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상담센터가 만난 세상- no. 135


진부(陳腐)는 사상, 표현, 행동 따위가 낡아서 새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문자를 뜯어보면 펼 진(陳)에 썩어 악취 날 부(腐)자입니다. 어원을 설명한 것을 보니 고기 먹기 어려운 시절에 고기를 부의 상징으로 알고 먹지도 않고 고기 자랑을 하다 고기가 썩었는데 그 썩은 내도 맞지 못하고 썩은 고기를 자랑하는 꼴을 진부라고 합니다. 


참신(斬新)은 새롭고 산뜻한 것을 이릅니다. 이 단어의 문자를 뜯어보면 벨 참(斬)에 새로울 신(新)입니다. 벨 참자를 분해하면 차거(車) + 도끼근(斤)입니다. 모두가 죄인들을 처벌하는 형벌도구라 합니다. 진부한 것을 도끼로 베어 내는 것이 참신입니다. 


우리는 지금 진부를 찍어 참신을 만드는 역사적 격변의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격변은 낡은 것이 제 몫을 다하고 수명을 다했다는 것이고, 새로운 것이 마구 움터나는 시기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억눌린 곳에서 가난하고 고통 받은 이들이 새로운 세상을 향해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득권을 누리는 이들이 우왕좌왕(右往左往)에 좌고우면(左顧右眄)하는 시기이며, 자꾸 진부한 과거로 머물게 하려는 무수한 음모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 민(民)은 과거와의 단절에 예민해야 합니다. 과거는 정체입니다. 정체는 종종 달콤한 휴식과 게으름의 편안을 줍니다. 휴식과 편안함은 강력한 유혹입니다. 나아감과 고쳐감에 대한 피곤을 눅이는 강력한 힘입니다. 이것이 수구보수정치의 토대입니다. 수구(새누리당)는 아예 어제로 현실을 돌리려 하다가 역사의 몽둥이를 맞고 있습니다. 보수 야당은 민심의 힘을 주권자의 민주주의를 대리한다는 여의도에 가두려 합니다. 파사현정(破邪顯正)의 혁명적 힘을 두려워합니다. 이 모두가 진부한 것들입니다. 대리(대의) 민주주의는 누가 내 대신 밥을 먹고 치료를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 배가 부르고 내 병이 낫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기고 있습니다. 낡은 것들이 자기 붕괴하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살아 있는 역사책의 주인들입니다. 불의에 대한 분노가 새로운 세상을 열고 있는 가운데 다시 한 번 우리의 거대하고 숭고한 힘을 되돌아보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힘은 쪽수입니다. 십만이 백만이 되니 꽁무니만 쫓던 보수 야당도 퇴진 탄핵의 길로 나섭니다. 백만이 천만이 된다면 경찰 차벽이라는 성벽에 숨어 고집을 부리는 청와대 요물정권도 성경 속 여리고성처럼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질겨야 합니다. 진박 공안 편집증 김진태 따위가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고 우리를 개돼지 취급하며 비웃었습니다. 그러자 춘천의 시민들은 꺼지지 않는 LED 촛불을 들었습니다. 광주는 횃불을 들었습니다. 등잔불은 바람에 꺼지지만 들불 산불은 바람을 타고 모든 장벽을 태우는 법입니다. 문제는 지구력입니다. 헌정을 농단하다 청와대에 농성 중인 박그네 정권의 무기는 우리가 양은 냄비처럼 달아올랐다 곧 식을 것이라는 우리 안의 ‘지침과 포기’를 노립니다. 


요구가 높아야 합니다. 속담에 ‘빵만을 원하면 빵도 얻지 못한다. 빵 이상을 원해야 빵이라도 얻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딱 맞는 경우입니다. 박그네 정부가 아니라 박그네 정부를 만들고 즐긴 새누리당과 그 정치세력들, 그 정치의 흉기가 되어 민주주의를 질식시켜 온 경찰 검찰 판사들, 백만원 주고 백억 이득을 취하면서도 희생양이라 말하는 재벌들에 대한, 그들이 남긴 반인간적 반노동적 개악 법 제도 정책들에 대한 근본적인 수술을 가하자는 요구가 커지고 깊어 져야 합니다. 우리의 요구가 참신하지 못하고 진부한 것으로 남는다면, 우리의 요구가 전진이 아니라 정체된다면 결국 어둠을 발본색원하지 못해 역사를 고인 물로 만들 것입니다. 


