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인간은 사회를 떠나 살 수 없고 사회와 더불어 존재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일 년이 멀다하고 흐름이 변하고 기술변화도 빠르고 유행도 자주 바뀝니다. 이러한 빠른 기술의 변화는 우리 생활의 변화와 더불어 사고의 변화를 동시에 가져오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회 변화에 따른 사회구성원들 간의 갈등은 점점 심화되고, 분화되고 갈등 양상도 다양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지역 간의 갈등, 세대 간의 갈등, 빈부 간의 갈등, 이념 간의 갈등, 성별 간의 갈등 등 우리가 인지하든 인지하지 못하든 이러한 갈등은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최근에는 기존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갈등 양상과는 조금 다르게 성별 간의 갈등, 즉 여성혐오, 남성혐오 형태의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왜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혐오하게 되는 것일까? 이러한 혐오는 세대를 넘어 다 존재하는 것일까? 혐오에 대해 혐오로 대응한다는 것이 무엇이며 이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등 많은 생각할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사상적으로나 제도적으로도 남성중심사회였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만큼 여성들이 우리 사회에 많이 제약을 받고 살아왔으며 그것을 우리 사회는 묵인하면서, 사회제도 또한 그렇게 형성되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으며 법과 제도가 양성 평등 사회로 가고자 하는 노력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여전히 체감 상으로 양성 평등사회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어느 몇 개 분야를 가지고 양성평등사회가 되었느냐 따질 수는 없습니다. 특히 요즘 젊은 남성세대들을 보자면, 기존 기성세대에서 누리던 남성우위의 이점을 요즘 젊은 남성세대들은 전혀 누리지도 못하면서 이제 사회 곳곳은 여성 비중이 높아가고 있으며 어떤 분야에서는 이제 압도적으로 여성이 우위를 점하고 있어 남성이 오히려 여성에게 역차별을 받고 있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성들의 입장에서는 그동안 우리사회가 남성들이 여성들에 가한 폭력이나 차별 등이 여전히 존재하고 이에 대해 여성운동의 입장에서 이를 시정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변하는 것은 별로 없고 온건한 방법으로 상식적인 수준에서 항의를 하거나 투쟁을 해도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자, 좀 더 과격하게 좀 더 극단적 방식으로, 그동안 남성들이 여성에게 행해온 것들을 똑 같은 방법으로 남성에게 되돌려 주는 미러링(반사) 형태의 저항을 하고 있습니다. 


여성들의 이러한 저항행태들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에 대해 평가는 다양합니다. 그런데 왜 여성들이 그러한 방법을 쓸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 우리 사회는 고민을 해 봐야 할 것입니다. 

또한 성별간의 이러한 대립 해결책이 꼭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미러링(반사)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이 최선인가에 대해서도 여성주의 입장에서 좀 더 깊은 고민을 해 봐야 할 것입니다. 

여성운동, 즉 페미니즘 운동이 우리사회의 여성운동을 발전시키고 여권을 신장시켰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러한 페미니즘을 넘어 즉, 극단적 페미니즘이라고 불리우는 메갈리아(혐오에 대해 혐오로 대응하는 방식)가 과연 여성주의 운동, 페미니즘 운동으로 볼 수 있느냐에 대해 논쟁이 분명히 있습니다. 페미니즘이든 극단적 페미니즘이든 메갈리아는 절대 페미니즘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반면 여성주의 운동의 한 방식으로 좀 더 극단적 페미니즘도 여성운동의 방식이며 심지어 메갈리아도 넓은 의미에서 페미니즘운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녀 성별간의 갈등 해결이 훨씬 더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여성주의 입장에서 넓은 의미의 페미니즘 운동(메갈리아와 같은 방식 포함)에 대해 왜 시비를 거느냐, 이것도 하나의 운동방식이다는 것과 혐오에 대한 미러링, 극단적인 혐오는 절대 반대한다는 남성측과의 대립이 생기는 것입니다. 

서로의 입장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고 있고 상대방을 비난하기만 하고, 어느 한 편만 들기만 하면 상대방에 대해 낙인찍기를 해 버리니 뾰족한 해결책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보편적 가치로서의 극도의 혐오와 폭력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갈등은 어디서나 존재하고 피할 수 없는 요소입니다. 

