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일은 

 내일이 걱정하게 하라.


자신을 예술가라고 소개하며. '해피'라고.


무의식 중에 뒤를 돌아본 듯하다.

자그마하고 깡마른 사내가 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인데, 유난히 까만 피부가 그를 더 왜소해 보이게 하고 있는 듯했다. 그는 나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여행지의 어디나 이런 사내들은 있고, 보통은 성가시지만, 낯선 곳에서 말이 통하면 약간의 구전으로 좋은 가이드가 되어 주기도 한다. 

그는 자신을 예술가라고 소개하며, ‘해피’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해피’라니… 갑자기 견공님들이 생각나 킥킥거렸더니, 본명은 따로 있지만 늘 웃고 있다고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부른다고 했다. 어릴 때 엄마 아빠를 모두 잃고 떠돌다, 공예가를 만나 도제로 있으면서 기술을 익혔다고 했다. 예술가라기보다 기능공에 가깝다. 어쨌던 아프리카는 자칭 예술가가 많은 땅이다

영어를 꽤나 해서 한참 영어 공부하는 내게 프리토킹 상대로도 나쁘지 않았다. 영어는 어디서 배웠냐고 했더니, 신이 자신에게 특별히 준 재능이란다. 공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 읽고 쓰는 건 못한다고 했다. 다른 언어는 기억이 안 되는데 영어만은 일부러 노력하지 않았어도 그냥 배워진 걸 보면 신의 선물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길을 안내해준 보답으로 약간의 돈을 건넸는데, 이건 뭐냐는 듯 나를 빤히 쳐다봤다. 자신이 좋아서 한 일이라나. 예술가라며 자존심을 지키려는 그에게 순간 호기심이 일었다. 마침 저녁 시간이었고 이런저런 말 상대로도 나쁘지 않았기에 잡았더니 못이기는 척 자리에 앉았다. 

민물 생선이 유명한 곳이어서 시키려 했더니 고기류나 생선, 심지어 우유나 계란, 유제품도 먹지 않는다고 했다. 채식주의자냐고 했더니 ‘비건’이라고 고쳐준다. ‘비건’은 완벽한 채식주의를 의미하며 일반 채식주의자와 구별된다는 설명이었다. 이유를 묻는 내게, 어느 날 갑자기 고기가 역겨워졌고, 얼마 후 생선과 우유, 달걀까지도 싫어져 그렇게 되었을 뿐이라 했다.


독특한 캐릭터의 그. 현실에서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한국에 이곳의 소식을 전하는 일을 하는데 너를 좀 더 소개해 줄 수 있겠냐고 했더니 순순히 그러마,고 했다. 

그는 남의 집을 무단 점거해 살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돈을 다 모은 후 한꺼번에 집을 완성하는 게 아니고, 어느 정도의 돈이 모아지면 집 짓기를 시작해 벌어가며 완성하므로 미완성 집들이 많은데 그곳에서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멘트 바닥에 깔린 돗자리 한 장과 모기장이 세간의 전부였다. 놀란 나를 진정시키려는 듯, 여기저기 떠돌며 살고 있는 탓이란다. 형편이 나을 때는 호텔에서 지내기도 하니 걱정 말라고 나를 되려 위로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돈이 좀 더 많았으면, 높은 자리에 오르고 성공했으면 하고 끊임 없이 욕심을 내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기에 늘 웃을 수 있다고 했다. 장가도 가야하고 아이도 길러야 할 터인데 미래가 불안하지 않냐고 찔러보지만 고개를 저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특별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은 죽음도 두렵지 않다고 했다. 내일 죽을 것처럼 산다는 그리스인 ‘조르바’가 생각난다.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하자 포즈를 취해 주는데 마치 수도승 같다. 

 

책이 출판되고 나는 한동안 많이 힘들었다. 지인들의 반응에 일희일비하며 그네를 타고 있었던 것이다. 떠나올 때의 용기는 다 사라지고 두려움이 나를 집어 삼켰다. 가진 게 없기에 잃을 것도 없다는 것이 내게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했는데, 자물쇠로 꼭꼭 채워놓은 곡간이라도 털린 양 억울해 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칭찬이나 이해, 공감을 기대한 것인데, 그 기대가 충족되지 못하자 나는 좌불안석하며 좌절하고 두려워한 것이다. 버린 것이 아니고 새로운 욕심으로 나를 채찍질하고 있었던 것인데, 그것이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연결되어 나를 밑바닥까지 밀어내며 상처 입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 날로 충분하다.’


 돗자리 하나와 모기장. 푸성귀만 있어도 항상 웃을 수 있는 그. ‘해피’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내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탄자니아에서 소피아

11월 26일




공간 소개 

TEL 010-9228-8371

ADD 서울 구로구 구로동 793-3 (남구로역  서울빵집 


지역청년을 만나다, 지역공간을 말하다 금천/구로 일대에서 매력적인 공간을 운영하는 지역 청년을 만납니다. 청년들이 편히 오갈 수 있는 혹은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지역공간을 담아냅니다.  


기획 및 제작, 촬영 무중력지대 G밸리

취재 무중력지대 G밸리, 도토리문화학교



# 서울식빵의 시작


Q. 안녕하세요, 간단히 소개와 인사 부탁드려요 :) 


안녕하세요. 서울식빵은 유기농 밀가루와 탕종법이라는 기법을 이용해서 식빵을 만들어 판매하는 빵집이에요. 저는 구로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 청년이자 서울식빵을 운영하고 있는 차선주입니다. 성을 따서 친구들은 주로 저를 ‘차차’라고 불러요. ‘차차’라고 편히 불러주세요. 


Q. 서울식빵을 운영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서울식빵을 어떻게 열게 되었나요? 


보통 여자들이 빵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도 빵을 굉장히 좋아해요. 그런데 또 건강에도 굉장히 예민한 편이에요. 좋아하는 빵도 먹으면서도, 건강도 챙기고 싶은데, 두 가지를 다 잡을 순 없을까하는 고민에서부터 시작해서, 제가 믿고 먹을 수 있는 식빵을 만들어 팔려고 서울식빵을 올해 7월 중순부터 시작하게 되었어요. 


Q. 올해 7월이면 이제 막 시작하는 시점이네요. 서울식빵을 운영하기 전에 ‘차차’는 어떤 일을 했어요? 원래 빵을 만드는 일을 했던 거예요? 


대학 졸업 후에 패션분야 일을 했는데, 취미로 제과제빵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빵만드는 것을 좀 더 전문적으로 공부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베이커리 분야로 옮겨서 일을 하게 되었죠. 유명 프렌차이즈 베이커리에서 근무하며 경험을 쌓고 배우면서, 제 가게를 열 준비를 차근차근 해왔어요. 개인적으로 저만의 가게를, 공간을 만들어보고 싶었거든요.     


Q. 서울식빵이라는 가게 이름이 심플하면서도 예쁜 거 같아요. 


가게 이름을 정할 때 저도 고민을 많이 했는데, ‘서울식빵’이라는 가게 이름이 느낌이 좋더라구요. 쉽고 간단하고 편하게 접할 수 있는, 그렇지만 또 특색 있고 기억에 남는 가게 이름을 짓고 싶었는데, 딱 제가 원하는 느낌을 잘 담고 있는 이름을 찾은 거 같아요. 


Q. 이름에 걸맞게 식빵만 주로 만들어 팔고 있는데, 식빵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제가 빵 중에서도 식빵을 제일 좋아하거든요. 특히 손으로 편하게 뜯어 먹는 게 좋아요. 그래서 가게에서도 칼집을 내서 잘라놓은 식빵이 아니라, 통으로 된 식빵을 팔고 있어요. 


Q. 원래 서울 식빵을 열기 전에, 이 자리에는 어떤 것이 있었나요?


직전에는 전자담배가게였고, 그 이전에도 여러 가게들이 문을 열고 닫기 일쑤였어요. 다 장사가 신통치 않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이 자리에 서울식빵을 열려고 할 때 주변에서 만류도 많이 했어요. 그래도 딱히 그런 점은 크게 개의치 않았어요. 이것저것 다 따지면, 뭐든지 시작하기 어려우니까요. 일단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시작해보는 거죠. 


# 서울식빵의 하루 


Q. 보통 서울식빵의 하루는 어떻게 흘러가나요?


새벽 5시에 출근해서 "1차 빵"을 구울 준비를 시작해서, 믹싱, 발효, 성형, 소성(굽기) 단계로 작업을 해요. 그러고 나면, 오전 8~9시 사이에 1차로 빵들이 나와요. 그 작업을 오후에 한 번 더 반복해서, 오후 5시에 2차로 또 한 차례 빵이 나오구요. 중간 중간 야채도 손질하고, 손님들을 만나는 등 여러 가지 작업을 하다보면, 하루가 훌쩍 흘러가요. 


경제적인 이유도 있지만, 저는 정말 빵 만드는 것이 좋고 재밌어서 가게를 열게 되었는데, 그런 점에서 양심적으로 믿고 먹을 수 있는 건강한 빵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참 재밌고 즐거워요. 


# 배우고 나누고, 소통하는 공간 


Q. 서울식빵에는 주로 어떤 분들이 찾아오나요? 


구로구가 홍대처럼 명소도 아니고, 또 가게가 골목에 있다 보니, 아무래도 지역 주민들이 많이 오시죠.


특히 가게 바로 옆에 제가 살고 있거든요. 오래 살았던 동네에서 가게를 열어서, 엄마의 친구, 친구의 엄마 등등 원래 오래 알고 지내던 이웃이나 친구들, 지인들도 많이 오세요. 그래서 거짓으로 팔수가 없어요. 진짜 맛있고 건강한 빵을 팔고 싶었던 애초의 마음을 항상 기억하며 재미있게 하고 있어요. 


Q. 본인의 동네에 가게를 연 이유가 있나요? 


가게 자리를 구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긴 조건 중 하나가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집과 가까운 곳이었어요. 그 전 직장들이 다 집에서 멀어서 출퇴근이 오래 걸려서 이번에는 가까운 곳에서 일하고 싶었고, 또 새벽 5시부터 빵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다보니, 집에서 가까운 게 최고죠.


무엇보다 저는 제가 사는 동네에서 소소하게 빵을 만들어서 파는 게 더 좋아요. 상수동이나 합정동, 다른 뜨는 동네나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 가게를 열 수도 있지만, 단순히 빵을 파는 것에만 몰두하는 게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랑 교류도 하며, 소소하지만 제가 하고 싶은 것들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으니까요.  


Q. 베이킹 클래스를 하고 있는 것도, ‘차차’가 꿈꾸는 서울식빵과 맞닿아있는 것 같아요. 


맞아요. 저는 서울식빵이 단순히 식빵을 팔고 사는 공간 뿐 아니라, 배우고 나눌 수 있는 공간도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지금 동네 아이들을 대상으로 베이킹 클래스도 하고 있어요. 제가 아이들을 되게 좋아하거든요. 1명이나 2명 아주 소수로, 가게에 자주 오는 아이들과 같이 간단히 쿠키를 만들어보는 시간을 갖기 시작했어요. 돈을 벌려고 한다기보다는, 아이들 한 명 한 명 이름을 외우고 불러가며, 그냥 재미있게 같이 논다는 마음으로 하고 있어요. 


아직은 아이들만 대상으로 클래스를 진행하고 있는데, 나중에는 남자친구한테나 부모님한테 만들어서 선물해주고 싶다는 분들이 있으면 도와드리고 싶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나누는 일, 기분 좋잖아요. 


# 서울식빵의 내일 


Q. 앞으로 ‘차차’가 더 시도해보고 싶은 것이나, 계획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앞으로 시즌별로 다채로운 메뉴도 개발하고, 연말 등 특별한 날을 위한 케이크도 만들어서 팔아볼까 싶어요. 아이들과 함께 주말에 진행하고 있는 베이킹 클래스도 좀 더 확대해서, 성인 대상으로도 해보고 싶구요. 


‘서울식빵’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가게에서 빵 만드는 게 너무너무 재밌고, 그래서 다른 것들보다는 ‘서울식빵’에 온전히 집중하고 싶어요. 

[마침]


일체유심조


두리안의 일종인 '훼나스'라는 과일을 보여주는 상인

 

내 마음이 에덴인데 어딘들 천국이 아니겠습니까?’

 

이곳이 바로 에덴동산이 아니었을까 싶다는 내용의 메시지에 대한 지인의 답신이다. 지금 내 마음은 정녕 에덴인가?

말라위와 국경을 이루고 있는 냐사 호수를 끼고 있는 도시 키에라. 내가 살고 있는 주에 있지만 이곳과는 날씨가 확연히 다르다. 이곳이 초가을쯤의 날씨라면 그곳은 온도계의 눈금이 30을 웃돌고, 건기임에도 주위는 온통 초록빛이다. 호수를 끼고 있는 탓일 것이다. 도심을 조금 벗어나 샛길로 빠지자 간간이 농가만 보일 뿐 주위는 온통 카카오나무다.

 

가나와 함께라면 고독마저도 감미롭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의 성우가 나레이터를 하고, 긴 생머리의 청순했던 채시라가 유난히 돋보였던 초콜릿 광고다. 고독마저도 감미롭게 만들어 버렸던 마법의 초콜릿 원료가 되는 나무. 좀 멋지게 묘사하고 싶은데 아쉽게도 참 볼품이 없다. 엉성한 나무줄기에 잎은 이상할 정도로 윤기가 없는 것이 푸석푸석해 보인다. 조화가 아닐까하고 손으로 만져보기까지 했다. 과일은 메인 가지 여기저기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어 잘못 돋아난 혹처럼 기괴하기까지 하다. 모습으로 치면 천생 럭비공이다.