우리의 촛불은 위가 아니라 앞을 비춰야 합니다. 투쟁을 합법의 틀로 가두면서 그것을 비폭력 평화라 꾸미고, 수구와 반동의 폭력에 대한 분노를 불법 폭력으로 돌리는 것은 전제된 폭력에 눈감는 짓입니다. 경찰이 쳐 논 차벽 자체가 불법입니다. 법원이 인정한 행진도 차단하는 경찰이 불법입니다. 그것은 한사람을 지키기 위해 5천만을 적대하는 거대한 폭력입니다. 이 폭력은 일인을 위해 민주공화국을 포기한 사유화된 권력의 실체입니다. 그런데 그 폭력에 평화라는 꽃을 붙이는 것은 기막힌 허위요 기만입니다. 오직 권력을 고스란히 먹겠다는 또 다른 기득권의 탐욕스런 요언입니다. 한국 헌법은 3.1운동과 4.19정신을 전문에 담고 있습니다. 반제 자주 반독재 민주를 위해 목숨을 걸고 감옥을 마다하지 말라는 것이지 무슨 비폭력 정신이 아닙니다. 여야 기득권들은 오직 높은 권좌로 오르려 합니다. 우리 민(民)은 위가 아니라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광장에서 최후의 압제자가 도망칠 때까지 모든 선을 넘고 모든 벽을 부숴 나가야 합니다. 


이번 주에 서울에서만 2백만을 만듭시다. 그 중심에 진부가 아니라 참신이 서게 합시다. 전국에서 천만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재벌들만 웃는 사회, 여전히 분단과 증오로 살이 찌는 나라, 1번 찍고 후회하고 2번 찍고 후회하는 정치를 확 뒤집는 진정한 역사를 참신하게 만들어 나갑시다. 그러기 위해 우리 안에 있는 잘못된 피해의식, 독박의식, 불안과 공포를 이겨야 합니다. 우리가 백만 민중 속에 설 때 우리는 낡은 정권과 그 체제를 깨는 것과 더불어 우리 안의 이기와 공포의 낡은 의식도 함께 깨나가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우리 안의 비겁과의 단절이요 전혀 새로운 세상으로의 전진입니다. 백만이 나요, 내가 백만인 경험을 품고 5천만 민중이 나요 내가 전체 민중인 저 곳으로 한발 더 나갑시다. 제발 죽 쒀 개주지 말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읍시다.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박근혜대통령이 기자 회견을 자청하였다. 국정농단 주모자들과의 공모 혐의로 이제 검찰의 대면조사 요구를 받고 있던 중이라 정치권은 물론 세인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회견 요지는, 국민에게 사과를 할 때 제기했던 국회 추천 총리를 선임해 달라는 것이고, 약속대로 총리에게 조각 구성 등 헌법이 규정하는 권한에 더하여 내치와 외치에 대한 대통령의 권한까지도 위임하겠다고 하며, 더하여 특검의 조사에도 성실히 임하겠다한다. 

먼저 책임총리 국회 추천 제의를 거절했던 야당 정치권은 이후 대통령의 버티기 작전이 시작되면서 당혹스러워 했고, 탄핵 추진에 있어서도 야당 간 엇박자를 내는 등 대통령 퇴진을 위한 시스템적 불안정한 행보를 하였으며, 야당이 합세하여 탄핵을 할 것을 결정했지만 그 후의 절차 곧 대통령 권한 대행자가 되는 현 국무총리에 대한 불신으로 난감해 하던 터라 대통령의 제의를 논란 없이 수용함으로 후임 총리 인선 절차를 시작하였다.   

책임 총리 후보를 두고 여·야간 의견의 불일치로 다소 소란스러웠으나 사태가 사태니 만큼 여·야는 한 발씩 양보하여 양쪽이 공감하는 중립적인 인물을 선정하여 대통령에게 임명을 요구하였고, 대통령은 약속대로 군말 없이 이를 수락함으로 새 총리 체제가 출범하였으며, 새 총리는 정치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중립적이면서도 전문성을 갖춘 내각을 구성하는 것으로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않던 상황이 전개되었다. 새 총리 체제가 출범하자 대통령은 다시 기자회견을 요청하고는 그간의 청와대 참모들의 국정 농단 등 죄과에 자신이 연루된 사실들을 구체적으로 밝히며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자 대통령직을 사퇴하겠다고 선포하였고, 대통령직을 놓은 만큼 그 동안 누렸던 헌법적 특권이 소멸됨을 스스로 인정하고는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의 조사에 성실히 임하겠다고 하였다. 

