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자대학교에 설치 예정이던 미래라이프 단과 대학은 학생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쳐 설치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고 한다. 학생들의 요구가 관철되었다는 점에서 정부당국에 의해 수립된 이 정책은 일견 문제가 있는 것으로 비친다. 국가의 정책은 그 설치 명분이 분명한데서 수립 근거를 가지게 되는데 정책현장에 반대가 있어 취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객관적 시각에서 보면 이러한 결과를 두고 정책당국을 질책할 사안은 아닌 것 같다. 경위를 살펴보면, 정부는 정책을 수립하였고 그것의 수용 결정은 민간 부분즉 이화여자대학이 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정부가 특정대학에 수용을 강제한 것은 아니고, 이 제도를 수용한 다른 대학은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굳이 책임을 따지면 수용 당사자인 이화여자대학교이다.


그렇다면 이화여자대학교의 이 결정은 잘못된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각자의 신념에 따라 달리 나오겠지만 필자의 의견은 ‘그렇지 않다’이다. 즉 이화여자대학교 당국자를 비난하는 이유는 보편성을 가지기 어렵다고 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 여론은 학생들을 옹호하고 대학당국에 비판적인 이유는 무슨 까닭인가?

사태를 제대로 보려면 문제가 된 “미래라이프 대학”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대학은 국민들에게 평생교육 기회 공여 일환의 교육제도로 특별히 직업 계 특성화고등학교나 마이스터고등학교 등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고등교육을 원하는 이들을 위해 기성 대학에 단과대학을 개설케 하여 운영하는 것이라 한다. 간단히 이해를 하면 가정 또는 개인적 사정으로 대학을 가지 않고 사회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고등교육 기회를 주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다.


제도의 취지를 볼 때 공익성을 가지고 있는데 학생들이 반대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들의 주장은, 방송통신대학과 사이버 대학 등 같은 목적의 교육기관이 있는데도 기성대학에 두는 것은 중복이며, 이러한 대학들과 동일 시 되는 것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이화여자대학의 자존의 문제이고, 능력이나 자질이 검증되지 않는 학생들을 입학하게 되면 어렵게 입학한 자신들과 형평성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를 강행하려는 것은 정부의 지원금을 받기 위한 학교당국의 상업적 발상이란다.

학생들의 주장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 받아들이기는 좀 그렇다. 학교 측의 상업적 발상이란 주장은 생각해 볼 과제이나 유사한 제도와 중복이나 형평성 제기, 학교의 명예실추운운은 공감하기가 어렵다. 그 배경에는 배타적 이기주의가 숨겨져 있는 것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학교 측의 상업적 발상도 솔직히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그들 학교는 오래 전부터 다른 대학교에 비교될 만큼의 상당한 국고보조를 받고 있고 그것으로 재학생과 교수들은 장학금, 연구비 등의 수혜를 받고 있다. 비판은 객관성을 확보할 때 설득력을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본질이 아니다. 그들의 가장 큰 반대 이유는 그들이 스스로 규정지우고 있는 자기들의 권위의 실추 즉 이화여자대학이라는 상징의 손상을 우려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 스스로 규정한 자부(自負)를 옹호하기 위하여 배타적 이기주의를 행동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자세를 잘 못되었다 하지 않는다, 자존(自尊)을 지키고 이를 중히 여기는 것은 인간라면 가질 수 있는 보편성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기적 배타주의가 발로라면 보편성의 범주에 두기 어렵다. 정의(正義)의 문제가 제기되기 때문이다. 세상이 대학을 상아탑(象牙塔)이라 하는 것이 이에 대한 설명이다. 다시 말하면 대학은 학문 연마의 장을 넘어 전인적(全人的) 인격 형성을 구하는 기회의 공간으로 보는 것이다.


학생들이 학문의 연마와 병행하여야 할 것은 사회정의의 행동이다. 정의가 실종된 시공(時空)에서 쌓은 지식은 사상누각일 뿐이다, 그러한 지식은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가 하면  타인들에게 위해(危害)를 가할 수 있는 것은 인류 역사가 잘 말해주고 있다. 정의롭지 못한 세력들이 지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공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비안간적 모습들이 주조이고 그러한 곳에서 평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대학은 지성인(知性人)을 추구 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지성(知性)의 사전적 어의는 “맹목적이거나 본능적 방법에 의하지 아니하고 지적인 사고에 근거하여 그 상황에 적응하고 과제를 해결하는 성질”이라 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지성인은 곧 정의로움의 바탕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라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상아탑의 주역이라면 지성인이 목표여야 한다. 그리하여 사회의 양심과 지성을 대표하도록 자기를 가꾸고 단련하여야 한다.


오늘의 대학을 두고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그래도 대학에 두어진 사회의 원래 기대는 지속되어야 한다. 그것은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세상의 평화를 지키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듯 대학생은 미래의 주역이자 희망이어야 하는 만큼 학문의 량(量)으로 자기도취에 빠지지 말고 전인적 인격자를 지향하여야 한다. 

이제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한다. 명문을 자처하는 대학교는 그것을 지속할 수 있는 가치를 현실 상황에서 찾아야지 과거의 가치에 고착하여 변화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역사의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과거에 형성된 가치는 문명의 변천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 어제의 선(善)이라 하여 항상 선일 수 없고, 어제에 세워진 권위도 오늘에 이르러서는 빛을 더할 수도 있지만 덜할 수도 잃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전통을 자랑하는 모든 집단에게 말한다. 나보다 부족한 이웃이 나와 함께 하는 것을 동의하는 것은 아름다운 모습이지 부끄럽거나 자존을 다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지성인의 모습이 되고 그들의 전통을 더욱 빛나게 한다. 또한 전통은 그 집단 내부의 자부이자 로망일 뿐 외부에 강요할 권위로 이해하지 않아야 한다.

(♣2016.8.10.).


장제모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해 

다양한 마을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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