샛노랗게 잘 익은 과일을 따서 돌에 내려치자 쩍하고 갈라지며 하얀 과육이 알알이 드러난다. 미끌미끌한 과육은 새콤하면서 달작지근하고 부드럽지만 먹을 건 없다. 씨앗이 카카오 원두가 되는 것인데, 마치 오랫동안 씻기고 씻겨 매끈해진 바닷가 조약돌 같다. 짙은 보랏빛을 띠고 있어 언뜻 보면 검정색으로 보인다. 겉껍질이 따로 없고, 씹어보니 의외로 부드럽게 씹히는 것이 풋콩처럼 비릿하면서 쓴맛이 난다. 입자는 어느새 고운 보랏빛으로 변해있다.

 

과수원을 직접 볼 기회가 없었던 어린 시절, 나는 과일을 보면 저게 어떻게 나무에 매달려 있을지가 참 궁금했었다.

처음 딸기밭을 보며 밭두렁을 타고 이리저리 뻗어 있는 가지에 달린 빨갛고 싱싱한 딸기는, 차마 저걸 어찌 따나 싶을 만큼 경이로웠다. 그 후 참외와 수박을 보면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었다. 그러다 나무에 달린 사과를 보면서는 마치 신밧드의 모험에 동참한 기분까지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 시시한 것이 다 궁금했구나 싶은데, 그런 사소한 것들에 대한 호기심이 나를 이곳까지 이끈 힘이 아닐까도 싶다.

탄자니아는 내게 식물원이고 동물원이며 박물관이다. 여기는 자연이 만든 것은 무엇이든 풍부하다. 세네갈에 살면서 나는 신이 버린 땅이란 생각을 하곤 했는데, 이곳은 신이 축복한 땅이다.

 

돌아 나오는 길이었다. 몇 채의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그 곁에 어른 머리통 두 세배는 족히 되어 보이는 크기에 삐죽삐죽 침이 돋은 과일을 달고 있는 나무가 있다. 두리안의 한 종류일 거라고 추측했는데 젝플룻, 이곳에선 훼나스라고 불리는 과일이었다.

주인을 불러 살 수 있냐고 했더니 창고로 안내했다. 시장에 내달 팔 요량으로 보관한 과일 몇 개가 바닥에 뒹굴고 있다. 크고 잘생긴 놈을 하나 골라 내 온다. 저걸 집에 가져가는 것은 엄두조차도 못 내겠다 싶어 마당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 할 요량이다.

잠시 후 한 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바나나 잎을 따든 아저씨가 나타나는 가 싶더니 교복을 입은 학생을 비롯해 꼬마들이 몰려드는데 어림짐작으로 봐도 서른 명은 너끈하다. 마치 미리 대기하고 기다리던 엑스트라 배우들 같다. 커다란 바나나 잎을 척 까니 그대로 잔칫상이다.

박을 타듯 타니 노랗게 익은 과육 사이로 울콩 같은 씨앗이 듬성듬성 박혀있다. 잔치의 주빈이 되어버린 내게 제일 먼저 한쪽을 잘라 건네는데 먹는 게 여간 까다롭지가 않다. 씨앗이 박힌 곳을 중심으로 결이 나있는데 쭉쭉 찢어 먹으니 쫄깃하고 달다.

지금 생각해보니 몇 개 더 사서 푸짐하게 나누어 먹었어도 좋았을 걸 싶다. 그 당시에는 갑자기 모여들던 사람들, 식탁보 같던 바나나 잎, 과일에 대한 호기심 등에 신바람이 나서 생각할 여가가 없었다.

돌아와 현지인 친구에게 그 곳을 스케치해 보여주니, 이곳이 에덴이었던 걸 어찌 알았냐며 박장대소했다. 아담과 이브가 백인이라고 하지만 사실 아담과 이브는 흑인이었단다.

과일 한 통이면 즉석에서 축제가 열릴 수 있는 이곳.

늘 축제처럼 살 수는 없겠지만, 마음을 열면 어디서든 천국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탄자니아에서 소피아

10월 28일

 

마을미디어 라디오 금천 

 조규만의 즐거운 실버를 진행하는 할배 DJ  조규만 



매주 목요일 11시 30분이면 팟빵 ‘동네방네 서울마을미디어’에서는 정겹고 푸근하지만 힘찬 목소리가 들린다. 바로 긍정의 에너지로 청취자들에게 행복 바이러스를 전하는 라디오 금천 조규만씨의 목소리이다. 이번 호는 청년들보다 더 청춘을 만끽하며 열정적으로 라디오 금천에서 ‘조규만의 즐거운 실버’를 진행하고 있는 최고령 할배(79세)DJ 조규만 씨를 만나 보았다.


 금천의 터줏대감이라 하던데 금천에 언제부터 살았나?

1971년부터 현재까지 45년을 살았다. 논산에서 태어나 자라며 군대 제대 후 군민운동(새마을운동 전신), 공회당 순회 강의, 동네 야학 개설(문맹퇴치, 중학과정) 등의 활동으로 청년 시절을 보내다 도지사 표창으로 선거관리직 공무원 특채 후 판직 시험으로 1969년 상공부 국립 광업 연구소(현 한국지질자원연구원)로 이직 했다. 1976년 당시 가리봉동 삼립식품 공장 뒤로 회사가 이전하게 되어 금천구에 처음 오게 되었다. 1999년에 정년퇴직을 했지만, 금천이 좋아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금천에 남다른 애정이 있다는데?

애정이 넘친다(웃음). 71년 금천에 이사 올 당시 다른 도시와 달리 초가집이 많았고 현재 은행나무 오거리 인근 개천이 안양천까지 연결될 정도로 정겨운 시골 분위기가 나서 처음 도시생활을 하는 내가 자연스레 적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제 2의 고향으로 마음을 두고 편하게 살 수 있었다. 정 있는 사람들이 많고, 아직은 깨끗한 환경, 저렴한 물가 등등 애정이 없을 수 없다.


라디오를 진행한 계기는?

 직장에 있을 때 ‘슬라이드 프로젝트‘라는 것을 준비하면서 업무 슬라이드를 만들어 보았다. 5개 부서 경진대회였는데 내가 일등을 했다. 그리고 회사 기술직에 있으면서 총무과의 다양한 사내 방송과 회사 행사 진행 등의 경험으로 방송을 조금 경험했고 방송에 대해 늘 관심이 있었다. 그러던 중 작년 9월 라디오 금천 교육 프로그램을 알게 돼 수료 후 바로 실버들을 위한 방송을 진행하게 됐다.


‘조규만의 즐거운 실버’는 어떤 방송인가?

내가 실버다. 나이가 많다고 항상 진중하게 무겁게 있을 필요는 없다. 나 스스로가 유머와 위트를 좋아하기 때문에 실버들을 위한 즐거운 방송을 하고 싶었다.

 실버들의, 실버들을 위한, 실버들에 의한 방송이다. 그들의 시선에 맞춰 필요한 정보를 무겁지 않게 전달하고, 편안한 음악과 멘트로 웃음과 위안을 주는 방송이다.


즐겁게 실버를 보내는 방법 소개한다면?

마음을 비워라. 꾸미지 마라. 내 인생 신조가 나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배려이다. 대우받고자 하면 대우해주면 된다. 그러면 자연히 마음이 편해지고 즐거워진다. 


 라디오를 진행하면서 느끼는 보람과 어려운 점?

퇴직 후에도 사회에 꾸준히 참여한다는 점에 큰 보람을 느낀다. 방송을 통해 사회에 봉사할 수도 있고, 건강에도 신경 쓰게 돼서 더 보람되다.

아직까지 큰 애로사항은 없다. 다만 종종 함께할 만 한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아쉽다. 라디오가 많이 활성화돼서 방송 참여와 활용이 적극적으로 이뤄줬으면 좋겠다.

대본을 수기로 직접 준비하는게 좀 어렵다. 대본의 자료를 대게는 신문이나 책에서 미리 수집하고 오전 10시부터 2시까지 점심도 거르고 몰입해서 쓴다. 하지만 그렇게 정성스레 대본 작업이 되었기 때문에 좋은 방송이 나오는 거다.


 가족들의 반응은?

모두 긍정적으로 격려해준다. 물론 아내는 나의 대본 쓰는 어려움을 알기에 걱정도 한다. 아이들이나 손주들도 가끔 방송을 듣고 얘기해준다.


 앞으로의 포부는?

내가 활동할 수 있을 때까지 방송을 즐겁게 잘 이끌어나가는 것이 포부다. 방송은 정년이 없으니깐 말이다(웃음). 또 동년배들의 많은 참여가 이뤄질 수 있도록 더 노력해서 좋은 방송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라디오 금천이 마을에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 라디오 금천에는 열정적으로 마을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애쓰시는 분들이 참 많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곧 있을 11월 10일 라디오금천 개국식을 계기로 라디오 금천이 많이 알려지고, 발전했으면 좋겠다. 물론 더불어 후원자들도 많이 모집되길 바란다(웃음).


김혜희 기자

gcinnews@gmail.com


금천구가 독립한 지 20년이 지났다. 금천의 시민사회는 얼마만큼 성장했을까? 누가 자신 있게 우리 시민사회의 미래를 낙관할 수 있을까? 왜 사람은 많은데 사람이 없다는 말이 반복될까? 몇몇 열성적인 활동가들의 목소리와 갈등에 포획되어 교착된 상황은 왜 해체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가? 시민주권의 꿈은 헛된 망상에 불과한 것일까? 


시민 - 번갈아 가면서 지배하고지배당하는 존재 


지난 번에도 언급했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을 번갈아 가면서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존재라 정의하였다. 그리스 시대의 자유의 개념은 이사야벌린의 구분을 빌리자면 소극적 자유였다. 그곳에서의 자유란, 복잡한 공적 업무를 동료에게 인계하고 그곳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기만의 사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자유를 의미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두가지를 알 수 있는데, 먼저 그들에게 공적 업무를 맡는다는 것은 권리 이전에 의무였다는 것, 둘째로 폴리스에 대한 위협이 상존하는데도 동료시민에게 그 자리를 내어줄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너와 나의 공동체에 대한 애정만큼은 다르지 않다는, 동등성의 원리에 바탕을 둔 믿음과 신뢰가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동료시민들이 번갈아가면서 지배하고 지배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모두 지배하려고만 하고, 오르려고만 한다. 정치도, 회사도, 시민사회도 예외가 없다. 올라가지 못하면 불안하다. 그야말로 떨어지면 낙오다. 교장을 하다가 평교사를 하고자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으며, 검사장 하다가 평검사 역할을 하는 사람도 보지 못했고, 국회의원하다가 구의원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것은 지역 정당도, 군소 지역 정당도 마찬가지다. 한번 위원장하면 중앙으로 올라가지 않는 한 끝까지 위원장을 하려한다. 때론 맡길 만한 사람이 없기에 어쩔 수 없다는 이유를 들기도 하지만, 사람이 없다는 말은 그만큼 무능 했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나마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시민사회도 마찬가지로 덫에 걸린지 오래다. 한번 맡은 사회적 지위는 더 상승하기를 바라면 바랬지 동료에게 내어주고 지배를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자기 보다 부족하다고 여긴 동료가 어떤 위치를 맡으면 도와주면 그만인 것을 끊임없는 험담으로 자기 불안을 대신한다. 결국 그 불안은 줄세우기를 강요하게 되고, 자기 편을 들어주길 바라며 은근히 자기 세력을 만들려 한다. 은연중 누가 자기 험담을 할까 촉각을 곤두세우기도 한다. 

타인의 모든 행위는 불순한 의도의 수단으로 의심받고, 갈등은 발전의 근간이 되지 못한 채 늘 언제 또 터질지 모를 불안만 가중시킨다. 갈등은 원인의 무한 소급에 빠져 더욱 미로를 헤맨다. 시민은 많은데 결국 시민이 없고 쉽게 지치는 이유다. 누구도 더 기대하지 못한다. 동료 시민들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없다는 것은 결국 자기 무능이다. 불가에서 “나는 너다.” 라고 하지 않았던가. 

2003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주 정부는 무작위로 입법가로서의 시민의원을 선출했다. 물론 선거를 통한 의원이 있었기에 이들의 집요한 반대는 불 보듯 뻔했을 것이다. 그 시민의원들이 정리한 법안(선거제도)은 주민투표로 이루어졌고 57.3%를 득표했다. 즉시 입법 되는데 60%가 필요했기에 결국 그 법은 폐기 되었지만 그럼에도 이 실험은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사라진 박애  


모두 알다시피 자유 평등 박애는 근대 프랑스 시민혁명의 주된 가치였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근대 계몽주의의 위대한 가정은 박애라는 실천윤리가 없이는 불가능한 가정이었다. 그런데 왜 박애라는 형제애와 연대의 가치는 근래에 와서 멀어졌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두가지로 추측하고 싶다. 하나는 근대 초기 나치와 파시즘과 소련 공산주의라는 희대의 전체주의라는 비극에 대한 경험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비극적 경험을 통해, 동지애나 연대의 가치에 대한 강조가, 전체주의에 동조한다는 의심 받을지도 모른다는 자기 검열을 불러일으킨 것이 아니었을까? 

게다가 동지애나 연대는 동질적인 공동체를 이루지 않고는 정체에 대한 헌신을 도덕적으로 끌어낼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 아니었을까? 결국 마이클샌델 같은 공동체 자유주의자도, 한나아렌트와 같은 정치철학자도 전체주의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두번째는 이데올로기가 종언을 구한 다음 도래했던 변종 신자유주의의 득세다. 신자유주의가 성공이라는 개인적 권리에만 줄기차게 집단적으로 천착한 결과로 연대와 박애의 가치는 더 멀어지게 되었고, 결국 그 가치는 개인의 성공을 위한 전략이나 수단으로만 전락하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자유와 평등은 주로 의무보다 개인의 권리에 대한 개념이다. 그것이 불간섭 자유이던, 비지배 자유이던 말이다. 그에 비해 박애는 주로 의무에 관한 개념이다. 논리적 비약이겠지만, 우리가 우리의 자유와 평등을 권리로서 보장받기 위해서는 박애라는 연대의 책임을 질 때만이 가능하다. 박애와 형제애와 연대의 가치가 폐기된 곳에서, “자유롭고 평등하기때문에 인간이 존엄하다”는 가치가 존립할 수 있을까? 

