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상담센터가 만나 세상] 

  트럼프의 연설




평택 미군기지 주소는 캘리포니아 주 캠프 험프리다. 주한미군기지는 미국령으로 한국의 주권이 관철되지 않는 치외법권(治外法權)구역이다. 트럼프는 그곳으로 왔다. 한국을 방문 한 것이 아니라 제나라 군 기지에 온 것이고 문재인대통령의 마중은 남의 나라에 들어가 남의 나라 대통령을 마중한 것이다. 트럼프는 무례(無禮)고 문재인은 과례(過禮)다. 이것이 한미 간의 현실이다. 트럼프는 극진한 대접을 받은 모양이다. 그 결과 트럼프가 국회 연설까지 막말로 깽판을 치지 않는 것이 굉장한 외교적 성과가 되었단다. 군사무기 8조 구매, 한미FTA 재협상 시작, 북한 압박 독자 재제 강화, 말을 안 해도 알아서 다 해주며 효자손처럼 가려운데 다 긁어 줬는데 괜한 짓을 할 리가 없다. 아니 트럼프는 국회연설을 통해 할 이야기를 다했다. 그 결과 자유한국당의 만세다. 자한당을 기쁘게 한 게 외교적 성과라니, 이것은 단연코 촛불 이전의 모습이다. 성주 소성리 사드배치는 물론 추가 배치, 광화문 광장에 다시 쳐진 차벽, 국가 물리력에 의한 법의 자의적 전횡으로 촛불이전의 광화문도 되었다. 문재인 정권은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통속적인 소인배 정권인가? 그렇다면 문재인 정권의 말 바꾸기 정치는 사대 종속이라는 대한민국 정치의 적폐다 적자다. 


트럼프는 수사는 화려하나 내용은 텅 빈 연설을 했다. 개살구 연설이다. 그의 현실인식과 역사인식은 거의 1890년대 구 제국주의 시대의 판박이다. 지루한 80년대 반공교육을 해 댄 트럼프가 기껏 90년대 고난의 행군 중인 북한의 모습을 스케치할 때, 성조기와 트럼프를 상왕 조국으로 아는 미친 태극기 노인네들의 환영을 좋아하는 트럼프를 볼 때, 우리는 지금 미국이 얼마나 낡은 체제인지 알아야 한다. 

트럼프 연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꾸로 말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거꾸로 알아들어야 한다. 트럼프가 ‘트럼프의 미국은 이전의 미국과 다르니 북에게 과소평가도 시험도 하지 마라.’할 때 북한은 미국에게 실제적인 위협이요 시험을 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트럼프가 북을 협박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그에 대하여 힘에 의한 평화를 말 할 때 군사 주권이 없는 한국 사람들은 그것이 힘과 무기가 만든 평화 체제가 아니라 전쟁 체제임을 느껴야 한다. 평화를 위한 안보가 강해 진 것이 아니라 전쟁을 향한 대립이 세 진 것이다. 미국과 대립한 체제는 망했다고 하지만 고르바초프의 소련, 가다피의 리비아, 후세인의 이라크까지 미국과 타협하려는 체제는 오히려 망했음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미국의 오만과 일본의 탐욕에 의해 더욱 위험해지는 동북아 정세를 평화라는 큰 틀에서 정리정돈을 하려면 트럼프의 정책과 변덕에 대하여, 아베의 욕망과 의도에 대하여 자주적이고 평화 통일을 향한 관점에서 다른 관점을 세워야 한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드는 것이 평화지, 농기구를 녹여 무기를 만드는 것이 평화가 아니다. 바로 이 관점에서 한반도 정세의 완화를 해야 한다. 그게 촛불의 염원이다. 하지만 우리가 현실에서 확인한 것은 이명박근혜를 그대로 계승하여 한국당과 성조기 노망든 이들이 만세를 부르게 하는 참담한 모습이다. 이것이 촛불일 수 없다. 


트럼프 연설 후에 정당들의 논평이 가관이다. 자주 평화에 대한 개념 자체가 다른 수구들이 그렇다 치고 국민당은 트럼프의 연설이 문재인 정부와 다르다고 차이를 공격한다. 민주당은 트럼프와 문재인은 차이가 없다며 방어한다. 두 정당 정치인들에게 기준은 한국이 아니고 트럼프의 입이다. 문재인과 트럼프는 달라야 한다. 같으면 그것이 더 이상하다. 트럼프의 견해는 한국에 와서 실사구시를 통해 비판 교정이 되어야 한다. 그게 생물로서 외교다. 그 외교가 없다. 이것이 촛불의 마음일리 없다. 

