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시작했던 육아일기가 필자의 사정으로 6회를 끝으로 마무리됩니다. 지난 2월부터 애써주신 지음이 엄마, 용지항 님께 어려운 조건속에서도 기고를 맡아주신 것에 감사를드립니다. 더불어 마을신문 금천in에 대한 애정에도 역시, 깊은 고마움의 인사를 드립니다.


무엇을 먹일 것인가?


  지음이는 5개월에 접어들면서 부쩍 먹는 것들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유식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백미로 일단 지음이의 식사는 시작되었다. 그렇게 이유식을 하던 중 백미의 영양이 아주 적다는 이야기를 듣고 현미로 바꾸기로 결심하였다. 이유식을 먹이자 가장 큰 변화는 똥냄새였다. 아직 어른똥냄새 같지는 않지만 밥냄새와 비슷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밥을 할 때 마다 지음이가 똥을 싼건지 확인할 만큼 밥냄새와 지음이 똥냄새는 비슷했다. 

  이유식! 이제 새로운 먹거리의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재료뿐만 아니라 이유식 도구에 맞춤이유식 까지 아주 다양한 정보와 물품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정보가 많으니 어떻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일단 개월 수에 맞춰 먹여야 하는 음식들을 살폈다. 현미가 적응되었을 때 야채를 하나씩 넣어가며 아이가 잘 소화시키는지 살펴보았다. 사과와 배도 먹여보고. 마트에서 단호박 사서 넣어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트에서 산 호박이 문제였을까. 으악! 온몸에 두드러기가 난 것이다. ‘단호박 알러지인가?’하는 생각에 만들어 놓았던 단호박 이유식을 모두 버렸다. ‘으미..아까운거..’ 무언가를 먹인다는 것이 좀 더 조심스러워졌다. 


<정말 아빠를 꼭 닮은 지음이  -편집자 주>

  그런 일이 있고 얼마 뒤에 언니 집에 놀러 가게 되었다. 뭐라도 먹을 것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흔한 감자도 없었다. 내 눈 앞엔 오직 삶은 단호박이 있었다!! 바로 그 단호박!! 하지만 먹일 것도 없었던데다 지난번에 정말 단호박을 먹고 일으킨 알러지인지 한번 더 확인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먹여보았다. 하루가 지났지만 지음인 아무이상이 없었다. ‘음...단호박 알러지가 아니었나?’. 그 이후로도 똑같은 음식에 대한 지음이 반응이 아주 다르게 나올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러다가 좋은 이유식 재료를 파는 곳이 있다는 친구의 말에 생활협동조합에서 이유식장을 보게 되었다. ‘아이에게 좋은 것을 먹여야지’ 하는 생각에 시작했는데 비용이 만만치가 않았다. 우리 먹을 것을 사기엔 부담이 되었다. 생협에서 구입한 채소와 과일, 고기들로 만든 이유식을 먹으면서는 알러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친정이나 시댁에서 공수해온 먹거리로 이유식을 해서 먹인 날엔 몸에 오돌토돌 올라왔다.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정리해 보니 오래됐거나 농약, 방부제, MSG, 첨가물 등이 들어간 먹거리를 먹었을 때 알러지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음이가 더 크고나서 동네에서 치킨을 시켜 먹었다. 지음이는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났지만 나와 남편은 괜찮았다. 어느새 지음이의 몸은 리트머스 종이처럼 건강한 먹거리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었다. 결국 민감한 지음이의 몸과 생협의 정신에 동의하여 가족의 먹거리를 전부 생협물품으로 바꾸게 되었다. 때론 불편하고 힘들지만 아이를 통해서 건강한 먹거리를 먹게 되었고 그런 먹거리를 만드는 분들의 수고도 생각하게 되었다. 더불어 우리가 사는 곳의 먹거리문화가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 


용지항

글쓴이는  금천구공동육아어린이집협동조합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산동 6년차 주부. 공룡을 좋아하는 6살 아들 지음이, 누워있기를 좋아하는 36살 남편(현용)과 함께 살고 있다.

세아이 아빠가 쓰는 성장일기 34번째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니 아내가 한 소리 한다. 또 무슨 건으로 책을 잡혔나 싶어 긴장한 채 들어보니 다행히 나의 잘못은 아니되 나의 자식들의 소행이 빚어낸 상황이란다. 아래 층 사는 아주머니가 올라와 제발 부탁이니 조용히 좀 살고 싶다며 신신당부 하고 갔다는 것이다. 우리 집은 독산1동에 위치한 건축한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주공아파트이다. 층간소음이 살인까지 부른다는 신문보도를 몇 차례 접하기는 했지만 그동안 살아오면서 그런 사실을 체감하지 못했다. 원래 옛날에 지은 아파트가 더 튼튼한가 봐 하며 안심했었는데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요즘 신축된 아파트들처럼 윗집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 옆집 아이 리코더 부는 소리, 아랫집 핸드폰 진동소리까지 들리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내가 사는 아파트도 층간소음에는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지금까지 간과하면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 윗집에 사사는 분들이 아이들이 없는 노부부만 살고 계신 집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것. 아! 그래서 그랬었구나. 층간소음에 강한 아파트라며 어느 정도는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제지하지 않았는데 아랫집 사는 분들에게는 층간소음이 장난이 아니었나 보다.

 다음 날은 휴일이었다. 오전에 시간을 내서 조심스레 아랫집 현관을 두드려 본다. 인상 좋으신 아주머니가 문을 여시고 이래저래 해서 왔다고 말씀드리니 일단 들어오라신다. 거실에 서서 마치 벌서는 아이처럼 일단 사과부터 드리고 변명을 늘어놓는 나에게 아주머니는 차분하게 말씀하셨다. 아이들이 어리고 거기다 셋이나 되니 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니겠냐고 하지만 저녁 늦은 시간이나 휴일에는 쿵쿵 울리는 소리가 너무도 거슬려서 집에서 제대로 휴식을 취하기가 힘들기만 하다. 이런 점을 좀 주의해 주었으면 하다는 그런 요지였다.

 거듭거듭 죄송하다고, 아이들에게 충분히 이해시키고 집안에서는 될 수 있으면 잠만 자겠다는 거창한 공약까지 늘어놓고 넙죽 인사드리고 나왔다.

 “얘들아, 이리 와바” 아이들을 불러 모아본다. “아빠가 지금 아랫집 아줌마를 만나서 얘기하고 왔는데, 아파트라는 곳이 말이지 우리 집에서 뛰면 그 소리가 아랫집에 울려서 아줌마가 잠을 못 주무신데. 그러니까 집안에선 뛰어 다니지 말고, 특히 소파에서 점프하지 말고, 놀고 싶으면 밖에 나가서 놀아야 대, 알겠지?

물론 아이들은 냉큼 대답은 잘한다. 하지만 어찌 열 살도 안 된 생명력으로 파릇파릇한 기운으로 충만한 어린 것들이 몸뚱이를 어찌 가만둘 수 있겠는가. 오히려 집안에서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한 법이지.

 나의 어린 시절, 그때의 서울은 아파트가 거의 없었다. 지하철 2호선 라인의 환승역인 대림역 근처가 나의 코흘리개 시절 살던 동네였는데 그때만 해도 2층집 옥상에 올라가면 남산타워까지 한 눈에 보일 정도로 시내에 고층건물이 없었다.(그러고 보니 엄청 나이 먹었군.ㅠㅠ)

세월은 무심하게 흘렀다. 코흘리개 어린아이는 40줄에 접어들었고 무밭 배추밭이었던 동네는 고층빌딩으로 즐비한 상업지구가 되었다. 아이폰가지고 노는 첨단세상은 좋은데 아파트에 딸려나오는 층간소음이란 불청객은 과연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성장을 하면 어느 정도 해결은 되겠지만, 지금이 문제인걸. 집안에 매트로 도배를 할까, 아이들을 묶어둘까(?), 아니면?...

남북통일보다 세계평화보다 더 풀기 어려운 층간소음 이라는 문제. 고민은 깊어가되 그 해답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아랫집 부부님께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사과드리는 바이다. ㅠㅠ


                          독산1동 김희준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아빠를 쏙 빼어 닮은 아들이 모처럼(?) 눈물을 흘리게 되면 아빠인 나로서는 가슴이 철렁하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아들이 태어나 갓난쟁이 시절이던 십년 전의 어느 날이었다. 초보 엄마아빠는 산부인과에서 3일 만에 무사히 데려온 갓난아기를 쳐다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지금 같으면 육아휴직이라도 신청했을 텐데 바보같은 엄마아빠는 직장이 우선이라고 생각했고 태어난 지 석 달밖에 안된 핏덩이를 어린이집에 맡기는 만행을 저질렀다. 두고두고 후회를 한다.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내에게 육아휴직을 하도록 했어야 했는데 아니면 내가 그깟 직장 때려치웠어야 했는데 말이다. 집은 우이동이었고 아침마다 출근해야 할 곳은 양재동이었다. 현장을 주로 다니는 일이다보니 강남일대에서 분당, 용인, 수지까지 배회하다 보면 퇴근 시간은 빨리 가봐야 저녁10시가 기본이었고 집으로 돌아가면 아무리 20대 후반의 젊은 아빠였지만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그 날은어린이집에 저녁 7시까지 가야한다고 서둘러 퇴근했던 2002년 가을의 어느 저녁이었다. 어린이집의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아기는 보이지 않고 울음소리만 들린다. 조그만 방에 들어가 보니 이불도 안깔린 맨바닥에 아기가  홀로 엎드린 채 서럽게 울고만 있다. 어찌나 서럽게 울고 있던지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 목소리까지 쉬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놀란 아빠는 아기를 들쳐 안았다. 아기는 내 품에서도 한참을 울었다. 그치지 않는 울음덩어리를 품에 안고 멍하게 서 있었던 그 저녁이 아직도 생생하기만 한데.

금천구로 이사 와서 어린이집을 보내는 첫 날에도 당시 네 살이었던 아들은 또 그렇게 서럽게 울었다. 그렇게 석 달을 아침마다 울었다.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나중에는 익숙해질 정도였다. 