우리사회가 현재 겪고 있는 성별간의 갈등대립이 사회 전반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점차 그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제 성별 갈등도 우리 사회가 좀 더 성숙한 사회로 가기 위한 하나의 진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남성이냐 여성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천부인권으로서 한 개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그동안 우리가 상대방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을 서로 공유하고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다시 한 번 상대방을 생각해 준다면 이 문제 또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독산동 주민 

공병권  



이화여자대학교에 설치 예정이던 미래라이프 단과 대학은 학생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쳐 설치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고 한다. 학생들의 요구가 관철되었다는 점에서 정부당국에 의해 수립된 이 정책은 일견 문제가 있는 것으로 비친다. 국가의 정책은 그 설치 명분이 분명한데서 수립 근거를 가지게 되는데 정책현장에 반대가 있어 취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객관적 시각에서 보면 이러한 결과를 두고 정책당국을 질책할 사안은 아닌 것 같다. 경위를 살펴보면, 정부는 정책을 수립하였고 그것의 수용 결정은 민간 부분즉 이화여자대학이 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정부가 특정대학에 수용을 강제한 것은 아니고, 이 제도를 수용한 다른 대학은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굳이 책임을 따지면 수용 당사자인 이화여자대학교이다.


그렇다면 이화여자대학교의 이 결정은 잘못된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각자의 신념에 따라 달리 나오겠지만 필자의 의견은 ‘그렇지 않다’이다. 즉 이화여자대학교 당국자를 비난하는 이유는 보편성을 가지기 어렵다고 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 여론은 학생들을 옹호하고 대학당국에 비판적인 이유는 무슨 까닭인가?

사태를 제대로 보려면 문제가 된 “미래라이프 대학”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대학은 국민들에게 평생교육 기회 공여 일환의 교육제도로 특별히 직업 계 특성화고등학교나 마이스터고등학교 등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고등교육을 원하는 이들을 위해 기성 대학에 단과대학을 개설케 하여 운영하는 것이라 한다. 간단히 이해를 하면 가정 또는 개인적 사정으로 대학을 가지 않고 사회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고등교육 기회를 주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다.


제도의 취지를 볼 때 공익성을 가지고 있는데 학생들이 반대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들의 주장은, 방송통신대학과 사이버 대학 등 같은 목적의 교육기관이 있는데도 기성대학에 두는 것은 중복이며, 이러한 대학들과 동일 시 되는 것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이화여자대학의 자존의 문제이고, 능력이나 자질이 검증되지 않는 학생들을 입학하게 되면 어렵게 입학한 자신들과 형평성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를 강행하려는 것은 정부의 지원금을 받기 위한 학교당국의 상업적 발상이란다.

학생들의 주장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 받아들이기는 좀 그렇다. 학교 측의 상업적 발상이란 주장은 생각해 볼 과제이나 유사한 제도와 중복이나 형평성 제기, 학교의 명예실추운운은 공감하기가 어렵다. 그 배경에는 배타적 이기주의가 숨겨져 있는 것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학교 측의 상업적 발상도 솔직히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그들 학교는 오래 전부터 다른 대학교에 비교될 만큼의 상당한 국고보조를 받고 있고 그것으로 재학생과 교수들은 장학금, 연구비 등의 수혜를 받고 있다. 비판은 객관성을 확보할 때 설득력을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본질이 아니다. 그들의 가장 큰 반대 이유는 그들이 스스로 규정지우고 있는 자기들의 권위의 실추 즉 이화여자대학이라는 상징의 손상을 우려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 스스로 규정한 자부(自負)를 옹호하기 위하여 배타적 이기주의를 행동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자세를 잘 못되었다 하지 않는다, 자존(自尊)을 지키고 이를 중히 여기는 것은 인간라면 가질 수 있는 보편성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기적 배타주의가 발로라면 보편성의 범주에 두기 어렵다. 정의(正義)의 문제가 제기되기 때문이다. 세상이 대학을 상아탑(象牙塔)이라 하는 것이 이에 대한 설명이다. 다시 말하면 대학은 학문 연마의 장을 넘어 전인적(全人的) 인격 형성을 구하는 기회의 공간으로 보는 것이다.


학생들이 학문의 연마와 병행하여야 할 것은 사회정의의 행동이다. 정의가 실종된 시공(時空)에서 쌓은 지식은 사상누각일 뿐이다, 그러한 지식은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가 하면  타인들에게 위해(危害)를 가할 수 있는 것은 인류 역사가 잘 말해주고 있다. 정의롭지 못한 세력들이 지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공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비안간적 모습들이 주조이고 그러한 곳에서 평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대학은 지성인(知性人)을 추구 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지성(知性)의 사전적 어의는 “맹목적이거나 본능적 방법에 의하지 아니하고 지적인 사고에 근거하여 그 상황에 적응하고 과제를 해결하는 성질”이라 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지성인은 곧 정의로움의 바탕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라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상아탑의 주역이라면 지성인이 목표여야 한다. 그리하여 사회의 양심과 지성을 대표하도록 자기를 가꾸고 단련하여야 한다.


