아리에 들어오면서 여행 팸플릿을 챙기는 습관이 생겼다. 보통 기차역에서 나오거나 기차역 안에 지역을 소개하는 팸플릿이 모여 있는데 지도, 맛집, 관광지 등이 적혀있다. 팸플릿들을 챙기다 보니 지금 내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고, 당일에 결정하지 못했던 점심도 정할 수 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필수로 챙기는 것이 좋다.
 박은미 : 어떤 장소를 가기 전, 그 장소에 대한 정보를 미리 검색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볼 때와 미리 알고 볼 때는 완전히 다르다. 그 장소에 대해 더 꼼꼼히 보게 되고, 보다 보면 궁금한 것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김채림 : 여행의 팁은 팸플릿이다. 정은이와 마찬가지로 여행 동아리원으로 여행을 하면서 팸플릿을 챙기는 습관이 생겼다. 팸플릿은 지도뿐만 아니라 관광지와 특색 등을 나타낸다. 여행을 하는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 

 교과서에서만 보던 유적지를 직접 보며 깊이 있는 역사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자유롭게 새로운 곳들을 다니며 여행의 묘미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기에 더 특별했다.

살구 어린이 기자단 
박은미(세일중 2), 손정은(세일중 2) 기자

학원에 대한 초등학생의 생각

 

요즘 초등학생들의 학원 이용도가 높아지는 추세다. 이에 맞춰 초등학생들이 학원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기 위해 서울문성초등학교 6학년 학생 61명에게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다.
설문조사에 응답한 학생들의 73.8%가 학원을 다니고 있었으며 26.2%는 학원을 다니고 있지 않았다. 학원을 다니는 학생들의 68.9%가 일주일에 5~6회 학원을 다니는 것을 보면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은 많은 시간을 학원에서 보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설문조사 응답을 보면 초등학교 6학년 학생 대부분이 학원을 다니는 것을 싫어함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많은 학생들이 학원에 다니는 이유가 궁금해 서울문성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에게 학원이 필요한지 물었다.
 19.7%는 ‘학교에서 집중을 잘하고 집에서 개인적으로 공부해도 충분히 학교 공부를 따라갈 수 있어서 학원이 필요하지 않다’라고 답했고, 29.5%는 ‘학교에서 배운 것을 복습하거나 예습을 해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 학원이 필요하다’라고 답했다. 가장 많은 의견인 50.8%는 ‘초등학교는 학교 공부가 딱히 어렵지 않고, 어렸을 때는 뛰어놀고, 공부가 어려워지는 중고등학교에 가서 학원을 다녀도 되므로 지금은 학원이 필요하지 않지만 후에는 학원이 필요하다’라고 답했다.
 서울문성초등학교 6학년 61명의 설문조사를 보면 10명 중 7명이 학원에 다닌다. 그런데 그중 5명이 학원에 대한 부정적인 느낌을 표현하며 초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학원을 다니지 않고 뛰어놀고 싶다고 말했다. 같은 초등학생으로서 이들의 의견에 동의한다. 부모님께서도 자녀들의 공부를 위해 학원에 다니게 하는 것이지만 부모님의 관심과 지도가 자녀들에겐 스트레스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초등학생까지는 공부보단 다양한 체험과 놀이로 즐겁게 공부하고 싶다. 체험을 통해 얻는 것이 많다는 걸 많은 어른들께 알려 드리고 싶었고, 학원을 다니는 초등학생들에게 힘을 내라고 전하고 싶다.