당장 개인의 권리만을 앞장세운 신자유주의가 판을 치는 곳만 보아도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박애가 자유와 평등을 위한 수단이라는 말은 아니다. 박애는 박애대로 고유한 가치가 있다.) 박애와 형제애와 연대는 비단 개인과 개인만의 관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형제애의 정신은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간의 연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다른 정치적 이상과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그 불편함을 인내하고 연대하겠다는 각오 없이는 “자유롭고 평등하기때문에 인간은 존엄하다”는 근대의 이상은 공염불이 될 수 밖에 없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역사적으로 민주주의가 성숙하는 과정에서는 노예의 해방이라는 담론들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고대 그리스가 그러했으며, 영국과 미국이 그러했다. 

노예들의 투쟁을 통해 도래한 해방의 담론이 아니라 당시 자유민에 의해 자발적으로 도래한 해방 담론을 말한다. 이 사실은 민주주의에서는 내가 절대 자유롭고 평등하기 위해서 박애가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그 자체로 존엄하기 때문에 박애와 연대는 전략이나 수단이 아닌 절대 당위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연대는 인간에 대한 존중과 관인에서 시작한다.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을 관인하겠다는 똘레랑스에서 비롯된다.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30년간의 종교전쟁을 치르고 나서야 종교가 다름을 존중하고, 공존하기로 했던 관인의 가치가 서구의 근대화의 중요한 덕목이 되었던 것 아니었던가.  

다시 시민사회로 돌아와 보자. 어쩌면 우리는 보다 좋은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헌신과 열정만큼이나 관인과 연대에는 무심했던 것은 아닐까? 

자신이나 또는 자기가 속한 집단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만큼 타인이나 타 집단에 대한 동료애나 연대의 의무를 수행했을까? 이것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그러나 자신이나 자신의 집단이 신도 아니면서 자신의 정치적 윤리적 이상만이 옳다고 타인을 배재할 권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왔단 말인가? 이것은 결단코 옳지 않다. 서구가 3~400년간의 과정의 긴 고통을 통해서 열었던 근대를 우리는 정녕 거져 먹었다는 것인가? 


금천의 시민사회가 적어도 시민주권이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박애와 형제애의 의무를 함께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이고 명령이다. 그 형제애의 대상은 자기가 속한 집단의 동료 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누구와도 연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치명적으로 인권을 침탈하고, 또 공적공간을 파괴하고 사유화 시키려 들지 않고, 치명적인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정당이던 무엇이던 형제애의 마음은 열어놓아야 한다. 그러한 관계 속에서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정체성은 확보되고, 주어진 공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헌시 되면서 명예와 영광이 주어지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글을 쓴다는 것이 늘 어렵다. 나 역시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또한 반성으로 여겨줬으면 좋겠다.)                            


                      

        금천구 주민 

이윤로

                                   



금천서민경제 다 죽이려는가 ?



대한민국 자영업자들은 노동자들 보다 335시간 더 많은 연평균 2406시간 일하고 있다. 물론 OECD 1위다. 그러나 1997년 국가부도이후 비정규직 노동자와 중소기업 노동자를 중심으로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1인 자영업자의 5년 후 생존율이 29.6%에 불과한데서 볼 수 있듯이 한국의 영세상인과 소상공인들은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다. 
 그런데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금천의 서민경제를 유달리 잔혹하게 파괴하고 있는 것들이 대형마트와 SSM들의 무분별한 난립이다. 검증된 통계를 보면 SSM 하나 들어서면 동네슈퍼 22개가 문 닫아야 하고, 대형마트 하나 들어오면 전통시장 매출액이 40-50% 줄어든다 한다. 대명시장을 봐라 ! 100미터도 안되는 지점에 홈플러스가 들어서면서 그 잘나가던 시장이 지금 다 무너지고 유흥가로 전변되어 있지 않은가? 
 관악구는 금천 인구의 두 배가 넘음에도 도시외곽에 대헝마트가 한 개 밖에 없다. 선진국들 대부분은 대형마트가 도시외곽에 위치하고 있단다. 금천은 도시 한 복판 전통시장 부근에 나란히 대형마트가 3개나 있다. 한인수 전 구청장이 허가해 준 것이다. 해도 너무 했다. 금천의 인구가 서울에서 제일 빠르게 줄어들고 있고 자살율이 매우 높은 이유를 알 것 같다.
    
     롯데마트 건축허가는 취소 되어야한다.
  상인들 앞에서 전통시장이 살아야 금천경제가 살 수 있다고 항상 외치고 다녔던 차성수구청장이 전통시장 상인들은 물론이고 본인이 속한 민주당이나 구의원, 시의원들하고도 상의없이 동네 한 복판, 현대시장과 500미터도 안 되는 곳에 매장면적 2만5천평방미터나 되는 롯데마트 건축허가를 승인해줘 버렸다.
 서울에서도 규모로 상위권에 든다는 롯데마트가 또 금천에 들어오면 겨우 연명하고 있는 현대시장과 남문시장, 대명시장, 골목시장등과 소상공인들은 존폐의 위기에 몰릴 것이다. 이들이 무너지면 금천경제가 무너지는 것을 정말 모른단 말인가? 
  창원시, 서울 구의동, 전주시 등에서는 교통체증과 소상공인 보호를 명목으로 대형마트 건축허가 심의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지금의 유통산업발전법이 3000평방미터 이상의 대헝마트가 전통시장 1키로이내에 입점하려 할 때는 상권영향평가와 전통시장협력계획서를 대형마트 건물을 준공한 후 사후적으로 제출하게 되어있어, 건축허가 자체를 통제할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개념있는 많은 자치단체장들은 교통영향평가나 환경영향평가 결과를 이유로해서  소송을 불사하며 무리를 하면서까지 건축허가를 안해주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현재 롯데마트 공사가 본격적으로 진행이 안된 상태이다. 2002년 시흥3동 동네 한복판에 주민들이 혐오하는 신앙촌이라는  종교건물을 당시 구청장이 주민들 여론수렴과정 없이 건축허가를 내준 적이 있었는데, 주민들이 이에 저항해서 반대운동을 격렬하게 벌였고 결국 한인수 구청장은 건축허가를 취소한 적이 있었다.
 인천시에 소재하는 대헝마트 사업자들이 인천시에 휴점날짜를 평일로 해줄 것을 제안
 했을 때, 인천시와 의회의 답변은 [시민들의 편의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전통시장과 소상공인들의 생존권이다]라는 것이었다. 차성수 구청장이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다.

금천미래연구회 대표 
최규엽


경제적으로 힘들어도 행복한 금천구가 되었으면


류은무 서울마을지원활동가!

이름이 익숙하다. 금천구의원으로 12년간 3선을 지냈으며, 부의장까지 한 류은무 전 구의원이 마을활동가로 활동을 하고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게다가 박원순 서울시장의 마을공동체사업에 대해 비판적인 새누리당 소속이다.

반대로 마을활동가들 중 의원출신은 보기 힘들다. 몇몇 명망있는 시민활동가들의 경험은 있지만 소위 보수정당 출신은 본 기자는 생소했다. 어떤 생각일까 궁금증을 안고 지난 8월27일 류은무 마을활동가를 만났다.


어떻게 활동을 시작하게 됐나?

의정활동하면서도 새로운 것에 있으면 도전해왔다. 취미로 축구를 하면서 감독도 해보면 새로운 선수를 기용도 많이 했다. 개인적으로 색다른 시도를 많이 하는 편이다. 그리고 마을공동체사업은 필요한 사업이다. 이우재 전 의원도 도시농업의 필요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했고, 나도 본회의장에서 표현한 바 있다. 도시농업이 잘되어 있는 것이 쿠바다. 고립된 가운데 도시를 유지하는 한 측면이 도시농업이다. 그리고 나이 든 분들도 상자텃밭 재배를 통해 생산자로 변모할 수 있다. 고령사회라고 이야기를 하고 걱정을 많이 하지만 도시농업만큼 실천적인 대안은 아직 없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정책이라고 하지만 구민이 원하고 주민이 필요하면 빨리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해왔다.

사람과 사람의 활동과 관계는 마을 속에서 이뤄진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사람들 속에서 이뤄져야한다. 그래야 사람의 이익을 끌어낼 수 있있다. 당의 색깔과 마을공동체가 안 맞다고도 한다. 당원이지만 당의 개념보다는 주민들의 실생활에서 의정활동을 해왔고 우리 당이 아니라고 ‘몰라’,‘안해’라고 하지않았다

금천구에서 하는 마을공동체 이웃만들기 공모사업을 해 70만원을 지원받아 해봤다. 직접 해보니 마을공동체의 흐름을 할게됐다. 그 이후  서울시마을지원활동가 활동에 참여해 56시간의 교육을 이수했고 사회적경제교육 등 많은 교육을 받았다.


하고 싶은 활동은?

 초반에는 당의 신분을 배제하고 구의원했다는 것도 잘 밝히지 않았는데 교육의 특성상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서는 진행이 될 수 없었다. 분임토의와 토론 속에서 다 드러나게 된다. 마을공동체사업은 진실 속에서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져 하는 사업이다.

괴리감은 거의 없었고 개인적으로 좋다. 의정활동이나 당 활동에서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묘미가 있다. 젊은 애기엄마들도 만나고 새로운 세대층에서도 배우고 있다. 대화를 하면서 솔직히 ‘수준 안되는 구의원활동을 했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생활패턴에서 주부들의 교육에 대한 관심은 집요하고 꾸준하다. 기회가 되면 이런 부모들과 자기아이만 잘 기르겠다는 생각을 양보해야한다는 부모교육을 하고 싶기도 하다. 아이들을 혼자키우려 하지 말고 3세대가 모여서 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은 것 같다. 부모커뮤니티사업이나 공동육아, 자녀돌보미 사업들에서 몇 십만원으로 큰 만족을 하고 있다. 그 맛을 본 사람과 가족들이 행복진다. 자녀들과 같이 하는 공동체, 함께 변화하는 공동체로 변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예를 들면  내 손주를 가만히 보면  나랑 참 닮았다. 성질도 그렇고. 그래서 이놈이 빽빽 거리며 울면 애기엄마는 몰라도 난 이해가 된다. 한 아이에 대한 폭넓은 참여가 이뤄지는 것이다. 

 


구의원과 마을활동가의 다름

계층간을 보면 구의원을 할 때 만난 민원은 대부분 건물을 가진 사람들, 중산층 이상 이거나 아니면 아주 저소득층, 의료수급대상자 들이었다. 마을활동은 주로 자녀를 키우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대화가 다르고  차이가 많이 난다. 금천구에는 공동육아, 교육과 관련한 사업이 많다 문화부문이 좀 뒤쳐진다.


구의원을 지내면서 행정의 습성에 대해서 이해가 남다를 것 같다. 민관거버넌스를 위한 제언을 해달라.

관이 집념을 가지고 참여해야한다. 주민센터, 특히 주민이 주인되는 형태로 새롭게 위촉받는 주민자치위원이나 시니어 상담가들과 유대관계를 가져야한다. 민간이 관에 끼어드는 것을 거부할 만도 하지만 그럼에도 조화를 만들어야 한다. 관에서 공무원들에 대한 교육을 잘해야 한다. 마을공동체 사업이 4년차 된다고 하지만 서울시 인구 중 1%만 참여하고 있다. 5%정도가 되야 마을속에서 역할을 확산시키고 참여한 사람들의 사기를 높여낼 수 있다.

근본적으로 마을공동체가 좋기는 한데 예산 뒷받침이 너무 약하다. 생계에 도움이 될까하고 들어온 사람은 흥미를 잃고 금방 사라진다. 활동하는 사람도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데 정작 중요한 돈 이야기를 잘 안한다. 배가 든든해야 연구도 하고 그런 속에서 주민들의 신뢰를 얻는 것인데 그 부분이 가장 미진하다고 볼 수 있다.


금천구 마을활동, 특징이있다면

금천구에는 열심히 하는 활동가들이 많다는 것이 큰 자산이다. 생각하는 지적수준도 수준급이다. 마을공동체의 기본 취지가 더 확산되서 서민이 많이 사는 금천구가 삶의 활기가 돌았으면 좋겠다. 정치적으로만 보지 말고 시민들의 삶, 평등한 삶을 추구하는 것에서 행복이 한발짝 오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경제적으로 뒤쳐지지만 행복지수는 가장 높은 금천구가 됐으면 좋겠다.


이성호 기자

gcinnews@gmail.com



구로동맹파업 30년, 당시 대우어페럴 사무국장

강  명  자



30년 전 1985년 6월24일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최초의 동맹파업이 금천구 가산동(당시 가리봉동)에서 일어났다.

현 현대아울렛의 자리에 있던 대우어패럴 노동조합의 김준용 위원장과 강명자 사무국장이 22일 구속조치가 파업의 발단이었고  6월 23일 비상대책회의를 열어 대우어패럴에 대한 탄압을 <민주노조탄압의 신호탄>으로 인식하고 동맹파업을 결정했다. 6월 24일 대우어패럴 노조가 파업에 돌입하는 것을 신호로 효성물산·가리봉전자·선일섬유가 즉각 파업에 돌입했고, 25일에는 남성전기·롬코리아가, 28일에는 부흥사 노조가 동맹파업에 가담함으로써 참여 노조 숫자는 총 10개, 노조원 약 2천 5백여 명에 달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당시나 지금이나 구로공단이 있는 금천구는 한국현대사의 굵직한 획을 그어갔고 그 사람들도 아직 여기에 살아가고 있다.

