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기념 우리 동네 역사 찾기-1

반외세 투쟁의 선봉 1,2차 시흥농민봉기



본 지는 창간 이후부터 금천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왔다. 우리나라 근현대 음악과 민속에 정통한 노동은 교수(중앙대학교 명예교수)와 함께 “2012년에 금천의 문화는 어디로 갔지?-이제는 금천학을 할 때이다”를 준비하다 아쉽게 불발된적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당시 함께 말씀을 나누었던 노동은 교수가 2016년 고인이 되셨다.

금천구혁신교육지구 마을공동체분과에서는 2018년 6월 4회에 걸쳐 ‘금천마을대학 우리동네 인문할科-한말 시흥농민봉기와 마을공동체’라는 주체로 3번에 걸친 강좌를 개최했고, 10월24일에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강연 우리동네 현대역사와 마을공동체 운동’을 열기도 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중앙정부와 금천구에서도 기념행사가 다양하게 준비되고 있다. 

1919년  시흥보통공립학교에서도 3월7일  동맹휴업과 만세시위가 있었다고 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에 앞서 1898년 1,2차 시흥농민항쟁도 있었지만 정작 금천구 주민들은 잘 알지 못한다. 이에 본 지는 우리 동네 역사를 중심으로 함께 고민을 나누기 위한 [3.1운동 100주년 기념 우리 동네 역사 찾기] 연재를 시작하고자 한다. 하지만, 전문연구자가 아닌 민간영역에서 관심있는 분들의 논의와 학습을 통해 정리한 것이라 깊이가 얕고, 다소 오류가 있을 수 있으니 독자의 양해를 구한다. 

 


우리 동네 항일운동, 시흥농민봉기 

  금천구는 1995년 구로구로부터 분구한 이제 25년밖에 되지 않은 작은 구지만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영등포와 구로, 관악, 동장, 광명, 안양, 안산, 과천, 군포등 넓은 지역을 포괄하던 시흥군의 중심지인 시흥현청이 시흥5동에 존재했다. 금천구에는 두 번의 농민봉기가 있었다. 1898년에 일어난 1차 시흥농민봉기는 지방 관리들의 탐학과 가렴주구에 있었다. 은행나무에 옛 군수들의 ‘선정비’가 믾이 남아 있지만 조선시대 말기 군수는 ‘돈으로 관직을 얻었으니 항구적인 지위가 보장되지 않은 상황이라 재임기간 최대한 수탈에만 혈안’이었다. 갑오농민전쟁을 통해 깨어 있는 농민이 많아졌다.


 항쟁의 주역들은 지방관리의 비행을 조목별로 정리하고 “향회”를 개최한다는 사발통문을 6개면 42개 동리의 집강(면장, 이장들을 지칭, 지금의 주민자치회장)들에게 통보하였다. 사발통문은 사발(밥그릇)으로 원을 그리고 원을 주위로 제안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해서 누가 주모자인지 알기 어렵게 하는 방법으로 농민항쟁에서 보편적으로 이용되는 수단이었다. 8월 23일 운집한 수천명의 군중들은 전임 군수 문봉오의 가혹한 수탈과 불법행위를 성토하고 그 아전들의 죄상을 관가에 알리며 처벌을 요구하는 반봉건 투쟁이었다. 농민들은 아전들의 가옥창고를 파괴하고, 집기,전곡 의복들을 마당에 끌어내 불태웠다. 이 사건으로 봉기주동자 남면의 직강을 맡은 성우경과 전횡을 일삼은 향장 엄우명 등 4명을 구속됐다. 