문성초교 6학년
박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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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날개’기자단 수업이 막을 내렸다. 지난 6월에 시작해 11월에 끝을 맺었으니 두 계절을 기자단과 함께한 것이다. 평화 ‘날개’ 기자단. 이름부터 눈에 쏙 들어왔다. 평화라는 말 옆에 ‘날개’라는 말까지 붙으니 당장이라도 평화가 날개를 달고 훨훨 세상 끝까지 퍼질 것 같은 (요즘 말로)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남북으로 갈라진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에게 평화와 통일이라는 말은 너무나 익숙하다. 대단한 의미와 무게를 지닌 말이지만 우리에겐 너무 오랫동안 들어왔기 때문에 외려 무덤덤한 말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평화와 통일을 얘기한다는 게 녹록치는 않았다. 평화와 통일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을 조금만 좁힐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래서 수업을 함께 하며 가장 강조한 것도 너무 먼 평화가 아닌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의 평화와 통일이었다. 그리고 학생들이 느낀 것들이 기자단 이름으로 날개를 달고 널리 퍼질 수 있길 바랐다. 
  ‘기자단’인 만큼 평화, 통일 수업 못지 않게 집중한 것이 기자로서 글쓰기였다. 매번 수업 후 글쓰기 과제가 있었고 토론도 하고 현장답사도 가졌다. 그러고 보니 직접 인터뷰도 진행했다. 쉽지만은 않은 과정이지만 80~90%에 가까운 높은 출석률을 보여주었다. 매주 토요일 오후 황금같은 시간을 함께 해준 기자단의 성실함에 대견함을 넘어 경의를 표한다. 이를 가능하도록 도와준 부모님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사실 부모님들의 높은 관심은 평화 ‘날개’ 기자단이 훌륭히 끝내는 데 큰 힘이 됐다.   덕분에 평화‘날개’기자단 ‘1기’ 수업은 무사히 마무리됐다. 첫 번째라는 말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첫 번째 발자국은 다음 사람에게 훌륭한 이정표이자 기준점 될 테니까. 1기를 마무리하며 그들의 마지막 글을 싣는다. 
  이번 호에서는   “평화로운 교실을 만들려면?”이라는 주제로 함께 토론을 진행하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본 글과 기자단 활동을 마무리한 소감으로 정리해 봤다. 기자단을 하며 느꼈던 생각들을 더 많은 사람들이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교실 평화를 위해 필요한 건 무엇일까?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힘” 
이주은/ 문백초등학교 5학년
  교실에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다는 것은, 즉 그만큼의 갈등도 존재한다는 겁니다. 학생들 간에 의견 차이와 생각의 다름 같은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상대를 존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는 그보다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힘, 바로 이해심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다투거나 의견 간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모두 자신만의 특징이 있고 생각이 있는데 갈등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니까요. 이런 다름을 존중하고 이해한다면 서로 간의 갈등을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또한 평화로운 교실이 되려면 아니, 저는 평화로운 교실이라는 말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평화란 평온하고 화목하고 전쟁, 분쟁, 또는 갈등이 없이 평온한 상태를 말하는 것인데 ‘평화’라는 단어 말고 저는 ‘서로 이해하며 갈등을 풀어나가는 교실’을 이루는 것도 좋은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정리하면 다툼이 없을 수는 없지만 다툼에서 끝이 나고 서로를 이해한다면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에서도 영향을 줘서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 수 있습니다.

