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천구가 독립한 지 20년이 지났다. 금천의 시민사회는 얼마만큼 성장했을까? 누가 자신 있게 우리 시민사회의 미래를 낙관할 수 있을까? 왜 사람은 많은데 사람이 없다는 말이 반복될까? 몇몇 열성적인 활동가들의 목소리와 갈등에 포획되어 교착된 상황은 왜 해체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가? 시민주권의 꿈은 헛된 망상에 불과한 것일까? 


시민 - 번갈아 가면서 지배하고지배당하는 존재 


지난 번에도 언급했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을 번갈아 가면서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존재라 정의하였다. 그리스 시대의 자유의 개념은 이사야벌린의 구분을 빌리자면 소극적 자유였다. 그곳에서의 자유란, 복잡한 공적 업무를 동료에게 인계하고 그곳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기만의 사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자유를 의미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두가지를 알 수 있는데, 먼저 그들에게 공적 업무를 맡는다는 것은 권리 이전에 의무였다는 것, 둘째로 폴리스에 대한 위협이 상존하는데도 동료시민에게 그 자리를 내어줄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너와 나의 공동체에 대한 애정만큼은 다르지 않다는, 동등성의 원리에 바탕을 둔 믿음과 신뢰가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동료시민들이 번갈아가면서 지배하고 지배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모두 지배하려고만 하고, 오르려고만 한다. 정치도, 회사도, 시민사회도 예외가 없다. 올라가지 못하면 불안하다. 그야말로 떨어지면 낙오다. 교장을 하다가 평교사를 하고자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으며, 검사장 하다가 평검사 역할을 하는 사람도 보지 못했고, 국회의원하다가 구의원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것은 지역 정당도, 군소 지역 정당도 마찬가지다. 한번 위원장하면 중앙으로 올라가지 않는 한 끝까지 위원장을 하려한다. 때론 맡길 만한 사람이 없기에 어쩔 수 없다는 이유를 들기도 하지만, 사람이 없다는 말은 그만큼 무능 했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나마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시민사회도 마찬가지로 덫에 걸린지 오래다. 한번 맡은 사회적 지위는 더 상승하기를 바라면 바랬지 동료에게 내어주고 지배를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자기 보다 부족하다고 여긴 동료가 어떤 위치를 맡으면 도와주면 그만인 것을 끊임없는 험담으로 자기 불안을 대신한다. 결국 그 불안은 줄세우기를 강요하게 되고, 자기 편을 들어주길 바라며 은근히 자기 세력을 만들려 한다. 은연중 누가 자기 험담을 할까 촉각을 곤두세우기도 한다. 

타인의 모든 행위는 불순한 의도의 수단으로 의심받고, 갈등은 발전의 근간이 되지 못한 채 늘 언제 또 터질지 모를 불안만 가중시킨다. 갈등은 원인의 무한 소급에 빠져 더욱 미로를 헤맨다. 시민은 많은데 결국 시민이 없고 쉽게 지치는 이유다. 누구도 더 기대하지 못한다. 동료 시민들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없다는 것은 결국 자기 무능이다. 불가에서 “나는 너다.” 라고 하지 않았던가. 

2003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주 정부는 무작위로 입법가로서의 시민의원을 선출했다. 물론 선거를 통한 의원이 있었기에 이들의 집요한 반대는 불 보듯 뻔했을 것이다. 그 시민의원들이 정리한 법안(선거제도)은 주민투표로 이루어졌고 57.3%를 득표했다. 즉시 입법 되는데 60%가 필요했기에 결국 그 법은 폐기 되었지만 그럼에도 이 실험은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사라진 박애  


모두 알다시피 자유 평등 박애는 근대 프랑스 시민혁명의 주된 가치였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근대 계몽주의의 위대한 가정은 박애라는 실천윤리가 없이는 불가능한 가정이었다. 그런데 왜 박애라는 형제애와 연대의 가치는 근래에 와서 멀어졌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두가지로 추측하고 싶다. 하나는 근대 초기 나치와 파시즘과 소련 공산주의라는 희대의 전체주의라는 비극에 대한 경험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비극적 경험을 통해, 동지애나 연대의 가치에 대한 강조가, 전체주의에 동조한다는 의심 받을지도 모른다는 자기 검열을 불러일으킨 것이 아니었을까? 