세상은 깜짝 놀라며 한편은 대통령의 비리를 질책하면서도 다른 한편 비록 잘못을 하였지만 책임지는 대통령의 용기 있는 모습에 찬사를 보내었다. 국내 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한 것은 물론 외국 언론들도 빅뉴스로 취급하였다. 그 동안 비난 일변도로 치달으면서 당장에라도 자리에서 끌어내려던 민심은 대통령의 결단에 찬사와 함께 촛불을 내러놓고 대신 연민을 표하는 모습들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외신은 ‘위대한 대한민국’이라는 표현을 하였다.”

작금의 상황이 아주 어지러워서 잠깐 소설을 써 봤다. 이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은 대한민국 국민 다수의 가슴에 희망을 던지는 상황의 전개가 아닌가!

물론 이런 상황의 기대는 어렵다. 우선 당사자에게 그런 기대를 가질만한 신뢰를 두기가 어렵다. 다시 말하면 그럴만한 그릇이 아닌 것은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행보가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런 한편, 그를 공격하는 측에도 유사한 상황 전개를 끌어낼 수 있다는 기대를 갖기가 어렵다. 입장만 다를 뿐 공격을 받고 있는 자와 다른 점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들 대부분은 외형상으로는 나라를 걱정하는 것 같지만 덕분에 그들의 입장을 유리하게 전환함으로 차기 권력자로 부상하고자 필요한 일만 하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그렇다면 현재 상황에 대해 국민들은 어떤 모습인가? 우선 보이는 것, 그러니까 상당수의 국민들의 주조는 무조건 대통령의 퇴진이다. 대통령으로서의 자질부족을 이유로 내세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아예 범죄자로 보는 수도 적지 않다. 그런가 하면 그냥 싫다는 수도 만만치 않다. 평소의 그의 삶에 대한 반감 때문인가 보다.

가치관의 다양성을 가진 인간사회에서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는 판단은 오류이므로 민심을 따지고 싶지 않다. 인간의 가치관을 함부로 구획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과오를 저질렀고 그것은 그의 위치 때문에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엄청난 범죄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그가 저질은 과오는 일반인이라 해도 평범하다 할 수 없는 범죄인데 하물며 대통령이라는 직분에서 저질렀으니 그 정도는 형량하기 어려운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지금 세상 사정이 이렇다. 그렇듯 현재와 같은 흐름에서는 이 혼란의 끝은 긴 시간을 요할 것으로 보인다. 공격하는 쪽이나 공격받는 쪽이나 결정적일만한 어떤 장치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애꿎은 국민들만 추운 날씨에 촛불행사를 계속해야 할 판이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정형화된 조직이 없는 국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지금으로서는 촛불을 드는 일 외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지 않는가!

그렇다고 국민들에게 이 이상의 행위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목적을 달성하게 하는 동기로 작용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헌법적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 결과에 가치를 둘 수 없다. 목적이 숭고하다 해서 수단 강구를 함부로 해서는 안 되지 않는가?

결론을 말한다. 정치권은 국민들의 촛불에 고무되어 황홀감에 빠져 허우적대지 말고 하루 빨리 뜻을 모아라. 그래서 가장 이상적인 방향 곧 헌법적 절차인 탄핵을 행동하라. 그것이야 말로 헌정질서를 지킴으로 민주헌정국가로서의 위상을 지키는 것이다. 제발 여야로 편을 갈라  싸움박질 하지 말고 오로지 나라와 민족을 위한다는 자세로 정파적 이익도 명분도 접어두고 혼연일체가 되어 한 목적을 위한 한 방향으로만 나아가라. 지금 나라는 경제사정에 더하여 외교 국방에 이르기 까지 몹시 어려운 사정임을 명심하라!

