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동맹파업 30년, 당시 대우어페럴 사무국장

강  명  자



30년 전 1985년 6월24일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최초의 동맹파업이 금천구 가산동(당시 가리봉동)에서 일어났다.

현 현대아울렛의 자리에 있던 대우어패럴 노동조합의 김준용 위원장과 강명자 사무국장이 22일 구속조치가 파업의 발단이었고  6월 23일 비상대책회의를 열어 대우어패럴에 대한 탄압을 <민주노조탄압의 신호탄>으로 인식하고 동맹파업을 결정했다. 6월 24일 대우어패럴 노조가 파업에 돌입하는 것을 신호로 효성물산·가리봉전자·선일섬유가 즉각 파업에 돌입했고, 25일에는 남성전기·롬코리아가, 28일에는 부흥사 노조가 동맹파업에 가담함으로써 참여 노조 숫자는 총 10개, 노조원 약 2천 5백여 명에 달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당시나 지금이나 구로공단이 있는 금천구는 한국현대사의 굵직한 획을 그어갔고 그 사람들도 아직 여기에 살아가고 있다.

30년 주년을 맞아 당시 대우어페럴 사무국장이었던 강명자(54세) 씨를 만났다. 인터뷰를 하는 날이 일요일에도 불구하고 구로구 고척도서관에서 진행하는 공단 탐방코스를 안내하고 난 후였다.

구로동맹파업은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역사에서 배울 건 배우고 버릴 건 버려야한다. 70년대 노동조합이  정권에 의해 제각각 깨져나갔다. 그 경험 속에서 동맹파업이 만들어진 것이다. 대우어페럴 조합이 깨지면 효성이, 효성이 깨지면 가리봉 전자로 이어졌을 것이다.” 

“나는 동맹파업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잘 모른다. 나와 김준용 위원장이 구속된 것을 기점으로 발발했으니까. 밖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상태로 경찰서에 몇일 있으니까  대우어페럴 조합 식구들이 유치장에 우르르 들어와서 알게 됐다. ‘이년아 너 구하려다 들어왔다’는 말과 함께.”

 명자 씨는 2~3년전부터 구로공단의 역사탐방의 종종 하고 있다. 평일에는 미싱을 하고 주말에 가끔 신청이 들어오는 하는 정도로.

“교과서적인 것은 안한다. 내가 겪었고 보았던 것을 알려준다. 가리봉5거리의 나포리다방, 일주일에 100시간,120시간일을 하기 위해 티이밍을 사먹었던 구림약국을 지나고 왜 우리가 노동조합을 건설할 수 밖에 없었는지 이야기해준다.”

현재 가산동 두산아파트이 있는 예전 삼립빵 공장이 있던 자리를 지날 때는 “그 배고픈 시절에 진동하는 빵 냄새가 어땠을까?” 물어보기도 하고, 바로 돌아 기륭전자의 공장을 지날 때는 현재도 진행되고있는 노동조합의 싸움과 현실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구로공단의 굴뚝은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아파트형공장빌딩 숲이 들어섰지만 그 속에 일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마리오아울렛 제3관에는 상징적 굴뚝 앞을 지날 때 명자씨는 “빌딩 숲에 비정규직이 넘쳐나고 있다. 당시에는 생산하고 만들어 냈던 이곳이 이제는 쇼핑몰이 됐다. 내가 젊은 날 살았고 숨 쉬고 있던 곳이 쇼핑몰로 되어 여기에 오려면 쇼핑을 하러 와야하고 돈이 있어야 올 수 있는 곳이 됐다.”고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한다. 

지금의 현대하이힐 들어선 대우어페럴 자리에 지날 때는 첫 인상을 알려준다. “언니가 대우어페럴에 다녀 면회를 왔는데 4~5월인가 장미가 만개해 있느 곳에  점심 때는 하얀스카프에 하늘색 가운을 입고 삼삼오오 웃는 모습이 그렇게 좋아보였고 간절히 오고 싶었다.”

그 간절함으로 82년 입사했지만 화려한 겉모습의 속내는 화려하지 않았다. 기숙사생 600명이었고 외출과 외박이 안됐다. 그러다 ‘어느 청년의 삶과 죽음(전태일 평전)’이라는 책을 보게 됐고 밤새 울면서 읽었다. 그려면서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84년에 조합을 만들고 85년에 구속당한다. 


수출의 다리 앞을 지날 때는 블랙리스트에 올라 노동자의 생존권을 박탈당하고 밥 줄이 끊겼던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야기한다. “85년 대우어페럴에서 구속된 후 86년 4월 석방돼 86년 5.3인천항쟁에 참석하고 계속해서 노동조합 건설 활동을 했다. 그리고 좀 더 조건이 좋은 ‘서광’에 입사하려고 했는데 블랙리스트라서 안된다는 것이다. 그때 블랙리스트라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봤다. 노동자가 자기의 노동을 팔아서 먹고 살아야하는데 그럼 무엇을 먹고 살아야하나 싶어 이 수출의 다리를 건너오면서 정말 많이 울었다.” 

명자씨는 블랙리스트로 공단과 운동에서 떠났지만 여전히 봉제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노동운동할 때는 미싱엔 관심이 없다가 이제는 어떻게 하면 빠르고 예쁘게 할까 고민한다. 미싱은 나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했다.”

독산동에는 조그만 봉제공장이 밀집해 있다. 서울에서 유일하게 봉제전문인력사무소가 위치해있는 곳도 독산동이다. 예전에는 공단에서 옷이 만들어졌지만 이제는 독산동에서 옷을 만들어 물류창고를 거쳐 공단에 있는 마리오나 W몰로 들어간다. 봉제노동자들은 예전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하게 됐다. 당시 공돌이 공순이의 이름을 이제는 비정규직이라고 부른다. 명자 씨는 “20미터 도로의 몰려있는  봉제아줌마들 위한 무엇인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제 봉제를 배우는 사람도 없다.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고민해보고 싶다.”고 바람을 전했다. 


이성호 기자

gcin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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