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암산성, 시흥동 은행나무...
안식과 지혜를 나누는 유적으로 가꿔야
내가 ‘서울’이라는 주제를 붙들고 씨름하기 시작한 건 2009년 4월 서울시민연대 대표직을 맡으면서다. 그동안 서울시정을 모니터링하는 일부터 예산 감시 활동, 최근 현안이 되고 있는 서울역고가 공원화 문제 등 이러저러한 현안에 대해 관심을 갖고 활동해 왔다. 지난 5년 능력에 부치기는 했지만 나름 보람을 느낄 수 있었지만 보람과 함께 재미가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서울답사는 보람과 재미를 함께 느끼게 하는 일이었다. 나의 서울답사는 2009년 12월 경복궁옆 서촌탐방이 그 시작이었다. 지금은 수성동 계곡이 복원되어 옛 정취를 느낄 수 있지만 당시만하더라도 철거 직전의 옥인시민아파트가 을씨년스럽게 서 있었다.
서촌답사를 시작으로 기회 닿을 때마다 서울의 이곳저곳을 찾아다녔다. 한옥의 처마 곡신이 아름다운 북촌, 일제의 식민지배의 본거지였던 남산자락, 시인 백석과 자야 김영한의 애절한 사연이 깃든 성북동 길상사, 조선의 수도 한양의 권위를 상징하는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과 성곽을 비롯하여 지난해 봄엔 157km에 이르는 서울둘레길을 완주하기도 했다.
답사하면서 느낀 소감은 서울은 뿌리가 깊고, 매력적인 도시라는 것이다. 서울은 조선의 수도 한양이 천도한 때로부터 600년의 역사를 간직한 도시다. 더 서슬러 올라가면 900년 전 고려의 남경이 자리한 고도이기도 하고, 백제의 시조 온조가 위례성(한성)에 도읍한 2000년 역사도시이기도 하다.
우리가 서울답사를 통해 만나게 되는 서울의 옛 모습은 대부분 근현대 유적들이다. 경복궁, 창덕궁 등의 궁궐도 3~4백 년 전의 건물이다. 그러나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서울의 지층(地層)을 한 꺼풀만 벗겨보면 아주 오래된 역사의 흔적과 만나게 된다.
송파구 풍납동 토성은 2천 년 전 백제 유적이다. 서울 광진구와 구리시의 경계에 있는 아차산 보루는 1600년 전 고구려가 남겨 놓은 흔적들이다. 북한산 비봉 꼭대기에 세워진 비석(진흥왕 순수비)은 신라 진흥왕이 555년(또는 568년) 지금의 서울지역을 둘러보고 세운 것이다.
금천구에도 오래된 유적들이 많다. 호암산에 위치한 호암산성은 신라시대의 유적이다. 또한 금천구는 정조가 화성(수원)으로 행차하면서 쉬어갔던 행궁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시흥동에 위치한 은행나무는 서울의 노거수들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나무로 서초동 도로 한복판에 서있는 향나무와 함께 천년의 나이테를 자랑한다.
마른장마가 한창이던 지난 7월 17일 금천역사포럼이 주최한 호암산성 답사에 참여하였다. 이날 답사를 통해 독산이 호암산 자락의 산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호암산성 안에 위치한 한우물의 석구지(石拘池) 표지석과 석구상의 설화도 처음 접한 금천구의 역사였다.
호암산성 답사는 금천구의 역사를 알게 되는 계기이기도 했지만 한편 아쉬움을 느꼈다. 호암산성의 위치와 역사를 알려주는 제대로 된 안내판 하나 없었다. 문득 몇 년 전 늦가을 시흥동 은행나무를 찾았을 때의 느꼈던 아쉬움이 떠올랐다. 시흥동 은행나무는 인도와 도로 한복판에 내몰려 있었고, 나무 옆에 줄지어 선 비석들은 방치해 놓은 듯 표정 없는 모습이었다.
면적과 인구로 따지면 금천구는 서울 25개 구 중 작은 구에 속한다. 그러나 역사와 전통만큼은 어느 구와 비교해도 뒤쳐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오래된 유적을 제대로 보존하고, 활용하고 있느냐이다. 호암산성, 시흥동 은행나무, 행궁터 등의 유적을 금천구청과 주민들이 애정을 갖고 보존하여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안식과 지혜를 나누는 살아 있는 유적으로 가꾸어 가면 좋겠다.
전상봉
서울시민연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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