오늘의 대학을 두고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그래도 대학에 두어진 사회의 원래 기대는 지속되어야 한다. 그것은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세상의 평화를 지키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듯 대학생은 미래의 주역이자 희망이어야 하는 만큼 학문의 량(量)으로 자기도취에 빠지지 말고 전인적 인격자를 지향하여야 한다. 

이제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한다. 명문을 자처하는 대학교는 그것을 지속할 수 있는 가치를 현실 상황에서 찾아야지 과거의 가치에 고착하여 변화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역사의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과거에 형성된 가치는 문명의 변천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 어제의 선(善)이라 하여 항상 선일 수 없고, 어제에 세워진 권위도 오늘에 이르러서는 빛을 더할 수도 있지만 덜할 수도 잃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전통을 자랑하는 모든 집단에게 말한다. 나보다 부족한 이웃이 나와 함께 하는 것을 동의하는 것은 아름다운 모습이지 부끄럽거나 자존을 다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지성인의 모습이 되고 그들의 전통을 더욱 빛나게 한다. 또한 전통은 그 집단 내부의 자부이자 로망일 뿐 외부에 강요할 권위로 이해하지 않아야 한다.

(♣2016.8.10.).


장제모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해 

다양한 마을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금천구가 독립한 지 20년이 지났다. 금천의 시민사회는 얼마만큼 성장했을까? 누가 자신 있게 우리 시민사회의 미래를 낙관할 수 있을까? 왜 사람은 많은데 사람이 없다는 말이 반복될까? 몇몇 열성적인 활동가들의 목소리와 갈등에 포획되어 교착된 상황은 왜 해체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가? 시민주권의 꿈은 헛된 망상에 불과한 것일까? 


시민 - 번갈아 가면서 지배하고지배당하는 존재 


지난 번에도 언급했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을 번갈아 가면서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존재라 정의하였다. 그리스 시대의 자유의 개념은 이사야벌린의 구분을 빌리자면 소극적 자유였다. 그곳에서의 자유란, 복잡한 공적 업무를 동료에게 인계하고 그곳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기만의 사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자유를 의미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두가지를 알 수 있는데, 먼저 그들에게 공적 업무를 맡는다는 것은 권리 이전에 의무였다는 것, 둘째로 폴리스에 대한 위협이 상존하는데도 동료시민에게 그 자리를 내어줄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너와 나의 공동체에 대한 애정만큼은 다르지 않다는, 동등성의 원리에 바탕을 둔 믿음과 신뢰가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동료시민들이 번갈아가면서 지배하고 지배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모두 지배하려고만 하고, 오르려고만 한다. 정치도, 회사도, 시민사회도 예외가 없다. 올라가지 못하면 불안하다. 그야말로 떨어지면 낙오다. 교장을 하다가 평교사를 하고자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으며, 검사장 하다가 평검사 역할을 하는 사람도 보지 못했고, 국회의원하다가 구의원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것은 지역 정당도, 군소 지역 정당도 마찬가지다. 한번 위원장하면 중앙으로 올라가지 않는 한 끝까지 위원장을 하려한다. 때론 맡길 만한 사람이 없기에 어쩔 수 없다는 이유를 들기도 하지만, 사람이 없다는 말은 그만큼 무능 했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나마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시민사회도 마찬가지로 덫에 걸린지 오래다. 한번 맡은 사회적 지위는 더 상승하기를 바라면 바랬지 동료에게 내어주고 지배를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자기 보다 부족하다고 여긴 동료가 어떤 위치를 맡으면 도와주면 그만인 것을 끊임없는 험담으로 자기 불안을 대신한다. 결국 그 불안은 줄세우기를 강요하게 되고, 자기 편을 들어주길 바라며 은근히 자기 세력을 만들려 한다. 은연중 누가 자기 험담을 할까 촉각을 곤두세우기도 한다. 

타인의 모든 행위는 불순한 의도의 수단으로 의심받고, 갈등은 발전의 근간이 되지 못한 채 늘 언제 또 터질지 모를 불안만 가중시킨다. 갈등은 원인의 무한 소급에 빠져 더욱 미로를 헤맨다. 시민은 많은데 결국 시민이 없고 쉽게 지치는 이유다. 누구도 더 기대하지 못한다. 동료 시민들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없다는 것은 결국 자기 무능이다. 불가에서 “나는 너다.” 라고 하지 않았던가. 

