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끓이며

 

 

냄비에서 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다.
옆에는 라면 봉지 두 개가 입을 벌리고 있다. 스프 봉지를 꺼내 봉지를 뜯고 끓는 물에 털어 넣는다. 그리고는 볼품없이 잘라놓은 소시지를 넣는다. 이곳 사람들은 도마를 사용하지 않기에 손에 들고 뚝뚝 자른 탓이다. 마지막으로 라면의 면발을 넣는다.
어학원 부엌이 한국인으로 붐빈다. 며칠 전 한국인 선교사 몇 분이 스와힐리어 교육 상담을 받으러 왔다가 라면 두 봉지를 건네주고 간 것인데, 어학원 식당을 잠시 빌려 요리를 하고 있는 중이다. 며칠 전부터 감기로 골골거리는 나를 위해 감기약이라며.....
접시에 소복이 담긴 밥과 야채 볶음 사이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냄비가 놓인다.
한국 음식에 어울리는 식기가 있을 리 없다. 아쉬운 데로 찻잔을 그릇 대신으로 삼아 면발을 나누어 담은 후 냄비 체 들고 국물을 따른다. 라면 두 봉을 네 명이 나누어 먹어야 하기에, 물을 넉넉히 잡은 탓에 심심해진 국물이지만 다들 맛있다며 법석을 떤다.

해외생활을 꽤 했지만 한국 음식을 그리워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세네갈에서 유일하게 생각났던 건 짭짜름한 젓갈이 유일했다. 그것도 잠시 스치듯 몇 번 생각난 것이지 크게 아쉬워하지도 않았었다. 그런 내가 새삼 입맛이 변해 갑자기 한국음식에 감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동료들이 약이라며 처방해준 뜨거운 국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따뜻함이 난데없는 행복을 주고 있다.

 

 

카카오톡단톡 방은 우리의 연락망이다. 누군가 수다가 필요하면 모임을 주동한다.
“호디“ “카리브”호디는 남의 방에 들어가기 전 노크 대용으로 쓰는 스와힐리어인데, 우리에겐 일종의 암호다. ‘프린세스’의 방이 우리의 아지트다. 그의 방 만이 유일하게 전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프린세스’. 와니. 유일한 남자다. 낯선 상황이 되면 여지없이 까탈을 떨곤 해서 누군가 그를 ‘프린세스’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인데 그 표현이 너무나 절묘해서, 그가 까탈을 부리기 시작하면 우리 중 누군가가 ‘아이구, 우리 프린세스 어쩌나’하며 그들 어른다.
우리가 그렇게 놀려도 마음 상해하지 않을뿐더러 며칠만 지나면 언제 까탈을 부렸냐는 듯 상황을 즐긴다. 또한 육체적인 힘이 필요할 때는 말없이 팔을 걷어붙일 줄도 안다.
약속시간이 되면 여행을 좋아해 이미 여러 나라를 경험하고 외국인 친구들과 가장 잘 어울려 우리의 부러움을 사기도 하는 스텔라가 호디를 외치며 입장한다.
조금 지나면 웃음소리가 하이디처럼 경쾌해 명랑소녀라고 이름 붙인 필리가호디를 외치며 들어온다. 신기한 건 나와 참 다르구나 싶은데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의외로 닮은 점이 많아 편한 아가씨다.

우리 넷은 하는 일도 나이대도 성격도 다 다른데, 매우 독립적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법에 익숙한 것이 비슷하다. 그래서 우리는 갈등이 없다. 설사 사소한 오해가 있다고 해도 솔직하게 표현하고 받아들이기에 금방 제자리로 돌아오는 탓이다.
아침을 좀처럼 먹지 않는 내가 하루는 아침 시간에 식당에 갔다. 보통 식사 시간이 되면 먼저 간 사람이 자리를 잡고 먹고 있으면 하나 둘 모이게 마련인데 그날은 아무도 오지 않는다.
맞은편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던 선생님 중의 한 분인 장구오가 동료들의 안부를 물어온다. 잘 모르겠다는 나의 대답에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네가 아는 게 도대체 뭐냐, 고 정색을 한다. 이곳 탄자니아는 아침에 일어나면 이웃집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며 그건 아주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한다.

아침 식사보다 잠을 선택했다는 걸 알기에 방해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자, 아프거나 위험한 일이 발생했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며, 탄자니아에는 ‘한 손가락으로는 이를 잡을 수 없다’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나는 그냥 웃고 만다. 옆방에 살면서 따로 와서 밥을 먹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자신의 그릇을 챙겨 먼저 자리를 뜨는 우리가 그들 눈에는 참 별스럽게 보일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장구오에게 이런 우리를 설명할 길은 없다.

 

방으로 돌아오는 밤하늘에 보름달이 바오밥나무 가지에 걸려있다. 필리가 말한다.
“특별한 일이 있는 날 하늘을 쳐다보면 보름달이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래서인지 정말 좋은 일이 있을 때 하늘을 올려다보면 보름달이 있더라고요.”라면 두 봉지가 특별함을 줄 수 있는 지금. 난 이 순간이 좋다.


 

소피아
7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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