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기록프로젝트’는 (사)금천문화역사포럼, 라디오금천,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이 협력해 방송 형식으로 주1회 총 10회 차에 걸쳐서 진행된다.

이 이야기들은 금천에 살면서 직접 듣거나 본 것, 전해들은 이야기의 기억들로  역사문헌들과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 구술내용에 대한 검증은 이후의 단계로 미루고 최대한 이야기를 모아내는 것에 힘을 모았다.   라디오 녹음분은 밴드 '라디오금천'에 가입해 들을 수 있다.  편집자 주




방귀쟁이 며느리라는 전래동화가 있다. 이 동화를 한글 배우시는 어머니들께 읽어드리면 참 재밌어 하시며 겪은 일이라 그 힘들었던 시절을 회상하신다.

방귀는 생리적인 것이고 참으면 병나는 것인데 그걸 하지 못했던 삶, 억압의 삶...

여인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이번에 나눌 이야기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참 많았을 것이다.

우리동네 기록프로젝트-금천을 기억해 제 2화에서는 첫 방송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에게 들은 구한말의 이야기 - 관아터와 흥선대원군 별장 편’에 이어 ‘내가 겪은 일제시대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진행 : 민경아(은행나무도서관, 이하 ‘민’), 이성호(라디오금천, 이하 ‘성’) 게스트 : 이석기(1935년생, 이하 ‘이’), 박상일(1945년생, 이하 ‘박’)


민 : 본격적으로 내가 겪은 일제시대 이야기를 해 보겠다. 총론적으로 일제시대에 대해 말씀해 달라.

이 : 우리는 강점을 당했고 일본은 강점했다. 서로 불편했고 우린 저항했고 일본은 그 저항을 무릅쓰고 지배하고자 점점 악랄해졌다. 피부로 느끼고 사는 사람들은 당하는 우리쪽이었다. 고통스러웠다. 그 한계가 관공서에 가보면 아주 뚜렷하다. 지금은 행정기관이라 하지만 일제시대에는 관공서라 했고, 관공서 종사자를 관리라 호칭했다. 관리들의 위세가 아주 고압적이였다. 어쩌다 민원으로 찾아가면 현관문 열고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일장기와 황국시민 선서(외침)에 큰절을 해야 했다. 공손하게 실무자에게 물어보고 관리자가 대꾸할 때까지 잠자코 있어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따귀 맞기가 일수였다. 그래서 시민들이 관공서에 잘 안 가려했다.

성 : 주민이 관공서에 갈일이 있나?

이 : 그렇다. 식량 배급이 잘 못 됐을 때 찾아가야한다. 동네 구장이 면사무소에서 보낸 자료에 의해 배급이 되는데 때로 오차가 있었다. 예를 들어 다섯 식구가 있는데 세 식구분만 배급이 될 경우가 있다. 먹고 살기가 절대적으로 힘들 때라 구장한테 따지면 면사무소로 가라해서 어쩔 수 없이 관공서에서 따귀를 맞더라도 가야했다. 관공서앞에서 떨려 더듬기라도 하면 그냥 맞았다. 대항 할 수 없었다. 이런 식의 악재는 흔했고 각오하고 살았다. 과장처럼 들리겠지만 그 시대를 겪은 노인한테 물어봐라. 사실이다.


민 : 직접 관공서에 가봤나?

이 : 가봤다. 당시 이사 가면 ‘기류계(지금의 전입신고, 주민등록등본등의 역할을 함)’라는 것을 써야했다. 나는 충무로 2가에서 일본인들과 유치원, 초등학교 3년까지 보내고 4학년 1944년 11월 때 금천에 먼저 혼자 오게 됐다. 혼자 기류계를 쓰려고 면사무소에 갔다. 당시 면사무소 직원들도 일본말을 잘 못했고 당시에 시흥에 나만큼 일본말 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린 내가 혼자 와서 일본말로 신청하니 처음에 직원들이 의아해 했다. 멀리서 지켜보던 부면장이 나를 데리고 담당자에게 데려다 줘 일본말로 처리했다. 나중에 동네에 돌아와 얘기하니 아저씨들이 따귀 안 맞은 것만으로 다행으로 알라고 해서 사람들이 많이 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민 : 10살 무렵에 시흥에 와서 혼자 기류계를 써 냈으니 어른들이 참 똑똑하다 평가받지 않았을까?

