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아의 탄자니아 통신-33    


아, 덥다 더워


“너, 돈 좀 있어?”

“아프리카에서 금방 온 내게 돈이 어디 있어? 그런데 왜?”

“돈 있으면 비트코인에 투자 좀 하라고.”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 온 친구와의 대화 내용이다.

주위에서 가상화폐 투자로 돈 벌었다는 사람들이 많아 투자를 해보려고 했더니  정부의 규제로 계좌 개설 자체가 불가능해지자 계좌를 가진 젊은이에게 돈을 맡기고 대리 투자를 했는데 며칠 사이에 많이 올랐다는 자랑 겸 투자권유 차 전화를 한 것이다. 하도 해괴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수익이나 손실이 발생했을 때는 어떻게 배분하기로 한 것인지가 궁금해 꼬치꼬치 캐물었더니, 이익은 똑같이 나누고 손실은 본인이 전부 떠안기로 했다는 것이다. 나도 너 같은 투자자 좀 찾아 봐야겠다며 허풍을 떤 후, 일단 돈부터 회수하고 추이를 지켜보다, 꼭 해야겠다 싶으면 본인계좌를 만든 후, 다 잃어도 대세에 지장이 없을 만큼만 투자해 보라고 권했다. 그녀는 사람을 그렇게 못 믿어서 어떻게 사느냐고 혼잣말 하듯 한마디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름 시대의 변화 정도는 읽으며 산다고 생각한 내게 오랜만에 들어간 한국의 가상화폐 광풍은 상실감 비슷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랄까? 바보가 된 듯도 했다. 가상화폐를 카카오 페이나 네이버 페이처럼 온라인 지급 결제 수단으로 쓰이는 것이라고 이해하며, 카드조차 필요 없는 시대니 여간 편리하지 않겠구나, 라고만 생각했으니 사실 바보였던 것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가상화폐가 우리나라에서 거래가 되었기에 나는 까막눈이 된 것인지 궁금했다. 2013년, 내가 아프리카로 향한 시점과 거의 비슷하다. 이곳에서도 가상화폐에 대한 기사를 접하긴 했을 터이지만 관심이 없으니 저 세상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눈 돌릴 사이도 없이 내 눈 앞에 쫙 펼쳐지니 무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2030세대가 주축이 된 작금의 투기 열풍에 법무부는 가상화폐 거래소 폐지를 추진 중이며, 투자자들은 청와대 청원 게시판으로 몰려가 거래소 폐지나 가상화폐 투자를 도박으로 보는 것에 반대하는 청원을 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갑론을박을 가만히 지켜보다보니 시대적 요구에 의해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정책으로 막을 방법은 없어 보인다. 일시적 유행을 넘어서는 거센 물결이 될 것은 분명하다. 

 나는 지금 가벼운 옷차림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올해 들어 가장 춥다는 날, 한국을 떠나오며 입고 있던 두꺼운 옷을 경유지마다 매미가 허물을 벗듯 한 겹씩 벗어던지자 여름 원피스 한 겹만 남았던 까닭이다. 단시간에 일확천금을 번 사람들의 무용담을 들으며 느꼈던 상실감도, 시대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바보가 되었다는 자괴감도 더위 속에 던져버리고, 모기장 속으로 들어온 한 마리 모기를 잡기 위해 모기채를 힘껏 휘두른다. 아, 덥다 더워.



2018.1.14일

* 탄자니아에서 소파아

푼디


 집수리 기술자 푼디와 아이들



종점에서 기다리겠다는 그의 말을 떠올리며 달라달라(시내버스)에 올랐다.

 빼곡히 들어찬 사람들 틈 사이로 잡목 숲이 언듯언듯 보이는 가 싶더니, 제법 큰 마을이 나온다. 차장은 한 정거장만 더 가면 목적지라고 알려준다. 달라달라에서 내리자 자그마한 키에 호리호리한 사내가 나를 발견했는지 다가온다.   

  그는 집을 수리하며 만난 푼디(기술자)다. 

관사로 들어와 집을 손보는데 며칠이면 끝날 것이라던 공사는 한 달이 다 되어가는 데도 진척이 없어 지쳐가던 중, 기술자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며 찾은 사람이 그였다. 

 식전 댓바람에 와서 늦은 시간까지 묵묵히 일만 했다. 물 달라는 말조차 없었다.  그런 그가 맘에 쓰여 중간 중간 간식을 냈다. 그의 손이 닿자 며칠 만에 공사는 마무리 되었다. 일을 끝내고 돌아가며, 자신의 집에 초대를 했던 것이다.  


