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일은 

 내일이 걱정하게 하라.


자신을 예술가라고 소개하며. '해피'라고.


무의식 중에 뒤를 돌아본 듯하다.

자그마하고 깡마른 사내가 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인데, 유난히 까만 피부가 그를 더 왜소해 보이게 하고 있는 듯했다. 그는 나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여행지의 어디나 이런 사내들은 있고, 보통은 성가시지만, 낯선 곳에서 말이 통하면 약간의 구전으로 좋은 가이드가 되어 주기도 한다. 

그는 자신을 예술가라고 소개하며, ‘해피’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해피’라니… 갑자기 견공님들이 생각나 킥킥거렸더니, 본명은 따로 있지만 늘 웃고 있다고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부른다고 했다. 어릴 때 엄마 아빠를 모두 잃고 떠돌다, 공예가를 만나 도제로 있으면서 기술을 익혔다고 했다. 예술가라기보다 기능공에 가깝다. 어쨌던 아프리카는 자칭 예술가가 많은 땅이다

영어를 꽤나 해서 한참 영어 공부하는 내게 프리토킹 상대로도 나쁘지 않았다. 영어는 어디서 배웠냐고 했더니, 신이 자신에게 특별히 준 재능이란다. 공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 읽고 쓰는 건 못한다고 했다. 다른 언어는 기억이 안 되는데 영어만은 일부러 노력하지 않았어도 그냥 배워진 걸 보면 신의 선물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길을 안내해준 보답으로 약간의 돈을 건넸는데, 이건 뭐냐는 듯 나를 빤히 쳐다봤다. 자신이 좋아서 한 일이라나. 예술가라며 자존심을 지키려는 그에게 순간 호기심이 일었다. 마침 저녁 시간이었고 이런저런 말 상대로도 나쁘지 않았기에 잡았더니 못이기는 척 자리에 앉았다. 

민물 생선이 유명한 곳이어서 시키려 했더니 고기류나 생선, 심지어 우유나 계란, 유제품도 먹지 않는다고 했다. 채식주의자냐고 했더니 ‘비건’이라고 고쳐준다. ‘비건’은 완벽한 채식주의를 의미하며 일반 채식주의자와 구별된다는 설명이었다. 이유를 묻는 내게, 어느 날 갑자기 고기가 역겨워졌고, 얼마 후 생선과 우유, 달걀까지도 싫어져 그렇게 되었을 뿐이라 했다.


독특한 캐릭터의 그. 현실에서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한국에 이곳의 소식을 전하는 일을 하는데 너를 좀 더 소개해 줄 수 있겠냐고 했더니 순순히 그러마,고 했다. 

그는 남의 집을 무단 점거해 살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돈을 다 모은 후 한꺼번에 집을 완성하는 게 아니고, 어느 정도의 돈이 모아지면 집 짓기를 시작해 벌어가며 완성하므로 미완성 집들이 많은데 그곳에서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멘트 바닥에 깔린 돗자리 한 장과 모기장이 세간의 전부였다. 놀란 나를 진정시키려는 듯, 여기저기 떠돌며 살고 있는 탓이란다. 형편이 나을 때는 호텔에서 지내기도 하니 걱정 말라고 나를 되려 위로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돈이 좀 더 많았으면, 높은 자리에 오르고 성공했으면 하고 끊임 없이 욕심을 내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기에 늘 웃을 수 있다고 했다. 장가도 가야하고 아이도 길러야 할 터인데 미래가 불안하지 않냐고 찔러보지만 고개를 저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특별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은 죽음도 두렵지 않다고 했다. 내일 죽을 것처럼 산다는 그리스인 ‘조르바’가 생각난다.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하자 포즈를 취해 주는데 마치 수도승 같다. 

