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대표시인 - 허은숙의 문학산책




라디오금천의 마음의 양식을 담당하는 프로그램 ‘허은숙의 문학산책’은 우리동네 대표시인이란 수식어가 아주 잘 어울리는 은숙씨의 자작시를 매회 낭독하고 있다.

누구나 소녀시절엔 꿈을 꾼다. 설령 그 꿈이 현실에서는 이루지 못할 불가능한 꿈일지라도 막연히 동경을 하게 되고 나름대로의 상상의 세계를 구축해간다. 미완의 꿈들은 수많은 책을 통해 완성된 후에 어느 정도 만족을 하면서 성숙한 것 같다는 은숙 씨 

은숙씨는 책을 읽으며 독후감쓰기나 편지쓰기를 좋아했고 결혼하고부터는 ‘시’에 접근하면서 가을이면 곳곳의  백일장대회, 전국주부 편지쓰기대회, 동서문학상 등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글 쓰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면서도 본인이 살아가는 유일한 버팀목이 되곤 한다. 

은숙씨는 우연히 라디오금천을 알게 되었고 문학을 주제로 프로그램을 진행해보고 싶은 마음에 그동안 틈틈이 써 온 자작시와 유명시인의 시 한편 그리고 문화와 관련된 소식을 겸해서 알려주고 있다. 문학산책의 차분한 방송을 귀담아 듣는다면 멘트 하나하나가 다 시어로 이루어져서 벌써 많은 고정팬이 생겼다. 


은숙씨는 오랫동안 지역신문기자로 활동을 해왔다. 마당발처럼 여기저기 나다니는 것보다 살금살금 행사장을 찾고 인물들을 찾아내며, 알음알음 아는 사람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주부로 살아오며 시를 쓰고, 지역신문기자로,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것을 눈여겨본 구의회 의원 한 분이 ‘윤명숙의 사랑채’에 소개를 해서 게스트로 출연하게 되었고, 녹음을 마치고 나서 윤명숙 대표에게 ‘라디오 진행을 한 번 해보고 싶다’고 이야기한 인연을 시작으로 방송을 시작했다.

방송을 할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날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떨렸던 기억을 전하면서 “매너리즘에 빠져 한참동안 글 쓰는 것에 게을러지고 있었고, 감성도 많이 메마르고 책을 읽는 일도 거의 없었죠. 그런데 라디오프로그램 대본을 준비하려면 하루 종일 노트북을 펼쳐놓고 뭔가를 써야만 했습니다. 단순한 글자의 조합이 아니라 글에 색깔을 칠하고 나만의 감성을 입혀야 했죠. 그래야만 한 편의 대본이 완성이 될 수 있죠. 한 편 분량의 대본을 쓰기 위해 다시금 글 속으로 나를 강제하는 일, 다시금 나를 화들짝 일으켜세우는 고통스러운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무엇인가에 몰두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라며 라디오 프로그램을 하면서 변화된 점들을 얘기했다. 


그리고 언젠가 녹음을 다 마치고 나서 팟빵과 라디오금천 밴드에 녹음파일을 올리는데 전 회분 파일이 올라갔던 아찔한 에피스도도 있다. 당시 기술을 봐주고 있던 담당 피디가 부랴부랴 라디오 사무실로 다시 가서 상황을 수습했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일로 꼽았다.

지난 25화에서는 게스트로 세 사람을 초청해 기타연주를 들려줬는데 스튜디오가 좁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그래도 무사히 진행이 되어서 다행이라면서 라디오금천이 지금의 장소를 벗어나 제대로 시스템이 갖춰진 근사한 스튜디오에서 방송을 하고 싶다는 것과 “스스로에게 지치지 않고 오랫동안 방송을 진행해서 명품 DJ가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라는 바람을  전했다.


