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임금이 오신다. 조선왕조 임금 중에서 제4대 세종에 이어 바람직한 군주로 후세에 기억되는 제22대 정조 임금이 오신다. 비정상의 세계에서 당신이 겪으신 한(恨)을 상기도 잊지 못해 세상을 두드리러 다시 오시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랴! 당신의 의미 있는 거행의 첫날 쉼 장소인 시흥행궁이 없어져 버렸으니.......,


오는 10월 8~9일 양일간 서울 창덕궁에서 수원 화성행궁까지 7박8일 간의 ‘을묘년 화성원행(乙卯年-1975년, 華城遠行)’을 원형 재현하는 행사가 대대적으로 거행된다. 이 행사는 정조가 평소의 이상(理想)을 현실화 하고자 했던 화성(華城) 곧 수원시가 지금껏 독자적 연례행사로 치르던 것을 이번에는 서울시 및 이웃도시들과 함께 한다고 한다.


이 거행은, 정조임금께서 당신이 품고 있는 국가통치 이념을 드러내고 더불어 세상 보편 가치조차 말살되고 있는 당시의 혼돈 된 사회질서를 바로잡고자 즉위 이전부터 계획하였던 개혁의지의 표명이다. 그렇듯 분명한 목적을 가진 장엄하고도 규모가 큰 국왕의 행차 의식으로 우리 민족은 물론 이를 아는 외국인에게도 깊은 인상을 갖게 하는 역사의 재현이다. 

지난 역사의 한 임금의 행차인 이 의식을 막대한 비용을 들이면서 그것도 여러 지방정부가 함께 참여하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은 역사적 상징을 범국민적 행사로 치름으로 문화국가 대한민국의 위상을 제고하고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함으로 관광한국의 이미지 제고효과에 더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때문으로 이해한다. 

정조가 세자 무렵에서 즉위 이후의 당시 사회는, 정치권력을 장악한 유림(儒林)세력들이 공리공론(空理空論)만 일삼으면서 건설적 변화를 거부하고 임금조차 무시한 채 백성을 수탈하는 가렴주구(苛斂誅求)의 주구(走狗)노릇을 하였다. 정조의 이 거행은 이러한 비인도적 비생산적 세력인 수구(守舊) 세력들을 배척하고 민중을 국가의 구성원으로 예우하는 참 민주주의의 시현을 선포한 위대한 행군이다.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권력지향세력에 둘러싸여 소통 제로가 됨으로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모르고 있는 오늘의 정치현상에 던지는 시사가 그곳에 있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위대한 행사의 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우리 고장 시흥(금천)이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다. 장엄한 그 장정 첫날밤을 챙겨야 하는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역사의 사실은 있는데 그것을 재현할 현장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여간 난처하지 않다. 그 현장에는, 더욱 난처한 사실을 만나게 한다. 시흥 행궁이 있던 공간이 그곳 일대라 짐작되는 유력한 증거물인 천년 은행나무들(세 그루)이 길 가운데와 가장자리에서 자동차 매연으로 신음하며  까맣게 타 죽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 그것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문화를 존중하는 민족으로 자부하고 그것을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이어오고 있으며 헌법에 조차 이를 명문으로 규정하여 국가정책에서 챙기고 있는 문화국가(?)이다. 그런 나라에 숭고한 이상과 철학을 행동한 위대한 역사인물의 행적이 형태는커녕 그 위치조차 모르고 있는 부끄러운 사실이 존재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시흥(금천)에서 만나는 현실이다. 어떻게 이렇게 황당한 일이 있어 오늘을 사는 우리를 한없는 부끄러움에 빠지게 하는가?  

이러한 현상에는 그럴만한 역사의 과정이 있음을 이해한다. 찬란한 문화를 일으켜 민족의 자긍심을 갖게 하였던 조선왕조는 후세에 이르러서 정치권력의 무능으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겨 역사의 유산은 물론 민족의 자긍심까지 말살시켰다. 서방의 도움으로 간신히 해방을 맞았지만 철학 부재한데다 무도하기까지 했던 정치권력들이 대를 이어 40여년을 지배하면서 세상을 온통 물질가치로 오염시킴으로 찬란한 우리 역사의 숨결들은 곳곳에 진한 상처를 입혔는데 오늘 우리가 분통해 하는 이곳 시흥(금천)의 역사도 그 사례의 하나이다.

