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호가 필요 없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  






총리로 내정된 이가 경호를 살살 하라는 말을 대통령이 했다고 전했다. 대통령은 경호의 매뉴얼을 넘어 주민과 만나는 모습이 보여 준다. 긍정적인 변화다. 게다가 새로운 대통령은 집무실을 청와대에서 광화문으로 옮겨 광화문 시대를 연다는 공약도 했다. 그래서 문득 든 생각이 이 글 제목이다.


우리는 촛불을 들어 광장을 이루고, 광장의 촛불은 흘러 역사의 큰 강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강은 ‘청와대’ ‘대통령’ ‘경호’라는 댐에 막혔다. 물은 흐르는 것이다. 자연에서 봤을 때 폭력은 흐르는 물이 아니라 막아 선 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폭력에 저항하는 반(反)폭력'으로서의 댐을 넘으려는 촛불의 강을 폭력이라 낙인찍었다. 역사를 고인 물로 만드는 논리는 거대했고, 물고를 트는 촛불대신 물고를 막는 댐이 법과 질서, 평화 시위, 민주주의가 되었다. 만약 우리가 그때 그대로 주저앉았다면, 촛불은 사회의 불평꾼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새로운 대통령도 못 봤을 것이다. 


한국에서 대통령이 떴다 하면 그 주변 천지사방이 삼엄하고 민생은 공포로 멈춘다. 대통령이 민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민폐의 축(軸)이 된다. 민폐가 법과 질서의 제일 원칙이 된다. 범죄자가 숨은 청와대 압수수색을 막은 것도 법과 질서였다. 흑과 백을 뒤집는 원칙은 종종 ‘무관용의 원칙’이 되는데 그것은 국가의 폭력화 선언이다. 그래서 수천 년 전에 노자도 공자도 법치(法治)는 덕치(德治)만 못하고 덕치(德治)는 무치(無治)만 못하다고 했다. 법 없이 사는 삶이 법대로 사는 삶보다 착하고 평화로운 이치다. 본시 경호는 보호에 있지 격리에 있지 않다. 그런데 한국의 경호는 보호 대상을 대중으로부터 단절시킨다. 경호가 아니라 격리고 배제다. 경호가 단절과 배제로 된 이유는 한국의 지배자들이 정치적 정당성이 없는 독재자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백범 김구가 죽는 모습으로 자기가 죽을까 두려운 이승만, 쿠데타의 폭력에 중독되어 민중을 가까이 할 수 없는 박정희 군부독재, 광주의 피를 먹은 전두환, 이들은 백성을 개돼지 아니면 자기를 해칠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볼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가 보호가 아닌 격리라는 극단의 경호가 된 것이다. 


찾아보니 경호의 일반원칙은 경호 대상자를 근접 중간 외곽으로 구분하고 경호를 하는 3중 중첩 경호의 원칙이 첫째요, 돌발적 상황에 대한 순발력과 창의력이 동원하며 자기희생을 감수하는 두뇌 경호의 원칙이 둘째요, 공격이 아니라 방어가 목적이어야 한다는 방어 경호의 원칙이 셋째요, 경호를 하고 있음을 보호 대상도 대중도 가능한 한 느끼지 못하게 하는 은밀 경호의 원칙이 넷째라고 한다. 근데 그 동안 한국의 경호는 창의력이 없으니 방어 대신 공격, 은밀 대신 으스대는 위력시위의 경호를 했다. 삼업한 경호보다 자연스런 경호, 자연스런 경호보다 경호를 하는지 안 하는지 모르는 경호가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경호가 유지되는 한 대통령과 민중 사이엔 언제나 건널 수 없는 강과 벽이 놓여 있게 된다. 역사를 보면 대통령의 위해는 밖이 아니라 안에서 왔다. 그런데 한국의 경호는 밖으로 위세를 떤다. 군사독재의 문화, 일제 군국 식민주의 잔재의 문화다. 그리고 그런 악습은 승용차를 몰고 기차역 플랫폼까지 밀고 가는 황교안식 괴물을 만들었다.  


이제 새로운 대통령은 광화문시대를 연다고 공약했다. 여기서 광화문은 촛불의 광장으로 광화문이다. 그런데 지금의 관행이 그대로 유지 된다면 대통령의 선의와 무관하게 광화문은 감옥이 된다. 광장이 만든 대통령이 광장 자체를 부정하고 말살하는 비극이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왜냐면 대통령과 그 집무실은 집회 절대 금지 구역에 심지어 축제도 안 되는 금단의 영역이 되기 때문이다.    


일찍이 망국 매국의 역사가 친일 친미로 이어지는 것을 한탄하며 분단과 증오의 현실에서 “껍데기는 가라”고 호통 쳤던 신동엽 시인은 대통령의 모습을 이렇게 그렸다.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고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 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럿셀 헤밍웨이 장자(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는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갯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곤가 불리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이름 극작가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 쪽 패거리에도 총 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하지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 내는 미사일기지도 탱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사색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 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 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경호가 필요 없는 나라는 국민을 적대시 하지 않는 정치로 가능하다. 태극기 휘날리며 미국기에 애국하는 껍데기들이 청산된 나라, 빈곤과 차별, 분단과 전쟁이 증오를 낳지 않는 나라가 필요하다. 사드를 죽어도 반대하는 대통령이 있는 나라, 그 나라에 살고 싶다. 대통령이 아니라 백성의 삶이 경호되는 나라 말이다.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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