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이 있었고 전국동시 지방선거가 끝났다. 두 국내외 사건 모두 한국인들에게는 초미의 관심사들이었다. 결과는 사람들에 따라 의견이 각색이겠지만 필자의 시각에서는 발전적이고 그래서 생산적이라 평가를 한다. 가장 우선할 수 있는 것은 전쟁의 위협을 막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두 사건의 외형이 각각 다르게 보이지만 그것이 그리고 있는 그림은 평화라는 하나의 상징으로 집약이 된다.

먼저 북미정상회담을 보자. 모두가 알고 있듯이 남북 정상회담의 연장이고 회담의 목적은 평화 지향이다. 북한이 벼랑 끝으로 모두를 몰아가다가 생각을 바꾸어 새로운 국면을 만들면서 남북이 만났고 그 연장선상에서 미국과 만난 것으로 그 명분은 평화였다. 결과적으로 일촉즉발이던 한반도는 전쟁 분위기에서 평화 모드로 바뀌어 가고 있다. 

그리고 전국동시 지방선거에서 여당의 승리는 현재에 일고 있는 평화의 기운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국민들의 염원의 표출이다. 다시 말하면 누구를 지지하고 아니하고의 차원이 아닌 모처럼 도래한 평화의 기회를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국민들의 강력한 시위다. 즉 눈에 보이는 평화의 기운이 철학은 없는 채 당리당략으로만 보려는 정치세력들로 변질되지 않도록 잘라버린 것이다.

그렇듯 평화는 이제 멀지 않는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 평화가 빨리 오도록 챙겨야 한다. 이 땅에 살고자 하는 이라면 누구도 이 대열에 동참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남과 북 그리고 국가와 국민 간의 신뢰의 확보다. 국가의 평화보다는 자기세력의 이익을 우선하는 정치세력들과 이들과 부화뇌동하는 사이비학자들의 엉터리 논리들로 어렵게 마련된 평화 모드가 작동을 멈추게 되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인간 간에 다툼이 있게 되는 것은 서로의 이해가 충돌할 때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의 기초는 대개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 데서 비롯한다. 믿지 못하면 오해가 생기게 되고 그것이 발전하여 싸움이 되며 집단적이 될 때 전쟁이 되는 것이다. 물론 전쟁은 이러한 이유 밖에서도 발생하고 있지만 그것의 단초를 살펴보면 서로에 대한 불신이 이유인 경우가 많다.

지금 남과 북은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평화무드가 가뭄에 내리는 단비처럼 한반도를 적시고 있다. 통일을 이야기 하기는 아직은 이르지만 그간에 있었던 적대적 상대들이 서로에게 가지는 적개심(敵愾心)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마치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지친을 만나는 것과 같은 상황들이 보이기조차 한다. 얼마나 보기 좋은가! 

남과 북의 정상이 손을 맞잡고는 분단의 상징 벽을 이쪽으로 넘어오고 또 저쪽으로 넘어가면서 서로가 한 민족임을 보여 주던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래서 이제 서로를 믿기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그것을 행동하는 일을 하도록 하자. 남과 북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양 정상은 평화를 약속하는 문서를 작성하고 보란 듯이 두 손을 맞잡은 것도 몰라 뜨거운 포옹을 하였던 것을 가슴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것은 서로를 신뢰하고 싶다는 아름다운 염원이다. 

신뢰(信賴)의 사전적 의미는 ‘믿고 의지함’이다. 신뢰는 규범이 가지는 강력한 규제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두 당사자 간에 신뢰관계가 형성되면 서로 상대의 기대를 벗어나는 행위를 억제한다. 또한 서로 신뢰하는 당사자들은 그것으로 상대의 행위를 예측할 수 있게 된다. 독일의 사회학자 N. 루만(Niklas Luhmann)은 신뢰는 상대의 행위를 예측할 수 있게 할뿐만 아니라 예기(豫期)할 수 있게 한다고 하였다. 즉 신뢰하는 당사자는 서로를 알고 함께 해야 할 일과 그것의 때도 알 수 있게 한다. 