<주동자가 누구인지 알수 없도록 원형으로 이름을 적어놓은 사발통문-갑오농민전쟁 당시 사발통문>



  2차 시흥농민봉기는 개항 이후 열강들의 이권 참탈에 항의하는 과정에 일어났다. 일본은 철도를 식민지의 침탈을 쉽게 하는 도구로 보았으며, 1904년 2월 발발하여 전쟁터가 만주지방으로 북상하자 철도부설을 다그치는 과정에 봉기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봉기가 발발하기 3년 전에 영등포~수원간의 경부선철도 공사가 시작된 9월부터 조짐이 있었다.  1901. 9.9 황성신문 보도에 의하면 ‘시흥군 등지에서 경부철도 기공을 한 후에 역부들은 임금이 매우 적다고 비난하고 땅주인은 적절한 지가를 지급하라 하고 분기하기로 하자 병정과 순검을 파견 진압하였다“고 보도됐다.


철도를 부설하는데 있어 일본은 조선측의 희생을 전제로 저렴한 임금과 토지의 무상수용으로 세계에서 가장 싼 값으로 완성시켰다.  19세기 말 식민지 및 반식민지 지역에서 철도 건설비는 일본 돈으로 환전하여 1마일 평균 16만원 수준이었으나 조선에서는 미국의 값비싼 자재를 사용하고도 3만 1천원에 불과했고 일본 군대의 비용과 수송비를 감안하더라도 6만 1천원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니, 당시 인부들이 얼마나 비참한 대우를 받았는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일본사령부는 청국 안동현(지금의 단둥시) 지방의 병참기지와 철도 부설을 위해 경기도와 삼남지방(충청,전라,경상도)에 2,000여명의 인부를 모집하여 보내줄 것을 조선 정부에 요구하였고, 시흥군에는 80명의 인부가 배정되었다. 

8월 각 동회 집강들은 수 천명의 농민들을 인솔하여 관아에 들어가 사정을 호소하였다. 지금은 농번기이므로 인무모집을 연기하고 다른 군이 시행하는 경우를 보아 가면서 실시하자고 요청하자 군수가 이를 받아들여 항쟁 직전에 해산하였다. 하지만 러일전쟁의 전장은 중국 동북지역으로 확대되어 역부 수요를 급증시켰다. 

이에 일본군은 인부 충원을 독촉하게 되었고, 군수는 강제 모집을 하였다. 농민들은 산속으로 피신하여 어떤 마을은 폐허를 방불케 했다. 시흥을 비롯한 경기도 지방은 서울에 가까운 지역으로 일본군의 압력이 집중되었다. 시흥군 이외에도 가평, 김포, 진위, 고양, 용인 등이 역부의 강제모집에 저항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농민항쟁 주동자들은 치밀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이들은 8월 중순경에 퇴리 김원록에게 의뢰하여 역부모집에서 야기되는 각 종 모순을 황성신문사에 투고하기로 결정했다. 초고를 받은 김원록은 읍내에 와 있던 이기준에게 황성신문사에 전달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는 상경 도중 노량진에서 이명수를 만나 대신 전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명수는 이를 집에 두었다가 며칠이 지나 내용을 살펴보니 역부모집의 부당성과 이를 둘러싼 아전들의 비리에 관한 내용이었음을 알고 곧바로 관아에 알렸다. 9월 10일 순교청에서 김원록을 즉시 체포하는 동시에 대필한 서울의 남중희는 경무청에서 구속하였다. 


  뜻밖의 밀고로 상황이 불리하게 진행되자 집강들은 9월 13일 사발통문을 발송했다. 다음날 집강들의 인솔하에 수천 명에 달하는 주민들이 한천교(안양천)에 모였다. 성우경 집강은 역부모집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한편 아전들과 자신과 작간(간악한 꾀를 부림)은 사실무근임을 밝혔다. 이에 하주명은 작간은 군민이 모두 아는 사실이라고 반박하며 언쟁이 높아지는 가운데 군중은 결백을 확인하기 위하여 관아로 나아갔다. 오후 3시경 관아에 도착할 즈음 이서층(향리와 서리들)은 모두 도망한 상태였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일본인 30여 명은 관문을 폐쇄하고 칼을 휘둘러 부상자가 속출하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관문 밖에 있던 농민들은 분노가 폭발하여 일제히 돌을 던지며 관문을 파괴하고 돌진하였다. 이들은 감옥을 파괴한 후 수감된 김원록 등 농민항쟁과 관련된 사람들을 풀어주었다. 이어 관청과 작간을 저지른 이서층 집과 기물을 파괴 하였다. 