 그는 삐뚤빼뚤한 골목길을 한참이나 걸어가서야 자그마한 대문 앞에 멈추어 선다. 여러 가구가 함께 사는 집인데, 그 중 커튼으로 내부를 가린 입구로 안내한다. 좁은 거실에는 벽면을 따라 레이스 천으로 커버를 씌운 소파가 자릴 잡고, 중앙에는 테이블이 놓여있다. 거실 한 귀퉁이를 차지한 배불뚝이 구형 텔레비전에서는 합창단원들의 몸짓만이 권태롭다. 

 거실을 가운데 두고 두 개의 방이 나란히 놓여있다. 부부침실엔 커다란 침대하나가 방을 가득 채우고, 벽면에 주렁주렁 걸려있는 옷가지가 전부다. 맞은 편 방은 부엌이며 동시에 아이들의 거처다. 부엌살림이라고 해봐야 아직도 불길을 안고 있는 숯불 화덕과 켜켜이 쌓여있는 플라스틱 통, 몇 개의 양은 냄비가 전부다. 우리 기준으로 보면 참 열악하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삶이 내게는 작은 위안으로 다가온다. 없어도 사는 데 지장 없는 것들을 탐내고,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곡간을 채우려고 전전긍긍 하던 욕심만 내려놓으면, 내 한 몸 거둘 수 없겠나 하는 맘이 들었기 때문이다.       

 

 딸만 셋인 딸부자였는데, 아이들은 자신과 다른 나를 보며 경계하는 지 곁눈질만 할 뿐 선뜻 내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곳에 자리 잡고 사시는 한인분이 자신의 딸 이 입었던 것이라며 주신 원피스와 막내를 위해 쇼핑한 옷이 든 쇼핑백을 큰 아이에게 내민다. 면 체크무늬 원피스를 밑에 동생에게 넘기는 걸 보니, 공주풍의 하늘하늘한 분홍색 레이스 원피스가 맘에 들었나보다. 동생은 바로 갈아입고 나와 내 앞에 서서 자랑을 한다. 언니는 체면을 차리는지 멀찍이서 몸에 대보기만 하는데, 입에는 함박웃음이 걸려있다.  

 그의 아내가 식사 준비를 하는 사이,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며 나를 끈다. 대문을 나서자 어느새 준비했는지 오토바이 한 대가 서있다. 친구에게 빌려온 것이란다. 울퉁불퉁 자갈길을 한참 달려 도착한 곳은, 넓은 들판에 몇 채의 집만 덩그맣게 서있는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저만치 공사 중인 건물이 보였는데, 혼자 자신의 집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삼십대 초반인 그는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공사판을 떠돌며 기술을 익힌 것인데, 손끝이 야물고 영리해 웬만한 전문가 뺨쳤다. 기술이 있는 그에게 땅이 마련되자 자연에서 나는 재료만으로도 너끈히 집을 짓는 것이다. 거실에 방 둘, 부엌 그리고 화장실 겸 샤워 실. 좁지만 다섯 식구가 살기에 손색이 없어 보인다. 이미 몇 그루의 망고와 아보가도 나무가 자리를 잡고 있는 마당에 야채도 심을 거란다. 정원도 가꿔보라는 나의 말에 빙그레 웃는다. 


 여섯 가구가 함께 세 들어 살고 있는 지금의 집. 수도꼭지 하나가 시설의 전부인 욕실을 공동으로 사용했고, 마당의 수도에서 물을 길어다 쓰고 있었다. 그의 집과 맞은편에 살고 있는 중학교 교사의 집을 제외하면 단칸방이라고 했다. 이곳은 서아프리카와 달리 핵가족 형태를 띠고, 가족과 떨어져 사는 독신인구가 많다. 부족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인구를 분산시키는 정책을 편 영향인 듯하다. 120개나 되는 부족들을 섞기 위해 학생들을 다른 지방의 학교로 보내 교육을 받게 하는 것도 그 중의 하나다. 그래서 기숙사나 관사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아이들을 키우며 이런 저런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 그곳을 떠나 자신의 집으로 이사 갈 꿈으로 행복한 그. 몸뚱이 하나로 삼십대 초반의 나이에 자신만의 집을 갖게 된 사내. 탄자니아에서 보기 힘든 사람이다. 