더 이상한 일이 있다. 나름 진보적인 사람들의 입에서 조차 ‘북핵 문제에 묶여 미국의 무기 구입을 허용한 조치에 대해 안타깝고 화가 난다. 하지만 현재의 조건상 다른 대안이 없다, 우리는 약자고 어쨌든 한반도의 평화가 중요하니 말이다.’라는 견해가  이성적인 양 말해 진다는 것이다.  

강자가 말하니 약자가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정말 한국적 체념이다. 어용노조를 지지하는 이들, 아니 회사와 공범이 되어 노동자들의 고혈을 짜는 어용들이 하는 말이 바로 그 말이다. 그런데 을들의 고통에 동정하고 분노하는 이들이, 여성이나 성소수자들의 차별과 고통에 공감하는 이들이 약자니 어쩔 수 없다고 하면 안 된다. 그 말을 뒤집으면 ‘억울하면 출세하라. 강자의 말이 법이다. 약육강식 정글의 법칙이 세상이치다’라는 오랜 한국 역사가 담긴 처세의 인정이자 왕따 가해자의 논리의 인정이다. 처음에는 의도적으로 이유도 없이 감정적으로 외톨이를 만들고, 그 책임을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에게 돌린다. “왕따를 당할 만하니 당한다.”는 말이다. 힘을 지닌 가해자들을 보며 겁먹은 방관자들이 왕따를 당하지 않기 위해 그 왕따에 동참한다. 이제 절대 다수가 된 가해자들은 그 숫자의 의미로 자기들의 상식이고 정의라 믿는다. 최소한의 양심도 잃고 그 독한 패륜적 범죄가 일상이 되고 피해자는 영혼마저 파괴당한다. 힘이 없는 것이 죄다. 


지금 북에 대한 유엔과 미국 그리고 문재인 정권이 하는 짓이기도 하다. 북한의 생존을 위한 저항은 정당방위가 아니라 감히 지엄함에 저항하는 반역자의 범죄다. 북한이 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순종 굴종 파괴뿐이다. 그 길을 국제 정의 양심이라 말하고 있는 트럼프, 그 말에 박수를 치며 훌륭하다고 하는 여야 정치인 짐승만도 못한 꼴에 비판을 가해도 모자랄 판에 이성이라는 가면을 쓰고 전략이니 불가피(不可避)니 하며 패배와 허무를 부추기는 견해를 만날 때 마다 슬픔이 분노가 된다. 

그들은 노예들의 내재적 복종은 이렇게 완성되는 것임을 정말 모르는 것일까? 약자는 순종이 아니라 저항을 통해 세상을 바꿔 왔다는 역사적 진실을 왜 외면할까? 비겁이 헬조선의 운명인가. 그 비겁이 헬조선의 운명을 만든 것은 아닌가? 불의에 저항하라. 약자이기에 더욱 더 저항하라! 

이것이 촛불의 상식이다. 트럼프에 저항하라!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트럼프 시대




"우리는 세계 다른 나라와 친선과 우호관계를 추구하겠지만 세계 어느 국가도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전제 아래 그렇게 할 것"이다. "우리는 오랜 동맹은 강화하고 새로운 동맹도 만들어, 문명국가들을 단합시켜 급진 이슬람 테러집단을 이 지구상에서 없애 버릴 것"이다. 트럼프의 취임사 중 국제관계에 대한 언급이다. 


전체적으로 ‘오직 미국’만을 외친 취임사다. 이런 트럼프에 대해 미국의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는 "끔찍하고, 무지막지하고, 위험한 파트타임 어릿광대이자 풀타임 소시오패스"라고 말한다. 또 누구는 ‘영리한 멍청이’라고 한다. 2015년에 트럼프는 미국 대선에 뛰어든다. 그리고 막말과 기행으로 대중적 인기를 끈다. 이때 대다수의 언론들은 비웃었고 그의 인기는 금방 식을 것이라 봤다. 그런데 그는 끝내 미국의 대통령이 됐다. 역대 미대선 후보 중 가장 부자였지만 선거비용은 상대 후보의 절반도 쓰지 않았다. 힐러리는 돈으로 뉴스를 샀지만 트럼프는 막말과 기행을 뉴스거리를 찾는 언론이 저절로 달라붙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불투명, 돌발, 불확실성을 백인 남성의 뚝심이자 백인 남성의 낭만으로 만들었다. 무식하고 우직하고 멍청한 척 하며 할 것 다하고 승리하기까지 하니 ‘멍청한 영리한 이’ 가 아닐 수 없다.  