이 : 똑똑한 것 보단, 면사무소 직원들조차 나 하곤 수준이 다른 일본말을 썼다.

성 : 면사무소 직원들이 대부분 조선인이었나? 그리고 금천에 살았나?

이 : 조선인들이지만 다 처음 보는 얼굴이라 어디에 살았는지는 모르겠다.


민 : 박상일 선생님은 해방둥이인데, 면사무소, 주재소(경찰서), 신사등 위치적인 설명 부탁한다.

박 : 관공서라는 것이 면사무소, 시흥지서(이석기 어르신 어렸을 적은 주재소라 불림), 우체국, 역, 학교가 있었다. 시흥국민학교만 있고 중학교는 없었다. 내가 중학교 들어갈 때 시흥 고등공민학교가 생겼다. 정식 중학교가 아니라 졸업 후 검정고시를 봐야 중학교 학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신사가 있었던 자리가 내 어릴 적에는 없었고 시흥교회가 있었다. 그래서 내 1학년 입학식을 시흥교회에서 했다. 시흥국민학교 자리는 미군들이 주재했던 시절이라 교회, 파괴된 공장, 야산 등에서 공부했고 내 3학년 때 첫 천막 교실(현 단군전 자리)이 들어섰다. 5학년 때 시흥초등학교 교실1동이 지어졌다.

시흥군 동면사무소는 현 구립 꿈나래 어린이집 자리다. 63년께 영등포구로 시흥군 동면이 편입되면서 기존 동면사무소가 1동 사무소로 바뀌었다. 현 시흥1도 파출소 자리가 시흥지서 자리다. 우체국은 면사무소 옆에 작게 있다가 나중에 길옆으로 나왔다. 시흥역은 지금의 위치와 같다.

민 : 면사무소는 지금의 주민센터인가? 구청인가?

박 : 주민센터다. 면사무소가 서울시 편입이 되면서 동사무소가 되고 현 주민센터이다.

성 : 시흥1동 동사무소가 구립 꿈나래 어린이 집이 됐다.

박 : 내 어렸을 적은 목재로 된 작은 공간이었다. 후에 벽돌로 2층, 100여 평으로 확장했고 앞의 마당이 굉장히 넓었다. 그 앞에 큰 시흥시장이 있었다. 

이 : 6.25호 이후에 판자집들 앞에 광주리 장사로 하다, 몇 년 후에 전부 술집들로 변했다(텍사스촌처럼). 

성 : 면사무소 주변에 가옥들이 있었나?

이 : 초가집이 많았다. 일본사람들이 발소라 명칭 했다. 출발할 때의 ‘발’ 의미가 있다. 

민 : 일본사람들이 살았나?

이 : 일본사람들 몇 살았다. 지금 대한전선 자리에 뭔가 있었다. 이름이 잘 생각 안 난다. 말미고개 내려가면 우측에 현 롯데캐슬 일대가 일본군 청년훈련소로 쓰던 일본군 부대였다. 그것을 미군이 인수해서 한국군에게 나중에 넘겼다.

성 : 주재소는 시흥사거리에서 시흥대교로 가는 길 왼편에 있는 길 맞나? 순경들이 상주했나?

박 : 주재해서 동네에 사건이 있으면 나와서 조사했다.

민 : 이석기 선생님, 신사 이야기 부탁한다.

이 : 자주 갔다. 주기적으로 학생과 일반 주민도 참배해야한다. 속칭 ‘진자삼빠이’라 했다. 손바닥 세 번 두들기고 절하는 것이다. 신사는 늘 동쪽에 대고 하는 것이다. 동쪽에 천황이 있으므로. 신사 마당은 서쪽을 보고 있다. 제일 신성시하는 것이 신사다. 조선13도에서는 신궁이 중심이다. 기원 2600~2700년 전부터 일본에는 야스쿠니 신사 말고 원 신전이 있다. 우리네 단기 개념이다. 예를 들어 애국자든지 설화 속 충신이 있으면 신사를 만들어 사당식으로 신사 명칭을 붙였다. 일본인들은 ‘가미다라’라고해서 신에 대한 함이 집집마다 다 있다. 이사 다닐 때도 가지고 간다. 우리말로 신주다. 우리는 사당을 밖에 모시지만 일본인은 안방 벽장안 또는 안방에 틀을 짜 넣어 놓는다. 지금 이북의 김정일, 김일성 같은 모습이다. 일본 정치인들이 그렇게 선동을 한다. 상징성이 엄청나다. 일본인들은 천황이라고 하면 아주 절대 적이다. 소련군이 8월 9일 선전포고 했을 때 천황부터 걱정했다. 핵폭탄 터지는 바람에 충격도 받았지만, 소련군이 참전하니 무조건 항복한 거다.