그 아기가 이제 열 한 살의 초등학생 늠름한 아들이 되었다. 아들은 좀처럼 자기 마음을 내색하지 않는다. 무작정 떼를 쓰지도 않는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아빠에게 얘기하는데 쉽게 말 꺼내는 스타일이 아니니만큼 대부분 수용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요구사항을 말한다. 아직 열한 살밖에 안된 꼬마인데 왜 이리 듬직하고 의젓한지 아빠로서 감개무량하기만 하다. 

그런 아들이 어제 밤 잠자리에서 엄마와 이야기하다가 눈물을 흘렸다. 아들의 울음소리를 잠결에 들으며 못난 아빠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아침에서야 아내에게 전해 들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아이는 정든 학교와 선생님과 친구들을 떠나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베란다 앞으로 빤히 내려다보이는 학교와 친구들, 가로수 밑에서 동생과 자전거 타며 동네슈퍼를 쏘다니던 즐거운 추억들이 아들에게는 행복이었나 보다. 하지만 다음 달이면 그 행복과 작별해야 한다. 그렇게 정든 동네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야 하는 것이 우리 가족에게 생길 일이다. 학교도, 어린이집도, 안양천도, 하다못해 동네 슈퍼도 하나하나 정든 곳인데 낯설기만 하고 아는 이 하나 없는 곳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아이에게는 힘들었나 보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는데 아이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는 것이라니 당황스럽기만 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별 수 없다. 이사는 가야하는 것이고 새로운 곳에서 아이들이 조금만 지내보면 지금보다 훨씬 더 즐거워하고 행복해질 것이라 확신하기에 엄마아빠의 판단을 믿어주기를 바랄 뿐이다. 엄마 아빠는 항상 너의 곁에 있어줄게. 그리고 새로운 곳에서는 정말 오래오래 너희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살자꾸나. 아빠도 이제는 한 곳에서 곱게 늙어가고 싶거든. 이번 주말은 아들과 목욕탕에 가서 서로 등 밀어주며 맛있는 것도 사먹어야겠다. 울 아들 홧팅!~


     29호  2012. 6.29                    

독산1동 김희준

필자는 독산1동에 거주하고 있으며 재빈, 재은, 재령 3남매와 함께 성장일기를 쓰고 있는 아빠입니다. 


아들은 이제 4학년이다. 3학년과는 다른 수준이 높아진 교과목 중에서 단연 최고의 난도를 자랑하며 아이를 압박하는 과목이 바로 영어라는 괴물이건데 이 괴물에 대한 한반도 거주민들의 사랑이 너무도 왕성하여 평생 영어를 한 마디 써볼 일도 없는 사람들조차 사회 진입 시 영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할 노릇이다. 

저녁 퇴근 후 소파에 앉아 신문을 들쳐보며 중동의 국제정세와 유럽의 환율위기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차에 종이 한 장을 들고 다가오는 아들이 시야에 잡힌다. 왜?하며 물어보는 나에게 아들은 학교에서 받아온 시험지를 내밀며 도와달라고 청한다. 그래 어디 한번 보자! 종이는 일종의 숙제 노트였다. 네 댓가지 상황을 묘사한 그림이 있고 그 상황을 현재진행형 문장으로 구성해 보라는 그런 주문인 것 같은데 이 문제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우리 아들이 아직 그런 문장구성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라는 것이다. 영어학원에서 한 두 마디 들어온 앵무새 영어보다는 때가 되면 자연스레 배워나가는 그런 인생을 아들이 살았으면 하는 마음에 지금까지 그렇게 영어학습에 대해 강요를 하지 않았지만 이 문제지를 받아보니 그렇게 방치할 상황은 분명 아니다. 

일단은 응급처치를 해줘야 했다. 이 문제지를 받아든 아들의 마음은 지금 얼마나 좌절하고 있겠는가 말이다. 영어단어 읽는 법도 모르는 아이에게 문장을 만들어 오라니 초등학교 영어교육 시스템은 사교육을 전제로 지탱되는 절름발이 공교육이다. 학원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은 처음부터 좌절부터 배우며 인생의 가장 빛나는 소중한 시간인 십대생활을 그저 2%를 위한 베이스나 채우면서 살아가란 말인가.


아들과 마주 앉는다. 일단 아들에게 너는 이걸 왜 모르느냐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림에 맞춰 현재진행형 문장을 최대한 간단히 만들어 써주고 아들에게 한 문장씩 읽어 보라 한다. 인칭에 따른 동사 변형같은 것은 나중문제다. 일단 아빠가 써준 문장을 보면서 읽어 보고 5개밖에 안되는 것이니 한 문장을 다섯 번씩 써보고 문장을 보고 읽을 정도까지 반복하게 하였다. 중요한 것은 짧은 분량의 간단한 문장을 반복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진도를 매일 매일 조금씩 나가면 반드시 성과가 생긴다. 다행히 아들은 순순히 아빠의 지도를 따른다. 그럼, 니 아빠가 옛날에 ‘성문종합영어’를 10회독 해서 걸레를 만든 사람이란다..ㅎㅎ


그렇게 일단 상황을 정리하고 아빠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 본다. 영어를 막론하고 다른 외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같은 소설을 읽어도 번역본과 원본은 그 느낌이 다른다. 우리말로만 표현이 가능한 느낌이 있고 영어 문장이라서 더 그 감동이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그런데? 모든 아이들이 아이비리그를 갈 것도 아니고, 엠아이티에서 네이처 논문을 쓸 것은 분명히 아니다. 되지도 않을 2%의 엘리트가 되리란 헛된 기대속에 이땅의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과 그 부모들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담보잡힌 채 정말 힘들게 산다. 그 씩씩한 기상에 혀를 내두를 정도지만 적어도 내 아이들은 그렇게 몰아세우지 않을란다. 

영어못하면 어때? 대학교 안가면 어때? 학교가기 싫으면 안가면 어때? 배우고 싶을 때 그때 배워도 된단다. 미래를 위해 참아내는 현재보다는 지금의 행복한 순간이 더 행복한 미래를 위한 발판이 되길 바란다. 아빠의 나이도 이제 불혹이다. 

아빠랑 같이 놀자! 까부리~~~


 2012. 6. 2 

 독산1동 김희준


 

봄은 콧바람에 자취만 남긴 채 사라지고 창밖은 이미 여름이다. 옷장에서 여름 근무복을 꺼내 입는다. 내가 근무하는 직장은 사시사철 근무복을 주는, 매일아침 무슨 옷을 입을까 하는 고민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진정 훌륭한 회사다. 봄과 가을에 입는 춘추복이 있고 겨울에는 두꺼운 내피,외피로 구성된 동복이 있고 여름에는 흰색 회사로고가 새겨진 녹색 반팔티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으니 항상 입는 나의 105사이즈가 없다. 창고에서 옷을 검색해보니 남는 옷은 100사이즈이길래 일단 몸뚱아리를 넣어본다. 흠.. 아래는 거의 배꼽티를 연상케 하고 팔뚝은 옷이 꽉 들어찬 것이 민망쫄티수준인데 요즘 극도의 다이어트로 인해 들어간 뱃살이 그나마 다행이다. 옷은 작은데 배만 뽈록 나오면 대략 난감이지 않은가. 결국 이걸 입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던 중 앞자리 동료여직원에게 자문을 구해 본다. “이렇게 입고 다녀도 되겠어?”


“아니” 왜 말이지? 왜냐고? ㅠㅠ 옷이 너무 작단다. 팔뚝은 그럭저럭 문제가 없는데 아랫단이 너무 짧아서 뱃살의 노출우려가 있다는 소견에 잠시 흔들리지만 일단은 대안이 없기에 그대로 입고 다니기로 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남자의 생명은, 우리 부인님께서 늘상 강조하시듯 듬직한 어깨와 잘록한 허리 아닌가? 처진 어깨와 불룩한 ‘배바지’로 늙어갈 수는 없지, 노력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은 노력해 봐야 한다. 체중77kg의 날씬한 체격으로 곱게 늙어가려면 말이다. 모처럼 쉬게 된 주말의 하루. 아들과 오랜만에 학교 운동장에 나섰다. 둘째와 셋째까지 모두 대동하고 다행히 중학교 운동장은 텅 비어 있다. 집에서 바로 내려다 보이는 곳에 이런 널직한 학교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넓은 운동장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며 같이 뛰어준다. 농구공 대신 축구공으로 농구골대에서 슛동작을 시범도 보이고 막내와 함께 달리기도 해본다. 아들이 축구공을 다루는 모습을 보니 제법이다.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 본인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녀석의 자신감을 키워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여간 그렇게 주말 오후는 보람차게 아빠의 본분을 완수하며 흘러갔다.


주말 저녁은 텔레비전을 보고자 하는 아이들과의 신경전이 늘상 벌어지곤 한다. “얘들아, 우리 산책나가자” 때는 봄인지라 안양천의 밤공기는 시원시원하기에 아이들도 곧장 따라나선다.
안양천을 따라 난 길에 우리처럼 산책을 하는 가족들이 꽤 많다. 무심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여유란! 그런데 꼭 이때 카톡을 보내는 원망스런 인간들이 있었으니 잠시 아이폰을 꺼내들고 화면에 집중하고 있는 찰라. 아들이 접근하며 왼쪽 코너를 파고드는 돌직구를 날린다. “아빠, 이럴 땐 핸드폰 하지 말아야지, 아빠가 우리한테 모범을 보여야 하잖아” 허걱!!


“하하하, 그렇지? 맞어맞어!” 냉큼 핸드폰을 주머니속에 밀어넣고 아들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괜히 오바하는 나의 모습. 이미 마음은 죄책감으로 시커멓게 물들었다.


아들이 내민 옐로카드에 아빠는 두 손을 들었다. 퇴근후에는 ‘그놈의 아이폰’을 서랍에 즉시 거치시키고 외면하련다. 그리고 아들의 영어공부를 도와주고 둘째, 셋째의 건사는 물론 각종 청소 및 쓰레기 버리기 등등 모든 집안일을 전담하겠다!라는 거창한 포부는 아니지만, (한국말은 끝까지~~~) 최소한 아빠를 핸드폰이 아닌 아이들에게 돌려주어야 하겠다는 것이 나의 조그만 각오일 것이다. 안지키면? 그땐 내가 너희들 아빠가 아니다. 