존중+협동=평화 
임예빈/ 두산초등학교 5학년 
  첫째, 서로 존중 한다.   어떤 공동체든 서로 존중과 대화로 활동하지 않으면 불화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서로 존중하며 생활한다면 교실 내 평화를 지키기 한층 수월해 질 것입니다.   둘째, 협동 한다.   교실 내에서 가끔 모둠활동을 할 때, 어떤 모둠은 결과물이 만족스럽게  나오는 반면에, 어떤 모둠은 결과물이 아예 나오지 않거나, 나오더라도 만족스럽지 않은 경우가 있는데, 원인은 대부분 모둠원들이 협동하지 않았거나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서로 배려하며 협동한다면 친구 간의 우정도 쌓일 뿐만 아니라 친구들 간의 의견차이도 줄 일수 있어 교실의 평화는 자연스럽게 유지됩니다.   셋째, 따돌림이 없어야 한다.   흔히 여러 명이 한명을 집중적으로 괴롭히는 행위를 ‘왕따’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만약 몇 명이 무리를 지어 한 명을 집중적으로 괴롭힌다면 자연스럽게 교실 분위기는 거북해지고, 자신도 따돌림을 받을까 두려워 동조하거나 방관하는 일이 생기고 결국 교실의 평화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바뀌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생각하는 교실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친구들이 협동하여 서로 공정한 위치에서 따돌림 없이 서로 존중하고 소통 한다면 행복한 학교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실 평화를 위해 필요한 건 ‘우리의 용기’ 최윤영/ 두산초교5학년 
 교실 내 평화란 것은 생각으로는 쉽지만 실천하기란 참 어렵다. 마음 속으로는 친구들이 싸울 때 제지해주고 못 싸우게 해야지 하는데 실제로는 나도 같이 껴서 싸우거나 말리다가 오히려 더 큰 싸움으로 번지기도 한다. 이처럼 실천이 참 어렵다.  나는 평화로운 교실을 만들려면 우리의 태도가 제일 중요한 것 같다. 우리가 “나 하나쯤이야, 배려 안 해도 괜찮겠지” 하는 태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 모두가 ‘나 하나쯤이야!’ 이런 생각을 한다면 우리 반은 절대 평화로워질 수 없을 것이다.   모두가 ‘나 하나쯤은 배려 안해도 되고, 나 하나 정도는 싸워도 되겠지’ 이런 생각을 하게 돼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의 태도를 고치면 우리 반이 평화로워집니다!” 이런 말 한 마디로 단번에 반 친구들이 변할 리 없지만 나부터 실천하는 모습을 보이면 친구들도 따라 실천할 것이다. 그렇게 하나둘씩 늘어날 것이다.
 나는 교실 평화를 위해 필요한 것은 ‘용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태도를 고치자는 말도 용기가 있어야 할 수 있고 싸움을 중재하는 것, 내가 먼저 배려하고 싸우지 않는 것 이런 것들 역시 모두 용기가 있어야 할 수 있다. 용기가 없다면 ‘애들이 막 나 험담하면 어쩌지? 이상하다고 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그래 그냥 말자. 그러면 나도 편하고 평화는 잃겠지만 내가 괜찮잖아?’하고 말 것이다. 싸움을 중재할 때도 중재하다가 나만 다칠 지 모르는 일이고 실제 중재하는 것이 만만찮은 일이 아니기 때문에 더 용기내기 어렵다. 싸움 역시 조금 더 들어가 보면 서로 배려하지 않아 생기는 갈등이나 논쟁이 원인이다. 그러므로 서로 오해를 풀도록 도와주거나, 아님 도움을 받으면 된다. 나는 교실의 평화를 위해 용기 내어 나부터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우리 교실의 평화와 갈등조정 
함상열/ 문일중학교 2학년
  평화는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고 어디서나 얻을 수 있지만 이루기는 쉽지 않을 수 있다. 우리나라와 북한의 관계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커가는 과정이라서 서로의 다른 의견과 주장 아래에서 다투기 마련이다. 다만, 갈등과 다툼 속에서도 필요한 것은 서로를 향한 이해와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다른 의견을 가진 상대의 입장을 바라볼 줄 아는 것이다. 그래도 다툼이나 갈등이 지속될 때는 친구들이 제 3자가 되어서 싸움을 멈추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와 같은 것을 ‘또래 조정’이라고 배웠다. 또래 조정은 총 3가지로 나뉜다.
1. 양쪽의 의견을 듣는다 2. 전반적인 것을 정리한다 3. 오해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선에서 협상 및 화해시킨다 4. 그래도 안될 경우 또래 조정이 어느 정도의 선에서 공명정대하게 대안을 내놓고 화해시킨다.
