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퇴진! 그 후를 위해 전태일을 읽는다. 


장기 투쟁 중인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전태일 열사, 박종철 열사, 문익환 목사 김근태 선생 등 140여분의 민족민주 열사들이 묻힌 마석의 모란공원을 갔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애환, 장기투쟁 노동자들의 고통을 열사를 통해 조금이라도 위무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모란공원에서 새롭게 투쟁에 대한 결의를 가다듬는다. 그리고 촛불 광장의 기운을 되새기며 왜 지금의 헬 조선의 구조가 썩었고 새로운 세상이 절박한지도 말한다. 그렇다. 지금 우리는 200만 촛불의 한 가운데서 전혀 새로운 한국을 말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근무시간에 놀며 약에 취해 있는 누구와 전혀 다르지 않는 역사 앞에 범죄자들이다.


모란공원은 우리나라 제1호 공원묘지다. 그 전에는 공동묘지였다. 공동묘지는 조선 후기 민란이후 지배자들에게 무리죽음을 당한 민중들을 묻은 것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공동묘지하면 원한과 귀신이 판치는 공포의 장소다. 그 이름을 공원묘지라 하니 밝음이 느껴진다. 특히 모란공원, 그리고 광주의 망월동 구 묘역, 부산의 솥밭산 등, 세상 모순에 맞서 싸우다 돌아가신, 흉포한 국가폭력에 타살을 당하신 열사들의 억울한 죽음의 묘지임에도 어느덧 뜻있는 이들의 위로와 결의가 맑게 뭉쳐지는 휴식과 치유의 공간이 되었다. 그것은 시대의 어둠에 맞선 이들이 투쟁이 비겁하지 않았고, 살아 있는 자들의 추모가 그 죽음을 욕되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사들의 염원이 살아 숨 쉬는 한국, 이것이 정말 새로운 대한민국이 아닐까?


 전태일 열사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지만 22년을 살면서 세상을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상’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어떤 무엇이든지 값이 붙은 것은 아무리 거액이고, 귀중한 것이라도 가치를 상실한 거야, 값이 붙은 그 순간부터’라고 갈파한다. 그 결과  ‘가난한 자는 부자의 노예가 되는 사회’ ‘가장 청순하고 때 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때 묻고 더러운 부한 자의 거름이 되는 사회’ ‘인간이 만든 생산물로부터 뭇짐승보다 천대를 받는 인간’들의 사회라 규정한다. 전태일은 이런 사회에서 참되게 살아가는 세상을 그린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을 고귀하게 여기고, 천지만물 살아 움직이는 생명을 고귀하게 여기는 사회’다.  ‘서로간의 기쁨과 사랑을 마음껏 음미할 수 있어서, 내일이 존재한다는 것을 즐거워할 수 있는 사회’다. 그러기 위해 태일은 사람답게 사는 생의 과제를 ‘어떠한 인간적인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인 과제’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그는 잘못된 세상에 녹지 말고 ‘잘못 뭉친 덩어리를 전부 분해’ 하자고 한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쓴다. “나는 여기서 내일 하루를 구하고 내일 하루는 그 분해하는 방법을 연구할 것일세.” 생활과 정치 투쟁을 융합하면서 돈 중심의 반인간적인 부패와 타락의 세상을 분해하자는 것이 전태일 열사의 제안이다. 