성 : 정기적인 참배는 얼마나 했나?

이 : 평일에 학교에서 단체로 정기적으로 했다. 

민 : 신사가 어디 있었나?

이 : 시흥교회 자리이다. 

성 : 해방 후 신사는 무너졌나?

이 : 9월 중순에 미군이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켰다. 지금 시흥5동 금강아파트 자리가 시흥 교회자리이다. 당시 초가집 몇 개 있었고 거기 사는 사람들이 관리했다. 시흥교회에서 6.25 후에 군목 두 사람이 생겼다. 이은성이라는 사람이 혼자 가서 목재였던 신사를 두들겨 부셨다. 거기다 교회를 만들었다. 우리 동네 사는 사람이 미군부대 통역자로 일했는데 그 양반이 그것을 보고 미군한테 천막을 얻어 쳐줬다. 시흥교회는 이은성과 시흥교회 종사 주민들과 미군들이 만든 것이다.

성 : 검색해보니 1904년 시흥교회가 생겼다. 탑골 쪽에 먼저 생겼다가 1947년 지금 위치로 왔다. 그러니 아마 45~46년께 허물은 듯하다.

이 : 45년에 허물고, 시흥교회는 딴 곳에서 예배를 봤다. 47년에 현 시흥교회를 세웠다.

민 : 신사자리에 교회를 세운 이유는?

이 : 당연하다. 교회는 우상을 인정할 수 없었다. 정신적인 중심지였다. 하지만 동네사람들은 해방 후 관심도 안 뒀다.

성 : 신사 지키는 사람들은?

이 : 해방 후 도망갔다. 일제 시대에는 건들지도 못 할 정도로 위세가 컸다. 주재소에서 정면으로 신사가 보였기 때문에 관리가 삼엄했다. 시흥사람들은 통칭 ‘왜곶이’라 불렀다. (왜놈 왜, 곶이=꼬치, 왜놈들이 뿌리 박은 곳, 산줄기 끝머리=곶 등의 의미로 그렇게 불렸다) 

국도가 그 앞으로 지나갔다. 전에 거기서 탑골 조씨 할머니 있는 곳으로 신호를 보내면 장정들이 내려와 횡패를 부리기도 했다.(1화 참조)


민: 신사에 여러 번 갔나?

이 :해방 될 때까지 여러 번 갔다.

일정 때 얘기는 끝이 없다. 학생 때였으니까 여름 방학 숙제 중에 무리한 숙제가 있었다.

일본군은 기동력을 말을 이용했다. 말먹이로 40관의 건초를 만들어오는 숙제였다. 한관은 4킬로그램이다. 약 150킬로그램이었다. 또 관솔(소나무 송진이 많이 묻힌 곳을 일일이 따서 모으는 것) 두 가마 만들어오기가 숙제였다. 학교 운동장은 3분의 1만 남기고 고구마를 심었다. 국력을 키운다고 고구마를 심었다. 일본이 전쟁을 일으켰는데 모든 것이 부족했다. 동남아를 일본군이 점령 했을 때 자원이 충분할지 알았는데 미군 맥아더가 도로 탈환해 제공권을 미군한테 뺏겨서 모든 물자가 부족했다. 그 부족분을 메우려 식량, 철 공출(강제 수납) 강행했다. 솥 뚜껑, 비녀 등 모든 걸 다 빼앗아 갔다. 

민 : 누가 거둬가나?

이: 면사무소, 주재소, 군인들이 거둬갔다. 구장 등의 친일파 들을 앞장 세웠다. 물론 울고, 불고 항변해도 소용없었다. 그냥 부숴버리고 가져갔다.

민: 방학 숙제를 해갔나?