한편 관아 진입을 시도하는 와중에 군수 박우양 부자는 현장에서 사망했고 관아 진입을 저지하던 일본인도 2명이 사망하고 4명은 부상하였으며, 농민 중에서는 광명리 민검석이 사망하고 일본인이 휘두른 칼에 다수 부상자가 발생하는 아비규환이었다.


  일제는 자국민 보호를 구실로 동대문에 주둔한 헌병경찰과 군인 200여 명을 급파하였고 읍내에 주둔하였다. 일분군은 7~8명씩 조를 편성하여 각 동리를 돌아다니며 검속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9월 15일 읍내에 감시가 엄중하자 집강들은 광명리에 모여 사후 대책을 논의하였다. 해결책은 역부모집 중단을 관찰부에 탄원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의견서를 작성한 후 철산리 최영선은 이를 가지고 관찰부로 가는 도중에 체포되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일본군의 무력 진압으로 표면적인 평정은 되찾았으나 오히려 민심은 상당히 동요하고 있었다. 


  주동자에 대한 재판은 10월 26일부터 진행하여 김원록은 사형, 성우경 민용훈은 무기징역, 하주명은 15년을 각각 언도했고 김원록은 곧바로 사형에 처해졌다.


민중운동사의 새로운 이정표


대한제국의 몰락과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이 가속화되는 상황 속에서 벌어진 시흥농민들의 봉기는 반봉건과 반외세라는 ‘이중적인’ 과제를 해결하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반영시키고 보다 결집된 역량을 발휘하고자 향회(민회)를 개최하였다. 향회는 다양한 농민들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공동체 장이었다. 향회는 지방관속의 수탈에 대항하고 민권의식을 강조하는 실천의 장이었다.  


  2차 시흥농민운동은 지방관리의 봉건적이 수탈에 대한 저항이자 일제 침략에 대한 저항이었다. 항쟁에서 군수 부자와 일본인 살해하는 등 현실 모순에 대한 타개하는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했다. 또한 신문을 통해 사회적인 여론에 호소한 ‘새로운’ 방법은 민중운동사상 획기적인 시도였다. 이는 결국 군수의 재직 기간을 단축시킴으로써 일시적이나마 수탈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다만 다른 지역과 연계를 통한 보다 조직적인 저항으로 나아가지 못한 점은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2차 시흥농민봉기는 1894년 갑오농민항쟁과 갑오개혁을 통해서 민중운동이 한 단계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생각한다. 2차 시흥농민봉기를 구로구도 ,광명시도 자신들의 역사로 기록하고 있지만 금천구에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주민자치, 지방분권 시대 역사의 정체성 찾기


 지방분권, 지방자치화가 시대의 화두가 되고 있다. 이는 지역사 연구의 심화를 통하여 지방자치화 시대에 걸맞는 역사적 정체성을 수립하는 문제와 풍부한 지역사를 복원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구로공단이 있으면서 1985년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노동자동맹파업인 ‘구로동맹파업’으로 이어지는 저항의 역사가 있어 금천구에서는 더욱 각별할 수 밖에 없다. (현재 민주노총의 전신이 되었던 전노협에서는 2차 시흥농민 봉기 등의 투쟁을 근대노동운동의 효시로 중요하게 평가했다.)

이제 3.1운동 100주년 기념일도 얼마 남지 않았다. 3.1운동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진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기 역사의 격동기를 살아낸 민중들의 ‘시흥농민봉기’와 같은 거대한 역동성의 역사적인 투쟁의 소산물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 위의 대부분 내용은 금천구청 발행 향토문화지와 김형목(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의 ‘시흥지역 농민운동 주역들의 올바른 자리매김’에 근거해서 기록했음을 밝힌다.  다음 호의 주제는 ‘우리동네 3.1운동’이다.


이성호 기자

gcin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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