국민들은 이제 새로운 의미의 촛불을 밝혀라. 그것은 질서에 의한 대통령의 퇴진이 되도록 정치권에 요구하는 것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기왕에 한뜻을 가지기로 한 정치권들이니 정파적 이해를 떠나 한 마음이 되어 오로지 한 목적만을 위해 응집토록 독려하는 한편 목적을 달성될 때 까지는 결코 다른 길로 가지 않도록, 촛불을 더욱 밝게 올려야 한다.

탄핵 후의 일로 정치권도 국민도 미리 걱정을 하면서 서로 당기고 밀고 하지를 말라. 시간을 끌면 반동들이 작동할 수 있다. 이 땅에는 아직도 비민주적이고 비정상적인 수구세력들이 여러 분야에 무수히 산재하고 있으며, 그들은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쓸 수 있는 에너지를 풍부하게 가지고 있음을 유의하여야 한다. 

단언하건데, 권한 이양을 받은 국무총리는 그가 누구이던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진리를 밝히고자 높이 치켜 든 국민들의 촛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비록 미덥지 못하지만 현재의 각료들도 나름의 경륜과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만큼 현 사태에 따른 상황인식을 함으로 경솔하거나 서투른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이성을 찾아 이 환란의 시간을 견뎌냄으로 전화위복의 계기로 만들자. 오천년 역사를 가진 이 민족에게 지금과 같은 간난(艱難)의 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 시간들 속에서도 한강의 기적을 일으켜 세계의 역사 속에 뚜렷한 지표를 펼친 대한민국이 아닌가! (♣2016.11.25.)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해 

다양한 마을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재승박덕(才勝薄德)이라는 말이 있다. 재주는 능한데 덕이 없어 사람에게 유익한 존재가 못되는 이를 두고 말한다. 돈과 권력의 힘을 믿고 횡포를 부리다 망한 이들에게도 붙여지는 이름이다. 87년 민주화 시민항쟁을 거치면서 한국은 군사독재를 물리치고 시민의 민주주의를 쟁취했다. 그 결과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가 만들어 졌다. 그래서 달라진 것 중 하나가 청문회를 통해 고위급 간부가 되는 문제에 재덕을 따지는 절차가 만들어졌다. 기능만 승한 재주나, 권력에 아부하는 능력으로 국가의 공적 책임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성숙한 민의가 반영된 제도요 절차다. 


그런데 이명박 박그네 정부를 거치면서 이런 기준이 시나브로 실종됐다.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는 총칼의 만든 철의 권력이 인사를 만사(萬事)가 아니라 망사(忘死)로 만들었는데 이명박 정부에서 돈이 만든 권력이 인사를 망사(忘死)로 만들다가 박그네 정부 들어서서는 아예 노골적으로 후안무치의 말종들만 등용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이렇게 잘 맞는 것도 희한하다. 일찍이 국제 투기꾼 소로스는 ‘돈은 부도덕한 것이 아니라 무도덕한 것’이라 했다. 권력은 부모 형제와도 못 나눈다고 했다. 그러니 돈과 권력은 부패와 부정으로 간다. 그것을 막는 것은 도덕적 조건을 만드는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과 사람으로 염치와 양심을 갖추기 위한 노력이 동반될 때다.  


사람은 재주만큼 덕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지도자는 재주만큼 덕도 스스로 쌓는 사람을 볼 줄 아는 눈을 갖춰야 한다. 그게 리더십이다. 지혜가 많거나 술수가 능한 것은 재(才)의 영역이다. 많은 사람들은 재를 통한 성공을 부러워하여 재가 곧 덕이라 믿기도 한다. 하지만 달라도 엄청 다르다. 재는 총명함이고 덕은 공평 온화함이다. 재는 수단의 문제이고 덕은 기반이자 목적의 문제다. 