 

책이 출판되고 나는 한동안 많이 힘들었다. 지인들의 반응에 일희일비하며 그네를 타고 있었던 것이다. 떠나올 때의 용기는 다 사라지고 두려움이 나를 집어 삼켰다. 가진 게 없기에 잃을 것도 없다는 것이 내게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했는데, 자물쇠로 꼭꼭 채워놓은 곡간이라도 털린 양 억울해 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칭찬이나 이해, 공감을 기대한 것인데, 그 기대가 충족되지 못하자 나는 좌불안석하며 좌절하고 두려워한 것이다. 버린 것이 아니고 새로운 욕심으로 나를 채찍질하고 있었던 것인데, 그것이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연결되어 나를 밑바닥까지 밀어내며 상처 입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 날로 충분하다.’


 돗자리 하나와 모기장. 푸성귀만 있어도 항상 웃을 수 있는 그. ‘해피’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내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탄자니아에서 소피아

11월 26일



푼디


 집수리 기술자 푼디와 아이들



종점에서 기다리겠다는 그의 말을 떠올리며 달라달라(시내버스)에 올랐다.

 빼곡히 들어찬 사람들 틈 사이로 잡목 숲이 언듯언듯 보이는 가 싶더니, 제법 큰 마을이 나온다. 차장은 한 정거장만 더 가면 목적지라고 알려준다. 달라달라에서 내리자 자그마한 키에 호리호리한 사내가 나를 발견했는지 다가온다.   

  그는 집을 수리하며 만난 푼디(기술자)다. 

관사로 들어와 집을 손보는데 며칠이면 끝날 것이라던 공사는 한 달이 다 되어가는 데도 진척이 없어 지쳐가던 중, 기술자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며 찾은 사람이 그였다. 

 식전 댓바람에 와서 늦은 시간까지 묵묵히 일만 했다. 물 달라는 말조차 없었다.  그런 그가 맘에 쓰여 중간 중간 간식을 냈다. 그의 손이 닿자 며칠 만에 공사는 마무리 되었다. 일을 끝내고 돌아가며, 자신의 집에 초대를 했던 것이다.  


 그는 삐뚤빼뚤한 골목길을 한참이나 걸어가서야 자그마한 대문 앞에 멈추어 선다. 여러 가구가 함께 사는 집인데, 그 중 커튼으로 내부를 가린 입구로 안내한다. 좁은 거실에는 벽면을 따라 레이스 천으로 커버를 씌운 소파가 자릴 잡고, 중앙에는 테이블이 놓여있다. 거실 한 귀퉁이를 차지한 배불뚝이 구형 텔레비전에서는 합창단원들의 몸짓만이 권태롭다. 

 거실을 가운데 두고 두 개의 방이 나란히 놓여있다. 부부침실엔 커다란 침대하나가 방을 가득 채우고, 벽면에 주렁주렁 걸려있는 옷가지가 전부다. 맞은 편 방은 부엌이며 동시에 아이들의 거처다. 부엌살림이라고 해봐야 아직도 불길을 안고 있는 숯불 화덕과 켜켜이 쌓여있는 플라스틱 통, 몇 개의 양은 냄비가 전부다. 우리 기준으로 보면 참 열악하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삶이 내게는 작은 위안으로 다가온다. 없어도 사는 데 지장 없는 것들을 탐내고,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곡간을 채우려고 전전긍긍 하던 욕심만 내려놓으면, 내 한 몸 거둘 수 없겠나 하는 맘이 들었기 때문이다.       

 

 딸만 셋인 딸부자였는데, 아이들은 자신과 다른 나를 보며 경계하는 지 곁눈질만 할 뿐 선뜻 내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곳에 자리 잡고 사시는 한인분이 자신의 딸 이 입었던 것이라며 주신 원피스와 막내를 위해 쇼핑한 옷이 든 쇼핑백을 큰 아이에게 내민다. 면 체크무늬 원피스를 밑에 동생에게 넘기는 걸 보니, 공주풍의 하늘하늘한 분홍색 레이스 원피스가 맘에 들었나보다. 동생은 바로 갈아입고 나와 내 앞에 서서 자랑을 한다. 언니는 체면을 차리는지 멀찍이서 몸에 대보기만 하는데, 입에는 함박웃음이 걸려있다.  