 

  독산1동 김희준

 

 

 

 


퇴근이 정상적으로 이뤄지면 아이들과 밥상머리에 모여앉아 저녁식사를 한다. 평범한 하루가 주는 행복은 어느 지붕 밑에서도 마찬가지겠지.
식사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서 신문을 들쳐보는데 아내가 장남 이야기를 꺼낸다. “재빈이가 말이지..” 하며 시작된 이야기는 아들의 수학성적에 대한 것이었다.
학교에서 받아온 수학 점수가 65점이란다. 보통은 그렇다. 부모는 아이가 못한 측면에서 너보다 더 잘하는 아이가 몇이냐 며 묻기 마련이고 아이는 자기보다 못한 아이들이 더 많다며 자기를 옹호하는 것이 이 지점에서의 대화 패턴이다.
그런데 아내의 말에 의하면 우리 아들의 반응은 뭔가 남다른 것이 있다. 아들의 설명은 이렇다. 수학시험이 나온 8단원이 ‘아주아주’ 어려운 부분이었다는 것이다. 흠. 그래서 점수가 나빴다? 그런 식으로 마무리가 되었다면 별로 이야기꺼리가 되지는 않았을 터인데 아들의 설명은 계속 이어진다는 것.
주변에 수학 학원을 다니는 친구들이 있단다. 학원을 열심히 다니는 친구들이 받은 점수도 65점이란다. 그러므로 학원 다니지 않은 자기가 받은 점수는 절대로 나쁜 점수가 아니라며 종결지은 아들 녀석의 한 마디는 ‘ 난 내 점수에 만족해’ 이다.
아내에게서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30여년전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어느 날이 생각난다.
내가 입학했던 학교는 동작구 신대방동에 위치했던 일제 강점기때 개교한 고색창연한 역사를 자랑하는 문창국민학교였다.
베이비붐 세대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1학년이 24반까지 있었고 교실은 지하실이었다.
지하교실에서 형광등 켜놓고 60여명의 꼬맹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한글을 하나하나 배워나가던 모습은 지금의 현실로서는 가히 해외토픽감이 아닐까 싶다.
그러다가 영등포구 대림동에 ‘대동국민학교’가 긴급 개교되어 일부 아이들이 그쪽으로 수용되었고 그곳에서 지금의 아들과 같은 학년인 3학년을 맞게 되었다.
담임 선생님은 얼굴이 통통하고 파마머리를 했던 예쁘장한 여자선생님이셨다. 다른 건 다 생각 안나지만 선생님의 표정과 억양이 아직도 생생하다.
선생님은 너희들 중에 서울대학교를 갈 수 있는 아이들이 나올까 궁금하다며 서울대학교라는 곳을 한참 설명하셨다.
서울대학교는 정말 훌륭한 대학교라며 정말 정말 똑똑한 사람들만이 가는 학교라며 너희들도 열심히 공부해서 꼭 서울대학교를 가기를 바란다며 말을 마치신 기억이 난다.
열 살짜리 꼬맹이들이 서울대학교가 뭔지 하버드 대학교가 뭔지 알 게 뭔가.
하지만 그날 선생님이 강조하신 그 다섯 글자가 지금도 뇌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면 정색을 하고 아이들에게 설명해 주신 듯하다.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나도 고3이 되었고 그때서야 서울대학교라는 단어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우리 집에서 114번 버스를 타면 한 방에 갈수 있었기에 반 친구들과 농담으로 대학교도 학군제로 하면 우리들 모두 관악산에 있는 대학교 배정받을 텐데 하며 킬킬대기도 하였다.
고3 막바지가 되어 학력고사가 임박한 11월경이었다.
담임선생님과의 1:1진학상담. 배치고사 평균점수가 나왔으니 이를 근거로 대학 순위표에 줄을 긋고 그 밑으로 한번 골라보라는 것이 진학상담의 전부였다.
줄 위에 있는 학교 한번 써보면 안되겠냐고 강짜를 부리는 나를 쳐다보던 담임선생님의 똥씹으신 듯한 표정에 결국 꿀밤한대 맞고 쓰라는 데로 썼다.
그래서 가게 된 000대학교. 비록 서울대학교는 아니지만 지하철만 타고 다닐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아들이 65점에 만족했듯이 나도 나의 대학교에 만족한다.
성적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 칭찬해 줄 수 있는 여유를 가진다는 것.
아들아! 만족해도 된단다. 넌 충분히 자격있어!
                   

         독산1동 김희준


스물 세번째 이야기-유치원 보내기, 정답은 어디?

2006년 2월생인 둘째는 지금 독산1동에 위치한 어린이집을 다니고 있다. 태어나서 집에서 키우다가 돈벌러 나가야 하는 엄마아빠의 숙명으로 어쩔 수 없이 보육기관의 손길에 맡긴지도 어느새 5년이 흘렀다. 다행히 그 시간동안 아이는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자랐다.
우리 세 아이들을 모두 맡아 키워준 어린이집에 새삼 감사를 드린다. 장남이 네 살 때 처음 어린이집에 들어와 만난 선생님이 이제 막 네 살이 된 우리 막내딸도 맡아 키워주시니 보통 인연은 아닌 듯 싶다. 둘째인 딸아이가 올해 일곱 살이 되었다.
작년 가을인가 싶다. 오빠가 가방들고 다니며 학교를 다니는 모습을 보며 자기도 얼른 학교 다니고 싶다며 줄기차게 졸라대는데 2월생인 만큼 정 원한다면 학교야 보낼 수 있지만 그것이 과연 정답인가 싶어 엄마아빠는 머리를 맞대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였다.
주변 선배 엄마아빠들에게 물어도 보고 아이한테 몇 번이고 다시 의사를 확인해보는 번뇌의 나날이 무작정 흐르던 지난 가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처럼 가족과 시간을 내어 충청도 어딘가에 있는 자연휴양림으로 짧은 여행을 떠났다. 사무실 동료가족과 시간을 맞추어 두 가족이 함께 떠나 숲속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요한 것은 사무실 동료의 아내님이 바로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는 것. 바로 우리 부부의 고민을 털어넣고 자문을 청해 본다.
아이의 뛰어노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던 선생님은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답을 주신다. “지금 보내는 것보다는 나이가 돼서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물론 이유도 달아 주신다. “재은이가 또래보다 키도 크고 성격이 활달해서 리더십도 있지만 그 때 아이들의 한 살 차이란 것이 아무래도 무시할 수 없어요” 밥을 먹어도 한 그릇을 더 먹은 연륜의 차이가 그 맘 때 아이들에게는 심리적 성장의 측면에서 보이지 않게 드러난 다는 것이다. 게다가 재은이가 제 나이때 학교에 가면 2월생이고 그 성격에 또래 아이들의 대장 노릇을 하며 리더십을 키울 수 있는데 굳이 한 해 먼저 보낼 필요는 없어 보인다는 것이 요지였다. 결론은 그렇게 났다. 때가 되면 보내는 것으로.
아이에게도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다행히 수긍하는 눈치여서 근심은 덜해졌는데 새롭게 부상한 문제가 있다. 다니던 어린이집에서 또래 여자아이가 없다는 것인데 그게 별 문제인가 싶은 것이 아빠의 마음이라면 엄마의 걱정은 그렇지가 않다. 아무래도 또래 여자아이들과의 교류가 없는 것이 맘에 걸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상한 해결방안은 유치원에 한번 보내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것이다. 유치원에 가면 또래들도 많고 나중에 학교에 입학하더라도 계속 만나던 친구들이 있으니 적응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의견인데 물론 아빠인 나도 그렇게만 된다면야 나쁠 것은 없지 뭐.. 하며 동의를 하였다.
그러나 갈만한 유치원을 찾기 위해 막상 동네를 살펴보니 막막하기만 하였다. 현재 살고 있는 독산1동이 안양천을 경계로 서울권과 분리되어 있는지라 실질적인 생활권은 광명시인데  우리 집에서 가까운 몇몇 광명시 유치원에서는 광명시민이 아니라고 홀대(?)받아 입학이 안되고 같은 금천구에 있는 유치원은 이미 정원이 꽉 차버린 상태여서 이를 어찌해야 하는가 답이 안나온다.
행정구역이 우선일까 생활권이 우선일까. 맥주 한캔 사러 갈 때도 길 건너 ‘경기도’에 가야 하는 것이 우리가족의 일상생활인데 지척에 둔 유치원 입학이 단지 행정구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받는 상황이 조금은 이해가 안되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내가 무슨 왕도 아니고 어쩌겠는가. 그래서 아이는 아직도 또래친구가 없는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다. 올 한 해만 버티면 학교에 갈거니 그 정도로 만족해야만 할까 아빠의 고민은 그저 깊어지기만 한다.
누가 좀 해결해줘요!!!
                             독산1동 김희준

2012년 새해가 밝았다. 아빠는 속절없이 나이 먹어 가는데 아이들은 죽순처럼 무럭무럭 자란다.

새해 첫날을 맞이하여 줄자를 꺼내서 아이들 키를 재어 본다. 하루라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는 열 살 하고도 한 살 더 먹은 장남은 냉큼 달려와 거실 벽에 뒤꿈치를 바싹 붙이고 엄숙한 자세로 서서 결과를 기다린다.
아들이 다섯 살 때였나 싶다. 그때 살던 집에서 쟀던 키는 102cm이었다. 우리 아들이 드디어 100cm가 넘었구나! 하며 기뻐하던 기억이 난다. 가장 최근에 몇 달 전인지는 모르겠으나 재 본 키는 137cm이었다.

오늘은 꽤나 오랜만에 키를 재는 것인데 과연 얼마나 나올까. 아빠도 궁금하다. 아이를 벽에 바짝 기대 세우고 네모난 책으로 구십도 각도를 유지하여 정확한 지점을 볼펜으로 체크한다. 벽에 낙서하는 것은 우리 집에서는 금기사항이지만 이때만은 예외이다. 펜으로 조그만 줄을 긋고 밑에서부터 줄자를 이어본다. 결과는? 143cm! 와우! 어느새 이렇게 컸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아들은 ‘나도 이제 145cm를 향해 달려간단 말이지~ “ 하며 좋아한다.

