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선생님의 독서지도 제안

겨울방학을 하기 전 어느 날,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이 거실 책꽂이 앞을 서성인다. 학교에가져가서 아침 자습시간에 읽을 책을 고르는 모양이다.
아들: 어딨더라.. 누나! 그 책 못 봤어?
딸: 뭐?
아들: 노빈손 뭐였는데…….
엄마: 혹시, ‘철새지킴이 노빈손, 한강에 가다’?
아들: 맞아!
엄마: 어쩐 일이야, 그 책을 다 찾고?
아들: 우리 반 여자애들이 읽더라고.
엄마: 그래? 엄마가 사다줬을 때는 안 보더니만, 어쩐지…….

어릴 때는 그림책을 좋아하고 가끔은 누나가 보는 동화책도 읽던 아들 녀석이 초등학교 입학 후 슬슬 변하기 시작했다. 퇴근하고 집에 와 보면 내가 권하지 않은 책, 아니 나는 생전보지도 못한 책들을 재미나게 읽고 있었다. <***게 딱 좋아>류의 만화책은 친구한테 빌려서, (동네 문구점에서 파는, 미니북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허무개그>시리즈는 제 돈으로 사서 낄낄대며 보고 있었다.이는 불과 30분 전까지도 직장(학교)에서는 독서지도 잘 한다고 소문난 국어선생인 나에게 부끄러운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녀석에게 유인책(?)을 고민하던 중 사 온 책이 바로 노빈손 시리즈였다.
그런데 이것도 실패! 학교에서는 남학생들도 좋아하는 책이라서 사주었는데 글밥이 많아서인지 그림만 대충 훑어 볼 뿐 심드렁했다. 그러더니 같은 반 여자애들이 읽는다고 그 책을 갑작스레 찾는 것이다.
자존심 상하게도 그 날은 애들 앞에서 서운한 티를 내고 말았지만,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하다. 누군가에게 호감이 생기면 그 사람의 사소한 일상이 스멀스멀 궁금해진다.

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특히나 짝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절실히 공감하시리라. 그의 자잘한 일상 중에서도, 그가 고독하게(?) 홀로 읽고 있는 책이 어찌 아니 궁금하겠는가?
실은 나도 고백할 게 있다. 모출판사로부터 선물받은 <맨발의 겐>을 (만화책인데다 10권이나 되어) 4년 넘게 쳐다도 안 보다가, 아들 녀석이 저녁밥도 마다하고 몰입해 읽는 바람에 따라서 읽은 적이 있다. 1권을 읽으면서 우리는 ‘겐’의 열렬한 팬이 되었고, 10권을 덮는 순간 학교 아이들의 권장도서 1순위가 되었다.

아마도 그 때 아이가 먼저 읽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만화가 별 거 있겠나 싶어, <맨발의 겐>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방학이라 집에서 아이들과 고군분투하는 엄마들이여, 세끼 밥상 차리기도 힘든데 무슨 독서지도까지 하시려 하는가? 다만 내 아이가 궁금하다면 아이가 읽는 책을 같이 읽어보시라, 혹시 아이가 책을 안 읽는다면 아이에게 주고 싶은 책, 우리 아이가 좋아할 만한 책을 먼저 읽어보시라.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 아이의 시험 성적만 궁금하고, 아이가 누구랑 노는지 궁금하지 않은 엄마는 없으리라.

내 아이의 친구 못지않게, 아니 친구보다 더 중요한 게 지금 아이가 읽는 책이라는 걸 알고 있다면, 이미 당신은 독서지도사의 자격이 충분하다.
자, 새해가 밝았다. 오늘부터 시작, 읽기만 하면 되는 거다!
(그런데 우리 아들이 읽다만 노빈손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애들 여행 갔다 오기 전에 빨리 다 읽어야 하는데…….)


<글쓴이소개>
이민수
방원중학교 국어 교사로현재 청소년문학 편집위원을 맡고 있습니다. 함께 엮은 책으로 『국어시간에 소설읽기 3』 『국어시간에 세계단편소설읽기 1, 2』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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