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포획된 시민사회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지금의 금천 시민사회는 소수의 열정적이 운동가들에게 포획되어 있는 것 같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질까? 물론 이는 비단 금천만의 문제는 아니다. 내가 토론을 이유로 타 구에 가서 상황을 물어보면 비슷한 대답들을 듣는다. 

시민사회가 소수의 열정적인 운동가들에게 포획되었다는 것은 몇몇 소수가 한 지역의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좌지우지하며, 마치 모든 시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처럼 왜곡되어 있다는 상태를 말한다. 이는 비단 시민사회뿐만 아니라 지역 정당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이러한 포획은 다양한 정책의 발굴이나 생산을 왜곡되게 한다. 물론 정당이 일부 열성적인 활동가들에 의해 포획된 사례는 한국만이 아니다. 서구에서도 정당 정치를 개선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개혁의 대상으로 이 문제가 거론되고 있다. 말하자면 소수의 열성적인 당원활동가들은 그들의 바램을 계속 유지하는 방향으로 정당을 이끌고 갈 가능성이 크고, 그런 경우 정당운영이 경직화되면서 유권자들의 선호 변화에 적응력이 떨어지는 그런 정당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한국의 정당정치와 대통령제 민주주의–정진민) 맹목적으로 열성적인 정당의 활동가들이 정당을 일반 유권자나 지지자들과 유리되게 만들듯이 시민사회의 일부 열성적인 활동가들이 많은 시민들을 시민사회의 열린 공적 공간과 유리되게 만들고 있다. 과정에서 갈등은 치유되지 않고 깊어져 간다. 

왜 이런 일들이 반복되어 나타날까?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 서문에서 우리는 목록에 없는 유산을 상속받았다고 말했던 것과 같이 우리 인간의 태생적인 한계일까? 


1 갈등과 위기를 바라보는 시각

어떠한 사회나 개인의 수준은 늘 갈등과 위기 속에서 드러난다. 위기에 대한 세련된 반응은 그 사회를 세련되게 만들고 역동적인 반응은 역동적인 사회를 만들며, 천박한 반응은 그 사회를 당연히 천박하게 만든다. 마키아밸리는 갈등이 국가를 발전시키는 근간이라고 하였다. 갈등을 구조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발전의 근간으로 여기지 못하고, 타인을 경멸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할 때 그 사회의 천박성은 극도로 드러난다. 서양 속담에 누군가를 괴물로 생각하면 어느 순간 진짜 괴물이 되어 나타난다고 하였다. 이는 동양 불가에서는 “나는 너다.”라는 화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런 관계에서는 모두가 힘들다. 

이제는 금천의 지역사회에도 갈등을 구조적으로 파악하고 세련되게 풀 수 있는 그런 노력이 필요하다. 서로를 말리거나, 대승적으로 참으라고 하는 그런 식으로의 방법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응보적 정의보다 회복적 정의가 제대로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할 때다. 노파심이지만 옥상옥처럼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또다른 구조를 만들자는 것을 말함은 아니다. 


2 행위의 정당성에 대한 착각 

열심히 활동하는 것은 장려 받아 마땅하지만 그것으로 빅 마우스가 되어 여기저기 참견하고, 큰 목소리를 내는 것은 옳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동료 시민에 대한 패악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적 행위의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은 크게 두가지 이다. 하나는 시민들의 투표나 합의된 절차 등을 통해 공직에 당선된 사람의 정치적 행위가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론장에서의 다수의 합의를 통한 정치적 행위가 정당성을 획득한다. 물론 무엇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정치인이 투표라고 하는 과정을 통했다고 해서 모든 행위에 정당성이 부여 된다거나, 공론장에서의 시민사회가 합의를 거쳤다고 모든 행위가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기준으로 타인의 목소리를 잠재우는 것은 정당성 없이 시민사회를 포획하는 것과 같고, 시민으로서의 지위를 남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자유와 평등, 노동에 대한 권리 등 인간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들을 누군가가 침탈할 때의 불퇴전의 용기는 소중하다 못해 숭고하다. 하지만 (권위주의가 해체되지 못한 공간에서의 불퇴전의 용기와 다르게) 권위주의가 해체된 공간에서의 불퇴전의 용기는 자신을 과시하는 것 외에는 결코 유익하지 않다. 한 공동체에서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문제는 신이 아닌 인간으로서는 그 누구도 절대화 시킬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독재와 반독재의 싸움, 민주와 반민주의 싸움에서의 익숙했던 덕목이었던 불퇴전의 용기가, 권위주의가 해체된 그래서 새로운 시민사회라는 공동체를 건설해야함을 요구 받는 곳에서는 과연 어떤 용기가 주된 덕목으로 대체 되어야 하는지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3 중세 권위주의시대의 개념적 정의(定義) 방식을 아직도?   