새삼스레 아들을 바라본다. 손도 발도 머리도 많이 굵어졌다. 사춘기를 앞둔 아들의 성장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아빠의 기억은 그렇다. 내가 중학교2학년생이던 시절의 그 한해에 거의 한 달에 1cm씩 1년에 무려 12cm가 자랐다. 중3때도 8cm가 자라 고등학교 입학 무렵에는 178cm가 되어 반에서 꺽다리로 통하던 기억이 난다. 나의 키는 고3시절의 183cm를 마지막으로 성장을 멈추었다.

아내의 키도 170에 육박하는 우리 가족의 유전자를 검토해보면, 아들의 키는 앞으로 3~4년 후면 엄마를 뛰어넘을 것이고 아빠와 어깨를 나란히 할 날도 멀지 않았다.
아들은 과연 폭풍과도 같은 성장과 함께 찾아올 사춘기를 어떻게 보낼까. 그 질풍노도의 시기를 과연 아빠인 내가 과연 얼마나 잘 이해해 줄 수 있을까. 

아들이 태어난 산부인과에서 3일을 보내고 퇴원하던 그 여름날, 날은 더웠지만 행여나 바람이라도 들까 싶어 꼭꼭 닫은 차안에서 강보에 싸인 채로 안고 가던 그 날이 아직도 생생한데, 목말을 태워 두 손을 잡고 동네를 뛰어다니던 날들의 영상이 새록새록 하기만 한데 이제는 업기에도 버거운 체구가 되었다.
 아들과 두 딸의 키를 재어주던 새해 첫 날 밤, 막내는 이불에 지도를 그렸다. 이불이 젖었고 잠잘 데도 마땅치 않아 아들이 자는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어둠 속에 곤히 잠든 아들의 얼굴을 바라본다. 아들의 발을 만져보니 완전 어른 발이다. 이 두 발로 아들이 딛고 살아갈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한 반에 60명을 넘던 시절의 콩나물시루 같던 학창시절을 보낸 아빠는 아들이 다니는 학교가 한 반이 고작 24명이고 한 학년에 4학급밖에 없다는 상황을 상상하기 힘들다. 아빠는 콩나물시루 같은 학교에서 줄곧 성장기를 보냈고 100만 명이 한 날 한시에 모여 대학입학시험을 치렀고, 한 해 500명이 죽어나가는 군대에서 간신히 목숨 부지해서 제대할 수 있었고 ‘아엠푸’로 풍지박산이 되어 버린 세상에서 직장을 잡았다가 쫓겨나기를 반복하다가 이제야 겨우 밥 먹고 살고 있다.

너희들이 살아갈 세상은 일단 머릿수가 적으니 다행일 것이다. 머릿수가 적으니 사람이 사람값 받는 세상이 될 것이다. 학식이 일천한 아빠로서는 복잡한 것은 알지 못하지만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조금이나마 노력할 것이다.
창가에 비친 1월의 겨울 하늘은 춥기만 하다. 좁지만 따뜻한 방에 부자가 누워 잠드는 밤. 아들은 이제 더 이상 아빠 품으로 들어오지는 않는다. 그래도 좋은걸. 아빠는 아들의 얼굴을 보며 잠이 들었다.
                            

김희준


필자는 독산1동에 거주하고 있으며 재빈, 재은, 재령 3남매와 함께 성장일기를 쓰고 있는 아빠입니다.



"아임 플레잉 하수구!”


영어가 권력인 시대다. 발음을 위해 혓바닥 수술까지 감행한다는 웃지 못할 케이스가 외국 언론에까지 기사화된 것을 보면 우리나라의 영어교육열기는 아무도 못 말릴 지경이다. 그 와중에도 아이들의 영어교육을 나몰라라 팽개치고 ‘방목육아’를 실천하는 나의 모습에 아내는 안절부절이다. 영어유치원은 못 보낼망정 영어동화라도 들려줘야 하지 않겠냐며 스폰지밥 이야기가 담겨있는 책과 시디를 어디서 사왔는데 몇 번 틀어주다 아이들이 흥미없어하여 책장구석에 얌전히 누워 있다.

왜 이런 일을 벌이느냐고 당신 남편이 명색이 영문학 전공자인데 어찌 나의 의견을 무시하고 이렇게 멋대로 하는가? 이런 나의 질책에 대한 대답은 ‘그럼 전공자가 한번 해보슈~’ 였다는 것이다.
이런.좋다. 나의 교육 신념을 드디어 실천할 기회가 온 것이다. 아빠의 교육철학은 무엇인가? 핵심개념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라는 속담으로 요약될 수 있다. 교육적이면서도 재미를 겸비하고 이를 통해 저녁시간 아이들 통솔까지 한방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해 고뇌를 거듭한 바 도출해낸 결과는?

그 해답은 롯데마트 서점코너에서 고른 ‘영어낱말카드’이다. 80장의 조그만 카드로 구성되어 하루의 일과를 순차적으로 묘사하여 한 카드에 딱 한줄의 영어문장과 그림이 그려져 있는 구조이다.
일단 내용이 많지 않아서 아이들의 도전욕구가 상처받지 않을 것이며 하루에 한 장씩 그림과 같이 익혀가면 저녁 나절의 30분 정도는 아이들이 재미있게 연습장에 써가며 오순도순 학업에 매진하는 흐뭇한 광경이 펼쳐지겠지. 또한 물론 아이들이 환장하는 떡밥도 사전에 매달아두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카드내용을 모두 배우고 나면 너희들은 마땅히 큰 상을 받게 될 것이리라.

첫째와 둘째에게 희망하는 상품을 하나하나 물어본다. 어 그거.. 알았어, 알았어.  그렇게 하다 보면 두어 달은 그럭저럭 지나갈 것이다. 둘째인 딸래미는 카드를 받자마자 ‘이거 어떻게 읽어? 어 얼른 써봐야지’ 하며 신이 났다. 그 모습을 본 장남도 이에 질세라 카드를 받아들고는 냉큼 연습장을 가지고 와 몇 줄씩 써가며 문장을 외우는 모습이 아주 열심이다. 막내는? 막내는 나름대로 막무가내 학습이다. 언니가 문장을 읽으면 옆에서 따라하고 자기도 카드 한 장 손에 쥐고 개발새발 낙서질에 급기야는 마구 접기도 하다가 관심이 없어지면 오빠와 언니의 모습을 지켜본다. 그래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좋아. 아빠는 이 상황에서 딴 짓 금지! 책을 보거나 소파에 앉아 조용히 명상에 빠지다 슬쩍 졸기도 한다.

며칠 전 저녁 나절. 둘째인 딸이 아빠에게 다가와 큰소리로 복습한다. “아임 플레잉 하수구!” 엥? 이것이 무슨 말인가.. 곰곰이 생각해본다. 너 뭐라고 했니 하는 아빠의 말에 딸은 자랑스레 또 한번 외친다. “아임 플레잉 하!수!구!” 멍해진 아빠에게 딸이 건네준 카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I'm playing house!" (난 소꿉놀이를 해요!) 아, 하수구는 하우스였구나. 의기양양해진 딸아이에게 아빠는 그저 박수를 쳐 줄 뿐이다. 우리 딸, 파이팅!

                                            독산1동 김희준

아이가 셋이다. 아빠는 하나다.
아이에게는 나만의 아빠지만 아빠에겐 이놈도 저놈도 다 내 자식이다. 부모의 손길과 사랑에 아직은 항상 배가 고픈 아이들.
퇴근 후 현관을 열고 나타나는 아빠에게 달려가는 순서조차도 그들에게는 양보할 수 없는 경쟁의 순간일 뿐이다.
이제 세 살을 잡수신 막내는 행여나 언니에게 뒤쳐질 새라 현관 키를 누르는 소리만 나도 꽥꽥 괴성을 지르며 현관으로 달려온다. 혹시나 언니가 앞을 가로막으면 바로 주저앉아 대성통곡이다.
막내가 이렇게 어리니 첫째도 둘째도 양보하지만 길지도 않은 퇴근 후 저녁시간을 막내만 챙기고 있노라면 다른 집에서는 막내 대접을 받으며 어리광피워야 할 여섯 살 둘째 딸은 소파에 홀로 앉아 동화책만 보기 일쑤다.
장남은? 그 나름의 방법이 있다. 막내가 아빠에게서 관심을 잠시 끊은 사이에 학교에서 받아온 시험지를 펼쳐들고 자기가 틀린 문제를 왜 틀려야 했는지 억울하다며 하소연한다. 아들의 말은 자기에게도 아빠의 관심을 주라는 의견이겠지.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 했다고 격려해주며 다음 축구수업 일정을 물어본다.
그렇다. 아들은 아들이라서, 우리 부부가 처음으로 본 아기라서 애틋하고 막내는 아직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 못하는 천둥벌거숭이이니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을 써야 하고 이래저래 둘째에게 돌아갈 관심의 몫이 제일 적어질 수 밖에 없다.
그 점을 그동안 신경쓰지도 않았고 문제의식도 없었는데 어느 날 아내가 전해준 말을 듣고 나서야 아둔한 아빠를 자책하게 되었다.
아빠는 밖에 있었고 가족들은 집에 있던 어느 날 저녁. 안부를 전하는 전화를 건 아빠는 장남부터 찾았고 그 담엔 막내의 건강을 물었고 그리곤 바쁘다며 전화를 끊었다.
왜 아빠는 나를 바꿔달라고 안해? 그렇게 둘째는 엄마에게 물었다. 대답은 아빠의 몫인걸. 그렇다. 나도 인정하기 싫지만 둘째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집에서 아빠랑 있으면 달려들지 않고 데면데면 혼자서 책만 봤던 거였니..
아, 미안타!. 야근하는 어느 밤. 작정을 하고 집으로 전화를 건다. 둘째부터 찾는다. ‘뭐하고 있었어?~’ 말투까지 나긋하게 음성변조까지 해가며 안부를 묻는다.
이 정도면 될까? 안될까?
미심쩍기는 하지만 시작이 중요한 법. 첫술에 배부를 수 없으니 앞으로가 중요하다.
깨물면 안 아픈 손가락이 마음속에 자리만 잡고 있었던 것인가. 아빠는 다짐해 본다. 끄집어 내서 아프도록 깨물어 줘야겠다고. 앞으로도 쭈~~욱!