 이런 방법이 성공하기 위해선 제3자 즉 중재하는 사람이 공평하게 누구 편 한 쪽을 절대로 들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래 조정은 커녕 2차 갈등으로 발전 되어서 문제를 야기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교실을 평화롭게 만들기 위한 3가지”
윤서정/ 금나래 초등학교 6학년 
  우리 교실을 평화롭게 하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해 보신 적 있나요? 최근 종종 이런 일들이 있습니다. 말을 듣지 않거나 수업시간에 큰소리로 떠들거나 친구를 괴롭히는 일들이 많은데요. 이런 것을 고칠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제가 생각하는 3가지를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규칙(질서) 입니다. 반을 평화롭게 하기 위해서는 규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 이유는 규칙을 정하면 자신이 하지 말아야할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규칙은 반 전체가 다함께 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비판하고 보충하면 그만큼 좋은 규칙을 정할 수 있습니다.
  둘째, ‘체벌’입니다. 규칙을 정해도 안 듣는 사람들이 있죠? 그런 사람들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체벌’입니다. 체벌은 규칙을 어기거나 지키지 않았을 때 받는 것입니다.  체벌도 모두가 의논해 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막무가내로 정하면 그건 또 평화에 어긋나죠. 그리고 체벌은 약해서는 안됩니다. 예로 들어 체벌에는 친구한테 사과 편지나, 반성문 쓰기 등이 있는데 이런 체벌로는 규칙이나 질서를 잘 지킬 수 있지 않을까요?
  셋째, 해결입니다. 만약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그때그때 바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따라 체벌을 하고, 서로 화해를 해야합니다. 그리고 해결하기 위해선 말로 풀어야하고, 그때 상황, 자신의 기분, 사과를 말하여 풀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피해자가 화해를 못하고 계속 생겨나면 교실의 평화는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는 교실을 평화롭게 할려면 해야 하는 3가지는 체벌, 규칙, 해결 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화로운 교실을 만들기 위해 내가 한 노력”
정원/ 금나래초등학교 6학년
 평화로운 교실을 이루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설명하기 전에 먼저 나의 경험부터 얘기해 보겠다. 우리 반에는 한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우리 반 친구들을 껴안으려 하고 위협을 가하는 등 우리 반 친구들과 나를 굉장히 힘들게 했다. 그래서 나와 몇몇 친구들은 그 친구에게 우리의 생각을 전하려고 편지도 쓰고 말로도 설득 하는 등 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그 친구의 괴롭힘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갔고, 결국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부모님과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했다. 선생님은 친구와 상담을 하고 꾸짖어도 보며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행히 2학기부터는 보조 선생님이 오셔서 많은 도움을 주면서 그 친구는 전보다 많이 나아졌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어느 정도 해결되어 잘 지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내가 그 친구에게 직접적으로 했던 많은 노력들은 큰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건 그 친구가 지속적인 관심과 치료가 필요한 친구였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내 경험상 교실에 학생들 간 갈등이나 싸움, 논쟁을 잘 해결하려면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전달하고, 그래도 소용이 없다면 주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또한 학생들은 그런 친구들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태도를 가지며 어떤 행동을 할 때 최소 30초 동안은 더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면 평화로운 교실을 만드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내 경험이 그 근거이다.