이 : 일부 했다. 학생들은 말 먹이가 뭔지 몰라 아무 풀이나 베어서 말렸다. 다른 것보다 해방되어 숙제가 없어서 신났다. 하지만 바로 정신적으로 위축도 많이 됐다. 학교시간에 미국(베이)과 영국(에이)은 악질 나라라고 배웠다. 지금 이북에서 우리를 괴뢰라 표현하는 것과 같다. 사이판에서 미군점령 후 주민이 전부 바다에 빠져 ‘옥쇄’했다고 우리도 옥쇄 하라 했다. 옥쇄는 자살이다. ‘옥처럼 부숴진다’는 뜻으로 천황폐하에게 목숨으로 충성하란 의미다.

성 : 그럼 해방이 두려웠을 것 같다.

이 : 해방이 무서웠다. 일정 때 고학년 인솔에 저학년이 뒤 따라 학교에 다녔다. 그 이유는 각자 책보자기와 방공모(솜 방석을 반을 접어 위는 바느질로 박고, 가장자리에는 끈을 달아서 귀와 머리를 가려주는 용도)를 항상 가지고 다녔다. 6학년 1반 반장 지수문이란 학생이 데리고 갔다. 호압사 주지의 아들인 지수문이 8월 13일 날 옥쇄하자고 했다. 친구 김흥규(서울시로 편입돼 생긴 초대 동장역임), 이응배(지금 대화정하는 집), 정흥록, 나 등등 동네 학생 몇 십 명을 다 모아 옥쇄하러 호압사로 데리고 갔다. 막상 산에 오르니 다 도망가고 위 네 명만 남았다. 마저 올라가니 지수문이 나머지 도망간 친구들이 없다고 화를 냈다. 다른 친구가 사금파리를 깨서 정맥을 끊으면 편안하게 죽을 수 있다했다. 사금파리를 구하러 갔던 친구가 안 왔고 나와 정흥록만 남았다. 그 때 정흥록이가 내려가자했는데 나는 기다렸다가 얘기를 들어보자 했다. 정흥록은 혼자 내려갔다. 밑에서 보면 호압사 바위가 보이는데 우리 둘은 거기 앉아 있었고 고학년 셋은 밭에가 있었다, 나 혼자 기다리다 겁이나 호압사에 가보니 병 찌꺼기도 없고 사발을 깨뜨리고 있는데 제대로 된 사기가 아니라서 사금파리가 안 나왔다. 잠시 후 저 아래에서 사람 수십 명이 소리지르면서 올라왔다. 정흥록이가 내려가 친구들집에 친구들이 죽으러 올라갔다고 일렀다. 우리들 이름을 부르면서 마을사람들이 쫓아왔다. 붙잡히면 혼날 것 같아 나는 우선 도망갔다. 나중에 몰래 집에 오니 식구들이 없어 낫 들고 풀 베러 나갔다. 해떨어진 후 집에 들어온 식구들한테 야단은 맞았다(웃음).


민 : 무슨 생각으로 옥쇄를 할 생각을 했나?

이 : 그 당시 고학년들이 인솔하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습관이 되어있었다. 

성 이 일본식으로 ‘기도’란 분이 있었다. 면사무소 징용 담당이었다. 그 일을 하면서 뒷돈을 많이 받아 개화집을 지웠다. 8월 15일 날 아침에 그 집 앞에 모이라하고 멍석 네 개를 빌려 깔고 천황폐하 연설을 기다리고 있었다. 11시에 모여서 라디오 방송을 들으려는데 수신 상태가 안 좋아 잘 안 들리기도 하고, 일본 궁에서 쓰는 말이 일반 평민이 쓰는 말이랑 달라 잘 못 알아들었다. 당시 교회 장로였던 장씨 어르신만 알아들었다. 12시 넘어서 방송이 끝날 때 쯤 사람들이 다 가고 없었다. 장씨 어르신이 방송을 다 듣고 나서 일본은 망했다고 알려줬다.