독산1동 김희준

필자는 독산1동에 거주하고 있으며 재빈, 재은, 재령 3남매와 함께 성장일기를 쓰고 있는 아빠입니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의 한 장. 첫째인지 둘째인지 누군지도 모르겠다. 갓난아기는 울고 있었고, 아기 엄마는 집을 비워 어떻게든 아기를 얼러주고 재워야 했던 그 밤. 회사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절여진 배추김치처럼 꼼짝할 수 없는 피곤함에 몸서리쳐야 했던 그 밤. 아기에게 밥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안아서 재우다 자리에 고이 누이고 토닥토닥해주던 그 밤.

아기는 만만치 않았다. 등짝이 바닥에 닿으면 자동적으로 눈을 번쩍 뜨고 울기 시작하는 녀석의 오기에 두손 두발 다 든 채 악악 울어대는 아기의 옆에 누워 눈을 감고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 밤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 보였고, 세상의 누구도 나를 도와줄 사람은 없어 보이던 그 밤에 이놈의 아기를 창밖으로 던져 버리고 아무 생각없이 잠이나 쿨쿨 자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든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밖에 들 수 없지 않겠는가.

세 아이를 둔 아빠로서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은 ‘길고 힘든 사랑의 시작’이라고 누가 그랬다지. 그 고귀한 사랑의 소임은 내 생명이 다하는 그 때 이후에도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빠의 나’를 벗어나 ‘나의 나’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나 홀로 운전하는 시간이니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한 지 11년이 훌쩍 넘은 늙은 자동차가 온전한 나만의 쉼터이다.

 사람들이 아직은 잠자리에서 뒤척이는 일요일 아침 6시. 사당으로 가는 남부순환로는 텅 비어있다. 몸을 부려놓고 왼손은 운전대에 오른손은 수동기어봉에 왼발은 클러치에 오른발은 브레이크에 올려놓고 시동을 걸면 부릉! 하고 차와 나의 신경세포가 연결된다.

나의 시선이 차의 시선이고 차의 바퀴가 나의 다리이다. 밟으면 밟는 데로 오른 발의 각도에 차는 속도로 반응하고 클러치를 누르는 깊이에 소리로 대꾸한다. 남부순환로는 새벽의 어둠만이 가득하다. 신림역을 지나 종횡무진 돌진(?)하며 서울대입구 사거리를 통과하는 나는 내 공간과 함께 있다.
그 공간을 채우는 것은 오직 차와 나의 숨소리와 엔진소리뿐. 우연히 돌린 라디오 채널의 노래가 좋다면 온전한 나의 휴식은 완성, 그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다.

사당을 지나 남태령고개를 넘어 지하도로 진입하는 순간은 시속 100km로 질주한다. 고가도로에 올라서면 관악산이 청계산이 내 눈에 한 가득 펼쳐진다. 이대로 가면 하늘로 질주할 수 있을 듯한 기분이란!
올라가는 때가 있으면 항상 내려가야 할 순간이 온다. 부릉부릉~ 회사로 연결되는 2차선 도로를 올라가는 차의 숨소리가 힘겹기만 하다.
차가 멈추었다. 몸뚱아리는 땅으로 내려온다.‘나의나’도 버리고 ‘회사의나’로 변신할 시간. 그렇게 휴일근무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독산1동 김희준

필자는 독산1동에 거주하고 있으며 재빈, 재은, 재령 3남매와 함께 성장일기를 쓰고 있는 아빠입니다.

[연재기고] 아빠가 쓰는 세남매 성장일기

세 아이의 아빠는 73년생 소띠이다. 동네를 쏘다니며 놀던 그 시절에는 서울도 서울같지가 않았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대림동은 어딜 가도 배추밭, 무밭이었고 비닐하우스 옆에는 또랑이 흐르던 시골이었다.

코흘리개 꼬마가 여덟살이 되어 입학한 ‘국민학교’는 신대방동에 지금도 건재한 문창국민학교!
진정한 ‘국민’이 되기 위해 손수건 하나씩 달고 운동장로 모여든 코흘리개의 수는 엄청나기만 했다. 1학년이 무려 24반까지 있었고 2부제도 모자라 지상도 아닌 지하에 있던 1학년 교실은 교육장소가 아니라 차라리 ‘수용시설’이었다.
파마머리를 했던 젊디젊은 담임선생님이 아이들에 치여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기만 하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국민으로서 그 옛날에 받았던 성적표는 '수우미양가' 로 과목별로 등급이 매겨져 있던 것으로 기억하는바 오늘 아들이 건네준 성적표를 보니 많이 달라졌다.

학업성취도가 기록되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과목별 수우미양가 는 없어지고 과목내의 단위별로 가급적 아이가 잘하는 것을 강조하고 부족한 점은 더욱 격려하여 채워나갈 수 있게 하는 점이 눈에 띤다.
운동을 좋아하는 아들녀석이 운동회에서 계주선수로 활약한 것도 언급되어 있고 이리저리 둘러보던 아빠의 시선은 성적표 하단의 ‘종합의견’으로 쏠린다.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으로 마음이 넓어 친구들의 신망이 높으며 맡은 일에 대한 책임감이 강하며...”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이라...외모부터 애비를 빼다박은 아들녀석..성격까지 유전되었군..ㅎㅎ..흠~ 맘에 듭니다. 네..
그런데, 성적표 제일 밑에 ‘과목별 종합의견’이라는 것이  가히 본 성적표의 화룡점정이라 할만한 멘트라 할만하다.
“글을 읽고 그 뜻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나며... 충고하는 말을 들었을 때 대답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음”
국어과목의 평가의견이다. 몇 번을 다시 읽어본다. 충고하는 말을 들었을 때 대답하는 방법'을.. 그것도 '잘' 알고 있다니.... 도대체 그것이 무엇일까. 궁금증이 새록새록 돋아난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아들을 불렀다.
"아들아, 충고하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어떻게 대답하는 거냐..."
아들의 답은 간단했다.
"고맙다고 하면 돼!"
쿵! 그래 그거였구나... 그것이었구나...
사회에서 배워야 할 것을 이미 초등학교3학년때 다 배운 거였다. 다른 것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너는 하산해도 된다.. 얼른 돈벌어 와라..ㅋㅋ

독산1동 김희준

필자는 독산1동에 거주하고 있으며 재빈, 재은, 재령 3남매와 함께 성장일기를 쓰고 있는 아빠입니다.


 

세파에 치여 정신없이 살다가 정신차려 주위를 돌아보면 어느새 아이들의 훌쩍 커 있는 모습에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오늘의 주인공은 올해 여섯 살인 둘째 딸이다. 며칠 전부터 아이의 앞니가 흔들린다는 제보를 받아 앉혀놓고 살펴보니 이빨이 흔들리며 밑에서 새로운 치아가 올라오는 것이 이미 한 발 늦은 것 같다. 아차 싶었다.
첫째인 아들의 흔들거리는 앞니에 실을 걸어주며 ‘얍’하며 뽑아주던 게 며칠 전인 것 같은데 벌써 둘째의 차례란 말인가. 세월은 탱크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지나간다.
아이는 이미 겁먹은 기색이 역력하다. 평소에는 천하의 말괄량이로 거실 소파에서 점프하며 마구 뛰어다니며 호랑이 알기를 우습게 여기는 하룻강아지처럼 엄마를 힘들게 하던 둘째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대성통곡할 준비를 갖춘 채 아빠 앞에 앉아 있는 것이다.
“이빨을 안 빼면 말이지, 미워진단 말이야.. 하나도 안 아파 알겠지?”
아이의 마음을 그렇게 안심시키고 실을 조그맣게 매듭을 지어 문제의 이빨에 걸어본다. 아이의 이빨은 정말 작기만 하다. 아빠의 손가락은 마치 야구 방망이처럼 굵어 보인다.
조심조심 매듭을 지어 이빨에 걸어 살짝 잡아당겨 고정을 시키고 아이의 눈치를 살핀다. 눈망울에 고인 눈물이 한 대야 가득이다. 톡 건드려만 주면 터져 나올 기세다.
이럴 땐 말을 계속 걸어줘야 한다. “이빨은 뽑아서 옥상에 던져줘야 한데, 왜냐면 그래야 새 이빨이 예쁘게 나온단 말이지? 근데 오늘 간식은 뭐 먹었어?”
아이는 ‘으,으~’ 하며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러다 아이가 이빨에 대해서 잠시 집중하지 않는 틈을 타 ‘탁’하며 실을 잡아 당겼다.
이런.. 실만 쏙 빠져 나온다. 다시 묶어야겠군. 또 한번의 시도에서도 역시 실만 쏙 빠져나온다. 이러면 안되는데 말이다. 이빨을 손으로 흔들어 보니 이미 99% 빠진 상태이다.
어떻게든 오늘 승부를 내야 한다. 다시 용맹정진의 마음으로 실을 튼실하게 묶어 본다.
그리고 하나, 둘, 셋! 마음속으로 외치며 잡아 당긴 순간. 뭔가 ‘툭’ 하며 빠져 나와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이의 눈물보는 터져 버렸다. ‘엉~엉’ 하며 우는 아이를 안아주며 괜찮아, 아프지도 않잖아, 이제 끝났어.. 그렇게 얘기해주며 살펴보니 제대로 빠졌다. 나오고 있는 새 치아의 자리만 잡아주면 될 것 같은데.. 그 옆에 있는 이빨도 조금씩 흔들리는 모습이 조만간 또 한 번의 승부를 벌여야 할 듯 하다.
하여간 오늘의 이벤트는 끝!
아이는 천하의 말괄량이이자 하룻강아지로 복귀하여 사방팔방 뛰어 다니고 있다. 저 녀석을 잡아서 얼른 씻기고 재워야지. 아빠의 하루는 그렇게 끝났다. 