열악한 스튜디오 환경과 주파수도 없고 다소 덜 알려진 팟캐스트 라디오를 하는 이유를 물어보니 “기술적인 부분은 물론 사람이 조종을 하지만 까딱 잘못하면 언제 어느 때 기계가 묘수를 부릴 수도 있는 일이죠. 잘못하면 다시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기술적인 부분보다는 스스로가 완성도 높은 대본과 함께 매끄러운 진행을 한다면 그것처럼 멋진 일이 어디있을까요, 멋짐 뿜뿜...그게 제가 라디오를 하는 이유입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거나 혹은 잃어버리고 무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산소 같은 프로그램“허은숙의 문학산책” 

단순히 전달 기능이 아니라 내면의 숨죽이고 있던 감성을 일깨워 자신의 존재와 삶의 의미까지 깨닫게 해주는 인문학의 산책, ‘허은숙의 문학산책’ 

삶이 지치고 힘들 때,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을 때, 찻잔을 마주할 때, 계절의 변화와 함께 나이듦의 시절들이 속절없이 느껴질 때 ‘허은숙의 문학산책’이 속삭이듯 많은 위로를 해줄 것이다.



김진숙 기자





* 라디오금천 프로그램을 듣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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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밴드에서 ‘라디오 금천’검색하세요.             


1967년 결혼과 동시에 무려 45년을 금천구 독산동에서 살고 있는 이강택(70세)씨는 독산3동 자원봉사센터에서 봉사활동을 5년째 하고 있다. 올해로 칠순이 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최근 ‘생태텃밭강사’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남부여성발전센터의 ‘도시농업지도사’ 과정을 수료하고 서울도시농업네트워크와 금천도시농업네트워크에 소속되어 학교와 어린이집 등에서 텃밭강사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공무원으로 평범한 직장생활만 해오다 퇴직 후 사업을 시작했는데 잘 되지 않아 아프게 접어야만 했던 시절을 회고한다. “욕심이었구나 생각했어요. 돈을 좀 더 불려보겠다는 욕심이 화를 부른 거죠.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잘 정리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작은 체구에 잔잔한 목소리를 가진 그는 의외로 참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사업 실패 후 내가 선택한 것은 ‘봉사’입니다. 내가 가진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나누겠다는 생각이었죠. 자원봉사센터에서 봉사교육을 받고 상담가 전문과정도 이수해서 지금까지 봉사자와 필요자를 연결해주는 일을 하고 있어요.” 컴퓨터, 테이핑테라피, 구연동화, 수채화, 도시농업 등 그동안 새롭게 배운 것도 참 많다. “내 목소리에 구연동화는 안 맞다는 생각을 했어요. 주인공에 맞게 흉내를 잘 내야하는데 목소리가 약해서 어렵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구연동화는 목소리 기교에 너무 신경 쓰면 감정 전달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하셨어요. 실제 해보니까 그래요. 진심을 담아 준비한 만큼 아이들 반응이 더 좋더라구요.” 자신의 구연동화를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몰입해주는 아이들을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이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요. 그저 철부지로만 생각했는데 다 알아 듣고 반응하는 것을 보면 오히려 아이들한테 다시 배우는 기분이예요.”

그의 구연동화는 텃밭교육에서도 빛이 난다. 한 어린이집에서 수업을 진행하는데 못미더워 지켜보던 원장선생님이 구연동화에 아이들이 집중하면서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는 흐뭇하게 나가셨다고 한다. 미리 배워 둔 컴퓨터 솜씨를 발휘해 아이들 활동 사진을 꼼꼼히 영상으로 담아주니 더욱 더 감동의 도가니가 되는 것이다. 사실 구연동화나 영상작업은 하루 이틀 준비해서 되지 않는다. 들이는 시간을 생각하면 강사비는 턱도 없이 작지만 이 모든 것이 자신을 건강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소중한 작업이다.