  그의 아내가 정성스레 준비한, 감자에 소고기를 넣어 찐 전통음식을 맛나게 먹고 나오면서 집들이 선물로 예쁜 식기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탄자니아에서 소피아

10월 15일



‘꽝꽝’

망치질 소리가 요란하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며칠을 미루더니 드디어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열 시쯤 되어 장정 네 명이 들어섰다. 손바닥만한 공간을 수리하는 것이니 금방 끝나겠군 했다. 그런데 조금 후, 망치 소리는 인부들의 잡담으로 바뀌었다. 타일을 깨던 망치가 부러져 바꾸러 가야한단다. 다시 망치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점심 시간이라며 옷깃을 여민다. 곧 돌아오겠다는 그들은 한참이 지나서야 들어선다. 망치질 소리 대신 청소하는 기척이 나는 가 했더니 퇴근 시간이란다. 

시계를 보니 세 시. 문설주 부분의 타일만 겨우 떼어낸 상태다. 너무 단단해, 일하는 게 여의치 않은 탓이었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한다. 내일이 지나면 다시 주말. 저 기세로 일하면 타일 벽을 제거하는 데만 며칠이 걸릴듯하다

(타일공사를 하고 있는 타자니아 인부)


학교 푼디(기술자)와 자재를 사러 시장에 갔을 때다. 타일을 고르고 흥정을 마친 후 계산기를 들고 셈을 하는 종업원의 손짓이 둔하다. 영수증에 적어넣는 숫자는 셈에 밝지 않은 내가 한 눈에 봐도 뭔가 이상하다. 다시 계산기를 누르더니 계면적은 듯 웃으며 숫자를 고쳐 적는다. 

물건을 사고 나오면서 푼디는 한마디 한다. “탄자니아 사람들은 느리지? 하지만 느린대신 정확해.” 계산기까지 들고도 간단한 셈마저 틀린 걸 그는 아는지 모르는지. 나는 그냥 웃고 만다. 


그러나 푼디의 말이 사실이었으면 좋겠다. 살림살이 욕심은 없는데 물을 사용하는 공간 만은 깨끗해야 살맛이 나는 탓에 좀 번거롭지만 수리를 하기로 한 것인데, 끝마무리가 제대로 될 까 불안해진 탓이다.

내가 집을 좀 손봐야겠다고 했더니 나의 코워커인로엘은 말했다. 

“그 집을 사용한 사람은 미국인이야. 아프리카 사람이 아닌.”

'미국인'으로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아프리카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두어 번 강조한다. 

미국인이라고 싸잡아 말했지만, 너와 같은 외국인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아파트는 외국인 전용이라 했으니 말이다. 

(거실에서 격자모양의 창문 너머에로 보이는 음베야)



삼십 년이 넘은 건물이니 당연한 거라 했더니 자신의 관사는 깨끗하다고 손사레를 쳤다. 그 특유의 넉살을 담아 유쾌하게 말했지만 예사롭게 들리지 만은 않았다.

공사 현장을 왔다갔다하며, 한편으로는 식탁을 책상 삼아 글을 쓰는 지금. 어설프게 짜진 격자창 속에 갇힌 음베야 산이 성큼 다가와 있다. 확 트인 통유리창이라면 더 좋았을 걸 하다가, 삐뚤삐뚤하게 잘라진 퍼즐 조각 같은 지금이 더 정감있다고 고쳐 생각한다.

피스코 단원이 돌아간 후 오래 비어있던 관사는 춥고 썰렁하다. 이곳에 사람 사는 기운을 담으려면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절기상으로 겨울이기도 하지만, 내가 살아갈 땅, 음베야는 고산지대인 탓에 날씨마저 추운 탓이다. 수리가 끝나고 자리가 잡히면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낼 거실만이라도 분위기를 좀 따뜻하게 바꿔야겠다. 


이년이 지나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본능이 꿈틀거리기 시작할 터이지만, 그때까지는 내게 안식처가 되어줄 ‘나의 집’. 좀 늦으면 어떤가? 혼자만의 공간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일이지 않은가!

탄자니아의 속담에‘하라카하라카 하이나 바라카’란 것이 있다. ‘빨리 빨리는 축복이 없다’,라는 뜻이다. 여기는 탄자니아. 나는 오늘도 중얼거린다.


하라카하라카 

하이나 바라카. 


