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모칼럼

원전 공론 유감


20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신고리5·6호기공론화위원회 최종권고안 발표에서 김지형 위원장이 최종권고안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사를 재개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탈 원전 에너지 정책을 공약으로 제시했고 정부 구성과 동시 건설 중인 신고리 5·6호기 공사를 중단시켰다. 그러나 정치권(야당)은 물론 국민들의 반대 여론이 극렬하게 일자 이의 조정을 위하여 시민대표 참여에 의한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위원장 김지형)’를 구성하였고, 숙의 과정을 거친 후 이에 참여한 시민대표 471명의 공사 재개 권고안을 받아들인 결과다. 

과제의 내용이나 중대성을 볼 때 민주적 과정을 거친 합리적 결정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여론이고 더러는 민주주의의 한 완성된 모습이라는 극찬조차 있다. 문제 제기자인 문재인 대통령조차도 “숙의 과정을 거쳐 지혜롭고 현명한 답을 찾아주셨고, 자신의 의견과 다른 결과에 대해서도 승복하는 숙의민주주의의 모범을 보여줬다”고 평가하고 “이번 공론화 경험을 통해 사회적 갈등 현안들을 해결하는 다양한 사회적 대화와 대타협이 더욱 활발해지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진행 모습을 볼 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운 완벽한(?) 과정이고 결과다. 그러함에도 마음 한구석에 공허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원전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필자의 편견적 사고 때문이리라. 

솔직히 말하면 필자는 당초 원전 찬성론자였다. 한국전쟁으로 폐허화한 국토, 모든 것이 부족한 사회에서 오랜 시간을 가난과 함께 살아온 터라 먹는 것이 중요한 일상이던 소년시기를 보낸 필자에게는 먹거리를 해결해 주는 가장 확실한 방향인 나라의 산업발전은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희망이자 가치였다. 조금씩 나아지는 경제사정에 감사에 더하여 희망을 부풀리던 청년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애국심으로 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했기에 산업 동력인 에너지 확보는 지대한 관심사였고 따라서 원자력 발전에 대한 애정은 마치 자기 성과인양 자부를 둘 정도였다. 부존자원이 부족한 나라에서 이보다 나은 에너지 자원은 없다는 것이 당시 필자의 사고였다.

과거에 필자가 가졌던 것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지금도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원자력 즉 핵물질(Nuclear Materials)에 대한 문제점을 제대로 인식한 필자지만 그런 사고(思考)를 가진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사물에 대한 사고는 개인의 자유의지이고 그것은 각자의 지식과 소양(素養)에 바탕하고 있으니 그를 어찌할 것인가. 다만 사회적 질서를 구하기 위하여 내 사고와 다툴 일이 아니면 그냥 두고 볼 수밖에. 

따지고 보면 현실에서 원자력만한 에너지는 없지 않는가? 경제성도 그렇고 환경오염 문제도 그렇고 또한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탄소 배출 문제도 그렇다. 그럼에도 원전을 기피해야 하는 것은 가공할 핵무기(核武器, nuclear weapon)의 위력도 그렇지만 그것의 가동으로 필연적으로 발생되는 방사능(radio-activity) 위험 때문일 것이다. 방사능의 위험성은 인류가 가장 기피해야 할 두려운 존재인 것은 원전 찬성론자들도 부인하지 않는다.

비전문가인 주제에 핵무기나 방사능의 위험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미 많은 전문가들에 의한 각종 자료들이 풍부하게 나와 있는가 하면 그 내용도 더욱 세밀하게 정리되고 있으니 말이다.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그럼에도 공론이라는 미명으로 그것의 존치를 결정한 것이 과연 공익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판단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음을 감추지 못한다. 

세상은 사유(思惟)하는 인간들이 지배하는 곳으로 그들에 의해 형성된 사회구조에 각자의 개성과 주관들이 지식으로 포장되어 만들어진 질서에 의해 운행되는 공간이다. 그러한 질서는 공동체적 합의를 거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것들에 오류가 있는 경우를 왕왕 발견한다, 인간들은 분별할 줄 아는 지능을 가진 만큼 보편성을 지향하지만 자기 합리화 집착도 가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합리적인 것이라 하여 오류가 없는 것도 아니고 또한 항상 정의로운 것도 아니다. 공론 과정에서 숙의민주주의를 통해 얻어낸 결정이라 하여도 공감을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다. 