친구랑 친해지고 싸우지 않는 방법
이주호 문백초등학교 5학년 
 사람들 사이에 갈등은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친구가 싫어하는 행동은 되도록하지 않고, 갈등이 생기면 의견을 물어보며 타협을 해야 한다. 의견이 다르면 싸움이 일어나기 쉬운데 서로 때리거나 해선 안되고 말로 하면 그나마 괜찮다. 나도 친구랑 갈등이 일어나 치고 박고 싸워본 적이 있다. 그럴 경우 선생님한테 심하게 혼나고 부모님이 직접 사과를 할 때도 있다. 친구와 싸우지 않으려면 싫은 행동은 피해야 한다. 왜냐하면 서로 오해를 해서 싸움이 일어나고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주장만 내세우다보면 폭력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평화로운 교실을 만드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면 친구의 마음을 최대한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감정을 공감 해주는 자세를 보이면 좋을 것 같다. 친구랑 친해지고 싸우지 않고 평화로운 교실을 만드는 방법은 이것 말고도 엄청 많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로 친구랑 싸울 때는 대화로 풀려고 하고 참을성을 길러야 한다. 남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진심을 갖고 대한다면 좋은 관계가 형성될 것이다.

평화’날개’ 기자단

 

 

은행나무 어린이 도서관 책이야기 207

 

매일 바쁘게 살고 있는데 삶은 더 윤택해지지 않고 더 바빠지기만 할 뿐 왜 이렇게 여유를 찾을 수 없을까? 무엇이 문제일까? 분명 전보다 더 열심히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왜 시간적, 경제적 여유는 더 없이 살고 있을까? 
정신없이 바쁘게 살고 있는 나에게 질문을 하는 책 <똑똑한 고양이/ 피터 콜링턴 글. 그림>에 나오는 주인공 냐옹이는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오로지 주인이 모든 것을 해주기를 기다릴 줄만 안다. 그러던 고양이가 스스로 밥을 챙겨먹게 되고, 열쇠로 현관문을 열 수가 있게 되고, 시장도 볼 수 있는 등 점점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게 된다. 주위에서 냐옹이가 똑똑해졌다며 칭찬을 해주며 이것저것 스스로 하게 한다. 그러나 칭찬은 아주 잠깐 냐옹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즐기고 싶은 것도 덩달아 많아지게 된다. 그전에는 안 해도 괜찮았던 것들이 자꾸만 생겨났다. 영화보고, 외식하고, 쇼핑하고, 게임을 하는 등 즐기고 싶은 것들도 많아졌다. 그러면서 취직을 해서 돈을 벌어야만 살 수 있는 형편이 되어버렸다. 냐옹이는 여유 없는 삶에 지쳐만 갔다. 몸도 마음도......
그러면서 선택을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으로 되돌아가기로 결심하고 누군가 해주기를 기다리기만 하며 살아간다. 그러면서 아주 행복해한다. 
그런 냐옹이를 보는 다른 고양이들은  “이제야 진짜 똑똑한 고양이가 되었군.”하며 하루 종일 늘어지게 여유를 즐기는 삶을 함께 보낸다.