칸트는 합리론과 경험론을 관념론으로 수용하면서, 세계는 객관적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식 체계 속에서 재구성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그가 말했던 입법자로서의 준칙은 사실 모두의 준칙이 아니라 자신의 인식체계속의 준칙이었다. 근대는 이런 소통불가능성을 태생적으로 안고 태어난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더 나아가 근대는 인간에게 자유를 부여하면서 무언가에 대한 개념적 정의를 스스로 또는 마음대로 내릴 수 있는 기이한 자유까지 부여하였다고 말했다. 즉 국가나 사회 또는 민주주의, 정치 등 모든 사물이나 추상적 언어를 포함한 어떠한 것에 대한 개념적 정의를 마음대로 내릴 수 있는 자유를 말이다. 이런 기이한 자유는 전통적인 권위주의적인 체계에서는 전형적인 소통불가능성을 내포한다. 그런 사회에서 자유가 인정되지 않는 이유다. 그러나 자유로운 체제 속에서는 이런 기이한 자유가 오히려 초기의 소통가능성을 열어젖히는 역할을 한다. 말하자면 사전적 정의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리는 행위가 새로운 가능성을 연다는 것이다. 비로소 근대는 이것을 발전과 진보의 근간으로 삼는다. 스티브 잡스가 휴대폰이나 컴퓨터에 대한 개념적 정의를 달리하면서 새로운 차원의 진화된 휴대폰과 컴퓨터의 생태계를 만들었듯이 말이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타인과 완벽하게 소통할 수 없다. 오히려 자유로운 인간의 불안전한 소통 때문에 가장 크게 소통의 가능성을 확보하는 역설이 근대의 소통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중세나 권위적인 시대에서 개념적 정의는 늘 권위자에 의해서 정리가 되었고, 누구도 부정해서는 안되었으며 인간은 그대로 외우기만 하면 되었고 모르면 권위자에게 물으면 되었다. 그러나 모든 사물이나 추상적 언어 등에 대한 개념적 정의조차도 개개인이 자유로이 내릴 수 있는 근대에서는 그런 말이 통하지 않는다. 우리는 때때로 도대체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볼멘 소리들을 한다. 세대간 지역간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게 아니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직 권위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증거다. 몇몇 넋 나간 과거의 사람들이 독재 때가 좋았다라는 푸념과 다르지 않다.  


정리를 대신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을 “번갈아 지배하면서 지배 당하는 자”라고 정의를 내렸다. 그러나 주변을 보면 누구나 오르려고만 한다.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구의원이 되면 시의원이 되어야 하고 구청장이 되면 국회의원이 되어야 한다. 국회의원이 낙마하면 견디지 못한다. 톨스토이의 이반일리치처럼 사형선고를 받고서야 후배가 나를 밀어내고 국회의원이 되었음을 깨달을까? 우리 사회엔 아직도 국회의원 하던 이가 구의원을 하거나 반장이나 통장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반장이나 통장을 만나면, 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자신은 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이런 왜곡된 덕목이 시민사회라고 예외는 아닌 것 같다. 때때로 은근히 자신의 지위와 경력을 들이대는 이유가 적어도 자신이 누구니까, 어느 정도의 위치 정도는 되어야 하는 사람이라고 과시하는 것 같다. 자신의 소중한 경험이 공적인 자산이 되지 못하는 이유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시민으로서의 기본적인 덕목도 스스로 지켜내지 못하면서 시민사회를 포획하려는 것이다.     


금천 시민사회에는 어른이 없다. 그들의 결정에 따라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낼 어른이 부재하다. 모두가 어른인 척 하고 있으나 불편한 상황에서는 회피한다. 어른은 있을지 모르지만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작은 갈등도 확대 재생산되어 끝까지 간다. 몇몇은 오히려 갈등을 유발하면서 불퇴전의 용기를 낸다. 이런 사람들이 열심히 하면 결국 다수의 시민과 유리된다. 시민과 유리된 시민사회는 그냥 그들만의 집단에 불과하다. 다수는 원치 않는 상황에서 결정을 강요 받게 되고, 또한 그들의 넋두리를 계속해서 들어줄 인내심도 곧 한계를 드러낼 것이기에 다수는 다시 사라지게 된다. 결국 다시 소수만이 남아서 지역을 포획하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 주권은 요원하다. 물론 나 역시 자유롭지 못하며 반성할 일이다.  



                              금천구 주민 

이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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