짐작을 하였겠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는 공론이라는 과정으로 원전 건설 재개를 끌어낸 결과에 대해 유감을 표하고자 함이다. 이 결정을 이뤄낸 공론은, ‘원전 건설이냐 중단이냐’를 두고 그에 대한 일정 지식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에게 관련 정보를 제공한 한 후 숙의(熟議)한 것’이라 이해를 한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탓할 데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멋진 결론 도출 모습이다. 그런데도 유감을 참지 못하는 것은 아무리 좋은 모습의 숙의 민주주의라도 그것이 만능이 되는 것을 경계하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범적 공론이라 하여 이를 사회 갈등해결의 만능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공론(公論)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여럿이 의논함. 또는 그런 의논’, ‘공정하게 의논함. 또는 그런 의논’이라 하고 있다. 전자나 후자의 정의는 일반적 이해지만 이번 경우를 표현하기에는 추상적이다. 이 장에서 뜻하는 상황과 목적을 이해하기가 그렇다는 뜻이다. 전문가들의 해석을 보니 “공공적인 의견”, "다수자가 지니는 견해와 사상의 경험적 보편성"[법철학』301절] 이라고 하고 있다. 보통 지식 수준으로 이해하기가 좀 어려운 표현이지만 사전적 의미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필자 나름의 이해는, 이 장에서의 ‘공론’은 사회갈등에 대한 공동체적 합의도출이 목적이다.

이번 공론화의 경험을 정부는 평가하면서 “향후 다른 사회갈등 사례에 적용할 수 있도록 공론조사 표준화를 개발하여 우리사회의 제 사회갈등 해결 모델로 정립하겠다.”고 한다. 이러한 정부의 자세는 일견 국민의 뜻을 존중한다는 것으로 비쳐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들의 찬반 의사에 대한 판단이 어려울 경우 국민여론에 의존하겠다는 것으로 책임 회피적인 모습으로 보이는가 하면 포퓰리즘적이라는 비판 여지를 가진다. 국가의 정책 결정은 국가 통치시스템의 룰(rule)에 의해 처리하여야 한다. 이러한 질서를 마련하려고 국민들은 선거를 통해 국가 지도자를 선출하였다. 물론 국가의 중요한 정책 수립에 국민여론을 통한 국민의견을 참고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것의 정도나 한계를 분명히 해야 하고, 그런 범주에서 국가는 시행을 주도하고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가져야 한다. 제대로 된 국가의 통치구도는 그래야 한다.

금번 공론에 대해 ‘대의 민주주의 가치 훼손’을 주장하는 소리가 있는가 하면, ‘대의제와 다양한 형태의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를 가진 여론수렴 수단은 배치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이는 법제도에 의해 민간 또는 민·관이 참여하고 있는 ‘노사정위원회’, ‘최저임금위원회’ 와 같은 법제도에 의한 위원회가 운영되고 있음을 예로 들고 있다. 전자는 국회의 존재를 의식하는 것이지만 우리 사회에서 설득력을 구하기는 어려울 거 같다. 후자는 공무원이 아닌 민간신분도 국가정책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강조하는 점에서 공감이 간다. 그러나 유의해야 하는 것은 국가정책 결정에  민간의 영향력 행사가 있다 하더라도 그 결정은 정부의 고유 권한이고 따라서 그에 따른 책임자라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이론의 전개는 기왕에 결정된 신 고리 5·6호기 원전 공사 재개를 반대하거나 문제 삼고자 함이 아니다. 어떻든 합리적인 진행에 의하였고, 그 공론에 참여하여 반대한 자는 물론 국민 다수가 수긍하는 만큼 그 결정은 존중되어야 한다. 다만 이 장을 통하여 피력하고 싶은 것은 국가 정책에 대한 국민 의견을 묻는 것은 마땅하고 또한 합의 도출이 민주적이고 합리적 과정을 거쳤고 그것이 현재에서 공익이라 하더라도, 과연 미래에서도 공익적인가를 살펴야 한다는 점이다. 인간이 두는 가치는 시간에 따라 가변적이지 않는가! (♣2017.10.28.)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해 다양한 

마을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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