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인문책 쓰기 동아리11명의 독산고등학교 학생들의 엮은 산문 모음집 중 홍승원 학생의 글을 소개합니다


  자율학습을 마치고 돌아가면 엄마가 나를 반겨주신다. 어느새 11월 중순, 엄마는 쌀쌀해진 날씨로 차가워진 나의 손을 감싸며 따뜻한 이부자리로 들어오라는 듯 팡팡- 곁을 두드리셨다. 전업주부이신 엄마는 내심 늦게 들어온 딸내미가 반가우셨던 모양이다.

  오늘은 공부를 열심히 했냐고 물어보시는 엄마의 말씀에 웃음을 흘리며 말을 흐렸다. 나를 향해 눈을 흘기시는 엄마께 내일부터 열심히 할 것이라며 애교를 부렸다. 엄마는 ‘나는 어렸을 때 하고 싶어도 못 했어!’ 라며 내게 핀잔을 놓으셨다. 왠지 모르게 엄마의 표정에서

아쉬움이 잔뜩 묻어났다.

“엄마는 어렸을 때 공부를 할 기회가 별로 없었나요?”

  엄마는 갑자기 왜 그런 것을 물어보시냐며 당황해 하셨다. 사실 나도 당황했다. 무의식적으로 나온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옛날부터 부모님이 어떻게 살아 오셨나 궁금했던 나이기에, 이번이 내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글쎄……. 어렸을 적에는 오히려 공부할 기회가 많았지.”

“어렸을 적? 그럼 커서는 공부할 기회가 적었나요?”

“그렇지. 이 얘기를 하려면 많은 얘기를 같이 해줘야 하는데…….”

“해 주세요, 너무 듣고 싶었어요!”

  다소 적극적인 나의 반응에 엄마는 당황하시다가 이내 웃으시며 ‘어디서부터 얘기해줘야 하나’ 라고 하셨다. 당신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주시니 내심 기쁘셨나 보다.

 “내가 어렸을 적에 너희 외할아버지가 사업을 크게 하셔서 상당히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단다. 그 당시 잘 볼 수 없었던 냉장고라든지 세탁기와 같은 가전제품도 집에 있었는데, 가끔 친구들이 집에 오면 이게 무엇을 하는 기계냐고 물었어.”

“그 때 기분이 어떠셨나요?”

 “기분이 어땠냐고? 참 당황스러웠지. 어렸을 때 난 모두가 그런 생활을 하는 줄 알았거든. 또 개인 교습으로 영어, 피아노, 발레, 미술 등 다양한 수업을 받았는데 내가 다방면으로 재능이 있었나봐, 하하. 경향신문 미술 대회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고, 항상 발레 선생님한테 잘 한다고 칭찬을 받았거든. 그래서 그런지 당시에는 친구들의 부러움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도 했어.”

“왠지,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엄마가 그림도 잘 그리고, 피아노도 잘 치셔서 신기했어요! 어렸을 적에 공부할 기회가 많았다는 것이 그런 뜻이었나요?”

“그렇지. 하지만 제 2차 석유 파동으로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지자 배우던 것을 몽땅 할 수 없게 되었단다. 또한 어린 나이였지만, 많은 생각을 했어. 우리 집이 잘 살 때 나를 대하는 태도와 판이하게 달라진 게 눈으로 보였거든. 당시에는 그게 무섭기도 하고 서럽기도 해서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어. 그 때 아마 나는 ‘돈은 사람에게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거구나.’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 그래서 너희한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라고 하는 거란다.” 

“그럼 그때부터 공부할 기회가 적어지신 건가요?”

 “응. 집이 어려워지고 나는 인문계 진학을 포기하고 실업계 고등학교로 갈 수 밖에 없었어. 하지만 착실하게 자격증을 따고 졸업할 때 즈음 은행에 취업을 했지. 교대를 가고 싶었지만 그 때 아버지가 편찮으시기도 했고 미국에서 생활하는 오빠의 생활비를 보내줘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어. 그래도 공부에 대한 꿈을 접어놓고 열심히 일하다가 동생이 학자금 대출로 대학을 갔단다. 공부를 하고 싶은 만큼 하지 못한 아쉬움도 컸고, 나도 학자금 대출이 있었다면 대학에 갔을 텐데 하는 생각에 상실감이 컸었어.”

“그 때 당시 힘드셨을 텐데 그럼 어떻게 이겨내셨나요?”

“내가 한창이었을 때, 고속버스에서 넘어질 뻔 했어. 그걸 어떤 잘생긴 남자가 잡아줬거든. 

그게 너희 아빠야. 그 때를 계기로 서로 대구 사는 것도 알게 되고, 전화번호도 교환하고,

그러다가 연이 닿아서 결혼하게 됐단다. 결혼하면서 기댈 사람이 생기고 너희 언니도 낳고 

하면서 저절로 이겨낸 것 같아.” 

“그럼 결혼하시고 은행은 그만두셨어요?”