“오늘도 한 어린이집에 다녀왔는데 내가 직접 수업할거라 하니까 아이들이 할아버지 선생님을 오히려 편하게 생각하고 따른다고 하시면서 좋아하더라구요. 나이 든 사람이 할 일이 없다고들 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돈 생각 하지 말고 과거 배운 것이 좀 있으면 나눈다는 생각으로 시작하면 됩니다. 그런 마음으로 시작해서 나를 찾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행복한 거지요.” 새벽 일찍 일어나 기도하는 것과 가끔 걷는 것 이외에 건강을 위해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이강택 선생님은 건강의 비결이 ‘일’이라고 말한다. “젊어서 직장생활 할 때는 머리가 자주 띵띵 아프곤 했는데 요즘에는 오히려 점점 머리가 맑아져요. 억지로 하는 일과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의 차이가 아닐까 혼자 생각했어요.” 활짝 웃는 그의 선한 눈망울이 반짝인다. “노인 중에 특히 나 같은 남자들은 어딜 가도 만나기 힘들어요. 늙고 가진 것 없어지면 위축되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저는 그분들에게 일을 시작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부인 또한 부지런하고 추진력이 있는 성격이라 몇 년 전 늦은 나이에도 운전면허, 간병인 자격증까지 땄고, 작년까지 교회에서 ‘신방전도사’로 활동했다고 한다. 부부의 이런 부지런하고 성실한 태도가 자녀들에게 전해지지 않았을리 없다.

1남2녀의 세 자녀들은 모두 목회자와 목회자의 배우자가 되어 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라 성실히 목회활동을 하고 있다. 가끔은 너무 평범한 삶이 밋밋하게 느껴진다는 이강택씨, 지켜보는 이의 눈엔 결코 그의 삶이 밋밋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텃밭의 채소를 이야기로 담아내고, 아이들의 초롱 초롱한 눈망울을 영상에 담아내는 그의 꾸준한 손길이 참으로 존경스럽고 멋있어 보인다.

김선정 기자


 

릴레이 인터뷰 - 태기봉 헤어디자이너

 

독산3동에 사는  태기봉씨는 작은 미용실을 운영하는 미용사이다. 금천세무서 부근의 ‘태기봉 헤어겔러리’에 들어가면 진짜 겔러리에 들어서는 기분이다. 화려하고 정돈되어 있지 않지만 구석구석 그의 손길이 스쳐간 자리를 확인할 수 있다.
세면대 옆 타일에는 체게바라의 얼굴이 있고, 구석 구석 그의 가족들의 모습도 모인다.
굶주린 사자처럼 울부짖는 사내의 얼굴도 그려져 있고, 한쪽엔 호랑이가 노려보고 있다. 좀 무섭다. 게다가 아무렇게나 찢겨진 종이나 과자박스를 펴서 거기에 그림을 그렸다.

참 제멋대로다. 요즘처럼 좋은 종이, 좋은 물감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자신의 소중한 작품을 아무렇게나 휘갈기는 사람은 초보라도 흔치않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한 조각이나 조형물들도 크게 공들이거나 완벽을 기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자신의 작품을 액자에 넣지도 장식장에 넣지도 않는다. 그저 그 순간을 즐길 뿐이다.

태기봉씨는 말한다.
“한 사람의 인생이 진짜 빛나는 시기는 50대부터라고 생각해요. 내 꿈은 50대에 농사지으면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는 것이예요.” 그림을 좋아하지만 자신이 작품을 만들어내는 화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 전봇대 위의 까치를 그렸는데 그때만 해도 쓰다 남은 지저분한 크레용으로 그리다 보니까 제 색깔이 나오지 않았어요. 낮을 생각하면서 그렸는데 심사위원은 밤을 잘 묘사했다고 저에게 은상을 줬지요. 좀 우습지만 어찌되었든 제가 최초로 실력을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죠.” 그림을 잘 그리고 싶었던 태기봉씨는 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원양상선을 탔다.
전북 장수의 깊은 산골에서 학교를 졸업 할 때까지 동네를 크게 벗어나본 적이 없는 촌놈이 세상 구경하러 지중해 뱃길을 나선 것이다. “세상이 얼마나 넓고 큰지, 내가 알고 있는 상식이 얼마나 좁고 왜곡된 것인지 알게 됐죠.” 이래서 가끔 사람들에게 일탈은 필요한 듯하다.  

