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그리고 용서

   

   이른바 ‘미투 운동’ 열풍으로 지구촌이 시끌시끌하다. 남성들은 민망함을 넘어 부끄러움을 피할 길이 없고 여성들은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을 구하려는 듯 대열을 갖춰 대 반격을 개시하고 있다. 바야흐로 인간 절반들의 거대한 전투가 전개되는가? 물론 이 물음은 필자가 스스로에 묻는 것이고 그것은 남성이자 사회의 기성인으로서 부끄러움에 더해 두려움조차 느껴지는 걱정의 우회적 표현이다.


걱정이 된다 하여 좀 심하게 표현을 한 것 같지만 전개되는 양상을 볼 때 사태가 만만치 않다. 권력자들에서부터 교양과 품위를 자랑하는 시인, 작가들 교수님들로 연결되더니 우리도 빠질 수 있느냐는 듯이 연예인들도 속속 나타나기 시작하는 등 그 진행이 예사롭지가 않으니 말이다. 이러한 현상인데도 말 앞세우기가 여간 주저되지 않는다. 명색이 칼럼리스트를 자부하면서도 말이다. 나이가 들었다 하지만 필자도 정상적인 감성을 가진 남자 그러니까 매력을 가진 여성을 보면 아직도 가슴이 설레는 남성 군에 속하니 이를 어찌하겠는가? 

그렇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하고 싶은 말을 해야겠다. 적어도 내가 사는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부끄러운 현상들을 보고 못 본 채 침묵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자책을 감당하기 어렵다. 더욱이 그 동안 정의를 좌우명처럼 내세우며 세상을 간섭하였으니 말이다. 


   서설이 길었다. 예민한 사안으로 들어가는 만큼 단단히 채비를 해야 하기에 그랬다. 말문을 열어보자. 주지하다시피 ‘미투 운동’은 선진국인 미국에서 시작되고 그것은 태양이 뜨면서 빛이 세상에 퍼지듯 지구촌을 밝히면서 예외 없이 이 땅에도 이르렀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성(性) 개방이 관대한데다 우리보다 인권이 존중되는 미국에서 이 바람이 시작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아직도 남성우위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양성평등을 내세우고 있지만 대부분의 기득권층은 남성이 독점하다시피 자리하고 있고 그것은 권력으로도 작용하고 있는데 ‘자유와 평등의 나라’라는 미국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다시 우리나라를 보자. 언제부터인가 성에 대해 관대해지고 에로티시즘은 예술의 중요한 한 장르로 자리 잡았는가 하면 성인들에게 더러는 로망으로도 생각하는 시대가 아닌가, 솔직히 말하면 정결한 성(性)은 그가 성인이라면 아름답게 봐주는 시대가 오늘 우리 사회의 트렌드다. 그리고 성(sex)이란 건강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본능적 욕망이고 그것은 보편적 현상으로 이해를 한다. 그럼에도 오늘과 같은 문제 즉 ‘미투’가 제기되는 것은 그 행위가 다분히 비평화적적인 등 일방적인 면이 강하거나 비록 서로가 이해될 수 있는 사이일지라도 공감의 정도에 차이가 있는, 말하자면 두 성(性) 사이에 진정한 교통이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 장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위해  전제해야 할 게 있는데 그것은 분명한 범죄로 보아야 하는 행위는 이 장 이야기에서 제외한다. 그것은 실정법(형법)에서 다루어야 하므로 사법기관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장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미투 운동’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양자 사이에 책임 소재 등 다툼의 여지가 있는 경우만을 살펴보고자 한다. 


   사실 남성의 입장에서 ‘미투 운동’을 만나는 것은 변명이 어려운 부끄러운 일이고 따라서 반론을 말하는 것도 편치가 않다. 그러나 이런 부류의 사건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사실들이 있고 그 책임을 무조건 남성에게 돌릴 경우 이를 방어하는 것이 어렵다. 사정이 그런데도 문제가 제기되면 무조건 남성 책임 일변도로 몰아가는 것은 합리적도 합법적도 아니다. 이 문제는 당사자 즉 상대가 있는 만큼 상호작용이 있었을 것인 만큼 그에 진실이 요구된다. 다시 말하면 분위기에 편승한 여론을 앞세워 미확인 상황을 사실인양 하여 억울한 피해자를 만드는 일이 없어야 한다.   