30년 주년을 맞아 당시 대우어페럴 사무국장이었던 강명자(54세) 씨를 만났다. 인터뷰를 하는 날이 일요일에도 불구하고 구로구 고척도서관에서 진행하는 공단 탐방코스를 안내하고 난 후였다.

구로동맹파업은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역사에서 배울 건 배우고 버릴 건 버려야한다. 70년대 노동조합이  정권에 의해 제각각 깨져나갔다. 그 경험 속에서 동맹파업이 만들어진 것이다. 대우어페럴 조합이 깨지면 효성이, 효성이 깨지면 가리봉 전자로 이어졌을 것이다.” 

“나는 동맹파업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잘 모른다. 나와 김준용 위원장이 구속된 것을 기점으로 발발했으니까. 밖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상태로 경찰서에 몇일 있으니까  대우어페럴 조합 식구들이 유치장에 우르르 들어와서 알게 됐다. ‘이년아 너 구하려다 들어왔다’는 말과 함께.”

 명자 씨는 2~3년전부터 구로공단의 역사탐방의 종종 하고 있다. 평일에는 미싱을 하고 주말에 가끔 신청이 들어오는 하는 정도로.

“교과서적인 것은 안한다. 내가 겪었고 보았던 것을 알려준다. 가리봉5거리의 나포리다방, 일주일에 100시간,120시간일을 하기 위해 티이밍을 사먹었던 구림약국을 지나고 왜 우리가 노동조합을 건설할 수 밖에 없었는지 이야기해준다.”

현재 가산동 두산아파트이 있는 예전 삼립빵 공장이 있던 자리를 지날 때는 “그 배고픈 시절에 진동하는 빵 냄새가 어땠을까?” 물어보기도 하고, 바로 돌아 기륭전자의 공장을 지날 때는 현재도 진행되고있는 노동조합의 싸움과 현실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구로공단의 굴뚝은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아파트형공장빌딩 숲이 들어섰지만 그 속에 일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마리오아울렛 제3관에는 상징적 굴뚝 앞을 지날 때 명자씨는 “빌딩 숲에 비정규직이 넘쳐나고 있다. 당시에는 생산하고 만들어 냈던 이곳이 이제는 쇼핑몰이 됐다. 내가 젊은 날 살았고 숨 쉬고 있던 곳이 쇼핑몰로 되어 여기에 오려면 쇼핑을 하러 와야하고 돈이 있어야 올 수 있는 곳이 됐다.”고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한다. 

지금의 현대하이힐 들어선 대우어페럴 자리에 지날 때는 첫 인상을 알려준다. “언니가 대우어페럴에 다녀 면회를 왔는데 4~5월인가 장미가 만개해 있느 곳에  점심 때는 하얀스카프에 하늘색 가운을 입고 삼삼오오 웃는 모습이 그렇게 좋아보였고 간절히 오고 싶었다.”

그 간절함으로 82년 입사했지만 화려한 겉모습의 속내는 화려하지 않았다. 기숙사생 600명이었고 외출과 외박이 안됐다. 그러다 ‘어느 청년의 삶과 죽음(전태일 평전)’이라는 책을 보게 됐고 밤새 울면서 읽었다. 그려면서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84년에 조합을 만들고 85년에 구속당한다. 


수출의 다리 앞을 지날 때는 블랙리스트에 올라 노동자의 생존권을 박탈당하고 밥 줄이 끊겼던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야기한다. “85년 대우어페럴에서 구속된 후 86년 4월 석방돼 86년 5.3인천항쟁에 참석하고 계속해서 노동조합 건설 활동을 했다. 그리고 좀 더 조건이 좋은 ‘서광’에 입사하려고 했는데 블랙리스트라서 안된다는 것이다. 그때 블랙리스트라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봤다. 노동자가 자기의 노동을 팔아서 먹고 살아야하는데 그럼 무엇을 먹고 살아야하나 싶어 이 수출의 다리를 건너오면서 정말 많이 울었다.” 

명자씨는 블랙리스트로 공단과 운동에서 떠났지만 여전히 봉제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노동운동할 때는 미싱엔 관심이 없다가 이제는 어떻게 하면 빠르고 예쁘게 할까 고민한다. 미싱은 나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했다.”

독산동에는 조그만 봉제공장이 밀집해 있다. 서울에서 유일하게 봉제전문인력사무소가 위치해있는 곳도 독산동이다. 예전에는 공단에서 옷이 만들어졌지만 이제는 독산동에서 옷을 만들어 물류창고를 거쳐 공단에 있는 마리오나 W몰로 들어간다. 봉제노동자들은 예전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하게 됐다. 당시 공돌이 공순이의 이름을 이제는 비정규직이라고 부른다. 명자 씨는 “20미터 도로의 몰려있는  봉제아줌마들 위한 무엇인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제 봉제를 배우는 사람도 없다.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고민해보고 싶다.”고 바람을 전했다. 


이성호 기자

gcinnews@gmail.com



희망을 가졌다는 것

이승무 전 진보당 금천구위원장


인터뷰가 약속된 토요일 밤, 작업 후 나타난 이승무 씨의 얼굴은 용접 불꽃으로 벌겋게 달아올랐고, 눈썹도 군데군데 그을려 있었다. 병원을 가봐야 하지않겠느냐는 물음에 그냥 얼굴 한번 쓸어내리고 웃고 만다. 이승무 씨는 용접공이면서, 얼마 전 헌법재판소가 강제해산한 통합진보당의 금천구위원회 전 위원장이다. 

공교롭게도 12월19일 박근혜정권 2년을 맞는 날 통합진보당은 해산됐다. 헌정사상 유래가 없던 정당해산에 많은 사람들은 당혹감에 빠졌다. 통합진보당의 중앙당과 서울시당 사무실은 폐쇄절차와 회계정산을 하고 있고, 국회의원과 지방비례의원직은 상실됐으며, 통합진보당의 모든 모임은 불법화됐다. 

헌재의 해산결정에 대해 이 전위원장은 “14년동안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으로 이어온 진보정당이 국민의 선택이 아닌 박근혜정부에 의해 강제해산되고  민주주의가 무너진 것에 대해 많이 분노했다. OECD가입국이자 GDP 2만달러의 국가에서 정부가 정당을 해산한다는 것은 헌법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87년 이전으로, 박정희유신 정권으로 돌아간 착찹한 기분”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관심법의 헌재 판결문

헌재의 판결문에 대해 사회적 논란이 많다. 판결문에 대해서도 “정당해산이 과거 독일에서 있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난 시기였음에도 4~5년에 걸쳐 신중하게 결정했다. 자료만 해도 정부요구 17만페이지, 진보당 요구 10만페이지나 되는 방대한 양인데 1년도 안되는 기간에 졸속으로 처리했다. 이석기 의원의 5월12일 강연회에 참석치 않은 사람도 참석한 것으로 거명하는 등 검증을 거치지 않은 허술한 심사였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진보적 민주주의’가 북한이 사용한 것이고, 반국가단체로서 북한을 추종하고 북한식 사회주의를 지향하기 때문에 반국가 단체라는 결론인데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 그저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말은 미국의 루즈벨트도 이야기했다.”고 밝히며  헌재판결문을 비판했다.


정권에 대한 공포의 확대

이 전위원장은 정권에 대한 공포감의 확대를 가장 우려하면서 “박근혜정부에 ‘반대’라고 말하는 사람과 단체에 대해 공안몰이가 예상되고 있다. 냉전의 구도, 매카시즘이 확대되고 표현과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말살되고 있다. 종북이니 빨갱이니 피해의식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최대 적인 권력에 대한 공포감이 확대되고 있다. 그것이 정권이 노리는 것 같다.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이 공포정권으로 가고 있다.” 고 진단했다. 


희망을 가졌다는 것

이 전 위원장은 오랜 기간 노동조합활동을 하면서 진보정당의 필요성을 고민했고 당활동을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노동조합이 대기업 조합 중심인데다가 영세공장이나 건설현장은 노조로 조직하기가 어렵고 교섭상대도 막연했다. 건설현장에서도 다단계에 하도급까지 되니 누가 사용자로 되어야 하는지 한계도 있었다. 그러면서 진보정당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고민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노동자가 잘사는 사회, 건설노동자, 영세노동자들이 잘 살수 있는 것이 나의 희망이 아니었나 생각이 들었다. 방법이 뭘까? 프랑스에서는 큰 공장에서 단체협약을 체결하고 그 구속력이 금속이면 금속, 금융이면 금융 전 산업에 영향을 미친다. 만약 건설노동자들이 대구에서 협약을 했다면 그것이 전체 건설노동자에게 적용될 수 있게 만드는 것, 이런 것은 진보정당을 통해서만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해결해야할 문제들

이 전위원장은 “진보당이 해산됐음에도 평화통일의 문제, 양극화의 문제, 경제민주화의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어떻게든 해결해야 할 문제다. 금천 주민들이 이런 문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주고 민주주의의 후퇴를 막는데 함께 해달라.”고 호소했다.



이성호 기자

gcinnews@gmail.com

관계속에서 피어나는 꽃

금천지역자활센터  윤지태 팀장


금천구는 2011년부터 사회적경제부분 활성화를 위해서 사회적경제한마당을 비롯해 매월 공유경제장터 해노리장도 운영해오고 있다. 금천자활센터는 사회적경제 강의와 연대회의, 장터에서도 꾸준히 참석하고 있다. 2011년 제1회 사회적기업가 학교에서부터 첫 얼굴을 보고 그 후 지속적으로 자활에서 활동하며 매 장터에 참여한 사람이 윤지태 팀장이다. 더울 때나, 추울 때나 실내로 들어올 수 없는 먹거리 부스를 빠짐없이 맡아오고 있는 사람도 윤 팀장이다. 몇 년간의 꾸준함에 지태 씨와의 약속을 잡았다.



자활

교과적인이야기로 한다면 자활센터는 1997년 IMF 당시 능력은 있지만 부도나 실직한 분들을 구제하기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수급자로만 살수 없기 때문에 새롭게 일을 배워 취업도 하고 창업도 도와주기 위한 기관으로 전국에 247개가 있고 금천지역자활센터는 2001년에 설립해 금천구에 사업단은 간병, 청소, 인큐, 장애인통합 등 6개의 사업단과 4개의 자활기업이 있다. 자활에서 교육을 받은 사업단으로 사업을 시작하고, 이후 기업으로 독립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자활의 특징 중 남녀 비율을 보면 남성이 많은데 금천구의 경우 6대 4 정도로 여성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가까운 경기도나 지방으로 나가게 되면 보조금으로 자활센터의 건물을 지원해 한 곳에서 자체적으로 교육도 하고, 상담과 작업도 함께 이뤄지는데 반해 금천자활은 모든 사업장이 뿔뿔이 떨어져 있다. 자활이라는 것이 참여자들과의 대화가 상당히 중요하다. 애로사항이나 고민들을 바로바로 캐치하고 밀착관계를 형성해야하는데 사업장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다 보니 애로사항이 많다. 

 

자활사람들

참여자들, 특히 여성 참여자의 경우에는 대부분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그 분들의 삶을 들어보면 ‘나라면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그러다보니 내적인 면에서 작은 말에도 쉽게 상처를 받는다.

2009년 금천자활에 처음 왔는데 참여자분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어려웠다. 당시 26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으신 분들을 이해할 수 있었겠나? 공감대를 갖지 못하니 고민을 나눠도 ‘잘못 이야기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금도 진심으로 이해하려고 많은 부분에서 노력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참여자분들과의 관계 속에서 성취감도 나온다. 그 분들이 나를 인정해줄 때 보람차다. 성과와 사업단 운영도 중요하지만 참여자들과 밀착됐다고 느낄 때 위로를 받고 힘이 난다. 이제는 내 표정만 보고 무슨 일이 있냐며 물어보시기도 한다.


사회적 경제와 자활

두 영역이 많이 겹치고 사회적기업이 급부상하면서 사회적기업가학교를 수강했다. 사회적기업과 자활기업이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적 환원과 서비스나 지원부분에서도, 창업해서 지역사회에 이익을 환원하는 것까지 큰 차이가 없다. 자활도 연대를 하고 배워야 공존이 가능하기에 힘들고 큰 수익은 없지만 해노리장에도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지역자활센터는 지역주민들을 위해서 존재하고 그 분들이 주체가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금천자활이 지역에 도움되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했고, 먹거리 냄새라도 풍겨서 행사를 좀 더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의 도움이 아닐까 생각했다.  


꿈을 가지시라

자활에 참여하시거나 힘들어 하시는 분들이 꿈을 가졌으면 좋겠다. 지난 힘든 과거에 발목이 잡혀 ‘어쩔 수 없어’라는 생각에 빠진 분들이 많다. 본인이 꿈을 가지고 설계를 한다면 얼마든지 디딤돌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곳이다. 열심히 꿈을 가지셨으면 좋겠다. 

사람의 관계 속에서 자립의 발판을 마련하고자하는 자활의 목표 실현은 지태 씨와 같은  꾸준함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성호 

gcinnews@gmail.com



기자가 박지영씨를 처음 만난 것은 2년전 즈음에 마을공동체 회의를 하면서 만났다. 당시 독산1동 참새어린이도서관에서 활동하고 있다며 인사를 나눴다.  그 후 마을관련된 행사나 교육, 페이스북과 SNS로 항상 밝은 웃음과 기운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지영를 보았다.

