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자니아통신] 옥수수 고개


  뭔가 수상하다. 

현관 앞 테라스에 낯선 사람들이 북적인다. 가까이 가니 도넛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한편에서 잘 부푼 밀가루 반죽을 아기 주먹만 하게 떼어 도넛 형태로 모양을 빚어 놓으면, 또 다른 한편에선 튀겨내느라 여념이 없다. 집 안 역시 다르지 않다. 가스레인지 네 개의 버너위에는 제 각각의 색으로 익어가는 도넛이 튀김 냄비 속에서 끓고 있다.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잘 익은 것을 건져내고, 빈 냄비에 다시 반죽을 넣고... 잠시도 손을 쉴 틈이 없다. 김 선교사님 얼굴에는 발그스레한 꽃이 피었다. 바람이라도 쐬고 오시라며 교대를 청하자 위험하다며 팔을 젓는다. 위험한 건 마찬가지 아니냐며, 뺏다시피 튀김 젓가락을 받아든다. 

  “무슨 일이래요? 잔치라도 벌이시나요?”  설명인즉, 지금 이곳의 시골은 춘궁기로 점심을 먹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단다. 그래서 아이들을 위한 점심 준비를 하는 것이란다. 


  이곳 서민들은 옥수수 가루에 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얕은 불에서 잘 저어주며 익힌 후, 마치 호빵처럼 둥글게 빚은 우갈리를 주식으로 한다. 지금 들에는 한참 옥수수가 영글어 가지만 추수를 하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한다. 추수를 하기 전 3~4월이 농민들에게는 가장 어려운 때라는 것이다. 그 옛날, 우리나라 역시 보리를 수확하기 전인 5~6월을 보릿고개라고 해서 가난한 백성들이 풀뿌리나 나무껍질 등으로 연명하거나, 심하면 굶어 죽는 사람도 많았다고 하지 않나. 지금 이곳도 옥수수 고개를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일주일에 두 번, 그 많은 양의 음식을 장만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불 보듯 훤한데, 그것들을 손수 장만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드는 김에 주변의 독거노인들 몫까지 만들었다며 들려주는 빵 봉지를 들고, 아이들을 앞세워 길을 나섰다. 옥수수 밭 한가운데 대여섯 평 됨직한 양철지붕 집. 쪽문을 들어서자 바로 부엌이다. 할머니는 발갛게 달아오른 화로 옆에 쪼그리고 앉아 콩 요리가 익어가길 기다리고 있다. 창이라곤 없는 집에, 갈라진 벽 틈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전부다. 부엌 옆 쪽방엔 스펀지 매트리스가 놓인 찌그러진 철제침대만 스산하다. 

  우리를 배웅한다며 따라 나온 그녀는 자그마한 키에 깡마른 몸매다. 신발을 신지 않은 발은 안쪽으로 둥글게 휘어 있었는데 엄지발가락이 기형적으로 길다. 오랜 세월 맨발로 생활한 탓이 아닐까 싶다.   오랜만에 찾아온 낯선 손님이 반가웠던지 여러 번 포옹을 청하는 그녀를 두고 나오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다음날 점심시간에 맞춰 학교로 출발했다. 초행길로 여기저기 파인 물웅덩이와 꼬불꼬불 산길 탓인지 꽤 멀게 느껴진다.  

  수업중인지 세 채의 교사(校舍)가 화단을 둘러 서 있을 뿐 조용하다. 화단이라고 해봐야 삐뚤삐뚤 벽돌을 둘러 시늉만 냈을 뿐, 사람 손이 가지 않아 잡초만 무성하다. 일학년 교실로 들어서자 손바닥만 한 교실에 백여 명이 넘는 아이들이 올망졸망 앉아있다. 하얀 난방에 빨강색 니트, 파란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여기 저기 헤져서 너덜거린다. 일 년에 한 번씩 교복을 나눠주는데 옷 한 벌로 일 년을 나니 당해낼 재간이 없는 탓이란다. 선생님이 함께 한 탓인지 아이들은 얌전히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다. 너무나 차분한 아이들이 낯설기만 하다. 세네갈에서의 경험을 생각하며 은근히 걱정을 하던 터였으니 말이다. 

  


  세네갈의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지도한 적이 있었는데 마지막 수업 시간, 작별 인사 겸 선물로 비스킷을 준비했는데, 온순하고 상냥하던 아이들이 먹을 것 앞에서 거의 아귀 수준으로 변해 잘못하면 큰 사고로 연결될 수 있는 상황으로 변했다. 담임선생님의 도움으로 간신히 수습을 했으나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아찔하다.   

  고학년으로 갈수록 교실은 널널했는데, 학년이 올라갈수록 자퇴한 아이들이 많아서라고 한다. 중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인데도 시골에서는 아직 아이들을 노동력으로 인식하는 탓이다. 하지만 일부 교육열이 있는 부모들은 소도 팔고 땅도 팔아 학교를 보내기에, 입학 시기가 되면 매물이 많이 나와 땅값이 곤두박질을 친단다. 

