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하)





손수 가꾼 재료로 만든 홈메이드 빵과 커피. 혀끝에서 출발해 온 몸을 타고 흐르는 부드럽고도 감미로운 느낌이 가슴까지 닿는다. 어찌 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시골 생활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소소한 일상이다. 그런데 나는 뭔지 모를 평화로움과 충만함으로 가득하다.

요셉은 수확기의 바쁜 일정을 잠시 뒤로하고, 나를 위해 시간을 할애한다. 넓게 펼쳐진 뒷마당에는 달콤한 과육을 벗어 던진 커피콩이 일렬로 늘어선 목판위에 누워있고, 정원 한 편에서는 어린 묘목들이 비닐봉지에 담겨 커가고 있다. 가공 공장에는 건장한 청년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크기별로 나누어진 커피콩은 물속에서 2~3일 발효과정을 거치며 과육을 모두 떨어버린 후, 인부들에 의해 여러 번 씻기고, 뽀득뽀득 해진 알몸으로 마당의 건조대로 옮겨지고 있는 것이다. 

농장으로 나오자 빨강, 노랑, 파랑색 커피콩을 단 나무들이 사방 어디에서 봐도 일직선을 이루고 서있다. 나무를 심는 데도 규칙이 있어 한 쪽 고랑은 넓이를 3미터로 해서 트랙터가 지날 수 있게 하고, 반대쪽은 1.5미터로 나무가 자라기에 최적의 공간을 확보한다. 고랑은 멀리 소실점으로 이어진다.

농장을 크게 돌며 초입에 이르자, 빨갛게 잘 익은 커피콩만을 골라 따는 사람들이 보인다. 열 살 남짓한 소녀에서 오육십 대 아주머니, 아저씨까지 다양하다. 보수는 일당이 아니고 수확한 양으로 계산된다. 보통 네다섯 바구니를 따는데, 우리나라 돈 3500원 정도. 

공정무역 대상이자, 아동 노동력 착취로 거론되고 있는 것 중의 대표적인 농작물 커피. 요셉이 그걸 모를 리 없다. 그는 여러 종류의 잡지를 구독하고, 인터넷 뉴스를 모니터링하며 바깥세상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내게 말했다. 


“소피아, 내가 재배한 커피 1킬로그램 출하가가 2~2.5유로야. 그런데 소비자가가 얼마인지 알아? 16유로가 넘어. 그 중간의 돈은 누가 다 가져가는 거야?”


커피도 곧 전 공정을 기계로 처리할 것이란다. 이미 브라질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으며 자신도 자동 시스템으로 바꾸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단다. 전 국민의 80퍼센트 이상이 1차 산업에 종사하는 현실에서 시골마을 사람들에게 그나마 돈을 만질 수 있는 기회인데 그마저 없어지는 것이다. 노동력 착취의 원흉으로 지탄 받지도 않겠지만, 학비를 벌던 학생들이나 생활비를 위해 일하던 아낙들의 일자리도 함께 가져갈 것이다. 

나도 그들 사이에 끼어 커피 따는 아낙이 되어 손으로는 커피를 따며, 상상력은 사십여 년 전 오늘로 거슬러 올라간다.  

옥수수 가루처럼 뽀얀 얼굴을 가진 농장주가 일손을 구하고 있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곳으로 왔다. 헬렌도 언니들을 따라 왔다. 낯선 얼굴이 보인다. 키가 껑충하게 크고 어른스러워 보이는 청년은 농장주처럼 피부가 뽀얗다. 소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에 대한 호기심으로 곁눈질을 한다. 그러나 무섭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한다. 그러나 헬렌은 달랐다. 자그마한 키에 날렵한 몸매, 총명한 눈빛을 가진 그녀의 호기심을 누를 건 어디에도 없다. 학교 수업시간에 배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머나먼 미지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을 숨기지 못한다. 또한 소녀로서의 호기심으로 자신이 그동안 봐왔던 주변 남자와는 다른, 이 멋진 청년에 대한 관심 역시 누를 수 없다. 나와 얘기 도중,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어느새 쪼르르 요셉에게 달려가 물어보고 오는 그녀의 어릴 적 모습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시골마을에서 학교에 다니는 소녀가 드물었을 뿐더러 당돌하고 적극적이던 그녀가 요셉의 눈에도 들었을 건 불을 보듯 훤하다. 세월이 흐르며 헬렌은 소녀에서 여인으로 성장해 갔을 것이고, 노총각이던 요셉에게 좋은 배필이 되었을 것이다. 23년 전, 그들만의 꿈이었던 농장주가 되어 지금에 이르면서, 사십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한 것이다. 

여기 저기 보물찾기를 하듯 움직이는 동선에는 캐롤리나도 있었다. 헬렌의 조카로, 태어나면서부터 정신지체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거둬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쳐다보면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다가도, 짐짓 내가 모르는 척하면 다시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조금 나와 낯이 익자 팔을 펼쳐 보이며 얼굴을 붉혔는데, 새 옷을 자랑하는 것이었다. 다음에 갈 때는 그녀를 위해 예쁜 머플러라도 한 장 사야겠다.

저녁 무렵이 되자 요셉은 오한이 나고 미열이 있다고 한다. 어제 이런 저런 얘기로 늦은 잠자리에 들었고, 종일 일을 하며 힘에 부쳤던 모양이다. 그에게는 오랜만에 찾아온 낯선 손님과의 대화가 즐거웠던 모양이지만, 내가 미안한 마음을 비치자 그는 말했다. ‘노인네가 조금 몸이 아픈 것은 당연한 거예요. 전혀 심각한 게 아니에요.’ 

삶에 있어 그에게 엄살은 없다.  


 6월9일

탄자니아에서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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