 그의 아내가 식사 준비를 하는 사이,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며 나를 끈다. 대문을 나서자 어느새 준비했는지 오토바이 한 대가 서있다. 친구에게 빌려온 것이란다. 울퉁불퉁 자갈길을 한참 달려 도착한 곳은, 넓은 들판에 몇 채의 집만 덩그맣게 서있는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저만치 공사 중인 건물이 보였는데, 혼자 자신의 집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삼십대 초반인 그는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공사판을 떠돌며 기술을 익힌 것인데, 손끝이 야물고 영리해 웬만한 전문가 뺨쳤다. 기술이 있는 그에게 땅이 마련되자 자연에서 나는 재료만으로도 너끈히 집을 짓는 것이다. 거실에 방 둘, 부엌 그리고 화장실 겸 샤워 실. 좁지만 다섯 식구가 살기에 손색이 없어 보인다. 이미 몇 그루의 망고와 아보가도 나무가 자리를 잡고 있는 마당에 야채도 심을 거란다. 정원도 가꿔보라는 나의 말에 빙그레 웃는다. 


 여섯 가구가 함께 세 들어 살고 있는 지금의 집. 수도꼭지 하나가 시설의 전부인 욕실을 공동으로 사용했고, 마당의 수도에서 물을 길어다 쓰고 있었다. 그의 집과 맞은편에 살고 있는 중학교 교사의 집을 제외하면 단칸방이라고 했다. 이곳은 서아프리카와 달리 핵가족 형태를 띠고, 가족과 떨어져 사는 독신인구가 많다. 부족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인구를 분산시키는 정책을 편 영향인 듯하다. 120개나 되는 부족들을 섞기 위해 학생들을 다른 지방의 학교로 보내 교육을 받게 하는 것도 그 중의 하나다. 그래서 기숙사나 관사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아이들을 키우며 이런 저런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 그곳을 떠나 자신의 집으로 이사 갈 꿈으로 행복한 그. 몸뚱이 하나로 삼십대 초반의 나이에 자신만의 집을 갖게 된 사내. 탄자니아에서 보기 힘든 사람이다. 

  그의 아내가 정성스레 준비한, 감자에 소고기를 넣어 찐 전통음식을 맛나게 먹고 나오면서 집들이 선물로 예쁜 식기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탄자니아에서 소피아

10월 15일

라면을 끓이며

 

 

냄비에서 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다.
옆에는 라면 봉지 두 개가 입을 벌리고 있다. 스프 봉지를 꺼내 봉지를 뜯고 끓는 물에 털어 넣는다. 그리고는 볼품없이 잘라놓은 소시지를 넣는다. 이곳 사람들은 도마를 사용하지 않기에 손에 들고 뚝뚝 자른 탓이다. 마지막으로 라면의 면발을 넣는다.
어학원 부엌이 한국인으로 붐빈다. 며칠 전 한국인 선교사 몇 분이 스와힐리어 교육 상담을 받으러 왔다가 라면 두 봉지를 건네주고 간 것인데, 어학원 식당을 잠시 빌려 요리를 하고 있는 중이다. 며칠 전부터 감기로 골골거리는 나를 위해 감기약이라며.....
접시에 소복이 담긴 밥과 야채 볶음 사이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냄비가 놓인다.
한국 음식에 어울리는 식기가 있을 리 없다. 아쉬운 데로 찻잔을 그릇 대신으로 삼아 면발을 나누어 담은 후 냄비 체 들고 국물을 따른다. 라면 두 봉을 네 명이 나누어 먹어야 하기에, 물을 넉넉히 잡은 탓에 심심해진 국물이지만 다들 맛있다며 법석을 떤다.