조심스럽게 접근해야겠지만, 현재 언론 등에 의해 드러난 ‘미투’ 중에는 이런 점에서 살펴 볼 사안도 있을 수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여성들의 입장에서는 불쾌하게 들릴 수 있지만 현재의 흐름에서 사실이 아니거나 왜곡된 사실들에 대해서는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 흐름은 마침내 제어하기 어려운 격랑(激浪)을 일게 하고 결과적으로 피해자에게는 아픔을 더하고 더불어 억울한 가해자들을 만들게 됨으로 좋지 않은 사회 풍조를 일게 한다. 


실제로 우려하던 사태가 보이기 시작했다. 양심의 가책인지 극심한 모욕감인지는 모르지만 고귀한 자기 생명을 해하는 사건이 두 건이나 있었는데 이런 일이 앞으로 얼마나 더 나올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자해자를 옹호하고자 함이 아니다. 고매한 인격자라도 성(性)에 대해서는 평범한 사람과 별로 다르지 않지만 그것이 문제가 되었을 때 반응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명예를 생명보다 중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다.   


제3자들이 해야 할 것은 사태가 노정되었다하여 사실여부에 관계없이 가해용의자에게 돌을 던지는 것을 쉽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역할보다는 피해자가 일상의 평범함에 숨어 있게 하는 일이 먼저가 되어야 한다. 용의자에게 돌을 던지는 것은 피해주장자에게 위로 보다는 또 다른 피해를 주는 일이 된다. 더욱이 용의자에게는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충격을 가하게 되고 그것이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더라도 그것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는다. 


   그간 제기된 문제 중에는 여러 정황 등 제3자가 볼 때 공감이 쉽지 않은 경우가 있었고 사람에 따라 정도에 차이는 있겠지만 저항조차 갖게 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이런 문제들로 사법절차가 진행 또는 준비하는 경우도 있는데 걱정되는 것은 이로 인한 세상의 양성(兩性)이 서로 대립함으로 갈등으로 연결되면 쉽게 지울 수 없는 사회적 상처가 된다. 이런 사회적 불신이 빨리 종식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응징을 당할 일을 했다면 그에 합당한 조치가 필요하겠지만 그것이 불확실할 때는 누가 누구를 단죄하기 위한 사실 확인보다는 용서와 화해를 권하는 일이 더 바쁘고 아름답다.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역할을 해야 한다.


   형법에서의 범죄는 죄형법정주의 원칙에 의하면 되지만 그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당사자야 감정적일 수 있지만 그것을 보는 제3자들은 간섭을 하지 않는 것이 좋고 간섭을 하려면 이성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남녀 간의 문제는 참으로 오묘하여 보편상식으로 접근하기는 난해한 경우가 있다. 성급한 접근은 오류를 만들 수 있고 그것은 양 당사자를 난처하게 만들 수가 있는가 하면 약자에게는 흉기가 될 수 있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그동안 누구나 인정하는 고매한 인격자로 살아온 사람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운 여론이라는 무서운 파도를 만날 수 있다. 이른바 ‘주홍 글씨(t​he scarlet letter)’의 교훈이다.


   살아오면서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시인이 고뇌한 것처럼 세상사에 노심초사해야 하는 현대인들이 곧 우리들이다. 어제 한 실수를 되풀이 않겠다고 다짐해 놓고도 자기도 모르게 반복하는 보통사람이 곧 나인 것이다. 바람직한 삶은 자기에게 엄격하고 그래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다. 이런 자기 관리도 가치가 있지만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일 또한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이제 맺음을 하자. 문제가 있다면 사실 그대로 실정법 규정에 따라 처리되는 것을 동의하자. 객관적으로 보아야지 편견을 두지 않아야 하고, 가급적 원만한 결말이 되기를 바라자. 모두 우리의 이웃이고 함께 살아갈 공동체 구성원이 아닌가? 피해자에게 부탁한다. 용서가 가능하다면 용서를 해주자. 어려워도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고 함께 살고자 하는 이웃의 정이다. 상대가 진심으로 뉘우치며 바라는 용서에 응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다!

(♣2018.3.22.)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해 다양한 마을활동을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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