게다가 동지애나 연대는 동질적인 공동체를 이루지 않고는 정체에 대한 헌신을 도덕적으로 끌어낼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 아니었을까? 결국 마이클샌델 같은 공동체 자유주의자도, 한나아렌트와 같은 정치철학자도 전체주의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두번째는 이데올로기가 종언을 구한 다음 도래했던 변종 신자유주의의 득세다. 신자유주의가 성공이라는 개인적 권리에만 줄기차게 집단적으로 천착한 결과로 연대와 박애의 가치는 더 멀어지게 되었고, 결국 그 가치는 개인의 성공을 위한 전략이나 수단으로만 전락하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자유와 평등은 주로 의무보다 개인의 권리에 대한 개념이다. 그것이 불간섭 자유이던, 비지배 자유이던 말이다. 그에 비해 박애는 주로 의무에 관한 개념이다. 논리적 비약이겠지만, 우리가 우리의 자유와 평등을 권리로서 보장받기 위해서는 박애라는 연대의 책임을 질 때만이 가능하다. 박애와 형제애와 연대의 가치가 폐기된 곳에서, “자유롭고 평등하기때문에 인간이 존엄하다”는 가치가 존립할 수 있을까? 

당장 개인의 권리만을 앞장세운 신자유주의가 판을 치는 곳만 보아도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박애가 자유와 평등을 위한 수단이라는 말은 아니다. 박애는 박애대로 고유한 가치가 있다.) 박애와 형제애와 연대는 비단 개인과 개인만의 관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형제애의 정신은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간의 연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다른 정치적 이상과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그 불편함을 인내하고 연대하겠다는 각오 없이는 “자유롭고 평등하기때문에 인간은 존엄하다”는 근대의 이상은 공염불이 될 수 밖에 없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역사적으로 민주주의가 성숙하는 과정에서는 노예의 해방이라는 담론들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고대 그리스가 그러했으며, 영국과 미국이 그러했다. 

노예들의 투쟁을 통해 도래한 해방의 담론이 아니라 당시 자유민에 의해 자발적으로 도래한 해방 담론을 말한다. 이 사실은 민주주의에서는 내가 절대 자유롭고 평등하기 위해서 박애가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그 자체로 존엄하기 때문에 박애와 연대는 전략이나 수단이 아닌 절대 당위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연대는 인간에 대한 존중과 관인에서 시작한다.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을 관인하겠다는 똘레랑스에서 비롯된다.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30년간의 종교전쟁을 치르고 나서야 종교가 다름을 존중하고, 공존하기로 했던 관인의 가치가 서구의 근대화의 중요한 덕목이 되었던 것 아니었던가.  

다시 시민사회로 돌아와 보자. 어쩌면 우리는 보다 좋은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헌신과 열정만큼이나 관인과 연대에는 무심했던 것은 아닐까? 

자신이나 또는 자기가 속한 집단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만큼 타인이나 타 집단에 대한 동료애나 연대의 의무를 수행했을까? 이것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그러나 자신이나 자신의 집단이 신도 아니면서 자신의 정치적 윤리적 이상만이 옳다고 타인을 배재할 권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왔단 말인가? 이것은 결단코 옳지 않다. 서구가 3~400년간의 과정의 긴 고통을 통해서 열었던 근대를 우리는 정녕 거져 먹었다는 것인가? 


금천의 시민사회가 적어도 시민주권이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박애와 형제애의 의무를 함께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이고 명령이다. 그 형제애의 대상은 자기가 속한 집단의 동료 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누구와도 연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치명적으로 인권을 침탈하고, 또 공적공간을 파괴하고 사유화 시키려 들지 않고, 치명적인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정당이던 무엇이던 형제애의 마음은 열어놓아야 한다. 그러한 관계 속에서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정체성은 확보되고, 주어진 공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헌시 되면서 명예와 영광이 주어지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글을 쓴다는 것이 늘 어렵다. 나 역시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또한 반성으로 여겨줬으면 좋겠다.)                            


                      

        금천구 주민 

이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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