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박건웅 작가의 <짐승의 시간>이라는 만화책을 읽었다. (故)김근태 의원(편의상 이하 ‘김근태 의원’이라 칭하기로 하자)이 민주화 운동 시절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사건으로 1985년 9월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22일 동안 받은 고문을 그린 책이다. 책이라면 한 페이지를 채 읽기도 전에 잠들어버리는 내 남편이 다 읽을 때까지 화장실도 가지 않고 집중해서 읽은 책이다. 물론 글자만 빼곡한 책이 아니라 만화이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그림과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만화가 나오기 전 <남영동1985>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이 영화를 볼 때 장면 하나하나가 마음을 아프게 찔러대던 기억이 있다. 


 <짐승의 시간>의 원형이랄까. 김근태 의원은 22일간 머물렀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있었던 일을 책으로 내게 되었다. 

 <남영동>이라는 책을 출간한 곳이 ‘도서출판 중원문화’(박정희 유신독재정권과 싸울 목적으로 1978년 설립됨)라는 곳인데 편집장(이을호 씨) 역시 남영동에서 고문을 받았고 발행인(황세연) 또한 한쪽 눈을 실명할 정도로 5.18 당시 고문을 받았던 사람이다. 박종철 군이 남영동에서 고문을 받다 사망한 1987년 이 책이 출간되었으니  또다시 험난한 길을 가야 한다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얼마나 비장하고 큰 결심으로 이 책을 내게 되었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이 책의 발행인은 독자에게 이런 한마디를 던진다.


 “독자 여러분들의 불 같은 정의가 오랫동안 남아있기를 부탁드린다.”

 이 책은 남영동에서의 일과 그 이후 구치소에서 가족과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 그것들에 담겨있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들로 채워져 있다. 내가 기억하는 김근태 의원은 약간 힘이 없어 보이고 목소리도 크지 않은 모습인데 그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만은 굳건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2016년을 겪은 나에게 이 책은 더욱 더 진하게 다가온다. 지나간 수십 년의 세월동안 우리가 아는 사람들부터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하고 간 수많은 민주화 열사들이 목숨 걸고 지켜온 민주주의를 고작 몇 사람들이 뿌리째 흔들어 놓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바라보며 마음  속으로 많이 울었다. 아니 사실은 민주주의를 지키려다 정의롭게 살다가 목숨을 잃은 그 분들의 고통과 수고로움, 그리고 그 가족들의 절규, 나는 백분의 일도 짐작할 수 없는 그 고통... 그분들의 맺힌 한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하지만 눈물이 나오는 그 순간 나는 그만큼의 노력도 없이 그저 받아먹고 있는 이 편한 민주주의의 세상에 살며 너무 값싼 눈물을 흘리고 있지는 않나 하는 미안함에... 눈물 흘리는 것조차 민망스러워 차마 삼키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참 마음 아프게 이 책을 읽었다. 그리고 함박눈이 쏟아지던 날, 남영동을 찾았다. 17년 전부터 다니고 있는 우리 교회가 있는 그 동네. 남영동. 지하철을 타고 집에 올 때면 플랫폼에서 항상 바라보던 그 회색 건물. 남영동 대공분실에... 마흔이 된 이제야 가게 됐다. 이제야 찾아가게 되어 부끄럽다. 그리고 많이 미안해진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찾아간 그 곳. 이제 막 11살 된 딸, 8살 된 아들과 가려니 (솔직히) 조금 무서운 마음도 든다. 그럴 리 없겠지만, 어디서 왔는지, 누군지, 왜 왔는지 물을 것만 같고, 어디 가서 조사받을 것만 같다. 그래서 아는 이들과 함께 갔다. 내가 평소 겁이 없는 인간에 속하는데도 그제야 안심하고 둘러볼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경찰청 인권센터로 바뀐 남영동 대공분실. 김근태 의원이 무거운 중압감을 느꼈다는 1미터 정도 두께의 철문, 그리고 몇 층인지 알 수 없게 건축가 김수근이 일부러 그렇게 설계한 소용돌이 계단, 그리고 겨우 한 뼘 정도 되는 조사실(고문실)의 창문... 그리고 욕조...