자치통감을 쓴 중국의 사마광은 재덕을 겸비하면 성인, 덕도 없고, 재주도 없으면 어리석은 자, 덕이 재주를 능가하면 군자, 재주가 덕을 능가하면 소인이라 구별했다. 그러면서 인재를 등용하는데 군자를 쓰는 것이 중요한데 군자로서의 인재가 없다면 소인보다 차라리 어리석은 자가 낫다고 말한다. 소인은 재능을 이용해 악행을 저지르고, 그가 저지르는 악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소인의 재주는 재앙이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최근의 장관 등 권력자가 된 이들을 보면 전형적인 소인들이다. 새누리 당이 보여주는 막장 국회의원들의 염치없는 소리들, 그 좋은 머리로 부정부패나 저지르는 판검사들, 그 엄청난 힘으로 권력의 편에 서서 사회적 약자를 괴롭히는 경찰 공권력, 무엇보다 백남기 농민열사에 대한 서울대 병원 정치의사들로 대표되는 지식인들의 패악질.. 어느새 한국은 재승박덕이 지탄의 대상이 아니라 성공의 필수요건이 되었다. 그러니 장관이 되는데 위장전입, 부동산 투기, 별별 불법 행위들이 당연한 듯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외려 뇌물 특혜 각종 부정부패가 능력의 기준이다. 우(牛) 병우, 최(膗) 순실, 진(嗔) 병준, 그리고 백(魄) 선하, 더러운 재승박덕 자들이 지성과 이성과 염치와 양심과 천의(天意)와 민의(民意), 그리고 민심(民心)을 저버리고도, 폭정의 흉기로서 자신들의 재능을 쏟고도 떵떵거린다. 헬조선이란 말이 자학의 말이 아니라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한 말임을 증명한다. 


한국이 염치없는 세상이 된 것의 가장 큰 공헌자는 이명박이다. 그가 “선거 때 무슨 말을 못하냐.”며 거짓을 당연시 할 때 몰염치는 눈을 떴다. 그를 “도둑질 서방질이면 어떠냐, 돈만 잘 벌어 올” 서방으로 여겨 대통령을 뽑는 순간 덕은 장해물이 되었고 파렴치는 성공과 출세의 능력이 되었다. 재승박덕도 아니고 재승무덕이 되었다. 그러니 절로 한국청렴도는 최하위권이다. 물론 그 전에 헬 조선의 기본으로 양심과 염치를 제거한 것은 한국의 비극적 현대사 자체다. 민족 반역자 매국노 친일파는 청산되지 못했다. 그들은 친미파 반공파가 되어 부정과 부패로, 총칼의 억압으로, 특권과 반칙으로 돈과 권력을 틀어쥐고 반공 반북의 칼을 휘둘러댔다. ‘억울하면 출세를 하라, 이긴 놈이 장땡이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돈 벌고 출세한 사람들을 시기하지 말고 존경하라’는 식의 양아치 심보가 체계적으로 세뇌된 역사가 신자유주의를 무도덕한 세상을 만나 음지 상처에 곰팡이 슬 듯 만개한 것이다. 그것이 헬 조선의 본 모습이다.    


사람이 여타 짐승과 다른 점은 지능이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인간의 지능이 덕을 갖추지 못하면 지능의 능력은 사기 협작 범죄의 흉기가 된다는 점이다. 사이코패스가 무서운 것은 그의 지능에 연민과 양심이 소거되어 있기 때문이다. 염치와 양심이 없는 사람은 어떤 짐승 어떤 악귀보다 잔인하고 또 잔인한 존재가 된다. 매일 뉴스에 오르는 엽기적인 범죄나 패륜은 개인의 심성이 문제가 아니라 양심과 염치가 없는 세상이 길러낸 결과물이다. 붕어빵과 국화빵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은 붕어빵이나 국화빵의 결정이 아니라 빵틀이라지 않는가? 재승박덕 재승무덕한 세상에서 개인은 자기와 상관없이 괴물이 되어 진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사람의 길을 포기하는 순간 사람은 사람에게 악귀다. 그런 순간을 조장하고 그런 관계를 증폭하고 이런 사회를 영구화하려는 것 중 하나가 지금 공공노동자들이 파업으로 막고 있는 이른바 성과연봉제다. 협력을 경쟁으로, 동료를 경쟁자로, 관계를 적대 화하고, 삶을 전쟁 화하는, 그리하여 자기도 모르게 자기를 사람에 대해 굶주린 야수로 만드는 체제에 대한 인간적 저항이 공공 화물 노동자들의 파업이다. 안전 사회를 위한 진실을 향한 세월호 유족들의 분투, 국가의 파렴치한 폭력에 맞서 굴하지 않는 백남기 열사 유가족들의 투쟁이 고마운 이유도 헬조선의 패륜 사회를 막는 몸짓이기 때문이다. 돈이 아니라, 광기의 사유화된 권력이 아니라 사람의 도리가 이기는 세상을 만들자. 공자님은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이라 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그 이웃이 있다는 말이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불의에 저항하는 이들을 외롭지 않게 우리가 연대로 그들의 이웃이 되자는 말이다. 그렇게 하자. 당장 연대의 손품 발품을 팔자.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정조임금이 오신다. 조선왕조 임금 중에서 제4대 세종에 이어 바람직한 군주로 후세에 기억되는 제22대 정조 임금이 오신다. 비정상의 세계에서 당신이 겪으신 한(恨)을 상기도 잊지 못해 세상을 두드리러 다시 오시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랴! 당신의 의미 있는 거행의 첫날 쉼 장소인 시흥행궁이 없어져 버렸으니.......,