 
그렇게 바람처럼 다니던 그가 고향친구들이 모여 있는 구로공단에 취직하기 위해 금천구에 자리 잡게 된다. 그러다 얼떨결에 결혼도 했고, 지금은 큰 딸이 고등학교를 다니는 중년남성이 되었다.
“다니던 회사가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었어요. 주야교대 근무여서 되풀이 되는 야간일도 고통으로만 다가왔죠.” 그래서 결혼해 아이가 둘이 된 아빠가 직장을 그만 둔다.
보통사람이 결코 하기 힘든 결정이다. “그때만 해도 미용실이 돈이 좀 됐어요. 손재주를 잘 활용해서 돈도 벌고 그림도 그릴 수 있게 될 거라 생각했죠.” 하지만 미용을 시작한지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는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의 가족도 무척이나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꾸준히 자기를 가꾸고 채워나간다. 구립도서관으로부터 ‘다독상’을 받을 정도로 하루 한권 꼴로 책을 읽어내고, 초등학교 때부터 써오던 일기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지금 상황이 아무리 힘들어도 저를 지금까지 버티게 해준 것은 책과 일기였던 것 같아요. 미용사로 살아가는 것도 돈을 못 벌어서 그렇지 다양한 사람과 얘기할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파마를 하려면 적어도 2-3시간 걸리니까 쉽게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어요.” 사람대하기가 어려웠던 태기봉씨에게 미용사라는 직업은 사람과의 인연을 맺게 해준 소중한 끈이라고 말한다.
“워낙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성격이라 처음엔 답답하고 미칠 것 같았는데 지금은 또 적응이 되더라구요. 놀러 한번 간 게 언젠지 모르겠어요.”

 그는 결코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꿈꾸지 않는다. 꿈을 꾸기 위해 현실도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안다. 물론 그의 가족들은 그가 좀 더 경제적이고 현실적이길 바랄 것이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내면의 세계가 복잡하고, 나이를 먹어도 꿈을 잃지 않는 사람들을 ‘한량’이나 ‘철부지’ 쯤으로 인식하지만 원래 꿈이라는 것이 어느 한자리 비워둬야 간직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가위를 잡고 파마를 마는 그의 손이 그림만 그리는 하얀 손보다 훨씬 멋지고 아름답다.
달려라! 기봉아! (ㅋ 죄송!)


김선정 기자
gcinnews@gmail.com
     

현대공업사 성기윤씨는 참 열심히 사는 젊은이라고 송민준씨를 소개했다.
민준씨는 산기슭공원 위에 자리 잡은 뉴 금천 휘트니스 대표다.
민준씨가 금천에 둥지를 튼 것은 2001년이다. 수영선수 출신으로 서울의 여러 스포츠센터를 돌아다니며 14년간 모은 돈으로 자신만의 센터를 만들고 싶었고 둘러보니 금천이 가장 싼 곳이었다.
현재 들어선 곳은 97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당시 수영장으로 개관했었단다. 그런데 99년에 금천문화센터, 2001년에 청소년수련관이 개관하면서 많이 힘들어졌다고 한다. 자신이 인수하기  까지 3명의 주인이 왔다 사라졌다고.
민준씨는 2001년 와서 1년 해보고 수영장을 헬스장으로 바꾸는 변신을 한다.
금천에 와서 가장 큰 변화는 '성공해야 겠다. 돈도 많이 벌어야 겠다'는 생각이 '동네 주민들과 어울어져 하는게 더 좋아'졌다고 이야기 한다. 서울의 다른 곳과 다르게 마을 같은 느낌이 든다고.
새벽 6시부터 밤12시까지 누나와 번갈아 가면서 일한다.
처음에는 새롭게 해보면서 많은 시도를 해봤다. 트레이너를 4명까지 구색을 맞추면 나아질줄 알았는데 잘못된 판단이었다. 5년간 버티면서 14년간 개미처럼 일한 자본금이 다 없어졌다. 세도 못내고 보증금까지 넘어간 상태였다. 그때 건물주인 문화 유씨 종친회를 찾아갔다. 절박하게 기회를 달라고 했다. 젊은 놈이 용쓰는 것에 마음이 동했는지 허락해줬다. 그때 나가라고 했으면 방법이 없었다.
그때의 어려움을 딛고 이제는 그냥 어울려 사는 것에 만족한다. 경조사를 찾아 다니면서 이 마을에서 사는 법도 배웠다.
회원들의 단합을 위해 휘트니스 내에 축구회도 만들고 산악회도 만들었다. 초창기에는 민준씨가 이끌었지만 지금은 각각 회장, 총무등이 있어 스스로 운영된다.
여름 야유회도 만들고 송년회도 체육관에서 진행한다.
송년회는 헬스장의 운동기구등을 모두 치우고 나이트 같은 분위기를 만든다. 그렇게 해온 것이 6-7년됐다. 작년에는 280여명이 송년회에 함께 했다.
10년간 거쳐간 회원이 6,800명이다. 2007년에는 2호,3호 분점도 냈으나 돈버는 것 만큼 욕도 같이 먹는게 싫어 얼마전 정리했다고 한다.