독산1동 김희준

필자는 독산1동에 거주하고 있으며 재빈, 재은, 재령 3남매와 함께 성장일기를 쓰고 있는 아빠입니다.



 

올해 열 살, 나의 아들은 초등학교 3학년생이다. 가난뱅이 아빠를 만나 좋은 점이라면 사교육에서 해방(?)시켜 주고 있다는 점이랄까?
회사 동료들 말을 들어보면 각종 학원을 두루 섭렵하고 그중에 영어학원은 필수라던데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건지 나름 ‘영문학전공자’임을 가끔 한번씩 내세우는 아빠는 해외생활을 한 몇 년 하지 않는 이상 학원에서 배워온 몇마디 영어를 밥상머리에서 중얼대는 식의 영어교육은 현재 단계로선 전혀 필요없다는 나름의 소신으로 아들을 ‘방목’하고 있는 것이다.
때가 되면 하면 된다! 전공자인 아빠가 도와주마..ㅎㅎ..
아들 녀석은 저녁마다 한 시간씩 자기 방에서 컴퓨터 게임을 한다. 가뜩이나 시력에 대한 걱정이 앞선 부모는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무작정 막을 수도 없고 하여 게임을 할 수 있느 시간을 정해놓고 허락하고는 있지만 아들이 게임삼매경에 빠져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마냥 편하지는 않다.

이날도 그랬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 싶어 시계 바늘을 지켜보다 아들의 모습을 힐끗 쳐다보니 게임에 빠진 모습이 몰입도 이런 몰입이 없을 성 싶다. 이런.
잔소리를 할까 말까 망설이다. 참지 못하고 한 마디가 새어 나오고야 말았다. “시간 다 되지 않았어?” 그런데 문제는 내 의도와는 다르게 목소리 톤이 조금 올라간 것이다. 아이는 “아,,아니,,” 라면서도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그 모습이 또 아빠의 신경을 거스리게 하니 결국 나오는 한마디 “얼른 꺼!”
아들은 급하게 컴터 전원을 끈다. 짐짓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빠는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면 딴청을 피운다. 방을 정리하고 나온 아들이 나오는데 아빠에게 조용히 전하는 말이 정곡을 찌른다.

“아빠 화났지?” 일단 오리발을 내미는 수 밖에..
“아니, 화 안났는데?”
“화 냈잖아” 허허.. 이렇게 된 이상 진실을 토로할 수 밖에 없다
“아,,, 그게 말이지.. 니가 좀 오래 하는 것 같아서..말이지..”
아들은 즉각 반론을 제기한다.
“아냐, 내가 시간 다 보고 있었어, 시간 되면 끌라고 했단 말이야.. 아빠 화내지 마, 알았지?”
흠...그래 니 말이 맞다. 시간이 덜 된 거 같기는 했었어..
“알았어, 아빠 화 안낼게. 앞으론..”

그렇게 그렇게 잠시 집안을 감돌았던 소용돌이는 잦아들었다. 그런데 왠지 기분이 좋은 이유는 뭘까.. 아이는 아빠에게 화내지 말라고 했다.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화내지 말라고 얘기하면 아빠가 자기 말을 들어주리라는 믿음이 있어서였던 건 아닐까? 아들에게 그만큼 신뢰가 있는 아빠라는 것 아닐까? 언젠가 아이는 말했다. 아빠가 집에 있으면 안심이 된다고..회사끝나고 매일매일 일찍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아빠도 니가 옆에 있어서 참 행복하다. 너도 내 맘 알지?

김희준  (독산1동)

연재 기고 - 아빠가 쓰는 세남매 성장일기

아들이 이제 열 살이다. 초등학교3학년. 80년대 ‘국민 학교’ 3학년에 담임샘 성함하고 파마머리 똥그란 얼굴까지 생각나는데 나의 아들이 지금 그 나이이다. 앞으로 무서운 속도로 커 나가겠지. 군대에 갈 나이도 곧 닥치겠지.
강화도에서 해병대원들의 끔찍한 총기사건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21세, 20세 어린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왕따를 시키고 피해자인 사병이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고 한다. 뉴스를 통해 ‘기수열외’란 생소한 단어를 접하게 되었다. 기수열외란 선임을 선임으로 인정하지 않고 투명인간 취급을 하며 후임들에게까지 선임대우를 못받게 하며 심지어 욕설에 폭행까지 일삼는 그들만의 ‘전통’이란다.

여기서 떠오르는 단상이 있다. 제대한지 어느 새 15년이 훌쩍 흘렀지만 나의 청춘의 26개월을 구금당했던 90년대 초반의 경기도 어느 산골짝 포병대에서 만났던 어떤 후임병의 모습. 그의 이름은 일명 ‘최스타’였다. 이등병때부터 장성급 행동을 일삼아 장성대우를 해줘야 한다며 인사계(별명이 난쟁이똥자루였다. 키가 워낙 작으신 양반이라..)가 붙여준 별명이다.

최스타는 6개월 정도 차이나는 나의 후임이었다. 충청도 어느 작은 마을에서 왔다던 그는 말수가 적었고 작은 키에 왜소한 체격으로 말수가 적어 대화가 힘들었다. 말을 시키면 대답 한번 듣기가 힘들었다. 체력도 약해 작업을 시키면 후들거리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내가 속했던 부대는 포병대였는지라 당시만 해도 매일 밤마다 공식 점호가 끝나면 ‘식기당번’이라 불리는 실세 기수가 후임들을 교육하곤 했었다. 욕설과 폭행은 일상적이었다.
그때 그게 당연하게 여겨졌다. 세상에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군대라는 곳에서 한 해 500명 이상이 죽어나가던 때였다. 누가 어디서 죽어나갈지 아무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사람들이 모여서 조직이 생기면 경쟁에서 탈락하는 사람은 받드시 생긴다. 특히 남자들만 모여 생활하는 군대라는 조직에서는 착하고 여린 심성의 병사들이 주로 낙오의 대열을 메꾸곤 한다. 최스타도 그런 점에서 유력한 후보였다.

그가 상병 진급한 날 밤이었나? 취침점호를 마치고 난쟁이 똥자루 인사계가 뒷짐을 지고 한 마디 하던 날이 말이다.
“우리 최스타가 이제 상병이 되었다. 모두들, 최스타가 무사히 제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자” 글쎄다. 그 말이 왜 지금까지 기억에 남을까…. 인사계가 그 말을 하고 내무반에 흐뭇한 미소가 흘렀던 것 같다. '우리 한번 힘을 모아 최스타를 제대시켜 무사히 고향에 보내주자. '는 공감대였나 싶다.
그랬다. 최스타의 동기들은 작업이나 훈련시 최스타를 도왔고, 선임들은 그를 어느 정도는 귀엽게 봐주었고, 후임들은 최스타를 철저하게 선임대우 해주었다.

만약 못난 선임이라고 우습게 보는 말을 한마디라도 했었다면 그를 포함한 그 동기들은 철저히 보복당했을 것이다. 감히 엄두를 못낼 정도로.
조직에 적응못하는 병사들을 자체적으로 낙오시켜 왕따시키는 모습은 그 때는 없었다.
군대면제자들이 모여 나라를 이끌어 가시니 있는 집 자식들은 이중국적취득으로 죄다 빠져나가고 나의 아들은 단지 못난 애비 만나 군대에 가게 될까…
아, 이나라의 군바리들이여. 무사히 제대할지어다!

                                                                                                           김희준 (독산1동)
필자는 독산1동에 거주하고 있으며 재빈, 재은, 재령 3남매와 함께 성장일기를 쓰고 있는 아빠입니다.


아빠가 되어 아들녀석을 키우는 재미는 여러가지 있겠지만은 그중에서도 같은 남자로서의 연대감을 형성해 나가는 것이 적잖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 과정에서 제일 쏠쏠한 맛을 주는 것은 녀석을 데리고 목욕탕에 가는 것이다.
몇 달에 한 번씩 가면 그때마다 등을 밀어주는 고사리 손의 힘이 그 전보다 조금씩 세어졌음에 남몰래 흡족해하며 여기저기 몸을 살펴가며 제대로 커가고 있는지 점검하는 시간이다.
동네에서 2km 떨어진 곳에 구로공단역 바로 옆에 가보면 00 해수탕이라고 지하에 있다.
결혼 전에 이 동네 살 적에 혼자서 많이 가기도 했었고 동해에서 바닷물을 직접 떠와서 큰 트럭이 밤새 왔다갔다 하는 걸 평소 봐왔던 터라 수질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는다. (이것저것 의심하다 보면 끝도 없는 것이다. 대충 살자. 좀!)
아이를 데리고 처음에 갔을 때는 도무지 아빠 곁을 떠나려 하질 않아 건사하기도 힘들었고  한번은 미끄러운 바닥에 넘어져 욕탕이 쩌렁쩌렁 울어대는 것을 달래느라 진땀 빼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자기 옷도 챙겨 스스로 챙겨 입고 수건으로 머리도 탈탈 털어내고 드라이기는 환경오염 때문에 사양하는 듬직한 아들이 되었다. 특히 목욕을 마치고 올라와 1층에 있는 롯데리아에서 엄마 몰래 맛있는 정크푸드를 나눠먹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양념이기도 하다. ㅋㅋ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전날 저녁부타 자기도 오빠 따라 가겠다며 설쳐대는 다섯살난 딸래미까지 동반하고 해수탕으로 향한다. 딸을 데리고 가는 건 아무래도 조만간 마감을 해야 할 성 싶지만 아직은.. 아직은 괜찮다고 본다.
여기는 조그맣게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전용 탕을 만들어 놨는데 둘이 아주 신이 났다. 둘째는 '빨래놀이'를 한다며 바닥에 수건을 펼쳐놓고 조그만 손으로 주먹방망이를 만들어 탁,탁, 쳐가며 빨래에 열심이다. 아들녀석도 오랜만에 와서인지 재미있나 보다. 여기 저기 들어가 보고 동생도 잘 챙기고 아빠는 여기서 좀 쉬고 있을게...
목욕을 마치고 아이들을 대충 닦아내고 체중을 재어 보았다. 아들은 131cm에 28kg.. 또래 평균키보다 10cm정도 더 크다. 어디 가면 3,4학년 소리 들으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체중이..........무려.....82.5kg 이었다. 80을 돌파한 걸로 모자라 이제 좀 있으면 85를 넘볼 기세다. ㅠㅠ
키가 182 이니 적정 체중은 75~77 정도이다. 80 넘어가면 몸이 둔해지고 피로회복도 쉽지 않다. 기분도 안좋다. 게다가 살이 찌면 나이가 더 들어 보인다. 나이듦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나이보다 늙어보임이 건강의 적신호이기에 무시할 수 없다.
암튼 결론은 it's time to go! ...
"올해가 아직 많이 남았고 신에게는 6개의 달이 남아 있사옵니다. 모든 적들을 배(?)에서 베어내는 그 순간까지... 열심히 뛸게여..ㅎㅎ"

김희준 (독산1동)

 

필자는 독산1동에 거주하고 있으며 재빈, 재은, 재령 3남매와 함게 성장일기를 쓰고 있는 아빠입니다.