지난 11월21일 시흥5동에서 도로를 막고 진행했던 ‘금천마을축제’에서 지영씨는 사회를 봤다. 4시간 동안 축제 마당과 부스를 넘나들며 축제의 감초역할을 톡톡히 했다.

지영씨의 활발한 활동의 원천을 뭘까? 축제가 끝난 수요일 지영씨를 만났다.  동일여고를 다니면서 독산1동 분소지역에 자리 잡은 지영씨는 “엄마품이 좋았는지 결혼하고 나서도 그 근처에 계속 살았다.”고 말했다.


아이를 기준으로 움직이다


지영씨가 동네에서 활동하게 된 것은 아이 때문이다. “어린이집을 안보내고 키웠는데 동네에 나가면 아이가 심심해했다. 놀이터에 아이랑 갔는데 다른 아이들이 있길래 ‘같이 놀래?’라고 물었고, 챙겨간 도시락을 나눠먹고 놀았다. 그렇게 공원도 같이 가고 안양천 뚝방도 같이 가고 했는데 나중에 알고보이 이런 것이 마을활동이고 사업이었다.”라고 답했다.

지영씨는 “초등학교 전에는 엄마가 아이들의 친구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관계를 형성시켜 주면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고 이어간다. 아이들만 서로 아는 것과 아이 친구의 부모를 알고 ‘이모’라고 불리우며 함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아이가 학교에 간 후 교육에 관심이 많다보니 2012년에 평생학습관에서 ‘자녀리더십 학부모지원단’강의를 들었고, 마을리더 아카데미도 수강했다. 그러면서 궁금함이 늘어났고 이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마을일을 하게 됐다.”고 마을활동을 하게 된 과정을 풀어냈다. 

또, 아이가 ‘엄마가 학교에 자주 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해 1학년때부터 녹색어머니회도 하고, 독서어머니회, 책사랑 어머니회, 책엄마 활동, 참새도서관 책봉사도 병행하고 있다.   


‘가능성’과 ‘따뜻함’


‘마을공동체’라는 개념이 행정에 등장한 것이 2012년경부터다. 지영씨가 마을로 들어온 시기와 비슷하다. 그 과정에서 타 지역사례도 많이 본 지영씨는 금천구에 대해 가능성과 따뜻함을 장점으로 꼽았다.

최대 장점에 대해서 “변화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다. 마포구의 ‘성미산’이나 성북구의 ‘장수마을’, 강북구의 ‘삼각산 재미난 마을’의 경우 5~10년 넘게 해오던 사업인데 금천구는 늦게 시작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알려질 계기가 많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금천이 딛고 올라갈 수 있는 디딤돌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다음으로는 따뜻함을 꼽았다. “사람도 따뜻하고 마을 자체적으로도 따뜻하다. 내 품에 안아지는 듯한 느낌이랄까? 동네에서 할머니들을 만나면 ‘마을공동체 필요없고 잘 살게만 해줘~ 나 죽을 때까지 살 동네인데…’라고 이야기를 하신다. 금천구를 떠난 사람들도 잘살기 위함이지만, 남아있는 사람도 이 안에서 잘 살기를 바란다. 옆 집 사람과 잘 지내고, 동네 사람과도 잘 지내고. 그런 것을 위해서 하는 것이 마을살이라고 생각하고 그러다보니 금천구가 따뜻하게 다가온다.”고 마을살이의 소감을 전했다. 

마을공동체 사업에 대한 제안도 이어졌다. “자꾸 새로운 것을 찾지 않았으면 한다. 새로운 것에 집착하는 것이 트랜드지만 마을까지 얼리어답터(제품을 남보다 빨리 구입해 사용해보는 사람들을 뜻 하는 신조어)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공동체를 늘리지만 말고 이 공동체가 이렇게 잘 되고 열심히, 좋은 마음과 실천을 하고 있다는 것에 집중하면 좋을 것 같다.”라는 말과 함께 “‘교육’과  ‘어르신’에 더 많은 신경을 썼으면 좋겠다.”고 덧붙혔다.

‘교육’분야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 향상됐다고 하지만 못미치는 것이 있다.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이 함께 나서주면 좋겠다. ‘금천구에 오면 아이들이 즐겁고 학교가기 즐겁다더라’는 것을 바라면서 혁신지구 추진단 모집에 바로 신청서를 냈다.”고 말했다.

‘어르신’에 대해서 “주공 13단지는 25년된 아파트인데 25년동안 산 분이 많다. 들어오면 돌아가실 때 나간다. 20년 정도 가까이서 보면 정말 무료하게 지내시는 분들이 많다. 이 분들을 살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마을공동체 사업이 금하마을에 가져온 변화를 묻는 질문에 “얼마전 마을리더아카데미를 같이 수강한 오회옥 어머니가 적극적으로 나서 축제를 했다. 예전에는 스쳐지나가던 얼굴들이 웃으면서 함께 하는 모습을 봤다. 조금 더 빨리 이런 즐거움을 함께 나눴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고 답했다.

자칭 연예인 스케줄로 움직일 때도 있다는 지영씨는 주민들에게 “집 안에만 있었다면 동네 아줌마가 됐을텐데 한걸음 밖으로 나오니 계속해서 만남이 쌓이고, 그런 것이 즐거움이면서 영양제고 비타민이 된다.”면서 나오는 것을 두려워 말라는 조언을 건넸다. 


코앞으로 다가온 새해 계획에 대해 사춘기를 앞둔 딸아이와 좀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싶다는 말과 함께 공부로 자신을 채워가고 싶다는 지영씨의 모습에서 숨겨진 원석이 세공과정(마을활동)을 통해 빛나는 보석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떠오른다.



이성호 기자

gcinnews@gmail.com


(86호  2014. 11.17~11.30)


금천in이 만난 금천人 : 제1회 옥상텃밭 뽐내기대회 대상  장영신 씨 



지난 10월23일 제1회 금천구 옥상텃밭 뽐내기 대회가 진행됐고, 시흥5동의 장영식(62세)씨는 대상을 차지했다. 쟁쟁한(?) 경쟁자를 물리치고 대상을 차지한 것에는 어떤 비결이 있을까하는 생각으로 약속을 잡았다.

첫 인사와 함께 잡은 손에는 수십년간 일해온 억센 삶의 흔적이 묻어났다. 전라도 부안 위도 사람인 영식 씨는 시흥동에서 38년을 살아오고 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상경해 지금까지 오다보니 산도 아름답고 정으로 엮어진 이들도 금천 땅에 있어 떠나지 않고 있다. 

혼자서 있다보니 모든 것이 빨랐다. 생업에 뛰어드는 것도, 결혼도, 손자도 빨리 봤다.  일찍 한 결혼으로 남들보다 좀더 빠르게 손자도 보고 3대가 한 집에서 지내고 있다.

3층 주택 옥상으로 가는 길은 성격을 그대로 보여줬다. 가지런히 정리된 물건들과 자신이 직접 만든 계단이라고 설명하면서  옥상으로 향했다.



첫 인상은 일반적으로 옥상텃밭을 하는 집들과 많이 달랐다. 하지만 구석구석에 서 집어들면서 보여준 물건들은 ‘이래서 대상 받을 만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식 씨는 섬에서 살다보니 바다와 가깝고 농사는 별로 하지 않아 농사기술을 혼자 스스로 터득했다. 남에 집에서부터 살면서 했던 텃밭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양한 아이디어가 묻어있는 물건들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영식씨는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좋았다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야지’하고 만들면 그대로 된다고 한다. 건축일을 하다보니 버리는 자재를 주워다가 만들기도 한다. 

화분에 동그란 틀받침을 놓고 물을 주면 여름 땡볕에 한번만 줘도 되게 만들고  흙은 조개나 뚜껑들로 덮어 수분의 증발을 막았다. 옥탑층의 옥상에서 떨어지는 빗물도 모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음식물재활용도 다른이와 방식이 좀 다르다. 영식씨는 음식물을 볕에 말린 후 이를 빻아서 가루로 만들어 보관하고 있다가 흙과 섞어서 뿌린다. 냄새가 나지 않느냐는 질문에 “썩히는 것보다 훨씬 덜하고 잠깐 나고 사라진다. 여름 햇볕에는 금방 마른다.”고 설명했다.



텃밭 노하우를 묻자 “재활용을 사용하고 최소한 적게 들이고 많은 수확을 할 수 있는 것이 텃밭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얼마큼 하는가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텃밭으로 결국에는 '노력‘”이라고 설명한다.

영식씨는 “성격상 직선적이다. 나무와 식물을 키우면서 성격이 많이 온순해진  것 같다. 사람은 달면 삼키고 쓰면 밷는다. 약속을 많이 어기기도 하고.. 그런 모습들에 상처를 많이 받았었다. 농작물은 말이 없지만 베풀면 베푼만큼 보답을 하고 배신도 없다”라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리고 “가끔 나무들에게 물어본다. 만족하냐고. 배고팠냐고 물어보면 꼭 답하는 것 같다.(웃음)”라고 덧붙혔다.



텃밭을 일구면 가장 좋은 것이 신선한 야채와 과일을 바로 따서 먹을수 있다는 것을 꼽는다. “올해 블루베리 나무와 방울토마토를 심었는데 아침마다 갈아서 먹으면 건강에도 좋다. 그리고 세입자들과도 가지나 상추를 나눠먹고 하면 참 좋다.”고 말했다.

그리고“3대가 살면서 텃밭을 하면 가정을 화목하게 지켜주고, 자연적으로 생각하게 되어 손자들에게 교육도 많이 된다. 자연을 버리고 살수는 없고 흙에서 나오는 것은 안 먹고 살수는 없다.” 고 설명했다.

농사도 기술도 배운 적은 없지만 특유의 뚝심과 손재주로 제1회 옥상텃밭뽐내기 대회의 초대 대상 수장자, 장영식 씨의 많은 노하우들이 금천구 곳곳에 퍼져나가길 기대해본다.

이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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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산고 2학년 정송목 군


시흥5동 금천예술창작소 어울샘에서  10월11일부터 23일까지  ‘어항(魚缸)-가두어서 편안하게 하다’의 주제로 다섯 번째 빈벽프로젝트가 전시됐다. 오가다 보니 얼굴에 랩을 씌운 인물의 등장하는 등 뭔가 심오해 보이는 사진들이 걸려있다.  어울샘의 담당자는 ‘정송목’이라는 사람의 개인전이고 독산고등학교 2학년이라는 것을 말해줬다. 

누굴까? 고등학생이 자신의 개인전을 여는 것이 심창치 않아보인다. 금천in이 만난 금천인으로 낙점되는 순간이다.

정송목 군은 독산고 2학년이고 사진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다. 직접 만나니 지난 독산고 ‘청솔제’ 축제에 취재차 들었다 사진반 전시회에서 본 얼굴이다.  전시물에 대한 설명을 조근조근 알차게 해주던 학생이었다. 


고등학생 개인전 하다. 계기

독산3동에 청소년 휴카페 ‘꿈꾸는 나무’활동을 하다가 어울샘의 담당자분을 만나게 됐는데  어울샘의 빈벽프로젝트를 통해 개인전을 해보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해줬다. 내가 찍은 사진만으로 꾸미는 개인전을 청소년기에 해본다는 것은 큰 기회인 것 같아서 시도했고  한 달 정도 열심히 준비했다. 

친구들의 반응은 “오~ 그렇게 떠들어 대더니 드디어 했구나.”라는 반응이었다. 부모님들은 사진에 많이 반대했는데 이번 전시회를 통해 많이 풀린 것 같다. 결과물들이 보이니까 인정해주시는 것 같다. 그동안 내가 찍은 사진을 잘 보여주지 않았었는데 아버지가 ‘잘했네’라는 칭찬을 해줬다.(웃음). 개인적으로 시리즈로 찍은 것은 처음이라 조언을 많이 구했고 친구들에게도 학교의 답답함에 대해서 여러 의견을 다양하게 물어봤다. 

동아리에 오시는 문예진흥원 작가분들도 많은 부분에서 심도 깊은 조언을 해줬다.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정말 많은 분들의 도움을 얻었고 만난 것 같아 고맙고 다해이었다.


주제가 ‘어항’인데

가둬놔서 편안하다는 뜻이다. 학교에 대해서 답답함을 느껴서도 그럴 수 있는데 입시에 갇혀서 나 스스로 고정된 프레임으로만 찍으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학교에 갇혀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고 그 틀을 깨고 싶었다. 

주제를 여러 가지로 고민하다고 일생생활에서 벗어난 것으로 정하고 준비했다. 얼굴에 랩을 감은 것은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이미 둘러쌓여져 있는 것을 보고 있다는 것, 말을 하고 있으나 뭔가 씌여져 있고, 숨은 쉬고 있으나 공기는 막혀있는 것을 표현했다. 

지금은 학교가 얼굴에 씌여진 랩처럼 다가오는 것 같은 심정이 반영됐다. 주말에 전시장에 나와 있을 때 동년배의 아이들이 사진을 보고 나의 의도를 읽어 줄 때 나름 성공한 전시회가 아닐까 생각했다.


나에게 사진은

사진을 전공으로 하고 싶다는 것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막연하게 꿈꿔오다가 3학년 즈음에 이길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진을 시작하면서 친구들에게 다가갔다. 그 전에는 친구들과 그리 친하지 않았다. 친구들을 찍어주면서 서로 이야기 할수 있었고 다가갈 수 있었다. 

사진의 매력이 ‘순간의 기억’이다. 기억될 만한 것을 미리미리 찍어 놓고 나주에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좋다. 

이런 활동들이 자연스럽게 고등학교 사진부로 이어는데 운좋게 문예진흥원에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받게 됐다. 동아리 시간마다 문예진흐원에서 활동작가들이 와서 많은 부분을 가르쳐 준 것이 큰 도움이 됐다.