 마음을 짓누른다. 아무도 없이 달랑 우리 일행만 있는 5층 조사실이 마치 이 세계가 아닌 다른 곳에 있는듯한 느낌마저 준다. 지인들과 함께 오지 않고 아이 둘하고만 이곳을 찾았다면 음산한 무거움에 눌려 몇 초 있지 못하고 바로 바깥으로 나와 버렸을 것만 같은 곳...

 <짐승의 시간>과 <남영동>을 읽고서 며칠간 머리가 하얘진다. 생각하느라 잠시 모든 생각을 미루게 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 아마 한동안은 이 상태로 지내게 될 것 같다. 


 요즘은 김근태 의원의 에세이집 <희망은 힘이 세다>를 읽고 있다.

 남영동에서 나온 지 15년이 지난 1999년 가을, 매일경제신문에서 김근태 의원은 이 시절을 회상하며 이런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아들애가 대여섯 살 때의 일이다. 부천 YMCA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란 제목으로 그림을 그리게 하였더니 검은 승용차 뒷자석 가운데 왜소하게 끼여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양켠에는 건장한 사내들이 검은 안경을 낀 채 떡 버티고 앉아 있고.


 유치원 선생님들이 그 그림 제목을 ‘우리 아버지’가 아니고 ‘자랑스러운 우리 아버지’라고 고쳐 쓴 다음 다른 애들 그림과 함께 전시해주었다. 애 엄마는 그 그림을 보고 너무 가슴이 아파서, 그리고 유치원 선생님들의 배려가 고마워서 화장실에 들어가서 엉엉 울었다......”


 그러면서 대학생이 된 아들이 그 때의 무거운 기억들 때문에 위축되어 도전적이고 적극적인 젊은이의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할까봐 걱정한다. 김근태 의원은 자율과 책임, 그것이 우리 사회의 기본 축이 되는 그런 날을 그리워한다. 그곳으로 가는 징검다리를 놓는 사람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으면 참으로 좋겠다는 고백을 한다. 


 생각하는 것들, 소신을 삶으로 살아내며 민주화를 위해 애쓰신 분들. 100% 만족하지 못하지만, ‘아직은 멀었다’라고 가끔은 한탄하게 되는, 그러나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이 민주주의 사회는 지나간 어둠의 시절에 그 분들이 민주화를 위해 목숨과 삶을 내어놓고 군부독재의 추악한 폭력, 끈질긴 억압과 싸운 덕분이리라.

 작년 10월말쯤부터 분노와 슬픔을 동시에 느끼며 살고 있다. 박근혜, 최순실과 그의 악당들, 아니 그 이전 이승만, 박정희부터 이어온 파렴치한 권력자들을 향한 분노와 절망은 단지 나 혼자만의 감정은 아닐 것이다.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에 책이 다 무어고 민주주의가 다 무어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혹시나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건 곧 역사가 되고, 삶이 곧 정치다. 정치와 삶은 직결되어 있다. 그렇기에 민주화 열사들이라고 불리는(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랐던) 사람들이 이루고 지켜온 민주주의를 올바로 지켜내기 위해 결코 침묵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건의 공판에 참석한 모든 분들에게 민주화 실현을 위해 국민으로서, 그리고 자기 자리에서 민주화를 향해 나가는데 기여하고 자극이 될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를 충심으로 희망합니다...(중략)... 민주화의 실현을 위해 나는 오늘 무엇을 했으며, 내일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다시 반성해야 하고, 민주화 실현을 위해서는 그 누구도 면제되고 제외될 수 없는 것입니다. 민주화가 이룩되는 날에 나는 민주화를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당신은 민주화를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를 서로 반문하고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중략)...”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조혜진


* 은행나무도서관 책이야기는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의 책읽는 어른모임 ‘함박웃음’에서 함께  읽고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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