“그만뒀지. 가부장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던 너희 아빠 때문이기도 했고, 우리 큰딸이 일찍 생겨서 어쩔 수 없었어.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일을 계속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대다수의 여성들이 결혼하면 자신의 일을 포기했던 보수적인 분위기와 은행에서 얻을 수 없었던 성취감 때문에 자포자기 심정으로 그랬던 것 같아.  시간이 지나고 오빠도 낳고 너도 낳고 보니, 문득 내가 하고 싶은 걸 했던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물론 너희들이 크는 모습을 보며 기뻤지만 나는 공부도 더 하고 싶었고, 할 수 있었다면 우리 딸내미들 데려다가 모델로 세워놓고 쇼핑몰을 운영해 보고 싶기도 했었거든. 하지만 현재는 지금 우리 큰 딸, 아들 모두 성인으로 잘 자랐고 작은 딸내미도 잘 자라고 있어서 참 뿌듯함을 느껴. 그냥 나는 신문이랑 책도 많이 읽고, 나중에 너희랑 같이 공연도 많이 보러 다니고 여행 다니고 하면서 다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나중에 엄마랑 같이 여행 다녀야해, 우리 딸?”

   나는 마지막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아빠가 돌아오셨다는 것을 알리는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아빠께 다녀오셨냐는 인사를 드린 후 씻고 나오실 때까지 천천히 기다렸다. 아빠와는 평소 이야기를 해본 적이 거의 없지만, 오늘 엄마와 했던 것처럼 용기내서 아빠와도 대화를 해보려고 한다. 그 때 달칵 하고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는 어떤 어린 시절을 보내셨나요?”

  다짜고짜 질문을 던지자, 영문을 모르시는 아빠께서 엄마를 쳐다봤다. 글쎄 오늘 얘가- 하며 말문을 여시는 엄마. 이야기를 모두 들으시고 아빠는 뭐 그런 걸 물어보시냐며 쑥스러워 하셨다. 하지만 평소에 말을 하지 않는 무뚝뚝한 딸이 당신의 이야기, 당신의 삶에 궁금증을 느낀다는 사실을 대견스러워 하시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아빠도 천천히 말문을 여셨다.

“사실 나도 너희 엄마처럼 어렸을 적에는 집이 부유해서 편안한 생활을 했어. 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 쯤 우리 아버지 사업이 망하고 그 뒤로 쭉 어려운 시절을 보냈지. 가끔씩 너무 어려울 때는 육성회비를 못 낼 때도 있었단다. 그 때 그 시절이 너무 힘들기도 했고, 어마무시하게 우리 어머니가 많은 고생을 하셔서 그 때부터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부모님께 효도 해야겠다.’ 라는 생각을 한 것 같아. 그래서 공부를 계속하려고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돈을 빨리 벌기 위해 학업을 그만두고 일을 찾게 되었단다.”

“그럼 공부를 계속 하셨다면 무슨 공부를 하고 무슨 일을 하셨을 것 같아요?”


“음, 사실 나는 상경계열을 전공해서 고시를 보고 싶었어. 하지만 안 그래도 좁은 집에 형제들도 많아서 제대로 공부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고, 경제적 여유도 없어서 일을 시작해 대학교에 다닐 시간도 없었단다.”

“일을 하시면서 제일 힘들었던 점이 무엇인가요?”

“멀리 타지에 가서 가족과 떨어져 일을 했는데 연말이라든지, 몸이 아플 때라든지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더라. 결혼하기 전까지 그런 생활을 지속했어. 그땐 제대로 교통도 발달되어 있지 않았고 임금수준도 낮아서 찾아뵙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거든. 그래서 결혼하면 아이를 많이 낳을 것이라는 다짐을 했지. 결혼 후에 아이를 낳고 너무 바쁘게 일했지만 내 자식들이 그걸 알아주지 않을 때, 서운함을 느껴. 하지만 내가 바쁘게 일해서 너희가 원하는 만큼 교육받고 공부할 거란 생각을 하니 마음이 좋아. 현재는 딱히 너희한테 바라는 건 없어. 그저 맏딸, 아들은 좋은 일 있었으면 좋겠고 작은딸은 빨리 컸으면 좋겠어.”

  대화를 끝내고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렸을 적, 고집스러운 막내딸이었던 나는 ‘우리 부모님은 과연 나를 사랑하실까’ 하는 발칙한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자란 지금, 당신들의 넘치는 사랑에 괜히 벅차오르는 걸 느낀다. 

부모님 세대.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게 힘들었던 세대이다. 자식들에게 자신의 고생까지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부모님들은 자신의 청춘을 태워, 우리의 세상을 밝혀주기 위해 항상 참고 열심히 일하실 뿐이다. 자식들이 조금만 부모님이 살아오셨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면 현재 자신의 삶에 만족하게 되고, 그들을 더욱 이해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한다. 

  나는 앞으로 부모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해주셨던 것처럼, 부모님을 제 0순위로 생각하며 살아갈 것이다. 우리 형제들을 위해 젊음을 불사른 엄마, 아빠가 내 눈에는 제일 아름답고 멋져 보이는 밤이었다.


독산고등학교 

                                    홍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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