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비리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신문과 방송 등 모든 매체들은 앞 다퉈  이를 보도하는가 하면 기획물로 연재까지 하는 곳도 있다. 세상 관심사가 온통 이곳에 집중되고 있다는 반증이다. 사실 법조 비리는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또 지금처럼 세상 사람들이 “어찌 이런 일이!” 하면서 탄식을 하거나 유난을 떨 정도가 아니라 할 수 있을 만큼 세간에 익숙한 사건이기도 하다. 다만 이번 경우는 그 사건이 빠른 시간에 진실이 드러나게 됨으로 유언비어로 호도되거나 축소되는 등 흐지부지 끝나던 과거와는 다른 점은 있다.


법 집행자이고 심판자인 검·판사들이 스스로 그 대상이 되는 경우는 분명 범상한 일은 아니고 그래서 세상은 온통 그들에 대한 질타의 강도가 여간 드높지 않다. 믿는 곳에서 기대에 반하는 사태가 있을 때 사람들은 놀라움을 넘어 실망을 하고 마침내는  분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과거에도 종종 볼 수 있던 사태인데도 근간에 이르러 이렇듯 큰 파장을 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에 비해 민주화가 크고 넓게 진전된 게 이유일 게다. 다시 말하면 과거에는 쉽게 감춰지고 축소, 희석되던 권력층의 비리 부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그에 대한 비판도 보다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사회 환경인 것이다. 그런데 사회는 이러한 환경으로 변화하고 있는데도 법조인에 의한 부정과 비리가 계속되는가 하면 그 양상은 더욱 추(醜)해지는 것은 또 무슨 연유일까? 


가장 쉽게 제기할 수 있는 것은 물론 행위 당사자의 자질이다. 그러나 먼저 따져봐야 할 게 있는데 그것은 그러한 자들이 자리를 할 수 있게 하는 국가의 제도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사회의 질서 유지를 담당하는 임무인 만큼 고도의 도덕성과 지성(知性)을 요구하여야 하지만 그것이 경시되는 것이 현실인 것을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 사회는 오래 전부터 인간성적 모습보다는 지식의 양(量)에다 이른바 스펙의 양을 앞세우는 경향이 높고 그래서 기회주의자와 같은 정의롭지 못한 인사들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빌미를 만들어 놓았다. 이런 환경에서는 지금 보고 있는 것과 같은 사태의 발생 개연성은 항상 존재한다. 


유의하여야 하는 것은, 오늘 우리 사회는 물질 만능으로 인한 가치왜곡이 심화되고 있고 그로 인한 불의(不義)도 다양하게 발생하고 있으며 특히 그것의 행사(行使) 주역들은 기회가 많은 사회 우위계급 즉 권력층이나 부유층에 주로 분포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법조인들의 추한 행위들은 정의롭다 하기 어려운 국가제도에다 물질만능으로 혼돈된 시대 가치관들로 인한 필연적 결과라 보는 것이다. 


이기적(利己的) 속성인 인간들이 물질적 가치에 초연(超然)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은 모두의 이해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찍부터 도덕을 내세우고 윤리를 가르친다. 이성(理性)을 통한 질서를 구하기 위해서 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치들은 한계를 가짐으로 일찍부터 인류는 질서를 강제할 수단으로 법과 제도를 만들었고 그것을 관장하는 기구 곧 사법부를 두었다. 이른바 검·판사 제도의 연원(淵源)이다. 


그렇듯 인류는 문명화에 비례하여 사법제도를 발전시키는 것으로 시대에 따른 인간의 오만(傲慢)과 방종(放縱)을 제어하고자 하였고 그런 목적인만큼 지성과 도덕성은 이들 발탁의 주요조건으로 하였다. 검·판사 즉 법조인에 대한 권위는 그래서 일찍부터 존재했고 사람들은 이러한 구도를 승복하였다. 그들 즉 법조인은 사회 질서유지의 보루(堡壘)로서의 역할을 인정하는 것으로 신뢰를 부여하였던 것이다. 


믿었던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할 때 받는 충격은 매우 크다. 실망은 도를 넘어  육체적 고통으로 발전되는가 하면 정신까지도 황폐화하기까지 한다. 오늘 우리사회의 구성원들은 그런 경험자들이 적지 않고 그래서 지금과 같은 법조인의 부정 비리에 관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법조인이라 하여 항상 긴장상태로 세상을 살 수 없는 것은 이해의 영역 안쪽이다. 그들도 보통사람과 같이 

오욕칠정(五欲七情)을 가지고 희로애락(喜怒哀樂)으로 감성을 표현하는 것은 아무도 탓을 해서는 안 된다. 내가 구하고자 하는 인간으로서의 자존을 그들이라 하여 아니라 할 수 없지 않는가! 다만 기대를 두고자 하는 것은 보통사람들과는 차별되는 자기 절제를 보고 싶을 뿐이다.


오래전, 세간의 신망을 받으면서 역임했던 대법원장이 임기를 끝내면서 “다시 태어나면 법관은 되지 않겠다.”며 회오(回悟)하듯 퇴임사를 하는 것을 보았다. 임기 동안 자기 절제에 따른 고통 등 법관으로서 품위 유지가 어려웠다는 자기 고백으로 들려 듣는 이들을 숙연케 한 그의 고백은  사람들에게 법관의 표양(表樣)이 어떤 것인가를 비로소 알게 하였다. 그는 임기 중에 무한정으로 요구되는 자기 절제에 따른 고통의 고백에 더하여 법관 임용제도에 대한 비판적 견해도 숨기지 않았다. 판사가 되는 시험에 합격하기 위하여 오로지 법전읽기에만 몰두하노라 다른 기회는 포기되어야 하고 그래서 꿈 많던 청춘시기에 연애편지는커녕 청춘이야기를 다룬 영화한편 보는 것조차 금기시 한 자신이 과연 인간의 감성(感性)을 판단하는 법관으로 타당한가를 묻는 대목이 그것이다. 


법관은 지식과 스펙의 량(量)으로 정형해서는 안 되는, 즉 전인적(全人的) 인격자라야 법관 자격자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가 던진 메시지 일게다. 오늘과 같은 사태를 예견한 그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다만 감탄할 뿐이다. 인간의 다양성으로 온갖 사건으로 날이 새는 오늘 우리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모두가 공감하는 기회가 주어짐으로 평등한 사회가 되게 하는 질서의 존재가 아닐까?. 그것은 특정인들에 의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고 함께 만들어야 하는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함께 지켜나가는 것이다. 우리 사법계가 챙겨할 대목이다. (♣2016.9.9.) 



장제모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해 

다양한 마을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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