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會議)를 논하다.




우리 사회에서 각종 회의는 오래 전부터 있었으나 그것의 실효성에 대한 평가들은 지금과 같이 민주주의가 확대되면서 활발히 제기되기 시작하였고 그러한 흐름들은 회의를 통한 성과를 이뤄내는 자극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실질적인 성과도 이뤄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진전에도 필자는 아직은 회의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할 생각이 없다. 그동안 필자가 참여했던 회의의 질이 문제라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이를 부인하거나 변명할 생각이 없다.  


회의의 목적은 공동체의 발전이나 당면한 문제의 해소와 같은 현실적인 것도 있으나 취미나 친목과 같은 단순한 회의도 있는데 따지고 보면 회의란 사람들의 모임 즉 공동체가 속성이므로 그 목적은 생산적 지향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모여 회의라는 형삭을 통해 의견을 나누는 것은 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유효한 방법이고 회의는 그 강력한 수단이다. 


이러한 회의의 긍정성에도 부정성을 앞세워 서두를 꺼내는 것은 경험칙을 앞세운 걱정을 말하는 것만이 아닌 현실에 당면한 사회 문제로 이의 해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서 솔직히 회의에 대한 인식을 긍정적으로 이야기 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려운 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현상이 아닌가?. 

회의(會議)를 사전에서 보면 ‘어떤 사항을 여럿이 모여 의견을 교환하여 의논하는 일(기관)’이라 하고 있다. 


‘여럿’ 즉 공동체가 모여서 공동의 과제를 논의하여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 회의인 것이다. 이러한 진행에서 토론이 전개되고 찬성과 반대가 부딪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회의에서 토론을 통한 찬·반을 논하는 과정이 생략되거나 소극적인 경우가 있는가 하면, 찬반 주장이 지나쳐 충돌로 이어져 회의의 본질이 실종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회의의 긍정성에 흠을 만드는 현상들이다. 어떤 사항을 두고 의견이 같으면 찬성을 하고 다르면 반대를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런데 토론이 생략되고 찬성을 유도하는 식의 진행이 되거나 주도세력이 일방적으로 진행하여 회의를 당초 설정한 목적 구하기 위한 형식적 절차로 삼는, 사실상 회의라 하기는 좀 그런 경우가 있다. 그런가 하면 반대를 하면서 철저히 이기적 자세로 접근하는 진행도 있다. 반대로 끝나지 않고 상대 안을 무력화 하는 등 회의의 결과에 흠결을 만들려는 경우도 있는것이다. 


우리사회에서 회의의 비합리성은 공사(公私) 양 부문에서 다 볼 수 있지만 그것의 해악이 공동체에 미치는 경우는 아무래도 공적 영역에서 많이 제기되고 있고 그것은 왕왕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 경우들이 있다. 물론 사적 영역에서도 영향을 주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사회적 파장이 큰 경우는 역시 공적 영역이 많다. 여기서 말하는 공적 영역이란 국회를 비롯한 각종 국가기관의 회의로 그에는 말단 행정단위인 읍·면·동의 회의도 예외가 아니다. 이 밖에 국가의 직·간접 간섭을 받는 공공기관의 회의도 공적 영역에 포함한다.


공적회의에서 가장 지적되어야 하는 문제는 민주성이다. 사회의 민주화가 향상되고 있는 만큼 이 지적은 잘못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그렇지 않다. 정부를 비롯해서 하위 행정기관에 이르기까지의 내부 회의에서 민주성이 경시되는 경우가 있고 지켜지는 부분도 다분히 형식적이다. 즉 형식에서는 민주성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관이나 공공 기관이 주도하는 회의에 민간 위원이나 유사 신분으로 참석을 해 본 사람은 무슨 말인지 잘 알 것이다. 대개 주관 처(관청 등)가 목적하는 바를 미리 정해놓고 이의 합리성을 구하기 위한  회의가 많은 것이 그것이다. 