사진감상의 TIP

작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작업노트를 잘 봐야 한다. 웬만하면 그냥 보면 잘 모른다. 도슨트의 설명을 들으면 작품의 이해도가 높아진다. 

개인적으로 가치관이 맞아야 멋있는 사진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표현해주는 사진이 나오면 보기 좋다.

준비하면서 힘들었던 것

새벽 1~3시경의 완전 어두운 상태에서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학생이다 어려움이 있었다. 늦은 시간에 촬영장소를 섭외하기도 힘들었고 몰래 들어갔다가 혼나기도 했다. 비누방울에 담배연기를 넣는 것도 있었는데 역시 쉽지 않았다.

다행이 모델을 준비하는 친구, 디자이너가 꿈인 친구들을 소개 받아 함께 작업을 했다. 이렇게 자신의 꿈을 가진 친구들을 만나서 같이 작업하기 힘든데 다행이다. 금천구의 아이들은 학교 공부에만 목 메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꿈을 가지고 있고 활동하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금천구가 좋다. 


진로상담이 필요해요

우리 학교 아이들 중 자신의 실제적으로 가진 아이들은 10명도 안되는 것 같다. 대부분이 많은 돈을 버는 직업이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막연히 좋은 대학을 가려는 것이 많다. 

꿈에 대해서도 아이들이 말하기 전에 선생님이 물어보지 않는다. 학생이 티를 많이 내야 약간의 조언을 해준다고 해야 할까? 진로 상담도 명목만 있는 것 같다. 금천진로직업체험센터가 있긴 하지만 학생들이 찾아가기도 어색하고 학교가 아니다보니 불편하고 초면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기도 어렵다.

정규수업에 진로체험이 들어갔으면 좋겠고, 양호선생님처럼 진로상담만 해주는 선생님이 있었으면 좋겠다.


정송목 군은 “전시회 오프닝이 시험기간이랑 겹쳐서 친구들이 많이 오지 않아 서운했다는 말을 꼭 넣어달라”는 청소년기의 장난스러운 풋풋함과  ‘열심히 하고 있니 뒤에서 조용히 지켜봐달라’라는 어른스러움이 동시에 당부를 했다.


이성호 기자

gcinnews@gmail.com

청년예술가  이경신(29)



금천마을예술창작소 어울샘이 얼마 전 첫 축제를 가졌다. 초등학생들의 오케스트라, 동네 아주마들의 우크렐라, 아저씨들의 기타공연들로 북적한 동네잔치의 모습이었다. 축제는 주민들로 구성된 운영위원들이 많은 준비를 했지만 예술창작소를 직장으로 갖고 있는 단 한명의 역할이 크다. 바로 이경신 씨다.

이경신 씨는 스물아홉살이다. 소위 지역일, 동네일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년이상의 여성이다. 남성이 희귀하고 젊은 청춘은 그 존재만으로 더욱 눈에 띌 수 밖에 없다.

시흥초교와 난곡중학교를 나온 경신 씨는 협진우시장과 독산1동 성산교회 주변에 대한 기억이 가장 오래됐다고 한다. “당시 우시장에 도축장이 있었고 소나 돼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가 일하는 곳이 과거 코카콜라 자리 인근에 있었고 어릴 적에 독산동에 살다가 시흥동에 이사를 했다.”고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중앙대학교 공예학과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면서 8년간의 자취생활을 마무리하고 다시 집에 들어온 지 1년 정도 보낸 경신씨는 처음으로 집과 동네를 꼼꼼하게 돌아보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이사와서 집을 제대로 들여다 본적이 없었다. 앞집 슈퍼아줌마랑 친해지고 동네 꼬맹이들과 사귀게 되고 길고양이도 돌봐주면서 1년정도 쉬었다.”

그러다 구청 앞 한내텃밭 분양을 신청하려다 보니 어울샘에 사람을 구한다고 해서 인연이 됐다. 


조금만 움직여도 하늘이 보여요


하늘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경신씨는 자주 하늘을 올려다본다. 오랜 시간의 흐름을 하늘을 보는 시야각에서도 느낀다고 한다. “예전에는 조금만 움직여도 하늘이 아주 넓게 볼수 있었는데 요즘에는 시야각안에 하늘이 얼마 안된다. 내가 자라는 것에 따른 변화를 제외하고는 이런 것이 제일 큰 변화”라고 이야기 했다.

마을의 청춘


지역에서 청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취업준비하고 직장다니느라 자신의 삶 공간에 나오기가 어렵다. 청년들이 더 많이 활동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까? 경신씨는 “주도하는 주체가 없는 것 같다. 이 안에 없기도 하고. 중요한 것은 그 친구들이 실제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해줘야하는데 활용하고 쓰려고만 하는 것 같다. 젊은 사람은 쓰려고 하려면 쓰여지지 않는 거 같다.”고 지적했다.

금천의 문화예술 인프라에 대한 질문에 “서울시가 문화예술에서 성공적인 케이스라고 하는 어울샘이라는 마을예술창작소도 있고, 문화재단 시리즈의 예술공장도 위치해 있지만 활용면에서는 아쉬움이 많다.”고 경신씨는 지적한다. 그리고 “지역과 서로 융합이 되면서 지역적 특색을 가지고 어우러져야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인력이 부족한 이유도 있겠고, 생긴지 얼마 안된 측면도 있을 것 같다.”고 덧붙혔다. 

 그러면서 금천에서 나가는 사람들이 다시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도 말한다. “‘금천은 후진 동네’라고 스스로 말한다면 당장 올 사람도 안 온다. 여기 사는 사람들과 들어오는 사람들이 하나라도 재미있는 꺼리를 만들어 갈수 있는 초석을 다진다면 사람들은 알아서 올 것이다. 알아서 놀고 즐기면서 재미를 찾는 과정, 그런 속에 어울샘도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예술을 즐기는 순환구조-어울샘


어울샘의 역할에 대해서도 “지역 주민들이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순환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초반에는 이런 구조가  우후죽순인 것 같지만 지금은 주민들도 마을예술창작소라는 개면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혼자 일하면 신경쓰지 못하는 것도 많은데 주민분들이 스스로 나서 주신다. 모르는 사람이 들어오면 주민들이 알아서 어울샘을 소개주고 궁금한 것을 설명해준다. 동네 사랑방으로 이웃과 아이끼라 친구가 되는 과정들이 어울샘에서 가장 좋은 점”이라고 설명했다.

더불여 예술계통의 대학을 꿈꾸는 학생들에게 어울샘은 최적의 학습공간이라고도 덧붙혔다. “예체능 입시도 공부학원과 다르지 않지만 고교1,2학년에 여기 저기 치여서 실습을 하기보다 성적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해보는 것이 좋다. 그러면에서 어울샘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함께 경험해볼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사람이 있었어


금천에서 자라고 다시 이곳에서 문화예술을 가지고 주민들과 일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개인적인 바람을 물었다. “항상 생각나고 마음에 걸리는 것이 매일 오는 어린 친구들이 커서 시흥동에 살때를 돌아봤을 때 ‘이런 사람도 있었어’라고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이름을 기억하기보다 문득 한번 생각 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하지만 큰 대답이 돌아왔다.


청년, 예술, 마을의 연결시키가는 이경신씨, “놀고 먹는 것도 예술”이라며 주민들이 좀 더 편하게 예술이라는 것에 다가설 수 있도록 고민하는 활동 속에서 금천의 문화예술의 싹이 키워지기를 기대해본다.


이성호 기자

gcinnews@gmail.com



(82호  2014. 9.15~9.28)

0123

▶ 사진설명 : 마을 곳곳에서 만날수 있는  성경씨 


취재를 하기위해 마을 곳곳의 축제나 행사 등을 찾을 때면 자주 만나는 얼굴들이 있다. 구청장 및 관계공무원이야 당연한 것이고, 시민단체 활동가들이나 마을활동가들이다. 이들은 이렇다 할 보수도 없이 오로지 마을에서 마을사람들을 위해 자신들을 희생하는 사람들이다.

특히 최근에는 정성경(43세, 시흥3동)씨와 자주 마주친다. 마을지기 워크샵에서, 해노리장에서, 각종 마을활동가 네트워크 모임 등에서 그녀를 만났다. 언제부턴가 이렇게 자주 만나게 되는 그녀가 누구인지 궁금해 졌다. 


중학교 3학년과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만 둘을 두었다는 정성경 씨는 3년 전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경기도 산본에서 시흥3동 박미마을로 이사를 왔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 금천구로 이사를 왔다는 그녀의 말에 의아했지만 이어진 그녀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신도시에서 안정적인 환경은 좋았지만 교육적인 부분에서 학원에 많이 보내고, 경쟁이 과열되는 환경 속에서 우리 아이들을 키우고 싶지 않았어요. 조금 자유롭게 생활을 하게하고 싶었고, 지금도 공부하는 학원보다는 미술이나, 음악 등을 배울 수 있도록 하고 있어요”라고 설명했다. 의사, 변호사, 판사로 키우고 싶은 것이 엄마의 마음, 그녀라고 왜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겠는가? “남편은 우리 아이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해요. 저도 여느 엄마들처럼 우리아이들 공부 많이 시켜서 의사, 변호사가 돼야 한다는 그런 쪽이었는데 남편과 살다보니 남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결혼 15년 동안 의견차이도 생기고 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항상 남편 말이 맞더라구요. 남편과는 다섯살 차이인데 인생을 더 살아 본 사람이라 그런가… 어떻게 보면 마을사업하는게 남편에게 하는 최초의 반항인 것 같아요.”

그녀는 ‘아이들이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는 엄마가 바깥활동을 하면 안 된다’는 교육철학을 가진 남편 덕분에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피아노학원을 하며 도서관 봉사활동 정도만 했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면서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방과후 코디네이터를 한 것이 바깥활동의 시작이 되었다. “남편은 아직도 집에 같이 있자고, 마을일 그만 접자고 해요. 그러면 저는 사실은 제가 아니어도 누군가 제 역할을 할 수 있지만, 남편한테는 내가 꼭 있어야 할 사람처럼 애기를 해요. 아주 중요한 존재인 것 처럼요…” 처음에 반대가 심했다는 그녀의 남편은 지금은 내색은 안하지만 어느정도 협조적이 되었다고 한다. 미리 스케쥴이 있다고 얘기하면 아이들하고 같이 밥도 챙겨먹고 참 가정적인 사람이라고.

그녀가 본격적으로 마을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금천구 마을리더 아카데미 강좌를 듣게 되면서 부터이다. “처음 안내를 할 때는 주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고 해서 뭣도 모르고 갔는데 가서는 깜짝 놀랐어요. 출석부에 제 이름 옆에만 주민이라고 써 있었죠. 첫 시간에 자기소개를 하는데 다들 이력이 화려했어요. 저만 시흥3동에서 온 정성경입니다. 라고 소개를 했어요” 그랬던 그녀가 이사 온지 3년 만에 박미마을회관 운영위원회 총무, 마을지기, 행복학습소 메니져, 어울샘 운영위원 등 이름 옆에 다양한 수식어가 붙게 됐다. 

박미마을 뿐만 아니라 금천구에서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완벽하게 마을살이에 적응한 그녀의 비법이 궁금했다. “마을사업의 중심에 서서 일하는 게 아니라, 어떤 사람이 하는 일을 지켜봐주고 도와주는 것이 마을일의 시작인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그녀는 마을회관에서 이것저것 잡다한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여기 와서 생전 한해봤던 일은 다 해보는 것 같아요. 상추도 심고, 풀도 뽑으며 텃밭관리도 하고, 얼마 전에는 지하에 물이 셌었는데 아침마다 물도 닦아냈죠.” 마을회관 1층에 금천마실이 카페를 열 예정인데 갑작스레 도와줘야 할 일이 생길 것을 대비해 바리스타 교육을 받았다는 그녀의 따뜻한 마음씀씀이에서 3년 만에 마을살이에 적응 한 비법을 알 수 있었다. “마을활동을 하면서 생각 되는 게, 마을사람이니까 그냥 할 수도 있지만 교육을 받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교육 때문에 사람이 확 바뀌는 건 아니지만 내가 몰랐던 것을 접하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요즘에는 서울시에서 진행하는 ‘도시재생자문위원가’ 교육을 받고 있다는 그녀는 “교육을 받으면서 느끼는 게 ‘내가정말 우물 안 개구리구나’라는 것을 많이 느꼈어요. 더 많이 공부하고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서울시에서 마을회관을 늘린다고 하는데 먼저 생긴 마을회관으로서 좀 더 잘 준비해서 발전된 모습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 했어요”

그녀에게 마을이란 무엇일까? “삶의 터전이죠. 예전에는 마을을 그냥 지나가는 나그네처럼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삶의 터전이 되었고 저와 제 가족이 모두 함께 있는 곳이 되었어요. 마을일을 하면서 보람도 느끼지만 우리아이들, 후손들한테 물려줄 수 있는 것들이 마을사업을 통해 사람 사는 맛, 정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요즘 그녀의 바람은 마을회관이 금천구의 유명한 명소가 되는 것이다. “거기가면 정말 마음이 뜨뜻해지는 공간, 큰 길에서 올라오는 길이 꽤 멀어서 힘들지만 왔을 때는 너무 좋더라고 말하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남현숙 기자

kasizzang@naver.com

언제부터인가 SNS에 자주 등장하는 금천주민이 있다. 거의 삭발에 가까운 스포츠 머리에 늘 웃는 얼굴의 그는 금천구 곳곳과 광화문 거리, 이스라엘 대사관 등에서 1인 시위를 하는 모습이 SNS에 올라와 눈길을 집중시켰다. 특히 6.4 지방선거기간동안 새누리당 손수조 후보를 비롯한 새누리당 청년 당원들이 광화문 광장에서 ‘도와주세요’라는 입간판을 설치하고 석고대죄를 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그런데 바로옆에서 ‘웃기고 자빠졌네’라고 쓴 피켓을 들고 서 있는 그의 사진이 SNS에 퍼져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독산동에 사는 박중언 씨(44세)이다. 