그 망했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철렁했다. “아저씨 일본이 망하면 어떻게 해요?”라고 물어봤다. 아저씨가 “왜? 너 놀랬구나. 일본이 망하면 잘 된 일이다”라고 했다. 우리가 “왜요? 뭔데요?” 라고 물으니 우리는 조선이라고 알려주셨다. 일제 때 집에서 알려주고 싶어도 아이들이 밖에서 가리지 못하고 실수하고 떠들까봐, 그래서 주재소에 불려가 당할까봐 어른들이 알려주지 않아서 그 전에는 몰랐다. 정씨 아저씨가 조선이란 나라가 원래 있었고, 임금님도 있었는데 강제 병합한 거라 알려줬다. 해방했으니 우리에게 앞으로 독립만 남았다고 했다. 독립이 뭐냐고 물으니 우리끼리 나라를 만들어 사는 것이 독립이라 알려줬다.

민 : 그 사람 이름을 기억하나?

이 : 이름 기억은 못 한다. 99칸 경호원들 모일 때 그 때 들어오신 분이다. 교회 장로이고 장씨인 것 밖에 기억이 안 난다. 일제가 해방되기 몇 년 전에 교회를 폐쇄 시켰다. 교회에서 하는 집회와 조선말 사용을 못하게 했다. 하지만 애국집회(일본에 충성하는)는 했다. 교회가 폐쇄돼도 크리스마스 행사는 했다. 44년 때 다들 배가 고플 때인데 교회가면 떡을 준다 해서 친구가 가자했다. 당시 내가 외가에 머물 때 였는데 교회에 간다하니 우리 이모가 못 가게 했다. 갔다가 주재소에 걸리면 끌려가서 혼나니 못 가게 했다. 부정시설이라 교회에 전기도 없었다. 

성 : 일제시대에 전기 있었나?

이 : 탑골까지 전기 들어왔다. 일본이 망했다는 방송을 들은 이후에 정씨 어른이 바로 집에서 일장기를 들고 자기 집으로 오라고 했다. 거기다 조선 깃발을 만들어 줄테니 집에 꽂으라 했다. 내가 먹을 갈아서 태극기를 10개 이상 만들어 집에 걸었다. 조금 지나 현재 어울샘 맞은 편에 김송자씨 댁 아버지(김기송)가 날 불러 깃발(태극기)을 누가 그렸냐고 물었다. 마리 아부지(정씨아저씨 딸 이름이 세례명을 따서 정 마리아였다)가 그려줬다 하니 태극기자 잘못 됐다고 알려주셨다. 송자아버지가 일장기를 더 가져오라 해서 가져다 드리고 그 마루에 앉아서 해가지도록 태극기를 그렸다. ‘건곤감리’를 그 어른이 가르쳐주셨다. 차라리 3.4.5.6으로 알려줬으면 그 당시에 쉽게 배웠을 것이다(웃음). 그 아들이 나랑 친구였고 송자는 어린 소녀였다. 아마 시흥 쪽에 배포된 태극기는 우리 동네에서 거의 다 나갔을 것이다.


민: 어떻게 자기가 조선 사람임을 모를 수 있을까 싶지만,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 사회적 배경 상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이 : 어른들이 말 할 수 없어서 알지 못했다. 불이익을 당할 까봐. 어른들이 말하는 것을 잘 들어보면, 예를 들어 어른들이 창경원을 얘기 할 때 동관대궐이라 부르지만(경복궁 동쪽에 있다)우리에게 말할 땐 창경원이라 했다. 김일성이란 이름도 우리 반 친구가 알려줬다. ‘장계석이하고 도호조히데끼시하고 싸우면 누가 이기냐’는 농담이 있었다. ‘중국총리하고 일본총리하고 싸우면 누가 이기냐’는 어린 아이다운 농담이었다. 우린 당연히 일본이 이긴다 했다. 그 때 한 친구가 김일성이가 이긴다 했다. 그래서 김일성이가 누구냐 물으니 조선사람 이라했다. 그때 막 들어온 선생님이 그 말을 듣고 다른 친구들이 못 듣게 그 친구를 교무실로 데려가 때렸다. 하교길에 친구에게 물어보니 김일성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장계석이랑 같이 졸업하고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라 했다.

성 : 다음 시간에는 징용, 징병, 정신대 얘기를 더 깊게 했으면 좋겠다.

민 : 더불어 해방 무렵까지 이야기 하면 한국사에 대해서 큰 획을 그은 이야기를 들어 볼 수 있을까 싶다.

이 : 말을 하다 보니 부실 할 망정 얘기가 계속 나온다. 피부에 닿는 이야기들이라 갈수록 훙미가 더해질 것이다. 많은 관심 부탁한다.


정리 김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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