오는 10월 8~9일 양일간 서울 창덕궁에서 수원 화성행궁까지 7박8일 간의 ‘을묘년 화성원행(乙卯年-1975년, 華城遠行)’을 원형 재현하는 행사가 대대적으로 거행된다. 이 행사는 정조가 평소의 이상(理想)을 현실화 하고자 했던 화성(華城) 곧 수원시가 지금껏 독자적 연례행사로 치르던 것을 이번에는 서울시 및 이웃도시들과 함께 한다고 한다.


이 거행은, 정조임금께서 당신이 품고 있는 국가통치 이념을 드러내고 더불어 세상 보편 가치조차 말살되고 있는 당시의 혼돈 된 사회질서를 바로잡고자 즉위 이전부터 계획하였던 개혁의지의 표명이다. 그렇듯 분명한 목적을 가진 장엄하고도 규모가 큰 국왕의 행차 의식으로 우리 민족은 물론 이를 아는 외국인에게도 깊은 인상을 갖게 하는 역사의 재현이다. 

지난 역사의 한 임금의 행차인 이 의식을 막대한 비용을 들이면서 그것도 여러 지방정부가 함께 참여하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은 역사적 상징을 범국민적 행사로 치름으로 문화국가 대한민국의 위상을 제고하고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함으로 관광한국의 이미지 제고효과에 더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때문으로 이해한다. 

정조가 세자 무렵에서 즉위 이후의 당시 사회는, 정치권력을 장악한 유림(儒林)세력들이 공리공론(空理空論)만 일삼으면서 건설적 변화를 거부하고 임금조차 무시한 채 백성을 수탈하는 가렴주구(苛斂誅求)의 주구(走狗)노릇을 하였다. 정조의 이 거행은 이러한 비인도적 비생산적 세력인 수구(守舊) 세력들을 배척하고 민중을 국가의 구성원으로 예우하는 참 민주주의의 시현을 선포한 위대한 행군이다.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권력지향세력에 둘러싸여 소통 제로가 됨으로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모르고 있는 오늘의 정치현상에 던지는 시사가 그곳에 있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위대한 행사의 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우리 고장 시흥(금천)이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다. 장엄한 그 장정 첫날밤을 챙겨야 하는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역사의 사실은 있는데 그것을 재현할 현장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여간 난처하지 않다. 그 현장에는, 더욱 난처한 사실을 만나게 한다. 시흥 행궁이 있던 공간이 그곳 일대라 짐작되는 유력한 증거물인 천년 은행나무들(세 그루)이 길 가운데와 가장자리에서 자동차 매연으로 신음하며  까맣게 타 죽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 그것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문화를 존중하는 민족으로 자부하고 그것을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이어오고 있으며 헌법에 조차 이를 명문으로 규정하여 국가정책에서 챙기고 있는 문화국가(?)이다. 그런 나라에 숭고한 이상과 철학을 행동한 위대한 역사인물의 행적이 형태는커녕 그 위치조차 모르고 있는 부끄러운 사실이 존재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시흥(금천)에서 만나는 현실이다. 어떻게 이렇게 황당한 일이 있어 오늘을 사는 우리를 한없는 부끄러움에 빠지게 하는가?  

이러한 현상에는 그럴만한 역사의 과정이 있음을 이해한다. 찬란한 문화를 일으켜 민족의 자긍심을 갖게 하였던 조선왕조는 후세에 이르러서 정치권력의 무능으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겨 역사의 유산은 물론 민족의 자긍심까지 말살시켰다. 서방의 도움으로 간신히 해방을 맞았지만 철학 부재한데다 무도하기까지 했던 정치권력들이 대를 이어 40여년을 지배하면서 세상을 온통 물질가치로 오염시킴으로 찬란한 우리 역사의 숨결들은 곳곳에 진한 상처를 입혔는데 오늘 우리가 분통해 하는 이곳 시흥(금천)의 역사도 그 사례의 하나이다.