민준씨는 시흥4동 자율방범대, 시흥4동 충청향우회, 시흥라이온스 클럽등을 활동하는데 이것도 많이 줄어든 것이란다. 
자율방범대도 회원의 소개로 금천에 온지 2년만인가 시작했다. 지금까지 해오면서 이제는 제일 오래된 아저씨가 되었다. 주1회 순찰을 하면서 경찰이 하지 못하는 부분을 한다고 하니 보람있다고 한다.
헬스는 꾸준히 하기 어렵다는 질문에 헬스는 그룹운동이 아닌 개인운동이기 때문에 매력을 느끼도록 트레이너가 코치를 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몸이 느낄수 있도록 해야하고 심리적으로 '할수있다', '해야한다'는 주문을 건다. 그리고 트레이너가 시킨대로 하면 100% 가능하다는 믿음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민준씨의 바램은 헬스장이 음악이 있는 편안한 곳이 되는 것이다. 마실 온 것처럼 느끼고 헬스장에 오면 3번 이상 자기와 인사할 수 있는 편안한 곳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

여기의 주인은 나 자신이고 내가 웃으면 역기의 차가운  쇳덩어리도 따뜻하게 보이지 않을까?

이성호 기자
gcinnews@gmail.com

시흥4동  현대자동차 공업사  -문덕기씨

시흥4동 남부여성발전센터 앞에 위치한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소규모 카센터를 운영하는 문덕기씨를 찾았다. 지난 호 릴레이 인터뷰에 소개된 성기윤씨가 자신의 ‘애마’인 트럭이 고장났을 때 이른 새벽이든 주말 아침이든 때를 가리지 않고 성실하게 수리를 맡아주는 문덕기씨를 추천했기 때문이다.

카센터에 도착했을 때 손님 한 명이 차 상태를 설명하고 있었다. 익숙한 표정과 말투가 단골인 듯 했다.
본격적인 인터뷰를 시작하려니까 또 다른 손님이 차 없이 몸만 쑥 들어온다. 익숙한 솜씨로 커피를 타면서 자리에 앉는 이 분은 시흥4동에 사는 김형진씨다.
“이 사람이 문씨예요. ‘문’자를 거꾸로 하면 ‘곰’이잖아요. 자기가 손해를 보더라도 항상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성실한 사람이예요.”라며 인터뷰에 대신 나선다.
“언젠가는 이른 아침에 브레이크 등이 나갔는데 아침부터 첫 마수일 텐데 공짜로 그냥 갈아주는 거예요.” 문덕기씨는 “요샌 그 정도 서비스는 다들 해줘요.”라면서 쑥스럽게 웃는다.

