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태극기 유감(遺憾)  

남부노동상담센터가 만난 세상


8:0, 탄핵에 대한 헌재 재판관들의 결론이다. 당연하다. 하지만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일은 이제 시작이다. 완장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 혁신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구(舊) 대한민국의 적폐 속에서 이득은 본 이들과 그 구조에 대한 제대로 된 청산이 필요하다. 

우리가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우리가 군사독재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결과가, 그저 완장만 바꾼 과정이, 이번과 같은 참담한 현실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향한 밑으로 부터의 힘, 민중의 힘을 발굴했고 확인했다. 이 힘을 낡은 부대에 기존의 틀에 가두면 안 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하는 역사적 교훈을 제대로 살리는 새로운 출발을 하자. 그 낡은 모습 중 하나가, 태극기를 둘러싼 기괴한 전쟁이다. 

    

태극기는 태극과 팔괘가 합친 형상이다. 그런데 조선이나 고(구)려 라는 이름으로 이어진 한반도의 역사를 상징하는 것으로 태극과 팔괘는 적절할까? 태극무늬가 우리의 전통문양이란 주장도 있지만, 태극과 팔괘는 중국의 주역에 근거한 철학적 상징이다. 고유의 것이 아니라 외세 중국의 영향이니 마치 한문을 한글이라는 것처럼 어색하다. 

태극기가 만들어 지는 과정도 그렇다. 박영효가 일본에 가면서 만들었든, 이후 고종이 대한제국의 상징으로 지정했든, 그것은 봉건적 왕조의 상징이다. 봉건 왕조에서 민주공화국으로 전환은 계승보다 단절이 크게 작동되는 역사다. 민주주의는 왕의 목을 단두대에 거는 것이다. 그 혁명의 과정에서 형성된 노래와 깃발이 근대국가의 국기(國旗) 국가(國歌)가 됐다. 대표적인 사례가 프랑스다. 프랑스 국가는 프랑스 혁명 당시 마르세유 출신 의용병들이 파리에 입성할 때 부르던 노래다. 미국의 국가도 미국 독립전쟁 중 가장 치열한 격전지 중 하나였던 볼티모어의 포트맥켄리전투를 통해 작곡된다. 이렇듯 근대국가의 상징은 민중들의 민주주의와 자주독립이란 투쟁을 담는다. 


그렇다면 태극기가 지금의 태극기가 된 것도 박영효도 고종도 그리고 이후 1948년 남한 정부의 수립 이후에 이승만 정부가 결정한 것도 아니다. 전적으로 태극기가 나라의 상징이 된 계기는 3.1운동이다. 조선의 독립을 원한 민중들이 저항의 무기로서 손에 쥔 태극기가 그 진정한 시작이다. 민주공화국의 새 조국을 만들겠다는 상해임시정부의 결의, 가족들의 피눈물을 뒤로하고 풍찬노숙을 하며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독립군들, 반세반봉건 민중 혁명가들의 가슴 속에 숨겨진 깃발로 태극기가 본질이다.


그런데 최근에 태극기는 그 역사적 태극기가 아니었다. 태극기가 휘날리는 곳에서는 썩어문드러진 냄새만 진동했다. 애써 언론은 본연의 태극기를 살리기 위해 태극기와 동반한 상징을 비교했다. “친박은 ‘성조기’, 촛불은 ‘노란리본’…태극기의 동반자는 달랐다”라는 한겨레신문 기사 제목이 그렇다. 친박은 태극기를 통해 애국주의라는 성역을 자기들의 방패로 세웠다. 그 결과 태극기는 집권 정부의 가면이 되었다. 부정부패를 가리는 상징, 분단 증오를 가리는 상징, 사대 의존을 가리는 상징, 놀랍게도 태극기를 찢고 일장기를 심장에 받은 박정희와 그 후손들, 친일파들의 가면으로 태극기가 동원됐다. 3.1운동과 상해 임시정부를 역사에서 지우려는 이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왔다. 태극기가 악마가 쓴 선한 가면이 됐다. 참으로 놀라운 본말전도다. 

태극기에 오물을 묻히는 것도 모자라 친박들은 애국을 성조기와 동반시켰다. 외세와 함께 하는 애국이라니,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외국의 도움은 그 나라의 굴욕이자 수치다. 어떤 경우에도 결코 자랑일 수 없다. 미국이 기독교 신의 천사가 되어 한반도 남쪽의 민주주의화 해방을 지켜주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랑스러운 역사가 아니라 빨리 극복할 역사다. 그런데 이들은 태극기보다 더 큰 성조기를 들고 “대한민국의 핵심 안보는 한미동맹의 유지”라며 의존가 사대를 주권보다 앞세운다. 놀랍게도 이런 이들이 중국 등에 대해서는 주권을 잘도 내세운다. 지금 정말 필요한 주권의식은 대중 의식이 아니라 대미의식이다. 


태극기와 관련된 또 다른 장면도 있다. 촛불집회에 나온 태극기다. 태극기를 처음에 들고 나온 것은 더불어 민주당이라 기억된다. 민주당의 집회에서 국회의원이 애국가를 함께 부르자는 모습도 목격된다. 이들도 아마도 종북 공세를 피하기 위해 태극기나 애국가를 애써 앞세웠을 것이다. 태극기를 수단화 하는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큰 호응은 없어 잠시 사라지나 했는데 나중에 노란 리본을 단 태극기가 등장한다. 노란리본을 동반자로 한 태극기는 또 어떤 의미의 태극기일까?

세월호는 국가의 총체적 부정과 무책임과 제도적 구조를 통해 은폐된 국가범죄다. 이때 국가와 정부는 다르다는 말을 할 수 있지만, 정부를 통한 국가가 아니면 국가에 무슨 실체가 있을까? 그 국가적 범죄를 규탄하고 진실과 정의를 밝히자는데 다시 국가의 상징이라니.. 애국이 중요하려면 ‘불의에 대한 저항, 진실과 정의를 향한 대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것이 빠진 애국은 폭력이고, 무지가 만든 맹목이다. 태극기에 세월호 리본을 다는 것은 그것을 다는 이들의 개별적 진정성과 무관하게 국가 폭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세월호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이는 행위다. 태극기로 상징하는 국가주의적 애국주의에 대한 자발적 복종이다. 


궁극적으로 국가(國家)는 민을 위한 도구다.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다. 가진 자들의 지배도구가 되어있다. 그래서 야당을 하다가 여당이 되면 누구나 할 것 없이 권력의 자의성에 마취되어 부정부패와 국정농단의 포로가 된다. 가진 자들 지배자들의 이익을 전체의 이익으로 속이면서 노동자 민중에 대한 착취조차 애국이라 믿는 미신이 만들어진 힘이기도 하다. 그래서 민중들에게 국가는 여전히 비판과 저항의 대상이다. 국가 자체를 노동자 민중의 국가로 변혁하지 못하면 헬(Hell)한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하물며 그 상징에 얽매이는 인식이라니. 그것은 고여 있는 물이다. 야당이 집권한들 앞으로 나가지 못할 것이라는 경험적 비관주의, 진보에 대한 허무주의 토대다. 이런 것이 정말 청산이 절실한 적폐다.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