공적 영역 회의 모두를 문제 삼고자 하지 않는다. 민주성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고 투명성 또한 객관화의 정도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어 기본은 지켜지고 실제로 그러한 바탕에서 진행되는 것도 많다. 그런데도 부정성을 말하는 것은 모든 회의가 그렇지 못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는 최상위급 회의에서 주로 볼 수 있고 읍·면·동 수준의 최하위 행정기관에서도 쉽게 목격된다. 특히 정부 주도의 고위회의에서 그런 경우가 많은 데 문재인 정부 수립 이후 진행되고 있는 이른바 ‘적폐청산’은 그런 회의로 인 한 결과의 한 유형으로 본다

사적 영역에서의 회의 비합리성은 오래된 관행이고 그것은 정상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시쳇말로 ‘좋은 것이 좋다’는 관념적인 접근이 사실적 현상이 버린 경우다. 주로 민간의 소단위 공동체 예를 들면 친목회 등 그 아류들로 이는 공동체의 목적성을 볼 때 별 문제로 보지 않을 수 있지만 옳은 회의 모습은 아니다. 회의는 회의인 만큼 그 본질에 충실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민주시민 의식이 향상되고 사회의 민주주의도 튼튼해진다. 

자본주의가 가치인 공동체에서 그에 바탕한 질서를 두는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상법적용 이나 그에 준하는 질서에 속하는 예를 들면 기업경영이 그런 유형이다. 그러함에도 회의 룰(rule)은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상식에 어긋나거나 보편질서에 위배되는 경우들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자기들만의 문제라 하더라도 기업의 사회성은 부정될 수 없는 만큼 정의의 문제가 제기된다. 정의를 경시하는 공동체는 그에 따른 응보(應報)를 만난다. 그것이 진리다. 


이러한 문제들이 있다 하여 공동체의 합리적 논의 시스템이자 문제해결의 유효한 수단인 회의를 부정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것이 가진 긍정성들이 올바르게 실현되고 그래서 계속적으로 희망적인 이 수단이 지속되기를 바랄 뿐이다. 사적 영역이던 공적영역이던 회의다운 회의를 하자는 것, 즉 회의의 본질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회의 이야기를 꺼냈으니 국회 이야기도 해보자. 국회야 말로 회의 전문기관이 아닌가! 회의는 국회의 정체성, 즉 회의가 없다면 그들 존재 이유도 없다. 그런데도 회의를 참 잘못한다. 정체성이 회의인 그들이 주역다운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것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의 불행이고 국민들에게는 비극이다. 그들이 회의를 잘못하는 것은 제도에 문제가 있어서도 그들에게 지적(知的) 문제가 있어서도 아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고등교육을 이수한 지식인들이고 더하여 석·박사 학위자도 상당수다. 그와 같이 개인적으로 보면 모두가 역량을 풍부히 가진 능력자들이다. 그런 자들의 구성인 국회가 왜 회의를 잘 못한다는 소리를 들을까?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그들이 처한 환경 곧 우리 정치구조의 문제라 본다. 개인적으로 능력을 가진 그들이 정치 집단에 속하면서 능력은 유보되거나 숨겨져 버리기 때문이다.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후진 정치구조가 우리 국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에게 패거리 집단으로 폄하되는 곧 철학 부재한 정당이 그들의 서식환경이다. 


2018년 국가예산이 논란을 끌더니 끝내 시간을 넘겨 통과되었다. 왜 법률이 정한 일정을 지키지 않았느냐면 국가 살림살이니 잘해 보려 그랬다 할 것이다. 그런 변명을 이해할 국민은 별로 없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럼에도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 나름의 소신을 행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부여된 임무를 볼 때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반대를 한다고 표결도 하지 않고 회의장을 떠난 것이다. 반대는 회의에서 자연스런 행위니 누가 탓하랴만 그것을 강하게 표현한다고 그들의 정체성인 회의를 부정한 것은 문책되어야 한다. 반대를 하던 찬성을 하던 회의는 회의장에서 정해진 질서에 따라 표현해야 한다. 그것이 회의의 룰이다. 그들이 이런 무책임한 행위를 다시는 하지 못하도록 대책을 세워야 한다. 가장 유력한 방법은 그런 행위자들은 다시는 국회에 못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어떤 방법이 있을지 중지를 모아보자! (♣2017.12.09.)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해 다양한  마을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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