나는 왜 바쁘고 힘들까? 왜 더 가지고 싶고 즐기고 싶어서 안달을 하며 살까? 
한 개를 가지면 왜 또 다른 무언가를 더 갖고 싶은 것이 자꾸 생기는 걸까?
여유 없이 바쁘게 살고 있는 나를 들여다보며 깊이 생각해본다. 진정 바쁘게 사는 것이 나를 위한 것이며 즐겁고 행복한가?
냐옹이가 처음으로 되돌아가듯 나에게도 멈춤과 비움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낀다. 
더 갖지 못하는 그 무언가를 위해 나를 더 이상 혹사시키지 말아야지. 욕망의 노예로 사는 것은 이제 그만해야지. 그럼 내가 원하는 여유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아~ 슬프다! 너무나 오랫동안 바쁘게 살아서인지 내가 진정 원하는 여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냐옹이처럼 당장 아무것도 안 하고 살 수는 없지만 일상에서 꼭 안 해도 될 일, 필요하지도 않고 내 마음이 원하지도 않는 것들을 찾아 안 해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내 마음에 평화와 행복이 깃드는 그날을 위해 일상에서 안 해도 될 것들을 찾아보련다.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활동가 양기순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의 책읽는 어른모임 ‘함박웃음’에서 함께  읽고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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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상담센터가 만난 세상- no.207

 

김학의가 무죄가 선고됐다. 어쩌란 말인가? 어쩌잔 말인가? 페이스 북에 공유된 글을 본다. [양진호 무죄, 김학의 무죄, 윤중천 무죄, 미성년자 불법 포르노 운영자 1년 6개월, 소라넷 운영자 징역 4년 추징금 14억 천만원 취소, 양진호 위디스크 사이버 포주 벗방 채널 개설, 최종범 강남 미용실 개업 성업 중. 소라넷 미동의 동영상으로 피해자 여성들 자살, 피해자 설리 타의에 의한 자살, 피해자 구하라 타의에 의한 자살. 이래도 모르겠나? 이렇게 설명해 줘도? 이래도 이 세상이 공정하고 여성 혐오가 없다고...] 남성으로 남성의 구조적 특권, 내재된 습성, 복구되고 마는 가부장적 관성을 반성하고 비판하고 또 성찰한지 30년, 그래도 나는 저 무참한 관성과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죽음 앞에 더 할 말이, 아무 할 말이 없다. 무참하다.    

돌아보면 유죄가 무죄가 되고 무죄가 유죄가 되는 것이 역사다. 지금의 무죄는 역사 속에서 무지와 공포와 혐오와 증오가 되고, 지금의 유죄는 인류 앞에서 저항과 해방과 평등의 이름으로 무죄가 된다. 하지만 그 역사라는 말 속의 시간과 공간에는 얼마나 많은 피와 눈물이, 말 못할 고통과 인내와 용기와 도전이 필요한지... 현실에서 법으로 무죄를 유죄로 만드는 것은 돈이다. 무죄를 유죄로 만드는 것은 권력이다. 그들의 유착이 그 시대의 지배적 구조를 검게 물들인 결과다. 탈옥한 지강헌이 ‘무전유죄 유전무죄’로 그 본질을 꿰뚫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유무죄를 법으로 결정하는 것은 가난과 차별이다. 소외와 폭력이다. 그것을 요약하면 민중에게 들씌운 유죄를 무죄로 만드는 역사지만 눈앞에서 무죄를 유죄로 만들고 유죄를 무죄로 만드는 마법의 힘은 결국 돈과 권력이다. 

우리는 그 적나라한 장면을 또 목격한다. 심지어 유죄지만 무죄란다. 공소시효가 지났단다. 김학의 사건이다. 김학의가 법무부 차관이 되었다가 범죄 마각이 들어 난 것이 2014년, 그 동안 세 번의 수사가 있었는데 두 번 무혐의, 마지막 한번 유죄라는데 공소 시효가 지나 무죄란다. 하지만 이 ‘비극적 희극’을 만든 것은 공소시효라는 시간이 아니다. 만약 공소시효가 문제라면 그 전에 두 번의 수사에 대해 우리는 눈 감고 만다. 1980년대 중후반 성동구치소에서 가장 인기 높은 이는 중풍을 맞은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였다. 절둑이며 법정에 온 그는 발음도 되지 않아 손짓으로 자기 모습을 가르치면 모든 변론이 끝났다. ‘나는 이렇게 되어 먹고 살 수 없으니 봐 달라.’는 몸짓으로 유죄는 무죄가 되고 실형은 집행유예가 되었다. 이런 이른바 전관예우라는 강도행위가 아주 노골적이었고 사회적 약자들은 그런 부정부패가 제공하는 더러운 편리하도 받고 싶어 난리를 쳐야 했다. 