지난 13일 저녁 박중언 씨를 만났다. 평소 과묵한 모습의 그 이기에 인터뷰를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지만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인터뷰 내내 눈도 마주치지 못할 만큼 숫기없어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차분한 말투로 조근조근 할 말은 다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4ㅏ빠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께요.

저는 신길동에서 태어나서 구로동에 살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독산동에 이사 와서 결혼도 하고 지금까지 독산동에서 살고 있어요. 네 자녀의 아빠이고요. 직업은 프로그램 개발자인데 지금은 행정시스템 유지보수 사업단에 있어요. 이 회사에 근무한지 10년 가까이 됩니다.

성격은 굉장히 내성적이에요. 형제는 제 위로 누나가 하나 있고, 아래로 남동생이 있는데 누나하고 동생은 성격이 활달하고 저만 내성적인 편입니다. 

머리가 항상 짧던데요. 이유가 있나요?

옛날부터 환경에 관심이 많았는데요. 96년도부터 환경단체에도 가입하고 활동을 하면서 머리가 짧은 게 환경에도 더 좋을 것 같아 그때부터 삭발을 하게 됐습니다. 당시에는 고기도 안 먹는다고 점심도시락도 싸 가지고 다녔어요. 요즘은 끝과 끝을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길러보려고요.


요즘 SNS에서 활약이 대단하시던데요. 특히 새누리당 청년당원이 석고대죄를 하는데 그 옆에서 1인 시위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  웃기고 자빠졌네 그거요?  그건 6.4지방선거를 앞두고 였어요. 당시 금천시민연대 분들과 선거를 독려하는 문구를 적은 박스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했었는데요. 그 전날 금천시민연대 몇몇 분이랑 술자리에서 제가 광화문에서 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바람에 피켓을 들고 출근을 못했어요. 그런데 약속은 지켜야 하잖아요. 

그날 새누리당이 광화문에서 1인 시위를 하는 것을 알고 있었거든요. 회사가 광화문 근처에 있는데 출근해서 무엇을 들까 고민하다가 회사 도서관에서 빌린 김미화의 「웃기고 자빠졌네」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어요. A3용지에 그 문구를 출력해 가지고 나갔죠. 

사실 인터넷에서 그렇게 뜰지는 몰랐어요. 그동안 연락도 없던 고등학교 친구한테 전화가 왔는데 그 사진이 SLR 이라는 인터넷 카페랑 뽐뿌, 오늘의 유머 등의 게시판을 비롯해 페이스 북 등 SNS에 사진이 올라왔다는 거에요. 나중에 제가 포털에 검색해 보니 그 사진이 뜨더라구요. 


요즘엔 어떤 피켓을 들고있나요?


제가 원래 1일1식을 해요. 새벽에 일찍 나가니까 잠이 부족해 점심때 잠을 자거나 하는데 요즘에는 생각 날 때마다 1인 시위를 하고있어요. 목요일엔 금천촛불이 세월호 촛불집회를 하잖아요. 전 광화문에서 세월호 피켓을 들고있어요. 가끔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이스라엘의 만행을 규탄하는 피켓을 들고 있는데요. 가능하면 수요일엔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목요일엔 광화문에서 하는 것으로 하려고 해요. 


이런 활동들을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가 SNS에서 닉네임으로 ‘나는 4ㅏ 빠다.’를 쓰고있어요. 이 의미는 ‘나는 네 자녀의 아빠다’란 의미에요. 우리아이들이 보다 안전하고 정의로운 사회에서 살기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했어요. 세월호 유가족들이 단식을하고, 수사권, 기소권이 있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시위를 하고있는데요, 그들은 '내가, 내 아이가 당한 일을 다른 아이들은 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마음에서 하는 일이에요. 만약에 그들이 대학특례나 보상금을 더 받기위해서 시위를 한다면 내가 그들과 동조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전교조나 다른 사회적 이슈와 관련한 피켓을 드는 것도 내 아이들이 옳은 시선으로 사회를 볼 수 있게끔 배움을 주는 사람들이 전교조 선생님들이기 때문입니다. 전교조가 100% 다 잘하는지는 모르지만 아이들에대한 배움의 길을 옳게 열어줄 수 있는 조직은 전교조라 생각해요. 

이스라엘 피켓을 드는 것도 그들이 아이들만 골라 죽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에요. 그들이 하고 있는 행동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에요. SNS에 올라오는 사진이나 뉴스를 보면 왜 놀이터만 폭격을 하는지, 군인이 10명 죽으면 민간인은 400명 넘게 죽는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아이들이 행복하고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아빠이니까요. 


내일 아내분 생일이라면서요. 아내분께 한마디 전할 말씀이 있나요?


그냥… 생일 축하해. 앞으로 잘 살자. (굉장히 부끄러운 듯, 짧게 대답함)


지면의 한계로 인터뷰 내용을 많이 간소화 했다. 그는 업무의 특성상 야근이 많다고 한다. 야근 대신에 새벽 6시에 출근해 저녁 6시에 퇴근을 한다는 박중언 씨는 말 그대로 새벽형 인간이었다. 라디오 방송작가였던 아내 조정옥 씨와의 러브스토리, 자기도 모르게 아내가 노사모에 가입을 시켜놨던 이야기, 언론에서 사실을 사실로 보도하지 않고 사실축소나 은폐하는 행태를 보면서 대안언론의 필요성을 느끼고 국민TV 열혈조합원이 된 이야기 등 2시간여 동안 정말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그의 이야기 속에 빠져들었다. 

인터뷰 끝에서 내일 생일인 아내에게 한마디 하라고 하자 무뚝뚝하게 던진 ‘잘 살자’라는 한마디. 그는 늦은 인터뷰가 끝나고서도 새벽에 일어나 아내를 위해 미역을 불리고, 조기를 구워 생일상을 차렸다고 한다.


남현숙 기자

kasizzang@naver.com



재선에 성공한 차성수 금천구청장을 지난 7월16일 독산4동 찾아가는 취임식 일정중에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는 이성호 편집장과 이신희,이성민 직업체험학생이 함께 했으며, 독산4동 동장, 기획홍보과 홍보팀이 배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차 청장은 6월 당선 이후 2달째 지역주민을 찾아가는 현장사업을 펼치고 있다. 100일간의 과정을 통해 8월말 주민대토론을 통해 향후 4년의 주요사업을 결정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민관 거버넌스에 대해 차 청장은 주민이 주도하고 관이 지원하면서, 좀 더 많은 주민들이 구 행정의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영역을 넓히겠다고 말했다.


이신희 학생: 재당선의 비결은 무엇인가요?

차성수 구청장 : 크게 두 가지인 것 같다. 세월호 여파로 정부의 무능함, 국민들의 분노가 야당에 우호적이었다. 그것이 가장 컸다. 두 번째로는 지난 4년동안 구청의 직원들이 직원들에게 다가가고 섬기려고 애쓴 성과라고 생각한다. 공부가 시험기간에만 열심히 한다고 성적이 오르지 않듯이 4년에 열심히 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성민 학생: 선거동안 가장 힘들었던 것은

차성수 구청장 : 제일 힘들었던 것은  4년동안 열심히 한 사업이 있다. 교육, 복지사업들이 있는데 이것들을  폄훼하고 왜곡하는 네거티브 공세가 있어 마음 아팠다. 주민들은 선거운동기간에 정치인이 말하는 것보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오고 활동했는지를 더 우선해서  평가하는 것 같다. 

당선된 후 찾아가는 취임식 등 지역을 순회하고 있다. 어떤 것을 느끼고 있나?

선거과정 자체가 다양한 계층의 주민들을 만나 민심을 듣는 과정인데 이번 선거는 세월호의 영향으로 비젼을 중심으로 공감대를 만드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다. 깊숙이 들어가 민심을 듣기 어려웠다. 

두 번째로는 주민들을 만나면서 듣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금천구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구정의 살림이 어떤지 주민들이 알아야하는데 정말 모르시는 것 같다. 그래서 이야기도 듣고 설명도 드리는 과정을 100일 정도 하려고 한다. 

1단계로 지역별로, 2단계 분야별로 의견을 듣고 3단계로는 저의 공약과 시의원,구의원의   공약을 모으고, 희망편지의 요구를 모아서 4년 중기 재정계획을 놓고 주민들과 전체 토론을 할 것이다. 이 과정을 마무리하면 4년 동안 해야 할 주요사업이 잡힐 것 같다.

민관거버넌스에서 1기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큰 방향은 크게 달라질 것은 없지만 주민들이 참여하고 주도하는 영역을 넓히고 깊이를 깊게 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를 위해 도시공간이나 재정과 연관된 교육프로램을 펼치려 한다. 주거재생의 문제, 뉴타운의 문제 등에 대한 이해를 높이지 않으면 진도가 나갈 수 업다. .

마을공동체나 교육사업은 좀 더 깊이있고 주도적인 활동이 필요하다. 직능단체, 마을리더 따로 하지 않고 같이 힘을 합쳐 모아가는 과정을 만들고 싶다. 


더 많은 참여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매일 참여하는 사람을 늘리기는 어렵다. 자기 영역에서 일정부분을 기여하는 사람을 조금씩 늘려가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여기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아내는 것이 중요한데 이것이 숙제다.  ‘참여하면 바뀐다’, ‘내가 결정했어’라고 느끼고 체감하는 사람들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대표적인 것이 주민참여예산이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사업을 제안하고 있다. 

시흥2동에서 보도블럭을 교체할 때도 500여명이 투표로 참여해 결정했다. 예산은 정해져 있지만 디자인은 주민들의 투표로 할 수 있다. 그 보도 블록은 본인이 결정한 거다.  이렇게 일상생활에서 참여의 폭을 넓힐 것이다. 

참여의 과정은 업무가 늘어날 수 밖에 없다.당분간은 직원들이 더 열심히 할 수 밖에 없다. 초기에 만들기는 쉽지 않겠지만 집행과정에서 익숙하고 당연한 과정이 되면 어려운 과정이 되지 않을 것이다.  결정과정에 대해서 주민이 참여하는 과정이 힘든 것 같지만 공사를 하고 난 후에 들어오는 민원은 확 줄어든다.  사업이 마친 후 처리할 것을 앞에서 풀어가는 과정으로 이해하면 된다. 

청렴도 평가에서 금천구는 2012년 21위 ,2013년 22위로 평가가 좋지 않다.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결과 자체에 참담하고 당혹스럽다. 선거 과정에서 느낀 것이 차성수를 왜 뽑았냐고 물으니 ‘깨끗하다’라는 것이었다.  청렴도평가의 여론조사나 설문조사에서 한 두 명이 악의적으로 응답 해버리면 방법이 없다. 순위 보면 대체로 정말 개끗하고 청렴하다고 평가되는 서대문구나 은평구가 하위권에 위치해 있다. 

청렴도 평가방법에 문제제기가 되어야한다. 선거직전일수록, 구청장이 의지를 가지고 일을 열심히 할수록 이런 쪽으로 불만이 표출될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청렴도 평가를 잘 받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일을 불만스럽게 만든 상황과 조건을 만든 책임이 있다. 그런 것을 개선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청렴도는 결과다. 이를 높이고자 무엇을 하기는 어렵다. 청렴의식개선 다양한 프로그램 하고 있지만 중요한 건 저나 구청 간부들이 솔선수범하는 것이다. 아랫사람들이 힘들어 하는 것을 해결해 가면서 서로 신뢰감을 형성해야 한다.  


경부선 지하화의 어디까지 왔나?

지하화는 서울시장이나 국회의원이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으로 결단이 필요한 사업이다. 이 사업은 지하화가 필요한가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어던 것이 사업성이 높은가의  타당성 조사, 어떤 순서로 진행할까의 결단, 3가지 과정으로 진행된다.

현장에 와본 사람들은 대부분 공감대가 형성된다. 사업타당성의 문제에서 경부선만큼 사업성이 있는 곳은 없다. 지하화가 되면 땅이 생기는데 유일하게 경부선만이 4차로 철도가 있어 땅이 많이 생긴다.  비용이 들어가는 만큼의 토지가 생긴다.

필요성 측면에서 더 이상 서울시의 강남 중심 일극체계로는 기업이 고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 기업이 빠져나가면 인구가 빠져나갈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는 서울의 경쟁력이 대한민국의 경쟁력인 상황이다. 서울의 균형발전이 되야 하고, 경부선권의 2~300백만 주민들의 숙원이기도 하다.  

또한, 지하화가 되어야 서울에 진정한 생태녹지가 만들진다. 현재 서울은 산을 중심으로 한 녹지축만 있지 평지의 녹지벨트가 없다. 공원을 산으로 몰아놓은 상태로는 삶의 질을 높이기 굉장히 어렵다.  평지 녹지축이 만들어져야 도시환경과 생활여건이 바뀔 수 있다. 2050년의 긴 미래를 본다면 서울시가 중앙정부와 함께 해결할 사업이다.


구 재정이 심각하다

가는 곳마다 설명해야 할 정도로 심각하다.  회계처리상 자체재원과  외부재원으로 되어 잇다. 금천구의 예산의 총액은 2,800억으로 정해져있다. 제도가 개선되지 않으며 늘릴 수 없다.  자체재원을 늘리면 외부재원이 줄어드는 시스템이다. 세입을 늘려서 풀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럼 세출을 조정해야하는데 국가복지사업의 자치구의 매칭비용이 늘어나고 있다. 기초노령연금이나 무상보육등은 경직성 비용이지만 회계처리상으로는 자체정책 사업으로 잡힌다. 