 

 


아빠가 쓰는 삼남매의 성장일기

서울특별시 상수도사업본부.

나의 네번째 직장생활의 첫 발령지였던 그곳.. 시청에서 발령장을 받고 각 사업소에서 온 차를 타고 내가 도착한 곳은 신대방동 보라매공원내에 위치한 남부수도사업소였다. 당시는 신대방동에 살던 때였고 집에서 걸어서 10분거리였는지라 아침마다 보라매공원을 가로질러 출근하는 길은 긴장되면서도 좋기만 했었다. 백수생활 쫑내고 그럴듯한 직장 다니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처음 사업소로 출근한 날은 아주아주 추웠던 2월의 어느 날이었다. 하지만 17만 평 보라매공원의 가장 안쪽에 있는 숲으로 둘러싸인 청사 2층의 행정지원과 사무실은 따뜻했으며 책상이며 캐비넷이며 화장실이며 죄다 환하고 깔끔했고 무엇보다 좋았던 건 온통 숲으로 둘러싸인 창밖의 풍경이었다. 비가 그친 아침엔 숲속에서 부는 바람이 정말로 싱그러웠다. 그때도 좋았는데 지금은 270만평 대공원의 한복판에서 일하고 있다. 무슨 복인지···.

최첨단 인텔리전트 빌딩이었지만 독 오른 눈빛으로 서로 못잡아 먹어 안달이었던 첫 직장에서의 기억을 떠올려보며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몽롱하기조차 하였다. 처음에는 말이다···.
얼마 후 내게 주어진 업무는 '심사'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용어야 거창하지만 내용은 간단하다. 상수도 요금 조정 및 민원 처리와 체납징수 정도로 요약될 수 있는데 우리 팀은 관악구를 담당하였고 직원마다 3~4개 동씩 맡는 식이다. 내게는 4개 동이 주어졌다.

수도요금 혹자는 말한다. 계량기에 나온 숫자대로 요금부과해서 돈받는 건데 무슨 할 일이 있느냐고 말이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말이야 맞는 말이다.
검침원들이 가져온 숫자를 시스템에 입력하고 전월사용량과 비교 분석해서 이상 징후 있는 곳은 고지 전에 사전체크하고 그야말로 누워서 떡먹기 수준의 업무난이도이다. 그런데 그게 마냥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안해본 사람은 절대 모른다.  출근해서 자리에 앉는다. 앉자마자 전화벨이 울린다. 다짜고자 욕설이다. 무조건 죄송하다고 일단 사과하고 화를 어느 정도 풀기를 기다렸다가 대화를 시도한다. 물론 대부분은 이유 없는 억지스런 주장이다.
하지만 무조건 사과하고 이해시켜야 한다.  시끄럽게 화내는 사람도 있고 조용히 화내는 사람도 있다. 찾아와서 그냥 하염없이 우는 사람도 있다. 사무실에서 탁자 박살내는 것도 봤고 멱살잡는 것도 봤고 어깨들이 찾아와 분위기 잡는 경우도 봤다.

그야말로 별의별 일이 다 벌어진다. 그냥 언성 높이는 정도는 아무도 관심을 안가진다. 신규 여직원들이 이 자리에 배치되면(여직원에게 이 업무 별로 맡기지도 않지만) 대개는 며칠 안에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흘리곤 한다.
집에서 평생 금이야 옥이야 곱게 자란 이들에게 갑작스런 욕설세례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그 자체 아니겠는가.
남녀차별은 옳지 않지만 그때 내 생각은 여직원들은 웬만하면 이 일 안시켰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남자들이야 군대에서 온갖 욕설과 구타에 단련되었으니 뭐 그려려니 하지만 여직원들은 좀..그런데 사람이 부족하니...
나의 업무의 또다른 절반은 체납요금 징수였다. 그게 뭐냐면.. 밀린 수도요금 찾아가 받아내는 것이다. ㅎㅎ
가정집도 가고 냉면집도 가고 목욕탕도 가고 텅 빈 사무실 문 붙잡고 ‘여기 주인 어딨어요.’ 수소문도 한다. 계속 다니다 보면 현지 거주민보다 동네지번 빠삭하게 안다는 장점도 있다. 하루는 난곡 근처 동네를 돌아다니는데 어떤 아줌마들이 반갑게 말을 건다. 알고 보니 얼마 전에 사업소로 민원 제기하러 왔던 그 분이다. ‘아, 딸래미 데리고 시장 가시네요.. 저 일 보러 나왔어요. 그럼 잘 가세요.. ’공무원돼서 이런 일도 하는구나. 참 폼 안나는 일이었지만 별 수 없다. 내게 주어진 일이니까.

그 남자의 눈빛
아직도 생각나는 그 남자의 눈빛. 사건이 벌어진 장소는 관악구 OO동 언덕배기의 빌라촌이었다. 좁고 낡은 빌라들이 비탈진 경사면에 옹기종기 붙어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 동네로 체납징수하러 가는 날. 미리 지도에 가야 할 집들을 체크하고 동선을 설정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혼자서 말이다. 단독플레이는 위험한 경우가 있어서 삼가하는 편이지만 다들 바쁘고 방문 예정지가 모두 가정집인지라 홀가분하게 가방 하나 둘러메고 길을 나섰다. 비탈길을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올라간다. 아유 더워 죽겠네..
OO빌라 301호. 문앞에 선다. 대충 보아하니 방 2개에 화장실 하나 있는 좁은 빌라이다. 이 집은 또 어떤 사연이 있을까.. 하며 벨을 눌렀다.

문이 열리고 내 또래정도로 보이는 한 남자가 나온다. 열린 문 틈으로 집안이 보인다. 집안 분위기는 딱 예상했던 그대로이다. 정중한 인사멘트를 날리고 내역서를 보여주며 이래저래 해서 왔으니 납부에 협조바란다는 말씀을 드리는데.. 아이들 목소리가 들린다. 일부러 보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남자는 아이들과 라면을 끓여먹고 있던 중이었나 보다.

남자는 나를 쳐다본다. 그 눈빛에서.. 나는 나를 보았다. 일년 전의 나를 보았다. 직장을 잃고 아내는 돈 벌러 나가고 백수남편은 집에서 아이들과 라면을 끓여 먹는다. 라면그릇은 아마 일자리 알아보던 벼룩시장으로 받쳐 놓았을 것이다. 불과 얼마 전의 나의 모습이었다.
백수가 아닐 수도 있잖냐고? 과연 그럴까? 직장이 있는, 가장의 역할을 다하는 남자의 눈빛은 그런 눈빛이 아니다. 초조함과 허탈함과 좌절이 복합된, 마음이 지쳐보이는 그의 힘없는 눈빛에서 나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내역서를 일단 주고 전부는 아니래도 일부라도 납부하시라는 말만 남기고 뒤돌아 설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곤 속으로 얘기했다.
'힘내쇼.. 아이들이 있잖소..' 이렇게 일하니 체납실적 꼴등은 항상 내 몫이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뭐..
 몇 년이 흐른 지금, 그 남자는 지금 뭐하고 있을까... 아이들 데리고 호기롭게 '오늘은 아빠가 쏜다!'라고 할 수 있는 거죠? 그쵸? 홧팅!

김휘준 (독산1동)


 

아빠가 쓰는 세남매 성장일기 여덟번째 이야기

헌책방에 가고 싶다는 아들의 민원이 아침부터 접수되었다. 갑자기 웬 책방인가?  하긴 모처럼 쉬는 일요일. 할 일도 마땅치 않으니 가족과 함께 시간을 적당히 보낼 수 있는 이벤트를 알아서 제안해 주니 고맙기도 하고 새삼 책의 바다에서 몇 시간 허우적댈 생각을 하니 기대도 되고 해서 햇살이 저물어가는 오후 무렵 다섯 식구가 총출동하여 신림동으로 향한다. 


아들이 말한 헌책방은 '도동고서'라고 신림9동(대학동이라 개명했다고 함) 고시촌 들머리에 있는 꽤 큰 규모의 헌책방이다. 아는 사람은 다들 아실터.
첫째와 둘째는 엄마와 함께 아동서적 쪽에서 책을 고르고 나는 막내를 안고 여기저기 둘러본다. 눈에 들어오는 책을 손에 쥐고 몇 장 넘기자니 세째 아기는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바닥에 있는 책을 펼치고 만지작대다가 서가옆에 쌓여있는 책들을 하나하나 집어 던지고 있다.ㅠㅠ 

워낙에 책들이 두서없이 쌓여있던 지라 무너지기라도 하면 책들에 깔려 다칠 것도 같다. 주섬주섬 바닥에 있는 책들을 정리해주고 아기를 안을 수 밖에 없다. 서점의 직원분들은 정리하느라 바쁘고, 근처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손님들은 수시로 드나들고, 아기는 서가의 책들을 하나씩 꺼내서 내동댕이치고, 급기야  어떤 손님은 좁은 통로를 지나다가 워낙 조끄만 아기를 발견못하고 넘어질 뻔하기도 하고… 소리없는 아비규환이다. 내가 선택한 것이기에 나는 책도 지켜야 하고 아기도 지켜야 한다.  그 와중에서 선택한 한권의 책. '밥벌이의 지겨움' 김훈.  그 안의 몇몇 문장이다.