김학의가 무죄가 된 것은 김학의가 무죄라서가 아니다. 김학의를 무죄로 만든 구조, 그 구조에서 흉기를 휘두른 똘마니들의 합작품이다. 검사와 판사, 그전에 경찰들, 돈과 권력에 의해 세뇌되고 사주된 이들의 한판 사기극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세상의 시간에 범죄를 감추고, 그 시간을 범죄로 오염시키면서, 크고 작은 특권과 이권을 지켜온 한국 자본주의의 더러운 지배 구조의 필연적 산물이다. 그 타락의 사냥개이자 흉기 경찰 검찰 판사들이다. 그들은 법을 앞세워 법으로 말한다고 하지만 항상 법 뒤에 숨어 망나니 칼을 휘둘렀다. 유죄를 무죄로 만든 범죄자들, 두 번의 수사로 유죄를 무죄로 만든 놈들이 여전히 법을 휘두르는 조건에서 대한민국의 시간은 범죄의 방패가 되고 말 뿐이다. 살인강도에게 살인강도의 이유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살인강도의 손에서 칼을 제거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김학의의 진실보다 먼저 할 것은 그를 무죄로 만든 검찰이라는 복마전(伏魔殿)에 검사라는 흉기(凶器)를 제거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시간을 범죄로 오염시키고 양심과 염치를 파괴한 흉기검사들을 응징하는 것으로 재발방지를 시작하자.

문재훈 소장
남부노동상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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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아프리카로 나갈 때만해도 꽤 순수했었던 하다. 그곳을 위해 이 년 열심히 일하고, 나의 잠재력도 시험해 보자며 힘이 들어가 있던 때였고, 지인들은 나의 뒤늦은 바람기에 힘을 보태주며 기부를 약속하기도 했었다. 그래서였던지 나는 내가 그곳에서 하고 싶은 일을 발견했을 때, 당당하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신나게 일했다.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양. 그래서 나는 내가 잘 ‘들이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위해 쓰는 게 아닌데, 기부금을 받는 것에 당당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거절에도 상처받지 않았다. 
엔지오에서 일한지 거의 일 년이 되어간다. 어느 분야이던 마찬가지겠지만,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 이곳에 발령을 받으면서 나는 후원금을 모집해야 하는 상황은 예측하지 못했다. 해외에서 일하는 사람이 어떻게 후원금을 모집하겠어? 그런 것은 본부에서 해주는 거지. 조직을 관리하고 예산에 맞춰 잘 집행하는 것만이 나의 일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본부에서 보내온 후원자 명단을 보면서 알았다. 내게 많은 부분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경력이 필요했고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해서 열심히 ‘앵벌이’를 시작했다. 평생 내 ‘갑’으로의 지위를 보장하겠다는 너스레로 지인들께 손을 벌렸다. 아직 잠재우지 못한 나의 바람기를 조금은 안쓰러워하며, “그래, 나도 ‘갑’ 한번 돼보자.”라는 말로 지인들은 기꺼이 후원자가 되어주었다. 내 입에서 ‘앵벌이’란 말이 나온 후 그 일은 정말 앵벌이가 되었고, ‘갑’이란 말이 나온 후 정말 나는 ‘을’이 되어 있었다.  아무도 내게 채권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지만, 나는 채무자가 된듯했다. 순수한 열정의 산물이 아닌, 조직에 대한 의무가 나에게 그 일을 하게 했기 때문이다. 
나는 길에서, 혹은 일하는 도중 죽고 싶다. 아프리카는 그러기에 좋은 땅이다. 이곳에서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었었다. 나는 살아남았고, 아프리카 생활만 만5년이 되어간다. 지금은 조직을 관리하고 조직에서 운영하는 프로젝트 전반을 책임지고 있지만, 계약이 끝나면 프로젝트 매니저로 오지에서 한 번은 활동해 보고 싶다. 그 후 한 학년에 한 반만 있는 작은 학교를 운영하며 정원사가 되어 학교를 예쁘게 꾸미며 늙어가는 것이 마지막 바람이었다. 멋지다며 후원을 약속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나는 그 꿈을 접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남의 돈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큰 책임감과 도덕성, 그리고 자기희생을 요구하는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주 매력적인 사기꾼이 되어야 하는데, 그만큼의 그릇은 되지 못하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궁금했다. 마더 테레사. 그녀에 대한 일화가 기억났기 때문이다. 음식을 구하러 나갔다가 모욕 받는 것을 보며, 동료 수녀가 자존심 상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우리는 지금 자존심을 구하러 온 게 아니고, 아이들 입에 들어갈 음식을 얻으러 온 것이다.’ 라고 대답했다는 내용이다. 목적의식이 뚜렷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글을 쓰기위한 확인 작업이 필요해 인터넷을 검색했다. 구글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로 그녀를 욕보이고 있었다. ‘당신은 테레사 수녀에게 속았다.’, 성인의 반열 오른 마더 테레사…’거짓 성녀’다?, ‘성녀’ 마더 테레사는 없다. 
한 문장, 한 문장을 타고 들어가자 악의에 가득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아이티 독재자의 아내인 미셸 뒤발리에와 그녀가 다정하게 양손을 맞잡고 미소 짓는 사진을 보여주며, 후원금에 대한 반대급부로 독재자의 이미지 세탁은 물론 대중선동에도 앞장섰다는 내용이 보인다. 기부금에 좋은 기부와 나쁜 기부가 있을까? 쓰는 사람이 잘 사용하면 깨끗한 돈이 되지 않을까? 그렇다고 그들을 미화하는데 일조하면 안 되지. 일단 이 부분에 대한 평가는 유보하기로 하자.
마더 테레사의 시설 ‘죽어가는 이들을 위한 집’에는 삭발한 채 한 방에 오륙십 명씩 수용돼 죽어가고 있는 말기 환자들이 있었고, 그들을 위한 구호물자나 비상약은커녕 모르핀조차 없었다. 그녀가 받은 엄청난 액수의 후원금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 돈들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쓰이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그녀를 다국적 선교사업체의 수장, 혹은 근본주의 종교 사업가가 아니었을까, 라며 의심하고 있다. 내가 엔지오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엔지오의 실상을 알고 난 지금은 그 의심이 충분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안다. 하나의 단체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는 많은 돈이 든다. ‘사랑의 선교회’는 123개 국가에서 610개의 선교단체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많은 단체를 운영하려면 엄청난 자금이 필요할 것이다. 
나를 들여다보기 위한 여정에서 만난 그녀.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성녀’의 반열에 올랐다. 얼마나 많은 검증을 거쳤겠는가? 나는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러나 나는 내 마지막 꿈을 버리기로 한다. 남의 돈으로 내 꿈을 사는 일, 하고 싶지 않다. 혹시 누군가 내가 꾸었던 똑같은 꿈을 꾸었는데, 어떤 이유로 자신이 할 수 없어 그 꿈을 실현시켜줄 대리인을 찾는다면, 나는 기꺼이 그 대리자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탄자니아에서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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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모 칼럼]

