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기념 우리동네 역사 찾기

 

내가 겪은 3·1운동-이희승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국어학자 이희승 선생은 시흥군(의왕시)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이희승 선생은 내가 겪은 3·1운동3·1운동 50주년 기념논집1969년 게제했다. 본 지는 시흥군 출신의 이희승 선생의 글을 100주년을 맞아 다시 읽어봄으로써 당시의 분위기를 되짚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이회승 선생은 호시탐탐한 일본은 1910년 기어이 한일합방이란 명목으로 한국을 완전히 병탄하고 말았다. 고종은 이태왕이란 치욕의 칭호 밑에서 10여년을 지내다가, 1919121일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일인에게 독살까지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191933일은 고종황제 인산(황제의 장례)의 날이었다.,, 인산을 구경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오는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극빈자가 아닌 이상, 서울로 오지 않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고 회고했다.


서울의 거리는 열광적인 독립만세를 연달아 부르는 군중들로 가득 찼다. 어느 틈에 만들었는지, 종이로 만든 태극기의 물결, 이러한 대열 앞에는 학생이 선두에 섰으며, 여기에 호응한 것이 서울 시민, 지방에서 모여든 시골 사람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시위 군중들의 맹렬한 기세에 일본 관헌들도 멍청하게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지금의 광화문 세종로 거리인 육조 거리가 콩나물시루같이 인파로 빽빽하였다. 그 속을 인력거를 타고 지나던 일인 경기도 지사에게 모자를 벗어들고 만세를 부르라고 호통을 치니까 혼비백산한 이자는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만세를 불렀다.”


해가 저물어도 만세소리는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들려왔다. 이때부터 일본관헌들의 잔인한 보복이 시작되었다 평화적인 시위군중에 대하여 창과 칼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였다. 안국동 부근에서는 손을 들고 만세를 부르는 여인에 대해 일 순경이 환도로 팔을 내리쳐 잘라버렸다. 여기저기서 이러한 일들이 생겨났다.”


“32일에도 시내 각처에서 적은 집단이 군중 속에 파고 들어가서 독립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였고, 그리하면 반드시 일반군중이 이에 따라 만세를 화창하여 그 기세가 커져가고 있었다. 33일은 인산날 이므로 만세소동은 비교적 적었다. 그러나 거리의 사람만은 어느 날보다도 더욱 많았었다. 35일에는 31일과 같은 대규모의 만세운동을 일으킬 예정이었다. 시발지점은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 전이요, 출발시간은 상오 9시였다. 서울역전으로 집합장소를 정한 것은 인산이 지나서 시골로 돌아가는 사람이 부쩍 많아져서, 그 사람들이 보는 눈앞에서 다시 한 번 대규모의 만세운동을 전개시켜 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전에 이 계획이 누설되어 그 정보가 일본관헌의 수중에 들어간 것으로 생각되었다. 역전에 모이는 군중들도 귀향인이 아닌 사람은 쫓아버리고, 덩어리로 뭉치는 것을 극력 방해하고 있었다. "


"이러한 중에서, 어떤 지도자격인 사람이 인력거를 타고 앉아서 큰 태극기를 높이 들고 역 앞에서 남대문을 향하여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주로 청년들로 이루어진 일련의 행렬이 그 뒤를 따라 질주하면서, 여기저기서 만들어 가지고 온 태극기를 꺼내서 행렬에 낀 청년들에게 또는 구경군들에게 나누어 주고, 이것을 흔들면서 만세를 고창하였다이후 서울에서의 만세 시위는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이희승 선생




경기도 광주군 의곡면 포일리(현 경기도 의왕시 포일동)에서 출생하였다.

 1930년 경성제국대학 조선어학과를 졸업, 19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가 되고, 같은 해 조선어학회 간사 및 한글학회 이사에 취임하였다. 1940년 일본 도쿄대학[] 대학원에서 언어학을 연구하였으며,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관련, 검거되어 일본이 망할 때까지 복역하고 8·15광복 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에 취임하였다. 1952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부원장에 취임하고 1954년 대한민국학술원 종신회원에 선임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희승 [李熙昇] (두산백과)



최석희 기자

 

이 기사는 향토문화지(금천구청), 내가 겪은 3·1운동(이희승),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19 “국내 3·1운동-중부·북부(김정인이정은), 시흥지역 3·1운동의 전개양상과 현장증언(김형목), 한국독립운동사 3-3.1운동 을 인용하여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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