소피아

8월 12일

라면을 끓이며

 

 

냄비에서 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다.
옆에는 라면 봉지 두 개가 입을 벌리고 있다. 스프 봉지를 꺼내 봉지를 뜯고 끓는 물에 털어 넣는다. 그리고는 볼품없이 잘라놓은 소시지를 넣는다. 이곳 사람들은 도마를 사용하지 않기에 손에 들고 뚝뚝 자른 탓이다. 마지막으로 라면의 면발을 넣는다.
어학원 부엌이 한국인으로 붐빈다. 며칠 전 한국인 선교사 몇 분이 스와힐리어 교육 상담을 받으러 왔다가 라면 두 봉지를 건네주고 간 것인데, 어학원 식당을 잠시 빌려 요리를 하고 있는 중이다. 며칠 전부터 감기로 골골거리는 나를 위해 감기약이라며.....
접시에 소복이 담긴 밥과 야채 볶음 사이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냄비가 놓인다.
한국 음식에 어울리는 식기가 있을 리 없다. 아쉬운 데로 찻잔을 그릇 대신으로 삼아 면발을 나누어 담은 후 냄비 체 들고 국물을 따른다. 라면 두 봉을 네 명이 나누어 먹어야 하기에, 물을 넉넉히 잡은 탓에 심심해진 국물이지만 다들 맛있다며 법석을 떤다.

해외생활을 꽤 했지만 한국 음식을 그리워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세네갈에서 유일하게 생각났던 건 짭짜름한 젓갈이 유일했다. 그것도 잠시 스치듯 몇 번 생각난 것이지 크게 아쉬워하지도 않았었다. 그런 내가 새삼 입맛이 변해 갑자기 한국음식에 감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동료들이 약이라며 처방해준 뜨거운 국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따뜻함이 난데없는 행복을 주고 있다.

 

 

카카오톡단톡 방은 우리의 연락망이다. 누군가 수다가 필요하면 모임을 주동한다.
“호디“ “카리브”호디는 남의 방에 들어가기 전 노크 대용으로 쓰는 스와힐리어인데, 우리에겐 일종의 암호다. ‘프린세스’의 방이 우리의 아지트다. 그의 방 만이 유일하게 전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프린세스’. 와니. 유일한 남자다. 낯선 상황이 되면 여지없이 까탈을 떨곤 해서 누군가 그를 ‘프린세스’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인데 그 표현이 너무나 절묘해서, 그가 까탈을 부리기 시작하면 우리 중 누군가가 ‘아이구, 우리 프린세스 어쩌나’하며 그들 어른다.
우리가 그렇게 놀려도 마음 상해하지 않을뿐더러 며칠만 지나면 언제 까탈을 부렸냐는 듯 상황을 즐긴다. 또한 육체적인 힘이 필요할 때는 말없이 팔을 걷어붙일 줄도 안다.
약속시간이 되면 여행을 좋아해 이미 여러 나라를 경험하고 외국인 친구들과 가장 잘 어울려 우리의 부러움을 사기도 하는 스텔라가 호디를 외치며 입장한다.
조금 지나면 웃음소리가 하이디처럼 경쾌해 명랑소녀라고 이름 붙인 필리가호디를 외치며 들어온다. 신기한 건 나와 참 다르구나 싶은데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의외로 닮은 점이 많아 편한 아가씨다.

우리 넷은 하는 일도 나이대도 성격도 다 다른데, 매우 독립적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법에 익숙한 것이 비슷하다. 그래서 우리는 갈등이 없다. 설사 사소한 오해가 있다고 해도 솔직하게 표현하고 받아들이기에 금방 제자리로 돌아오는 탓이다.
아침을 좀처럼 먹지 않는 내가 하루는 아침 시간에 식당에 갔다. 보통 식사 시간이 되면 먼저 간 사람이 자리를 잡고 먹고 있으면 하나 둘 모이게 마련인데 그날은 아무도 오지 않는다.
맞은편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던 선생님 중의 한 분인 장구오가 동료들의 안부를 물어온다. 잘 모르겠다는 나의 대답에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네가 아는 게 도대체 뭐냐, 고 정색을 한다. 이곳 탄자니아는 아침에 일어나면 이웃집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며 그건 아주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한다.

아침 식사보다 잠을 선택했다는 걸 알기에 방해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자, 아프거나 위험한 일이 발생했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며, 탄자니아에는 ‘한 손가락으로는 이를 잡을 수 없다’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나는 그냥 웃고 만다. 옆방에 살면서 따로 와서 밥을 먹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자신의 그릇을 챙겨 먼저 자리를 뜨는 우리가 그들 눈에는 참 별스럽게 보일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장구오에게 이런 우리를 설명할 길은 없다.

 

방으로 돌아오는 밤하늘에 보름달이 바오밥나무 가지에 걸려있다. 필리가 말한다.
“특별한 일이 있는 날 하늘을 쳐다보면 보름달이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래서인지 정말 좋은 일이 있을 때 하늘을 올려다보면 보름달이 있더라고요.”라면 두 봉지가 특별함을 줄 수 있는 지금. 난 이 순간이 좋다.


 

소피아
7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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