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모칼럼]평화의 소녀상을 살핀다




봄이 온다는 삼월은 3·1절로 시작된다. 자연히 일본을 생각하는 시간을 맞는다. 한국인에게 일본은 어떤 나라인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 가장 먼 나라, 다수 한국인에게는 그렇게 느껴지는 나라일 게다. 더욱이 독도문제에 더하여 평화의 소녀상 건립 문제로 일본과의 거리는 더욱 멀게만 여겨지게 하는 이 즈음이다. 이른바 글로벌 시대에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나라와 언제까지 이런 상태로 지내야 하는지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독도는 영토문제이니 국가의 존립과 자주의 문제이고, ‘평화의 소녀상’은 민족 자존심의 문제이므로 둘 다 양보할 수 없는 대상이라 답을 만드는 게 쉽지가 않다.  


독도문제는 현실적으로 한국이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으니 시끄럽기는 하지만 그간의 기조를 지켜나가면 된다. 그러나 ‘평화의 소녀상’ 문제는 정의의 문제이자 민족자존의 문제인 만큼 그것의 온전(穩全)을 구하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직접 피해를 당한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고 민족전체가 당한 수치인데 대한 치유(治癒)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다. 지금까지의 전개로 볼 때 그렇다. 일본 정치를 담당하는 무리들의 후안무치(厚顔無恥)로 접근의 여지가 좁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과는커녕 사실을 부정하기조차 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정의의 문제이고 따라서 어떤 논리로도 감추어질 사안이 아닌 만큼 해결의 길은 결코 묻히지 않는다. 진실은 가린다고 가리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 하지 않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미리 하자면, 아무리 속상하다 하더라도 국가 간의 문제이니 만큼 감정적 접근을 자제하여야 한다. 이 문제는 일본 내에서도 자국의 책임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들 중에는 한국인 못지않게 분개하는 이들조차 있다. 현재에 보이는 그들의 억지는 집권세력을 포함한 일부 극우 세력의 망동일 뿐이다. 유의할 것은 문제의 본질은 부정하지 않았던 것이 그간의 일본 정치역사라는 점이다. 그렇듯 그들을 두드려 깨울 여지는 그들 공간 곳곳에 남아있다. 성숙하고 유연한 자세로 접근하여야 한다. 


우선 생각할 것은 이성적 접근이다. 상대를 깨우치게 하려면 진리의 모습을 잃지않아야 한다. 비이성적 자세로는 진리를 깨우치게 하기 어렵다. 진리는 진리로 접근하여야 하고 그것은 이성(理性)을 갖출 때 강력하다. 진리의 승리는 쟁취로 인하는 것 보다는 그것을 구하고자 하는 곳에서 본연의 모습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현재 전개되고 있는 ‘평화의 소녀상’ 설치를 냉정하게 보자.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가 나타나지 않는데 대한 시위이고 그 설치 공간 선택의 당연성도 인정된다.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한 가장 적극적 선택이다. 그러나 그 후속 전개는 사려 깊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원하는 것을 구하기 위하여 보존해야 할 가치를 분명히 해야 하기 때문이다. 부산의 일본 영사관 앞의 설치를 이야기하고자 함이다. 일본이 반발하기 때문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이성적 접근을 말하고, 더하여 그것을 행위하는 가치를 말하고자 함이다.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의미하는 상징물이다. 최초의 ‘소녀상’은 서울의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되었다. 당시 그것을 보고 이성적이면서도 강력한 접근이라 찬탄을 금치 않았다. 목적을 위한, 이보다 더 강렬한 메지시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후의 전개 즉 부산 일본 영사관 설치는 최초의 소녀상이 가진 가치를 흐릴 수도 있다는 우려가 든다. 반복은 강조를 의미하기는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최초의 가치를 저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평화의 소녀상은 서울의 주한일본대사관 앞에만 있는 게 아니다. 국민모금 등 여러 방법을 통해 전국 27곳에 있는가 하면 미국 캘리포니아 주 글렌데일 시립공원을 포함한 해외에도 3곳이나 있다 서울에만도 여러 곳에 있다. 마포구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노원구 ‘마들근린공원 역사의 길’, 성북구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 앞, 동작구 흑석역 3번 출구 옆, 구로구 구로역 북부광장 등에서도 주한일본대사관 앞과 같은 모습의 ‘평화의 소녀상’을 만날 수 있다. 


그 밖에 서울의 대학생들에 의해 건립된 서대문구의 대현문화공원, 서울 서초구 서초고등학교 교정, 고등학생들에 의해 건립된 서울 중구 정동길 프란치스코회관 앞에도 있다. 특히 ‘프란치스코회관’ 앞 소녀상은 당시 ‘위안부’ 세대를 생각하게 하는 연령인 고등학생들에 의해 건립된 것이라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이 밖에도 최근에 문제가 되고 있는 부산 동구청 앞을 비롯하여 전국 여러 곳에 소녀상이 건립되었거나 건립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소녀상의 건립은 반성을 모르는 일본, 정확하게 말해 일본정부를 비롯한 그 옹호 세력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그 전개는 보다 성숙하게 접근한다면 목적한 바를 더욱 충실하게 달성할 수 있다. 장소 선택을 말하고자 함이다. 위안부 문제 응징의 상징인 ‘평화의 소녀상’은 서울의 일본 대사관 앞의 것을 대표로 하자. 대사관이란 그 설치 국가의 상징이니 그 목적을 위한 선택은 타당하다. 그 이외, 즉 서울을 비롯한 여타지역의 ‘소녀상’은 대표의 상징을 돋우는 목적이면 된다.


다시 이야기 한다. 반복은 강조라는 의미에서 횟수가 많은 것은 탓이 아니다. 그럴 만큼 반성을 모르는 일본을 압박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부산의 일본 영사관 앞의 소녀상은 생각의 여지를 갖게 한다. 반복보다는 중복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소녀상 상징적 대표는 서울의 일본 대사관 앞의 것 하나인 것이 더 강렬한 메시지다. 일본 정부가 반발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한국의 소녀상 의미를 수긍하고 있고 따라서 전국 도처를 비롯한 해외의 소녀상으로 압박감을 갖고 있다. 그런 그들에게 반전(反轉) 빌미를 줄 필요가 없다. 부산 영사관 앞 건립은 그런 점에서 유의할 필요가 있다. 


소녀상 건립은 그것이 가지는 상징성을 극대화 할 수 있는 곳, 즉 항일운동의 상징성을 가진 곳으로 예를 들면, 부산은 ‘부산진일신여학교기념관’, 광주는‘수피아여자고등학교’, 대구는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충남은 ‘천안아우내 3·1 운동 독립 사적지’ 등이 어떨까 한다. 특히 부산과 광주는 위안부 또래에 의한 독립운동 발상지라 상징성이 크다.


비이성적 상대에 대한 강력한 시위는 이성적 접근임을 말한바 있다. 한국이 이성적일 때 일본의 양심세력은 더욱 결집을 할 것이다. 비열한 자들만의 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이 이성적일 때 세계의 동참은 더욱 많아지게 될 것이다.

(♣2017.03.10.)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해 다양한 마을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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