'아, 밥벌이의 지겨움! 우리는 다들 끌어안고 울고 싶다…(중략)'
'전기밥통 속에서 밥이 익어 가는 그 평화롭고 비린 향기에 나는 한평생 목이 메었다. 이 비애가 가족들은 한 울타리 안으로 불러 모으고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아 밥을 벌게 한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 끼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이것이 진저리 나는 밥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근로감독관들아, 제발 인간을 향해서 열심히 일하라고 조져대지 말아 달라. 제발 이제는 좀 쉬라고 말해 달라. 이미 곤죽이 되도록 열심히 했다….(중략)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돌아오는 길. 입맛도 없고 살이 빠져서 고민이라는 부인님을 위해 신대방동 사무실 근무 시절 단골 맛집이었던 보라매역 근처 '서일순대국'을 들러 영양관리를 시켜주었다.
근데 정작 먹으라는 분은 입맛이 없다 하시는데, 막내 따님은 밥풀떼기를 사방팔방에 뿌려가면서 허겁지겁 숟가락을 놀리며 때로는 자지러지게 울어도 주면서 신나게 먹는다. 잘 먹으니 일단 좋다. 내 자식 맞군.

원래 순대국은 소주한잔 걸쳐주면서 먹어줘야 제 맛인 법인데. 흑흑… 하지만, 아이 셋을 앉혀두고 먹을 것 챙겨주다 보면 정신이 없다. 술 안먹어도 취한 것 같으니 말이다.
이렇게 또 한끼를 때운다. 김훈작가의 글을 읽어 보니 대책은 없다는 것이고 내일의 끼니가 또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우리는 다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잠자리에 들 뿐이다. 내일의 끼니를 생각하면서….

김희준 (독산1동)


 


제목 : 갈매기의 선물!

이틀 연속 회식일정을 마치고 널부러져 있는 휴일 아침이다. 조개구이를 진작부터 먹고 싶었다는 와이프의 교지가 아들을 통해 전해졌으니, 별 수 없이 길을 나선다. 사실은 나도 가고 싶었어..라는 비굴한 멘트와 함께..ㅠㅠ


목적지는 영종도이고 새로 생긴 인천대교를 거쳐 가보기로 하였다. 주말이었지만 교통흐름은 원활하였고 덕분에 시종일관 120을 달리는 거다. 160정도는 밟아줘야 스트레스 날라가는데.. 가족을 위해 살살..


인천대교 진입하는 지점에서 그 거대한 구조물을 실제로 보니 그 규모가 정말 놀랍기만 하다. 이런 기술이라면 세상에 못할 것이 없겠구나... 인간의 자만심이 바벨탑을 쌓기 전에는 충족이 안되겠구나...토목으로 쌓은 나라 토목으로 망하려나.. 수리수리마수리~~


다리 형태는 사장교이니 줄에 매달린 형국이렸다. 운전을 하며 옆을 바라보니 해면에서 최고 80m 상공을 달리는 것이 마치 하늘을 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사장교 구간을 지나 내려가는 길... 영종도에 진입하여 무의도 방면으로 빠지니 잠진도라는 조그만 섬으로 연결된 다리를 지나서 갑자기 여객터미널이 나온다. 얼결에 표까지 사게 되었다. 일단 여기로 진입한 차들은 차표까지 사게 유도한다. 뒤에서 계속 차가 들어오니 빼기도 난감하고 이래저래 2만원 뜯기는 거다. 어떻게든 외지인의 지갑을 털어보려는 얄팍한 상술이 엿보여 기분이 심히 꿀꿀하다.


배가 들어온다. 차들이 줄지어 내려오고 사람들은 떼지어 가방을 둘러 메고 왁자지껄 선착장으로 걸어온다. 호각소리가 나고 이젠 올라가는 차들과 사람들의 차례이다. 잠진도로 가는 뱃길은 멀지 않다. 갈매기들은 백만년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익숙한 자세로 배와 속도를 맞춰가며 사람들 주변을 맴돈다. 이런 장면을 놓치기 싫어 카메라를 한손에 들고 바닥에서 주운 새우깡 조각을 들고 갈매기를 불러본다. 왼손의 새우깡을 향해 접근하는 갈매기의 눈빛을 주시하며 녀석의 부리가 최대한 열리는 그 순간을 ‘찰칵’ 카메라에 담았다. 갈매기도 긴장했는지 새우깡과 함께 손가락도 물어버리고 날아가 버렸다.

아유 아파~~ 손가락도 먹이로 보였나보다. 하지만 날개 한쪽이 약간 잘린 걸 제외하고는 의외로 좋은 구도가 잡혔다
.


(나중에 이 사진은 경향신문 사진공모전에서 월간최우수작으로 선정되어 '니콘S6000' 이라는 폼나는 디카로 환생하였다. 갈매기가 물어다 준 선물이겠지..ㅎㅎ)


출발하고 배의 방향만 바꾼 거 같은데 벌써 도착했다며 호루라기 불어대며 얼른 차 빼라고 난리다. 이런 된장. 이정도 거리면 다리가 생길 법도 한데...삽질공화국이니 조만간 공사하겠지... 집에 와서 검색하니 안그래도 공사일정 잡혔단다. 2014년 완공예정이라고..ㅋㅋ 하지만 다리 생겨도 다시 가고 싶지는 않다. 무의도란 곳에 내려 보니 이 동네도 웃기는 거다. 해수욕장이 두 개가 있고 이 중 하나는 유명한 실미도 해수욕장인데 중요한 것은 두 개의 해수욕장 모두가 돈을 내야지만 입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언제부터 해수욕장같은 공공재도 돈을 내야지만 입장할 수 있는 사유물이 되었단 말인가? 무의도는 지형이 이상해서인지 해수욕장 아니면 바다구경을 도보로 할 수도 없다. 차에서만 구경하다 나가야만 한다. 실미도 해수욕장 입구에서 돈내라는 팻말을 보고 그냥 차를 돌려 나왔다. 잠시 지켜보니 방문하는 차 몇몇도 나처럼 차를 돌리는 모습이다. 돈까지 내면서 보는 건 오버지.. 결국 무의도에서는 아무 미련없이 그냥 다시 배를 타고 나왔고, 어느 작은 포구에서 아이들을 풀어놓았다. 여기가 차라리 낫네...ㅎㅎ


집으로 가는 길.. 인천대교는 여전히 바다를 가르며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 위를 달려 편하게 집에는 간다지만, 웬지 마음이 불편하다.


"이렇게 편해지면 지구는 누가 지킬까?"


김희준(독산1동)


아들에게 농구강습 중

올해 10살이 되어 십대자녀 학부모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부여해준 아들녀석은 축구선수가 꿈이다. 방과후 축구교실을 열심히 쫓아다니며 까맣게 그을은 아들의 얼굴은 보기만 해도 파릇파릇한 생기로 휴일이면 아빠와 운동장에서 뛰어 놀기를 원한다.

일요일이다. 다행히 우리 집 바로 앞에 초등학교, 중학교가 있어 뛰어 다닐 공간은 충분하다. 나른한 오후나절에 졸리는 삭신의 유혹에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데 축구공을 들고 서성이는 아들의 간절한 바램이 온 몸을 통해 전해져 온다. 에구... 오늘 녀석에게 점수 좀 따볼까.. ㅎㅎ

“아들아, 아빠랑 축구하러 가자” 라는 한 마디에 녀석은 펄쩍펄쩍 뛰며 번개같은 속도로 옷을 챙겨입고 그 모습을 본 둘째도 질세라 자기도 가겠다며 신발부터 챙긴다.

축구공을 들고 도착한 곳은 집앞의 중학교 운동장. 그리 넓지는 않지만 다행히 텅비어 있어서 우리 셋이 뛰어놀기에는 최선이다. 옆의 초등학교와 다른 점은 농구골대가 많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 모습이 나의 농구본능을 자극한다. 축구에 목마른 아들의 갈증을 30분 정도 풀어주고 농구공은 없지만 축구공을 손에 쥐고 농구를 시작하겠노라고 선포하니 아들은 축구를 더 해야하는데 하더니 그래도 괜찮다며 동의해 준다.

농구를 해본지 몇 년이 지난 지도 모르겠다. 군대 있을 때는 입에 거품물 정도로 한 여름 뙤약볕에서 농구를 했었는데 사회생활 하다보니 거리가 멀어진 것이겠지. 일단 아빠의 위용을 자랑하기 위해 레이업슛 시범을 보여주기로 하였다.

‘자 이만큼 거리를 두고 바운딩하면서 골대 밑에서 뛰어 오르며 넣는 거야, 아빠 하는거 잘 봐라..“


아들과 딸이 지켜보고 있다. 툭툭 공을 튀기며 골대 근처로 접근하는 순간, 발이 엉킨다. 스텝이 꼬인다. 공이 손의 지배를 벗어나고 있다. 몸뚱아리는 균형을 잃고 속도를 못이겨 앞으로 전진만 한다. 공은 어디론지 사라져 버리고 나는 골대 뒤 화단으로 돌진해서 거의 넘어질 뻔 하였다. 이런...

"하,하,하!!!” 한바탕 웃음으로 위기를 무마하고 재시도 해보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이거 자식들 보기 민망하다.

“아빠 괜찮어.. 멋있어..엉” 아들의 위로에 그만 다리가 풀릴 지경이다.

열 번 정도를 시도한 끝에 몸의 기억회로가 재생되기 시작한다. 공이 의도한 지점으로 제대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 그렇지 암. 아빠를 보라고..ㅎㅎ
아이들과 함께 한 일요일 오후는 그렇게 끝났다. 신이 난 아빠는 오늘 농구공을 주문하며 다음 주를 기약해 본다. 그런데 어떡하지? 이번 주말은 근무해야 하네..엉엉.

김희준(독산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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