해외생활을 꽤 했지만 한국 음식을 그리워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세네갈에서 유일하게 생각났던 건 짭짜름한 젓갈이 유일했다. 그것도 잠시 스치듯 몇 번 생각난 것이지 크게 아쉬워하지도 않았었다. 그런 내가 새삼 입맛이 변해 갑자기 한국음식에 감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동료들이 약이라며 처방해준 뜨거운 국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따뜻함이 난데없는 행복을 주고 있다.

 

 

카카오톡단톡 방은 우리의 연락망이다. 누군가 수다가 필요하면 모임을 주동한다.
“호디“ “카리브”호디는 남의 방에 들어가기 전 노크 대용으로 쓰는 스와힐리어인데, 우리에겐 일종의 암호다. ‘프린세스’의 방이 우리의 아지트다. 그의 방 만이 유일하게 전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프린세스’. 와니. 유일한 남자다. 낯선 상황이 되면 여지없이 까탈을 떨곤 해서 누군가 그를 ‘프린세스’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인데 그 표현이 너무나 절묘해서, 그가 까탈을 부리기 시작하면 우리 중 누군가가 ‘아이구, 우리 프린세스 어쩌나’하며 그들 어른다.
우리가 그렇게 놀려도 마음 상해하지 않을뿐더러 며칠만 지나면 언제 까탈을 부렸냐는 듯 상황을 즐긴다. 또한 육체적인 힘이 필요할 때는 말없이 팔을 걷어붙일 줄도 안다.
약속시간이 되면 여행을 좋아해 이미 여러 나라를 경험하고 외국인 친구들과 가장 잘 어울려 우리의 부러움을 사기도 하는 스텔라가 호디를 외치며 입장한다.
조금 지나면 웃음소리가 하이디처럼 경쾌해 명랑소녀라고 이름 붙인 필리가호디를 외치며 들어온다. 신기한 건 나와 참 다르구나 싶은데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의외로 닮은 점이 많아 편한 아가씨다.

우리 넷은 하는 일도 나이대도 성격도 다 다른데, 매우 독립적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법에 익숙한 것이 비슷하다. 그래서 우리는 갈등이 없다. 설사 사소한 오해가 있다고 해도 솔직하게 표현하고 받아들이기에 금방 제자리로 돌아오는 탓이다.
아침을 좀처럼 먹지 않는 내가 하루는 아침 시간에 식당에 갔다. 보통 식사 시간이 되면 먼저 간 사람이 자리를 잡고 먹고 있으면 하나 둘 모이게 마련인데 그날은 아무도 오지 않는다.
맞은편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던 선생님 중의 한 분인 장구오가 동료들의 안부를 물어온다. 잘 모르겠다는 나의 대답에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네가 아는 게 도대체 뭐냐, 고 정색을 한다. 이곳 탄자니아는 아침에 일어나면 이웃집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며 그건 아주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한다.

아침 식사보다 잠을 선택했다는 걸 알기에 방해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자, 아프거나 위험한 일이 발생했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며, 탄자니아에는 ‘한 손가락으로는 이를 잡을 수 없다’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나는 그냥 웃고 만다. 옆방에 살면서 따로 와서 밥을 먹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자신의 그릇을 챙겨 먼저 자리를 뜨는 우리가 그들 눈에는 참 별스럽게 보일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장구오에게 이런 우리를 설명할 길은 없다.

 

방으로 돌아오는 밤하늘에 보름달이 바오밥나무 가지에 걸려있다. 필리가 말한다.
“특별한 일이 있는 날 하늘을 쳐다보면 보름달이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래서인지 정말 좋은 일이 있을 때 하늘을 올려다보면 보름달이 있더라고요.”라면 두 봉지가 특별함을 줄 수 있는 지금. 난 이 순간이 좋다.


 

소피아
7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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