예산 중 경직성 비용, 청소비용 130억, 하수도로관리 등 도시 인프라의 기본 유지 예산을 빼면 돈이 없다. 이것저것 다 빼면 구청장이 의지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예산이 50억 정도다. 

문제는 이 상황이 개선될 전망이 없다는 것이다.  1년에 1,300명의 노인이 늘어나고 있다. 기초노령연금의 지출이 함께 늘어날 수 밖에 없다. 경직성 비용의 가장 큰 것이 복지다. 2,800억 중에 복지비용이 2011년 39%였는데 올해 51%다.

국가복지사업은 국가가 책임지는 것이 맞다. 무상보육과 기초연금만 중앙에서 정리되면 이 상황이 나아질 것이다.  조세제도의 개편이 필요하다. 현재의 구조는 불가능하다. 

늘어나는 경비 중 청소행정비도 한몫을 한다. 약 140억에 재정이 들어간다. 음식물 쓰레기의 경우 주민부담은 30%정도고 70%를 세금으로 충당하고 있다. 그런데 쓰레기분리수거가 안돼 매립지에 반입이 금지당하면 3배의 비용이 추가적으로 들어간다. 이런 것은 주민들의 참여와 협조가 있어야 한다.

금천구가 작기 때문에 손해보는 것도 있다. 국회의원과 서울시의원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적다보니 추가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예산도 적다. 구의 전체 총량이 작지만 비율을 같다. 5000억 예산의 3%와 2800억 예산의 3%의 차이가 구청장이 할수 있는 사업의 차이다. 금천구로서는 너무나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주민들에게 

세상을 바꿔가는 길은 구청장이나 구청이 초기 역할을 하지만  결국 주민들이 주도하고 주인의식을 가져야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다시 한번 일할 기회를 줘 감사하지만 저 혼자서는 못한다. 주민들과 함께  ‘함께 꿈꾸는 금천, 함께 만들어 나가는 미래’로 만들어 가자. 한 사람의 꿈으로 끌고 가면 힘이 없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꾸고 가면 현실이 될 수 있다. 



인터뷰 및 정리 이성호 기자

문성중학교  이신희,이성민 학생

사진 이성민 학생

gcinnews@gmail.com

요즘 어디에 사세요? 주택? 빌라? 아파트?

금천구의 총 주택수는 5만1천가구다. 이중 2만4천채가 아파트다. 50%에 육박하는 수치다. 그많은 사람들이 아파트에 살고 있다.



아파트라고 하면 삭막하고 이웃간의 정이 없는 곳으로 인식하기 쉽지만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많은 부분을 공유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 주차장부터 엘리베이터, 수도, 전기 등의 기반시설을 공동으로 관리하기 때문이다. 

벽산1단지에 살고 있는 연정흠(60세)씨는 요 근래 아파트 일로 바쁘다. 입주자 대표도 아니고, 동대표도 아닌데 바쁘다.

한신아파트, 벽산5단지, 1단지로 아파트에서만 20년 가까이 살았지만 요즘처럼 자기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관심을 가진적은 없었다. 먹고살기 바쁜 것도 큰 이유이기도 했다.

정흠씨는  '벽산발전위원회' 총무이면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교육분과위원장이다. 두 단체 모두 벽산1단지를 기반으로 한 모임이다.

벽산발전위원회는 작년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이하 입대위) 선거 과정에서 생겨났다. "당시 입후보자들이 아파트 관리의 문제를 적은 유인물을 나눠졌다. 그 내용을 보고 하나하나 따져보니 심각하게 느꼈고 위원장님과 심층적으로 파고 들었다." 고 이야기를 많이 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하 함살사)'는  말 그대로 마을공동체다.  주민들간의 소통을 하기 위한 단체로 주민들이 서로 자기가 원하는 프로그램을 스스로 만들어 재능기부도하고 함께 배우기도 한다. 연정흠씨도 자신이 하는 조경일을 배경으로 '야생화 강좌'를하고 있다.

아파트라는 공간에서 비판과 견제의 발전위원회와 친목과 소통의 함살사가 함께 존재하는모양세다.

아파트에서 주민들이 서로를 보듬으며 잘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정흠씨는 소통과 참여 그리고 관심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주인의식이 있어야 한다.  내가 한달에 약 35만원의 관리비 공과금을 낸다. 1단지만 1년에 80억이 왔다갔다한다. 잡수입만 1년에 2억이 넘는 돈인데  그 돈이 올바르게 쓰여지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아파트는 조금만 노력하면 발전할 수 있는 요지가 무척 많다는 연정흠씨는 함께 살아가는   아파트를 만들기 위해 오늘도 바쁘다.


이성호 기자

올해는 지방선거의 해다. 서울시장부터 동네구의원까지 수십명의 후보가 나서지만 여성의 비율은 낮다.  6.4지방선거 예비후보 등록현황을 보면 현재 기초의회예비후보는 전국적으로 2,236명이며 이중 남자가 2,036명이고 여자가 232명으로(3월13일 기준) 10%정도의 수준이다. 그나마 서울지 남자 301명, 여자 55명으로 15%정도가 된다. 

금천구는 어떨까? 

구의원후보로 거론되고 직간접적으로 의사를 표한 여성도 몇 있지만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선관위에 등록한 후보는 단 1명이다.  그 유일한 여성예비후보는 서울시의원 금천제2선거구(시흥동)에 출사표를 던진 통합진보당의 신난초(33세)씨다. 여성의 날과 지방선거를 앞 둔 시점에서 유일한 여성예비후보 신난초씨를 만나봤다. 


난초씨는 2001년 금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고 다시 금천구에 신혼집을 차렸다. 고등학교 다닐때부터 청소년단체에서 활동했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청소년권익활동을 많이 해왔다. 현재는 청년활동에 집중하고 있으며 한국청년연대 집행위원회 사무국장으로 일을 하고 있다.



3월8일이 여성의 날을 어떻게 보냈냐는 질문에 “일했다.(웃음) 106주년 기념하는 집회가 있었는데 청년회의 일정이 있어서 참석하지 못했다.”면서도 “여성의 가장 큰 문제는 노동권의 문제다. 성차별과 비정규직의 문제에 대한 요구가 크다. 여성노동자 뿐만 아니라 여성농민, 대학생 등 여성으로 느끼는 고충들을 나누는 증언대회를 했다.”고 현재 여성의 요구를 전했다. 


난초씨, 아니 신 후보는 박근혜정부의 여성정책을 어떻게 평할까? “여성대통령이라 여성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과 정책이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후퇴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덧붙혀 “외형적으로 여성들이 사회진출이나 권익 등이 굉장히 높아진 것으로 이미지화 됐다. 현실에서 생활적으로는? 학교 비정규직, 마트 비정규직, 콜센트의 비정규직 대부분이 여성들이다. 그런 현실 속에서 사회적 지휘가 높아졌다고 평가할수 있을까?”라고 이 시대의 여성의 지위를 평가했다. 


정치활동의 계기는 뭘까?

 난초씨는 2004년 민주노동당에 가입했다. 당시 비영리청소년단체의 간사로 활동하면서 학교의 경쟁교육, 두발규제반대 등의 활동을 해왔고 이를 제도화 시키는 것의 필요성으로 느꼈다고 한다. “비영리단체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고, 법을 만들고 제도화하는 역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민주노동당에는 청소년위원회가 있었고, 그것이 첫 계기가 됐다.”


서울시의원 제2선거구(시흥동) 후보로 등록했다. 어떻게 출마의 결심을 했을까? 

“진보당의 특징이 젊은 활동가가 많다는 것이다. 지역에서도 젊은 정치인들이 진출해서 진보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봤다. 그보다 결정적 계기는 진보당의 내란음모 사건이다. 당해산 청구까지 오면서 정당해산의 위기에 놓였다. 지금의 민주주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진보당 사수’는 굉장히 중요하다고 보고 당차원에서 많은 후보를 내기로 했다. 그 취지로 결심하게 됐다.”


여성의 정치세력화

지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여성임에도 막상 정치의 길을 걷는 여성은 드물다. 왜그럴까?  “내 스스로도 후보등록을 할수 있게 된 이유는 아직 아이가 없어 생활이 자유로운 측면이 있다. 육아,가사의 현실적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가? 노동문제도 그렇지만 정치영역에서 여성들이 보장을 받으면서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여성노동권 보장이 핵심

난초씨는 선거에 후보로 나서면서 여성정책에 대한 고민의 핵심을 ‘여성노동권 보장’으로 표현했다. “성차별 해소, 경제활동의 참가확대 등 일과 생활의 양립시킬 수 있는 정책들이 필요하다. 노동시간 단축, 무상보육, 육아휴직의 문제 등을 안정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금천구의 여성정책에 대해서도 “‘밤길안전365’등 단발적인 불편해소에 머물는 것같다. 장기적인 여성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삶에서 나오는 정책이 부족해보인다. 얼마전 친구 한명이 육아문제로 직장을 그만뒀다. 이런 고민들을 개선해야 하지 않나?”

 

당 해산 위기 통합진보당

통합진보당은 현재 정당해산재판 중이고, 이석기 국회의원은 내란음모로 재판중이다. 이 사건에 대해 난초씨는 “내란음모사건은 국정원에 의해 ‘철저하게 조작된 사건’으로 규정했다.”고 단호히 말했다.  

“여성후보라는 점보다 진보당이 이번 지방선거에 출마한다는 것이 특이한 일이 됐다. 진보당은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14년의 역사속에서 소금 같은 역할을 해왔다. 물론 세련되지 못하고 부족한 것이 있지만 그 속에 진정성은 누구보다 높다.”고 덧붙혔다.

“박근혜정부의 탄압이 당 해산까지 가고 있다. 그 속에서 출마의 의미는 정치세계에서 진보당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하고, 진짜 일하는 사람들의 정당이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와 함께 주민들 한분한분 만나면서 주민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싶은 것이 선거의 목표”라고 설명했다.  

이성호 기자

gcinnews@gmail.com



작년 조영진씨(40세 시흥1동)는 매우 바빴다. 스스로 “내인 생에 이렇게 열심히 한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금천구 구석구석을 다녔다.  조영진씨는 2013년 ‘우리동네 보육반장’으로 활동했다. ‘우리동네 보육반장’은 2013년 서울시에서 처음으로 내놓은 정책으로 지역의 육아 관련 정보를 수집해 육아를 고민하는 엄마들의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지역의 보육정보, 인력, 자원을 수집해야하기 때문에 어린이집은 물론 놀이터, 도서관, 상담센터, 키즈카페 등을 찾아 골목골목 돌아다녔다. 

영진씨는 시흥초등학교부터 시작한 금천살이가 신혼살림 3개월을 제외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음에도 새로운 만남과 과거의 기억이 합쳐지면서 마 을 속에서 더 많은 즐거움을 느꼈다고 한다. 물론, 올해도 보육반장은 아니지만 역시 바쁘다. 인터뷰가 진행된 날도 ‘금천문화아카데미 두근두근 2014’라는 교육을 마친 후였다.   

“아이를 키우는 것이 항상 1순위이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했다. 아이 엄마로서의 내 모습만이 아닌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으면 싶었다.”는 영진씨는   보육교사 자격증도 따고 집 근처 어린이집에 시간제 교사로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보육반장에 지원하고 작년 한해를 맞았다.  

 “보육반장을 시작하면서 의무교육이 진행됐다. 아동발달, 부모상담 등 육아교육도 많았지만 후반기로 갈수록 마을공동체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당시에는 ‘이것 왜 배울까?’싶었다. 성미산 공동체이야기, 인문학이야기. 마을공동체의 이야기가 보육과 연관이 있는지 의아했다. 활동을 하면서 ‘배운 것들이 별개가 아니구나. 마을살이의 중심에는 아이를 함께 키우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사람만 보입니다

1년 동안 금천구 보육 자원을 구석구석 돌아본 영진씨의 평가는 어떨까?

“대체로 보육환경은 잘 갖춰져 있는 것 같은데 아는 사람만 알고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다. 안양천이나 관악산 등 생태적으로는 아이키우기 참 좋다. 조금만 움직이면 갈 수 있는데 여러 조건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엄마들이 없다.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지만 활용을 잘 못하는 것 같다.”고 평했다.

부모는 아이의 놀이 퍼실리테이터

영진씨는 아이의 성장에 ‘놀이’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그와 함께 부모의 역할을 강조했다.  “아이들이 혼자 놀 수 없다. 어린이놀이터에 가도 아이들이 없다. 때문에 부모가 퍼실리테이터(촉진자)의 역할을 해줘야한다. 아이들을 놀이터에 데려다 놓고 알아서 놀아라하면 아이들은 막막해한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맞장구 쳐주고 10분정도만 놀아주면 두시간을 스스로 논다.”


동네에서 재미있게 살기

금천구에서 오래 살아왔고, 지금도 재미있게 살아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영진씨가 권하는 방법은 ‘조금만 나와보기’다.

“마을을 돌아다녀보면 보이는 사람만 보인다. 교육도 그렇고, 공동체활동들도 그렇고 하는 사람만 하는 것이 아쉽다. 대부분의 무관심한 사람과 적극적인 소수의 사람들을 연결시킬 수 있다면 좋겠다. 좋은 기회들이 참 많은 것 같은데 참여하는 사람들이 적어서 안타깝다. 도시농업도 그렇고, 지금하고 있는 ‘두근두근 아카데미’도 그렇고 너무 좋다. 엄마들이 많이 배우고 깨우치면 아이들에게도 영향이 가지 않을까 싶다. 조금만 나와보면 정말 좋은 것이 많다.”


이성호 기자

gcin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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