까뮈는 노동하지 않는 삶은 부패하고 주인 되지 않는 노동은 삶을 질식시킨다고 했다. 지금 우리 시간의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이 아니라 돈이, 돈과 관련된 야만적 관계가 인간다움을 구성하는 선의의 공동체적 관계를 잡아먹은 것이다. 박그네의 기괴한 삶은 박그네만의 삶이 아니다. 장자연리포트의 조선일보, 건설업주가 운영한 섹스 파티 별장의 관료 검판사들, 김무성 사위, 이명박 아들 들이 했다는 마약파티, 부패와 부도덕의 환락은 돈이 만든 인간 타락의 최고의 무기들이다. 그러니 시민들의 분노와 그것이 일상인 지배자들의 이해는 천지차이다. ‘대통령이 무슨 죽을죄를 진 것도 아니고’라는 저들의 발상은 부패와 타락과 향락이 그들의 일상이기에 가능한 반응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분노했다. 탄핵마저 동요하는 이들을 몰아 드디어 탄핵까지 이르렀다. 잘못을 모르는 청와대는 탄핵을 해도 물러가지 않겠다고 한다. 억지로 통합 진보당을 해산시키며 민주와 복지를 종북으로 몬 반동의 최종 완결자 헌법재판소가 자기들의 아성이라는 오만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죽은 줄도 모르는 망령이자 좀비다. 그는 다시 살아있는 생명의 세계에서 생명을 부지할 수 없다. 그래서 이제 박그네 이후가 중요하다. 보수야당들은 흔들리고 동요하며 억지로 몰려왔음에도 민중들이 쓴 죽을 개처럼 탈취하려 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반동의 도돌이표가 될 것이다. 여야 간의 정권교체가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에 하등 도움이 되지 못했음은 이미 증명되었다. 만약 야당이 진실로 새로운 세상이 주역이 되기 위해서는 이제 촛불이 만든 광장 정치가 민주권력의 모태이자 진정한 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민중을 구경꾼에다 필요할 때 동원하는 무기 수단쯤으로 여긴다. 그래서 해결은 마치 국회 또는 체제라는 구름 속에서만 아퀴 지으려 한다. 그러니 그들은 쉼 없이 심판의 대상에 구애를 한다.  


청문회에 나온 재벌들의 모습은 비루했다. 우리가 확인한 대통령은 비천했다. 하지만 그들은 바로 그것으로 우리 위에 군림했다. 무수한 세상 전문가 지식인들이 비루와 비천의 사냥개 간신이 되어 세상을 농락했다. 일을 안 해도 되는 (박그네)대통령, 죽어도 문제가 없는(삼성)이건희, 이들은 정말 존재적으로 쓸모가 없다. 기생적 존재들이다. 이제 실체 진짜 생명이 나서야 한다. 진짜들의 요구가 중심에 박힌 정치가 되어야 한다. 


새로운 정치로 우리는 세월호 진실을 규명하자. 백남기 농민 열사 한을 풀자. 관권 부정선거를 저지르고 공권력을 사유화한 국정원과 극우 반동 진영의 뿌리를 뽑자. 농민 생존권 보장하자. 재벌들의 민원해결이자 뇌물의 결과인 노동법 개악을 모조리 되돌리자. 정리해고 비정규직을 철폐하자. 재벌 지배 체제를 분쇄하자. 국가보안법 철폐하자. 증오와 대립과 전쟁과 파괴가 아니라 친선 협력의 평화 통일의 길을 열자. 전태일이 염원한 ‘서로 간의 기쁨과 사랑을 마음껏 음미하는’ 세상으로 나가자. 


새로운 정치의 중심은 기존의 질서, 체제, 세력이 아니다. 바로 광장에 촛불을 든 민중들이다. ‘금전대의 부피’가 아니라 민중들의 선한 인간 공동체의 꿈이 돈을 이기는 박근혜 이후를 힘차게 상상하며 나서자.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며 산화한 지가
올해로 40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근로기준법은
 우리사회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몇차례에 걸쳐
 근로기준법기준법의 허실을
살펴 보겠습니다.

두번째 이야기
쌍용자동차 77일 파업 투쟁 기간에 회사를 대표하는 사람은 언론 앞에서 당당하게 "불법을 저지른 이들에게 인권은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군사독재 정권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것 중 하나가 고문이다.
고문의 악랄함을 폭로하자 많은 국민들은 "간첩도 아닌데 고문은 너무했다."라는 반응을 했다. 하지만 인권은 주권이 아니다. 간첩도 인권이 있다. 가장 열악하고 힘든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인권이다. 전쟁포로도 제네바 조약에 의한 보호를 받는 것처럼 말이다.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이 자기 자식을 때린 사람을 조폭을 통해 납치해서 폭행을 가한 사건이 있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돈과 폭력이 유착되어 있음과 돈이 폭력을 지배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돈을 가진 자들이 사회적 약자나 국민에겐 준법을 강조하지만 그들의 세계에선 법 절차가 부재함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엉뚱하게 주류 언론들은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 마음만 강조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선경재벌의 일족인 최철원이라는 모회사 대표가 1인 시위를 하는 노동자를 꾀여 야구방망이로 한 대에 얼마씩 하면서 구타를 했다고 한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가진 자들의 치사함과 잔인함과 폭력성이 진저리쳐지지만 문제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다.
왜 이럴까?