내가 누구를 신뢰한다는 것은 그가 나의 존재를 인정해준다는 것을 나 자신이 확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인용하면 남과 북이 서로 신뢰를 하는 것은 서로의 현상을 인정하는 것으로 평화가 있게 된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유의할 것은 남과 북은 각각의 가치질서를 서로 존중하여 자기를 기준하여 상대를 판단하지 않아야 한다. 물론 이러한 질서는 궁극적으로 보편타당성의 확보가 전제여야 한다. 즉 서로 신뢰의 목적이 평화라면 그것의 본질에 맞갖은 질서 형성을 함께 추구해야 한다.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한반도의 북쪽에 정부(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가 수립되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국과 적대적 상대로 대립하던 북한이 그들과 국가 간 협의를 위한 정상회담이 열린 것이다. 그들이 만난 목적은 평화인 것은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두 사람은 서로를 신뢰한다고 하였고 그것으로 이곳에서의 만남은 일단 종료되었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잘 된 회담이라고 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당초 기대했던 것에 못 미치는 결과라며 실망했다는 평을 하였다.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강경일변도이던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만족한다고 하였고,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도 같은 취지로 기자들에게 소감을 밝힌 만큼 전자의 평이 옳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적대적 상대로 회담 수일 전까지 서로를 혐오하는 발언을 무차별적으로 하던 두 정상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악수를 하고 보도진들 앞에서 서로를 신뢰한다고 하였는데 바깥의 평가들은 그 성과를 절하하는가 하면 어떤 평은 아예 실패한 회담이라고 하는 이유는 왜 일까? 언론 보도에 의하면, 당초 미국과 그를 동조하는 세력들 그리고 남쪽 일각에서 요구했던 CVID, [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 이른바 ‘완전하고 검증할 수 있고 되돌릴 수 없는’이란 조건이 공동발표문에서 빠졌기 때문이란다. 즉 북한의 핵 시스템을 일거에 완벽하게 제거할 것을 북한이 약속하는 것이 미국 측의 목표였는데 그것에 대한 표현이 불완전하고 그래서 이 회담은 기대 밖을 넘어 실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그토록 강경하던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만족한다 하면서 언론 등의 의구심 표명에 성공적 회담이라며 적극적인 자세로 대응을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분명한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그의 대답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을 신뢰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는 점이다.

정상회담의 목적은 대개 서로에게 민감한 현안을 최고 결정권자가 협의하여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결과를 얻고자 함이다. 그런 회담에서 양 정상이 만족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문서로 작성하여 대외적으로 공포하였다. 다시 말하면 양 정상은 회담을 성공적으로 진행하여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에서 합의를 하였다. 따라서 회담의 성공여부는 전적으로 당사자들의 판단이다. 그런 결과를 두고 제 삼자들이 왈가왈부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양 정상의 이 회담 목적이 평화 지향이고 서로가 만족할만한 결과를 거두었다고 발표를 하였다. 일각에서는 부속합의서가 있을 수 있다는 추정을 말하기도 하는데 그것이 궁금하겠지만 공개하라고 채근 할 일이 아니다. 회담 당사자인 양 정상이 서로 신뢰한다는 말을 했으니 그들의 말을 존중하고 그에 따른 후속 진전을 지켜보는 것이 예의다.

서로 신뢰하는 것은 아름다운 구속이다. 두 관계는 오랫동안 서로를 혐오를 넘어 타도의 대상으로 두고 지내왔던 사이다. 그런 두 당사자가 지난 날 그들이 취했던 과격한 행동이 민망할 정도로 서로를 추켜세우기까지 하고 있다. 그들의 신뢰를 믿어보자.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가 있는 한반도에 평화를 오게 한다 하지 않는가!(♣2018.06.20.) 


필자는 

시흥3동에 거주해 다양한 

마을활동을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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