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카란다 꽃길‘에서 다시 만난 현실




이곳은 봄이다. 

계절의 흐름조차 눈치 채지 못하고 흘려보냈던 작년의 봄과는 사뭇 다르다. ‘탄자니아 통신’ 누적 횟수만큼 이곳의 시간이 누적된 탓일 것이다. 

모처럼 나들이 나온 구시가지. 그동안 입고 있던 두꺼운 옷을 벗어던지고 얇은 원피스 차림이어서인지 좀 걷고 싶어진다. 구 시가지를 조금 벗어나자 ‘자카란다 길’이 나온다. 구도심과 이어진 언덕길인데 차가 많지 않아 한적한 것이 걷기에 좋다. 자카란다가 피어있는 이 길을 걸어볼 마지막 봄일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그 길로 끌었다. 

가로수 너머 멀리까지 시야가 확보되니 숨통이 확 트이는 느낌이 들며 살짝 들뜬다. 갓길을 지키는 연보라색 꽃, ‘자카란다’. 이국적인 이름으로 신비한 느낌마저 든다. 종모양의 보라색 꽃이 가지가 휘어질 듯 매달린 것이, 색깔만 다를 뿐 마치 흐드러진 벚꽃을 연상케 한다. 파스텔 색조 특유의 보드라움과 연약함에 보라가 주는 몽환적인 느낌이 묘하게 나의 마음을 쓰다듬는다. 지인들이 인증 샷이라며 찍어 보내 온, 가을 나들이 풍경에 잠시 흔들렸던 터다. 계절 따라 저마다의 아름다움으로 넘쳐 나는 땅에 대한 그리움으로. 

자카란다로 향했던 내 마음이 아릿한 통증으로 옮겨가자 새로 산 하얀 샌들에 눈이 멈춘다. 내리막길이니 체중이 앞으로 쏠리게 되고, 맨발로 샌들을 신은 탓에 얼마 못가 물집이 잡히고 피부가 벗겨진 탓이다. 오랜만에 작정하고 산책이란 걸 해보자며 들어선 길인데, 신발이 발목을 잡을 줄이야. 


내가 여기에 살면서 가장 적응이 안 되는 부분이 도로 사정이다. 버스에서 내려 학교까지 걸어 다니는 일이 많은데, 차라도 지나가면 먼지로 목욕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워낙 길이 험해 혹여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나 않을까 땅만 보며 걷다 보니, 꽃이 피고 지는 것도 보질 못할 정도로, 나는 차안대를 쓴 말이 된다. 

아프리카의 사정을 익히 알기에 이곳에 오면서 가벼우면서도 편한 플랫슈즈를 신고 왔는데, 말라위를 여행하며 잃어버렸다. 다르에살람에 간 김에 숍에 들렀지만, 우리와 취향과 체형이 다를 뿐더러 다양한 사이즈가 없으니 눈에 드는 걸 고르는 게 쉽지 않다. 몇 개의 숍을 돈 후, 사이즈도 넉넉하며 굽도 크게 높지 않을뿐더러 어느 옷에나 무난히 어울리겠다 싶어 구입한 것인데, 길들여지지 않은 신발이 발에 무리가 된 것이다. 


신발은 문화나 종교에 따라 다양한 상징으로 해석되곤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사람의 발자취라고 생각해서, 자신을 소개하는 글인 이력서(履歷書)의 이(履)가 신발을 의미한다. 또한 그 사람의 자리나 지위로 해석해, 꿈에 새 신발을 사거나 신고 있는 것은 길몽으로 친다. 당연히 잃어버리거나 헌 신발을 신고 있으면 흉몽으로 본다. 이곳과의 계약이 끝나면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고민이 있는 나로서는 물집 잡힌 발을 보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게 된 것이다. 

오랫동안 하이힐이 주는 선의 아름다움과 긴장감을 좋아해 자칭 하이힐 예찬론을 펼쳤었다. 아프리카란 커다란 대륙에 들어서며 플랫슈즈가 주는 자유로움에 매료되어 하이힐을 집어 던졌다. 양 극단 사이의 어느 지점, 적당한 긴장감을 즐기면서도 결코 나를 가두지 않을 적당한 포인터를 찾을 수 있을까? 


자카란다 꽃길에서 만난 봄이 화사하지 만은 않은 이유다.

  

 2017.10.29

탄자니어에서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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