최소한의 양심과 염치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의 소유에만 집착하여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발전 지상주의, 출세 지상주의, 황금만능주의가 양심과 염치와 책임을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권을 개인의 소양에 맡기는 것은 너무나 불안전하다. 그래서 근대국가에서는 양심과 염치의 대강을 '헌법'이 규정한다. 그리니 노동법을 지키지 않고 노동조합을 적대하여 아예 무노조경영을 한다는 삼성의 논리는 헌법을 부정하는 헌법파괴 논리다.
헌법을 일상적으로 파괴하면서 잘했다고 웃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3권을 주장했다고 조합원보다 10배나 많은 용역깡패를 동원한 현대자동차를 보라.

근로기준법의 총칙을 보면 "근로기준법의 근로조건은 최저기준"이라 되어 있다. 40년 전에 전태일 열사가 '노동자도 인간이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라고 한 것과 요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철폐하여 인간답게 살아보자!' 한 것은 노동자들의 인간적 존엄성을 보장하라는 인간선언과 동일하다.

2007년보복폭행 혐의로 구속 기되외었던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 사진출처 : 연합뉴스

노동자에게 가혹한 폭행에 '맷값 폭행'을 건네 물의를 일으킨 재벌가 2세 최철원씨 출처:한국경제



40년 전과 동일한 구호를 외쳐야 하는 노동자들의 처지가 참으로 가엽지만 이런 가여움도 결국은 최저기준도 지킬 생각이 없는 사용자들의 노동법에 대한 무지에 기인한다.
근로기준법에서는 노사가 동등한 위치에서 자유의사에 의해 근로조건을 결정하라고 하지만 어떤 회사가 이렇게 할까? 남녀, 국적 신앙 또는 사회적 신분을 이유로 차별적 처우를 할 수 없다는 '균등처우' 조항이 있지만 여성들의 차별, 이주 노동자들의 차별은 전혀 고쳐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근기법 제 7조는 폭행의 금지 조항이다. 어떤 사유로도 폭행 구타를 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최철원같은 이들 뿐 아니라 일상적으로 그리고 상사나 나이를 앞세운 폭력을 감수하고 있다.
근로기준법 제 8조는 영리로 타인의 취업에 개입하거나 중간인으로 이익을 취득하지 못한다는 '중간착취 배제'조항이 있지만 현실은 정권에 의해 "파견법" 등 사람장사 행위가 공공연하게 확대 조장되고 있다.
권력을 가진 이들이나 돈을 가진 이들은 법을 지키지 않는다. 그래서 법을 지키는 사람만 손해라는 어처구니없는 풍조가 돌고 있다.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을 넘어 공공연하게 법을 파괴하고 있다. 구사대나 용역을 동원한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에 대한 폭력, 노동조합에 대한 부정과 배제, 그리고 최철원처럼 아예 직접 구타까지 헌법이 보장하고 법이 구체적으로 정한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는 것을 외면하고 있다.


직업이 사장에겐 돈줄이지만 노동자에겐 생명줄이다. 그런데 요즘은 돈줄을 위해 생명줄 자르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사람에서 승냥이 이리 같은 짐승으로 만드는 것임일 알아야 한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법도 지키지 않으면서 준법이니 질서니 하는 것은 정말 낮 뜨거운 모습이다.
사람다운 세상을 위해 사장도 노동자도 그리고 그 누구도 무엇보다 먼저 노동자 그 중에서 근로기준법을 공부해야 한다.
노동자는 자기의 권리를 잃지 않기 위해서, 사용자는 최소한의 양심과 염치를 지닌 경영을 위해서 말이다.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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