그렇게 모인 단골들이 꽤 된다. 하지만 요샌 차들이 워낙 성능이 좋아져서 고장 나는 일이 별로 없다고 한다. 괜히 안타깝다.
 문덕기씨는 대학 졸업 후 취업을 준비하는 큰아들과 군대에 가 있는 작은아들, 두 형제를 둔 50세 중년이다. “제 아내는 보험설계사 일을 하는데 요샌 다이렉트 보험이 많이 생겨나서 많이 힘들어요. 모든 업종들이 다 그런 것 같아요. 우리 같은 카센터도 갈수록 대형화되는데 현대나 기아 같은 브랜드는 그 회사 출신들이나 받을 수 있지 우리는 꿈도 못 꿔요.”

이야기 하는 도중 개인택시를 수리하기 위해 손님 한 명이 들어온다. “야, 가게 정리 좀 했구나, 그래 좀 깨끗이 하고 있어야 손님들이 좋아하지. 요샌 아무리 실력 좋아도 깔끔해야 좋아 해.” 형님 동생 사이로 지내는 독산2동 신윤영씨다. 주유구 버튼이 고장 나서 찾아온 손님이다. 다른 곳에선 새로 갈았는데 못미더워 이곳을 찾은 모양이다. 문덕기씨는 스위치를 떼서 쓱쓱 칼로 기름때와 먼지를 닦아낸다. 다시 설치한 스위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척척 주유구 문을 열어제낀다.

신윤영씨는 여기저기 아직까지 손길이 못 미친 가게의 구석구석 개선해야 할 부분을 지적하고 떠났다.
  말 한마디 다시 시작하기도 전에 이번엔 옆집 카센터 사장님이 방문했다. 문덕기씨보다는 조금 젊은 사장님이다. 누가 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모두 커피 한 잔씩 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좋은 점만 쓰지 말고 뭐 잘 못된 걸 찾아보세요. 이런 사람들이 뒤로 구린 데가 있는 법이에요.”라며 농담을 건다. 같은 업종이라 경쟁관계여야 하는 두 사람은 한눈에 보기에도 허물없이 지내는 이웃사촌이었다.
문덕기씨는 정비 기능장 시험 공부를 하고 있다. 정비 3급 이상이면 누구나 사업체를 운영할 수 있지만 누가 알아줘서가 아니라 이 일을 하는 한 꾸준히 실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 문덕기씨의 생각이다.    
    


  “돈이 사람을 따라와야지 사람이 돈을 따라가려면 힘들어서 못살아요.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돈이 들어올 때가 있고, 몇 천 만원씩 순식간에 까먹을 때도 있지요. 돈이 모이면 저축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거죠.
저는 목표를 높게 잡지 않아요. 목표를 높게 잡으면 욕심이 생기고, 욕심이 생기면 정직하게 살 수가 없죠.”

최종 목표가 정직이라는 것이 남다르다. 정직이라... 요즘은 왠지 고리타분하게까지 느껴지는 단어이다.
하지만 정직한 사람은 누구의 어떠한 설명도 해석도 필요치 않다. 금세 또 한 명의 손님이 들어온다. ‘카포스’라는 정비협회 금천구지회 사무장님이시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한 시간 남짓 동안 다섯 명의 손님이 다녀갔다. 그러고 보니 하나같이 돈 되는 손님들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가장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인터뷰가 될 것 같다.
향기가 나는 꽃에는 벌나비가 날아드는걸까?


 

김선정 기자
gcinnews@gmail.com


 

릴레이 인터뷰 -여덟번째
기존 '금천in인 만난 금천人'코너를 릴레이 인터뷰로 코너명을 신설하여 지속합니다


“우리는 인정과 도리로 먹고 살아요”

가산동의 아담한 커피집 안에 앉아있는 성기윤(47세)씨는 그야말로 평범한 동네아저씨의 모습이다.
“황당하네요.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신문에 나온대요? 뭐 특별히 해드릴 얘기도 없는데…”

가락동 농산물시장에서 새벽에 입찰을 마친 물건들을 재구입해 식당에 납품하는 유통업을 하는 성기윤씨는 하루가 정말 길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시장으로 향해서 식당마다 일일이 물건을 대주고 나면 9시가 넘는다.
“사실 딱히 취미생활을 누릴 시간도 없어요. 남들은 골프도 치고 한다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처럼 다 이렇게 살지 않나요?”