1970년 초까지 은행나무들이 있는 곳은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이 있었고 주변 일대는 지금과 같은 혼란스런 도시 시설들은 없었는데 행궁의 흔적을 챙기는 것은 고사하고 오늘의 은행나무의 생육 현상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주변일대를 처참하게 망가뜨려 버렸다. 그 역사의 현장에는 문화민족이라면 도무지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현상들, 1000년에 가까운 생육 역사를 가진 은행나무 세 그루가 길 가운데와 가장자리에서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조상들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 선도비들조차 길 가운데에서 온갖 길 먼지와 차량들이 품어내는 아황산가스를 덮어쓴 체 볼품없는 모습으로 서 있다.  

이렇게 황폐한 환경이 될 동안 이곳을 사는 시흥(금천) 사람들, 우리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역사의 숨결을 찾아 문화도시를 만드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물질 풍요만을 추구하는 경박한 시민의식만 있었지 않은가? 시민들이야 그렇다 해도 고장을 잘 가꾸겠다고 자리를 차지한 정치지도자를 비롯한 관료들은 또 어떤가! 

구전(口傳)에 의하면 시흥행궁자리는 시흥5동의 천년은행나무 세 그루가 있는 부근일거라고 하는데 정확하게 ‘여기가 그곳’이라 할 만한 역사의 사실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없다고 한다. 다만 일제 강점기에 행궁은 없어졌고 그들의 지배체제에서 흔적조자 지워지면서 그 공간은 인간의 이기심 충족의 장으로 변하게 되어 오늘과 같은 현상이 있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혼돈의 역사인 일제 강점이 끝나면서 전국 각지에서는 역사 실종을 찾는 운동이 전개되면서 많은 역사 유적들이 더러는 제 모습을 찾고 그렇지 못한 곳은 그 흔적에 의미를 둘 수 있는 역사(役事)들이 전개 되었는데 이곳은 그 공간의 위치조차 알지 못할 정도로 무관심 지대가 되어버린 데는 이곳을 생활공간으로 두고 있는 우리 모두가 통절히 반성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진정을 하고 다시 역사를 본다. 정조 임금은 이곳에 행궁을 두는 것을 기화로 이곳 행정지명을 당시까지의 금천현(衿川縣)에서 시흥현(始興縣)으로 하고 고을 수장인 정6품인 현감을 정5품인 현령으로 승진시켰다. 그가 준비한 역사의 장을 펼치는 첫 기착지로서 의미를 부여한 것 일게다. 

그런데 이제 이곳에서 시흥(始興)은 이제 동명(同名) 등 몇몇 기관의 명칭으로 있을 뿐 역사의 주적(主績)은  딴 곳으로 가버렸다. 시흥시(始興市)를 행정지명으로 곳이 따로 있고 그래서 국가의 행정기록도 그곳에 가버렸다. 이곳 시흥은 이제는 다만 금천일 뿐이다. 물론 금천도 이곳 역사이니 그것이 나쁘다거나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시흥이란 지명과 그것이 이곳에서 가지는 의미가 서서히 퇴색되어가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일찍이 개화한 서방 국가들은 사소한 역사라 하더라도 그것이 가진 의미를 부각하기 위하여 국가예산을 드려 기념의 장을 만들어 잘 보존하고 있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선진국으로 이해되는 것은 앞선 문명에 더하여 문화에 대한 남다른 의식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문화민족이라면 이러한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필요한 행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금 10월 8일 행사에 주민들이 대대적으로 참여를 하자. 비록 시설은 없어졌지만 역사의 사실과 그로 인한 공간은 없어지지 않으니 이번 행사를 계기로 시흥행궁 복원 당위를 범주민적으로 펼칠 명분을 구해내자. 이를 위하여 선행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고사상태의 은행나무를 살리고 길 가운데 방치된 선도비의 갈무리다. 그래서 앞선 사람들이 망가뜨린 역사와 훼손된 문화를 다시 살리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주어 시흥행궁 복원사업 현실화의 토대를 만들자.(♣2016.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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