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자니아 통신] 커피꽃 향기


“다 젖었네.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온 거야?”


옅은 회색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다. 

낮게 드리운 하늘을 보며 우산을 챙겨 나왔지만, 오토바이 위에서 소나기를 만나니 그것도 별 소용이 없어 물에 빠진 생쥐 모양이 되어 들어서는 나를 보고 건넨 첫 마디였다. 오토바이 위에서 돌아가야 하나 잠시 생각도 했지만 비 오는 이곳이 얼마나 아름다울지를 생각하며 온 것이다. 도시에서 멀찍이 떨어진 한적한 산골이기에 버스가 없어 큰 맘 먹고 움직이는 곳이지만, 이곳은 내가 탄자니아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다. 나지막한 언덕에 위치해 시야가 확 트였을 뿐 아니라, 신이 창조한 본연의 아름다움에 인간의 손맛이 더해져 새로운 땅으로 거듭난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의 매력 한 가지를 더 덧붙이자면 에스프레소 맛이 최고이기도 하다. 

 

젖은 몸이 체온을 빼앗겨 춥다. 시간이 지나 옷이 마를 때를 기다릴 수 밖에 없다. 우선 따뜻한 차를 주문한 후 노트북을 부팅시키고 있는데 그녀가 손에 헤어드라이어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비에 젖은 새마냥 오돌오돌 떨고 있는 내가 안스러워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드라이어를 건네며 한쪽 손을 자신의 가슴에 대고 한쪽 눈을 찡긋한다. 따뜻한 바람이 머리칼을 스치자 헤어스타일이 보송보송 살아나며 몸에도 온기가 돈다. 따뜻하다. 그렇게 만난 모니카 휘슬러는 덴마크 여성이다. 



< 커피농장을 운영하고 있는 모니카 휴슬러 부부 (왼쪽)30년전 (오른쪽)현재의 모습>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 휴가를 보내기 위해 탄자니아에서 한 달을 머물게 되었고, 스위스 청년을 운명처럼 만나게 되었다고 했다. 한참 예쁜 스물둘, 스물여덟, 둘은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단다. 어째 영화 속 이야기 같다고 했더니 잠시 기다리라며 자리를 떴다. 돌아온 그녀의 손에는 태블랫 피씨가 들려있었다. 곧 신문기사 한 편이 그녀의 손 위에 펼쳐졌다. 가장 먼저 눈길을 잡은 것은 한 눈에 봐도 오래된 사진이다. 짧은 금발에 핫팬츠 차림의 왈가닥 소녀와 뒤에서 그녀의 목에 팔을 두르고 예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보고 있는 청년. 꼭 30년 전의 그들이었다. 그들의 러브스토리는 기사거리로 손색이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 청년은 스위스인 가족이 세대를 이어 경영하던 커피 농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결혼 후 그곳을 인수해 지금의 ‘우탱굴레 커피 로지’를 지었다고 했다. 그 후 잔지바르에도 사업을 확장해 커피 하우스를 오픈했고, 지금은 다르 에스 살람에 로스팅 공장까지 가지고 있단다. 한 남자와 시작된 운명적인 사랑은 동화로만 그치지 않고 커피로 확장되며, 그녀를 유능한 사업가로 변신시킨 것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커피 경진대회에서 우승해 상장과 트로피를 손에 든 사진을 보여주며 자신이 너무 자랑스러웠다며 두 팔을 치켜들고 흔든다. 그 속에는 커피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이 듬뿍 베어있었다. 결혼 전에도 커피에 대해 관심이 있었던 거냐고 했더니 문외한이었단다. 이제는 ‘커피 전문가가 된거냐’,는 나의 짓궂은 질문에 ‘그렇게 되고 싶다’,라는 말로 대신했다. 


커피 꽃은 이 삼일 동안 재스민과 비슷한 강한 향을 뿜고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꽃만 남는다고 했다. 그 이유는 자신도 모르겠다고도 했다. 얌전한 새댁 같기만 하던 순백의 꽃. 향마저 없구나,하며 아쉬워했던 기억이 있었는데, 내 속마음을 읽은 것마냥 그녀가 말했다. 자신이 가장 아름다운 때를 알고 그때에 맞춰 강한 향기를 뿜어내는 것 또한 최고의 후손을 남기기 위해 선택한 고도의 전략일 것이다. 그들 역시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짧은 순간에 서로를 향해 강한 매력을 발산하며 서로를 끌어당겼을 것이다. 그렇게 만나 평생을 함께 하며, 한 곳을 바라보며 성장했을 그들, 커피 꽃을 닮았다. 그리고 몇 장의 사진들을 더 펼쳐 보이는데 덴마크의 유명한 배우, 여왕의 아들과 함께 한 사진 등이다. 세월의 흐름은 발랄했던 소녀의 모습을 중년의 사업가인 아름다운 여인으로 바꿔놓고 있었다. 

앞으로의 꿈이 있다면 말해 달라고 하자, 우탱굴레 커피가 한국에도 전해지길 바라며, 자신의 커피를 위해 그곳에 오는 한국인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여성, 혹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개인적인 꿈을 말해 보라고 했다. 


“너는 이미 알잖아. 나의 삶이 곧 커피야.” 


내게 누군가 똑 같은 질문을 한다면 나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짧은 여행을 위해 아프리카에 왔던 그녀. 오랫동안 동경한 땅 아프리카를 찾아 온 나. 그녀는 이 속에서 평생의 꿈을 찾았는데, 내게 지금 아프리카는 너무나 거대해 꿈으로 담기에는 막연하다. 구체적이고 손에 쥘 수 있는 내게 맞는 꿈을 찾아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탄자니아에서 소피아

12월 10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