현실에 안주하는 것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평범한 일상을 만족하면서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

“이 일을 오랫동안 해왔지만 가장 마음 아플 때가 작년 배추파동과 같은 상황이예요. 식당 운영을 하시는 소비자들이 너무 힘들어 했거든요. 저희도 물건이 없어서 못주고, 안그래도 비싼 물건에 마진을 더 남기지도 못했죠. 그런데 올해는 또 폭락해서 농민들이 배추 엎는 걸 보니까 참 마음이 안 좋아요. 가격이 폭락하면 소비자는 웃겠지만 생산자는 울어야 하고, 생산자가 웃으면 소비자가 울게 되는 것이 시장의 논리죠.
제가 시골 출신이라 그런지 소비자는 한철 비싸게 먹고 마는 거지만 농민들은 일년 동안 애쓴 거 다 잃어버린다 싶으니까 더 안타깝더라구요. 이번 구제역 때문에 돼지고기 값이 올랐다고는 하지만 평생을 일궈온 것을 다 잃은 농민의 심정과 비교가 되겠어요? 위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우리끼리니까 얘기하는 거지만) 이런 거 신경이나 쓸까요?”

긴 이야기 조목조목 듣다보니 시장구경 하다가 세상구경 다 한 것 같다. 

  “저 같은 중간 상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지만 채소 값이 뛰든 가라앉든 어느 한쪽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덜 가게, 가늘고 길게 사는 것이 저의 영업 방침입니다. 손님들도 이제는 오랫동안 정들어서 세상이 각박해 졌다고 하지만 우리는 인정과 도리로 서로 먹고 살아요.”

세상사는 이치가 바로 이런 것이다 싶다.
크게 어긋나지 않고 조화롭게 서로의 고통과 아픔을 이해해주면서 살면 된다.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자기 자리에서 빛나게 살 수 있다면 이보다 행복한 세상이 또 있을까.

  “수입의 3분의1을 사교육비로 쓰고 있어요. 가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한숨이 나올 때도 있지만 이 길 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요. 사실 사교육비의 10%라도 문화생활을 즐기는데 쓴다면 훨씬 삶이 윤택해 질 텐데요.”

성기윤씨는 독산고 3학년, 세일중 3학년 자녀를 두명 두고 있다.

“결혼기념일에나 공연한번 볼까말까 하는데 사실 한번 보고 오면 관중석의 열기와 감동이 뇌리에 한동안 남더라구요. 무리해서라도 가끔씩 이렇게 인생을 즐기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전시간에 크라운.해태제과 납품 코디(납품한 물건 정리) 일을 하는 아내 유원복씨(44세)는 주말에는 성기윤씨의 일도 나서서 돕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다. 아이들 교육에 가사까지 책임지니 ‘투잡’이 아니라 ‘쓰리잡’ 하신다고 했더니 “아이고 맨날 투잡한다고 그러는데 이 말 들으면 애들 엄마 목에 힘 더 주겠네요.”라며 웃는다.

“아이들도 표현하지 않지만 어리다고 생각이 없는 것 같지 않아요. 내가 너희들 때문에 얼마나 고생하는 줄 아냐면서 강요할 필요는 없어요. 말로 하지 않아도 부모가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고 자라면 자기들도 속으로 다 알고 느끼는 거죠. 그래서 그런지 우리 아이들은 사춘기도 무난히 넘어가는 것 같아요.”


서로에 대해 믿어주고 알아주는 관계에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저는 요즘 예능프로그램 시청을 잘 하는데 사람은 누구한테나 배울 점이 있다는 생각을  해요. 억지로 웃음을 만드는 것은 한계가 있지요. 삶이 녹아나고 진정성이 보이니까 같이 울고 웃게 되는 것 같아요.”
평범한 삶이라 할 얘기가 없다던 성기윤씨, 우리가 그의 삶에서 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그도 충분히 아는 듯 했다.

김선정 기자
gcin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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