2003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주 정부는 무작위로 입법가로서의 시민의원을 선출했다. 물론 선거를 통한 의원이 있었기에 이들의 집요한 반대는 불 보듯 뻔했을 것이다. 그 시민의원들이 정리한 법안(선거제도)은 주민투표로 이루어졌고 57.3%를 득표했다. 즉시 입법 되는데 60%가 필요했기에 결국 그 법은 폐기 되었지만 그럼에도 이 실험은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사라진 박애  


모두 알다시피 자유 평등 박애는 근대 프랑스 시민혁명의 주된 가치였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근대 계몽주의의 위대한 가정은 박애라는 실천윤리가 없이는 불가능한 가정이었다. 그런데 왜 박애라는 형제애와 연대의 가치는 근래에 와서 멀어졌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두가지로 추측하고 싶다. 하나는 근대 초기 나치와 파시즘과 소련 공산주의라는 희대의 전체주의라는 비극에 대한 경험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비극적 경험을 통해, 동지애나 연대의 가치에 대한 강조가, 전체주의에 동조한다는 의심 받을지도 모른다는 자기 검열을 불러일으킨 것이 아니었을까? 

게다가 동지애나 연대는 동질적인 공동체를 이루지 않고는 정체에 대한 헌신을 도덕적으로 끌어낼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 아니었을까? 결국 마이클샌델 같은 공동체 자유주의자도, 한나아렌트와 같은 정치철학자도 전체주의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두번째는 이데올로기가 종언을 구한 다음 도래했던 변종 신자유주의의 득세다. 신자유주의가 성공이라는 개인적 권리에만 줄기차게 집단적으로 천착한 결과로 연대와 박애의 가치는 더 멀어지게 되었고, 결국 그 가치는 개인의 성공을 위한 전략이나 수단으로만 전락하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자유와 평등은 주로 의무보다 개인의 권리에 대한 개념이다. 그것이 불간섭 자유이던, 비지배 자유이던 말이다. 그에 비해 박애는 주로 의무에 관한 개념이다. 논리적 비약이겠지만, 우리가 우리의 자유와 평등을 권리로서 보장받기 위해서는 박애라는 연대의 책임을 질 때만이 가능하다. 박애와 형제애와 연대의 가치가 폐기된 곳에서, “자유롭고 평등하기때문에 인간이 존엄하다”는 가치가 존립할 수 있을까? 

당장 개인의 권리만을 앞장세운 신자유주의가 판을 치는 곳만 보아도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박애가 자유와 평등을 위한 수단이라는 말은 아니다. 박애는 박애대로 고유한 가치가 있다.) 박애와 형제애와 연대는 비단 개인과 개인만의 관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형제애의 정신은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간의 연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다른 정치적 이상과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그 불편함을 인내하고 연대하겠다는 각오 없이는 “자유롭고 평등하기때문에 인간은 존엄하다”는 근대의 이상은 공염불이 될 수 밖에 없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역사적으로 민주주의가 성숙하는 과정에서는 노예의 해방이라는 담론들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고대 그리스가 그러했으며, 영국과 미국이 그러했다. 

노예들의 투쟁을 통해 도래한 해방의 담론이 아니라 당시 자유민에 의해 자발적으로 도래한 해방 담론을 말한다. 이 사실은 민주주의에서는 내가 절대 자유롭고 평등하기 위해서 박애가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그 자체로 존엄하기 때문에 박애와 연대는 전략이나 수단이 아닌 절대 당위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연대는 인간에 대한 존중과 관인에서 시작한다.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을 관인하겠다는 똘레랑스에서 비롯된다.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30년간의 종교전쟁을 치르고 나서야 종교가 다름을 존중하고, 공존하기로 했던 관인의 가치가 서구의 근대화의 중요한 덕목이 되었던 것 아니었던가.  

다시 시민사회로 돌아와 보자. 어쩌면 우리는 보다 좋은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헌신과 열정만큼이나 관인과 연대에는 무심했던 것은 아닐까? 

자신이나 또는 자기가 속한 집단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만큼 타인이나 타 집단에 대한 동료애나 연대의 의무를 수행했을까? 이것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그러나 자신이나 자신의 집단이 신도 아니면서 자신의 정치적 윤리적 이상만이 옳다고 타인을 배재할 권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왔단 말인가? 이것은 결단코 옳지 않다. 서구가 3~400년간의 과정의 긴 고통을 통해서 열었던 근대를 우리는 정녕 거져 먹었다는 것인가? 


금천의 시민사회가 적어도 시민주권이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박애와 형제애의 의무를 함께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이고 명령이다. 그 형제애의 대상은 자기가 속한 집단의 동료 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누구와도 연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치명적으로 인권을 침탈하고, 또 공적공간을 파괴하고 사유화 시키려 들지 않고, 치명적인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정당이던 무엇이던 형제애의 마음은 열어놓아야 한다. 그러한 관계 속에서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정체성은 확보되고, 주어진 공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헌시 되면서 명예와 영광이 주어지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글을 쓴다는 것이 늘 어렵다. 나 역시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또한 반성으로 여겨줬으면 좋겠다.)                            


                      

        금천구 주민 

이윤로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