 

마을 민주주의와 협치
근간 서울시의 한 자치구에서는 행정당국과 주민들과의 사이에 마찰이 있었는데 이유는 행정사무 위탁 계약 갱신 때 당국이 특정 단체를 선택하기 위해 기존 단체를 기피하는 것과 같이 공정성 문제를 가진 시행을 하였다는 것이다. 주민들은 이러한 진행은 객관성 결여 등 공정성의 문제가 있는데 이는 행정이 특정한 목적을 위한 작전이라는 의심이 든다면서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행정시행이라고 목소리를 높혔다. 또한 이러한 비민주적 시행을 근원적으로 방지하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며 주민대책위원회 구성으로 관련 활동 전개를 시위하였다. 행정의 대 민간 위탁사업은 참여자들의 이해문제 등으로 관계자들 간 마찰이 있을 수 있는 사안이지만 주민과 당국이 첨예하게 대립을 하고 있어 그 전말을 살펴본다. 
양쪽 주장을 들어보자. 민(民)은, ‘행정위탁 재계약을 위해 적합한 대상을 찾고자 공개경쟁 방법으로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절차 마련과 진행에 공정성이 의심된다. 즉, 수탁 조건을 선례와 달리 간소화한 것은 의중에 둔 단체를 선정하기 위한 것으로 이는 기존 단체 배제가 목적으로 보이며 여러 정황으로 보아 사실 개연성이 높다. 따라서 이는 행정의 자의적 진행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그 전말을 살펴보면 결정을 구하는 절차를 사전에 목적을 정해두고 진행하였다는 의심을 배제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러한 시행은 시정되어야 하고 더불어 책임자에 대한 응분의 조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관(官)의 반론을 들어보자. ‘절차에 공정성 문제 등을 지적할 수 있지만 규범적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고, 기존 단체의 운영 성과에 대한 평가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으므로 이를 문제 삼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위탁기간 중 운영에 과실이 있는 등 신뢰성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므로 재발방지를 위한 대안 강구는 자연스러운 순서다. 그리고 절차마련에 민주성결여를 이야기하지만 지적이 추상적이고 또한 권한자의 재량권을 이해 못한 점 등을 살피면 적절한 지적이 아니다. 다만 절차 진행에 일정 수준의 무리가 있었던 것은 유감이다.’ 라 한다.
민과 관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문제다. 그러나 양쪽의 대립 등 사태의 전개를 볼 때  그냥 보아 넘길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더욱이 다툼의 핵심이 민주주의와 관한 것이다. 지방자치시대이고 그래서 주민자치를 중요가치로 내세우는 행정이 시대의 트렌드(trend)가 아닌가! 따라서 이런 문제를 적당히 넘기는 일은 주민도 행정도 해서는 안 되는 사안이다.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사회에서 용인되어야 할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규범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해도 민주주의 원리에 반한다면 그것이 있게 한 현재 규범에 문제가 있다는 증좌다. 유의해야 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중요 가치로 두는 사회에서는 그것에 반하는 행위에 관대해서는 안 된다. 정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양측을 이해 해 보자, 민의 주장은 행정을 시행함에 절차에 민주성을 결여하였으므로 공정성의 결여고, 더욱이 그것은 자의적이라 볼 수 있는 만큼 행정당국자는 공직자로서의 법적 윤리적 문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위법인데다 도덕성 문제까지 있으므로 시정조치와 함께 책임자에 대한 응분의 처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한편의 관 주장은, 위탁 참여 조건을 완화한  것은 위탁 대상의 다양성을 구하기 위한 것으로 시의(時宜)적 필요에 의한 것이고 그러한 결정은 권한자의 재량범위인 만큼 규범적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리를 해보면, 민의 주장은 공성성 문제를 제기할 수 있지만 법적 문제로 연결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위법성을 주장하려면 명확한 사유 제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절차상의 흠결은 비판이나 비난 대상이 되지만 위법이 될 구성요건으로는 부족하다. 그런가 하면 행정권자의 재량권 남용도 그 내용과 범위에 대한 적정성의 이해가 필요하다. 다만 공정성의 제기 여지는 충분하다. 절차상 흠결은 궁극적으로 민주성 결여가 이유이고 그것을 이 문제의 본질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민의 주장에 대한 관의 대응은 당국자의 자세로는 바람직하지 않다. 반론은 다채롭지만 설득력 문제를 가진다. 그리고 제기된 문제 해명만 집중해야 하는데 기존 단체의 과실을 부각시키는 것은 결정적 흠이고 이는 정의롭다 할 수 없는데다 본질을 벗어난다. 다시 말하면 위탁처의 선정을 위한 인위적인 절차마련으로 의심하게하기에 충분하다. 살펴야 할 것은 공정성 문제 제기자는 경쟁 일방인 기존 단체가 아니고 관련행정시행의 공정성을 요구하는 불특정 주민들이다. 즉 진영논리가 아니다. 행정 당국은 방어를 위한 반격이 필요하겠지만 합리적 접근이 아니다.
누구를 판단하고자 하지 않는다. 행정 사무를 두고 민·관의 다툼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사회의 성숙도 문제인데 따른 대안을 고민해 보고자 함이다. 문제가 제기된 자치구는 다른 자치구에 앞서 혁신을 내세우며 행정조직을 운영하고 있고 관련시책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이런 중에 위·수탁 사무를 두고 파열음이 있는 것은 이 정책 시행의의를 다시 살펴야 한다는 경고다. 다툼을 하더라도 목적의 공통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양방의 사려(思慮) 또한 요구된다.
정리를 하자. 이번 문제는 우선 관 영역에서 살펴져야 하는 것이 순서다. 공정성을 논하는 장에서 이런 가설(假說)은 모순일 수 있지만 현실은 그것의 성립을 부정 못하는 시간임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사실 아직은 민주주의가 익숙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행정이 아닌가? 관(官)은 행정사무 담당자이자 성실하고 책임 있는 협치 주체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환골탈태를 해야 한다. 그런 한편, 민(民)도 협치의 한 주체여야 한다. 그러나 갑(甲)이 되지 말고 합리적인 협업자의 자세여야 한다. 이러한 모습이 협치고 혁신의 방향이자 곧 민주주의의 실천이다.(♣2019.12.02.)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하고 있으며 다양한 마을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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