1970년 초까지 은행나무들이 있는 곳은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이 있었고 주변 일대는 지금과 같은 혼란스런 도시 시설들은 없었는데 행궁의 흔적을 챙기는 것은 고사하고 오늘의 은행나무의 생육 현상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주변일대를 처참하게 망가뜨려 버렸다. 그 역사의 현장에는 문화민족이라면 도무지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현상들, 1000년에 가까운 생육 역사를 가진 은행나무 세 그루가 길 가운데와 가장자리에서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조상들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 선도비들조차 길 가운데에서 온갖 길 먼지와 차량들이 품어내는 아황산가스를 덮어쓴 체 볼품없는 모습으로 서 있다.  

이렇게 황폐한 환경이 될 동안 이곳을 사는 시흥(금천) 사람들, 우리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역사의 숨결을 찾아 문화도시를 만드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물질 풍요만을 추구하는 경박한 시민의식만 있었지 않은가? 시민들이야 그렇다 해도 고장을 잘 가꾸겠다고 자리를 차지한 정치지도자를 비롯한 관료들은 또 어떤가! 

구전(口傳)에 의하면 시흥행궁자리는 시흥5동의 천년은행나무 세 그루가 있는 부근일거라고 하는데 정확하게 ‘여기가 그곳’이라 할 만한 역사의 사실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없다고 한다. 다만 일제 강점기에 행궁은 없어졌고 그들의 지배체제에서 흔적조자 지워지면서 그 공간은 인간의 이기심 충족의 장으로 변하게 되어 오늘과 같은 현상이 있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혼돈의 역사인 일제 강점이 끝나면서 전국 각지에서는 역사 실종을 찾는 운동이 전개되면서 많은 역사 유적들이 더러는 제 모습을 찾고 그렇지 못한 곳은 그 흔적에 의미를 둘 수 있는 역사(役事)들이 전개 되었는데 이곳은 그 공간의 위치조차 알지 못할 정도로 무관심 지대가 되어버린 데는 이곳을 생활공간으로 두고 있는 우리 모두가 통절히 반성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진정을 하고 다시 역사를 본다. 정조 임금은 이곳에 행궁을 두는 것을 기화로 이곳 행정지명을 당시까지의 금천현(衿川縣)에서 시흥현(始興縣)으로 하고 고을 수장인 정6품인 현감을 정5품인 현령으로 승진시켰다. 그가 준비한 역사의 장을 펼치는 첫 기착지로서 의미를 부여한 것 일게다. 

그런데 이제 이곳에서 시흥(始興)은 이제 동명(同名) 등 몇몇 기관의 명칭으로 있을 뿐 역사의 주적(主績)은  딴 곳으로 가버렸다. 시흥시(始興市)를 행정지명으로 곳이 따로 있고 그래서 국가의 행정기록도 그곳에 가버렸다. 이곳 시흥은 이제는 다만 금천일 뿐이다. 물론 금천도 이곳 역사이니 그것이 나쁘다거나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시흥이란 지명과 그것이 이곳에서 가지는 의미가 서서히 퇴색되어가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일찍이 개화한 서방 국가들은 사소한 역사라 하더라도 그것이 가진 의미를 부각하기 위하여 국가예산을 드려 기념의 장을 만들어 잘 보존하고 있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선진국으로 이해되는 것은 앞선 문명에 더하여 문화에 대한 남다른 의식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문화민족이라면 이러한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필요한 행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금 10월 8일 행사에 주민들이 대대적으로 참여를 하자. 비록 시설은 없어졌지만 역사의 사실과 그로 인한 공간은 없어지지 않으니 이번 행사를 계기로 시흥행궁 복원 당위를 범주민적으로 펼칠 명분을 구해내자. 이를 위하여 선행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고사상태의 은행나무를 살리고 길 가운데 방치된 선도비의 갈무리다. 그래서 앞선 사람들이 망가뜨린 역사와 훼손된 문화를 다시 살리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주어 시흥행궁 복원사업 현실화의 토대를 만들자.(♣2016.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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