  

  이곳에서 초등학생들이 주로 사용하는 노트 겉면에는 ‘Education is the most powerful weapon we can use to change the world'라는 넬슨 만델라가 했던 말이 적혀 있다. 교육의 힘을 믿는 지도자와 일부 학부모의 교육열이 이 땅을 살릴 것이라 믿는다.    나는 보릿고개를 경험한 세대는 아니지만, 초등학교 점심시간에 식빵이나 옥수수 빵을 급식으로 먹은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선진 자선단체에서 제공한 구호물자였다. 어린 나이의 우리가 그런 것을 알리 만무했고, 별미를 먹는 색다른 즐거움을 누렸을 뿐이었다. 나는 저 초롱초롱한 눈빛을 가진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지금을 추억하며, 좀 특별한 급식을 먹었던 학창 시절의 아름다운 경험으로 기억하길 바란다.

   


3월25일 탄자니아에서 

소피아

소피아의 탄자니아 통신

“하바리 자 아수부히 은주리 사나”


“하바리 자 아수부히 은주리 사나”라는 스와힐리어 인사로 하루를 여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여기는 아프리카의 동쪽, 인도양변에 접해있는 탄자니아다. 여행할 곳이 가장 많은 나라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볼거리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여행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세렝게티의 나라이며, 조용필의 노래로 유명해진 킬리만자로의 나라다.



지금 이곳은 겨울이다. 겨울이라고 해도 20도를 웃도는 날씨이기에 우리나라의 가을 같다. 아침저녁엔 제법 선선해 스웨터를 찾게 되지만 따뜻한 햇살이 비추는 낮이 되면 스웨터를 벗어 던지기 마련이다. 아프리카는 보통 크게 건기와 우기로 나누기에 계절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이곳도 사계절이 있는 것이다. 내가 이곳에 도착했을 즈음 우기가 막 끝났다고 들었는데 가끔 소나기가 쏟아지기도 하는 걸 보면 우기의 막바지가 아닐까도 싶다. 

 

나는 지금 수도인 다르 에스 살렘으로부터 자동차로 약 네 시간 정도 떨어진 도시, 모로고로에 와있다. 임지에 파견되기 전 스와힐리어를 배우기 위해 언어 훈련원에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여느 나라와 달리 탄자니아의 국어는 스와힐리어다. 영국의 식민 지배를 거친 나라이기에 영어와 스와힐리어를 섞어 사용하지만 대부분은 스와힐리어를 쓰기에 스와힐리어를 모르고는 생활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이곳의 수업 방식은 독특하다. 오전에는 여러 명이 교실에 앉아 추마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문법을 공부한다. 오후에는 낮잠을 한숨 잘 만큼의 휴식을 취한 후, 선생님 한 분에 학생 둘이 그동안 배운 내용들을 반복해서 연습한다. 처음에는 떠듬떠듬 대답하게 되는데 어느새 입에 붙게 된다. 말은 머리로 배우는 게 아니라 입으로 배우는 것이라는 말이 딱 맞다.  


하루 중 가장 행복한 때는 저녁 무렵의 산책 시간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도시는 어디를 보아도 아름답다. 계절적인 영향도 있겠지만 열대성 식물이 많이 자라고 있어 상당히 이국적인 풍경을 보이는 탓이다. 

꽃잎 갈피갈피에 꽃술을 숨겨놓고 꽃잎을 한 장씩 떨어트릴 때마다 바나나 한 손을 키워내는 빨갛고 커다란 꽃은 볼 때마다 경이롭다. 

우기가 시작되며 모내기 했을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논에서 아낙네들이 벼를 베고 있는 풍경이나, 콩을 털듯 알곡을 털어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카메라에 담으니 그대로 밀레의 그림이다. 

돌아오는 길에서 만나는 소떼들 옆에는 어김없이 목이 긴 하얀 새들이 무리지어 앉아있다. 그 모습이 신기해 물어보니, 소는 벌레가 있으면 그 부분의 풀은 먹지 않기에 새들이 벌레를 잡아 먹어준다고 한다. 악어새와 악어처럼 서로 공생하는 관계인 것이다. 


8주의 교육을 마치면 임지로 가게 되는데 이곳이 무척 그리울 듯하다. 함께 공부하는 다양한 나라에서 온 친구들도 좋지만 공부하는 게 참 좋다. 공부하는 게 좋다는 말을 들은 선배 언니가 말했다. 인생 총량의 법칙이 있는데 아무래도 그동안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서 지금 그것을 채우고 있는 모양이라고.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참 다행인 건 그 몫을 채우고 있는 이 시간이 여간 행복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늦바람이 나도 한참 난 듯하다.  


한국에 있는 지인이 소식을 전해오며 물었다. 무엇이 나를 아프리카로 다시 떠나게 했는지 궁금하다고. 

나는 대답했다. 내가 할 일이 있고, 선량한 사람들이 있어서라고.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곳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얼마나 멋진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인지 알리는 일을 하고 싶어서라고. 

나는 내 평범한 일상에 때로는 과감히 돋보기를 들이 대기도 하고, 때로는 팔짱을 끼고 멀찍이서 바라보기도 하고, 때로는 상상도 하며, 이곳을 그려 보려한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미지의 땅인 아프리카. 

내 눈에 보여 지는 아프리카를 솔직 담백하게 담아 전할 수 있다면, 나의 늦바람도 이해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필자 - 소피아>


소피아

7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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