트럼프를 닉슨에 비교하는 사람도 있다. 보통 미국의 양당은 대외 전략에서 질적 차이가 없다. 다만 공화당은 미국 우선주의라 부르는 고립주의를, 민주당은 민주와 인권을 내세운 개입주의를 선호한다. 그래서 실제 전쟁은 민주당 정권이 많이 일으켰는데 공화당이 더 호전적인 것처럼 느낀다. 이런 모습을 민주당은 세련된 ‘양복 입은 조폭’, 공화당은 배 유리병으로 긁으며 진상을 피우는 ‘양아치 조폭’이라고 비유했다. 모습은 양아치가 훨씬 흉하지만 피해는 양복이 훨씬 크게 만든다. 이런 공화당의 입장을 ‘미치광이 전략’이라 부른다. "미치광이 전략 (Madman Theory)"을 대외정책으로 삼은 미국 대통령이 닉슨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작은 일에도 발끈해서 핵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인물로 믿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소련이나 제3세계에게 ‘나를 건들면 죽는다’ ‘한다면 한다.’라는 메시지를 주려했다. 적어도 트럼프는 미국인과 인류에게 미치광이 전략을 성공시킨 모습이다. 



미국의 석학 노암 촘스키는 트럼프를 ‘인류공동체의 삶을 가능하면 빨리 파괴하기 위해 혼신을 다하고 있는 자’라 평가했다. 그러면서 2016년 11월 8일을 상기한다. 11월 8일, 세계기상기구(WMO)는 파리 기후협약 이행 방법을 논의하기 위해 모로코에서 기후변화당사국총회(COP22)를 연 날이자, 기후변화로 인해 앞으로 닥쳐올 일들을 무참히 뭉개버릴, 세계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의 대선이 있던 날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트럼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미국이 됐다고 평가한다. 촘스키 교수의 말을 좀 더 빌리자면 트럼프 시대는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 관리 감독한 잘 나가던 미국 경제가 박살난 2007년 대공황의 산물이다. 그린스펀은 "노동자들의 불안정성을 증가시킴으로써" 경제를 성공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위기에 내몰린 노동자들은 차마 임금 인상, 복지 혜택, 노동 안정성 등을 요구할 수 없었다. 참고 견디는 노동자 민중은 신자유주의적 기준으로 보면 매우 건강한 경제의 신호다. 그 결과 남성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은 1960년대 수준으로 추락했다. 반면 극소수 최상위층과 1% 부자들의 주머니는 더욱 두둑해졌다. 그런데 또 왜 사상 최대 부자인 트럼프가 미국의 선택이 되었을까?


촘스키 교수는 진정한 원인을 빈부격차로 본다. 지금의 빈부격차는 자유시장 원리나 실적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부자들을 위한 기업하기 좋은 세상’ 정책 결정이 낳은 것이라 진단한다. 임금이나 복지 혜택의 파괴가 진행됐다. 안정적 일자리 방패인 노조가 파괴됐다. 그것은 자기 존엄성이나 미래에 대한 희망, 자기가 속한 세상에서 무언가 가치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느낌마저도 무너뜨렸다. 그런데 미국 백인들은 그 원인을 빈부격차에서 찾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능력주의 경쟁을 당연시 해 온 미국 백인들은 상층부 사람들이 잘 나가는 것에 대해선 불만이 없다. 잘 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보상을 받는 건 당연하다. 그것이 '미국적 방식'이다. 오히려 불만의 대상은 자기보다 못한 이들이 된다. 자기들의 나아짐을 방해하고 괴롭히는 고통의 제공자는 뒤쳐진 사람들이다. '규칙을 따르지 않는 무자격자들'이 정부 정책 때문에 자기들을 앞질러 나가게 됐다고 여긴다. 이주민에 대한 혐오 복지에 대한 부정이 정부에 대한 증오로 나타났고, 이런 이들에게 트럼프는 변화를 대변하는 사람이다. 그 변화가 개선이 아니라 개악, 나아가 퇴락이겠지만 말이다. 


사회를 구조적으로 과학적으로 객관적으로 볼 사회적 시각이 사라진 곳에서 핀 시대가 트럼프 시대다. 사회를 제대로 배우면서 휴머니즘을 지탱할 공동체적 관계가 부족한, 노조나 진보 계급정당 등이 부재한 세상에서 고립된 원자로 사는 미국 사람들이 믿는 능력주의는 결국 ‘문제는 사회적인데 해결은 개인이 알아서 하는’ 것이자 ‘사회가 생산한 질곡을 개인이 책임지는 시대’다. 트럼프의 시대를 연 다른 요인은 인종주의다. 그리고 기독교 근본주의다. 촘스키는 그런 미국인들의 정서를 이렇게 전한다. ‘미국에서 심각한 지구 온난화의 위협에 대해 대중들의 관심을 이끌어내기가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는 미국 인구의 40%가 조만간 예수가 재림할 텐데 지구 온난화 따위가 무슨 문제냐는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과학이 성경을 부정하는 것 같으면 오히려 과학이 비정상이 되는 구조가 미국이다.’ 

트럼프는 미국이 봉착된 문제를 세계의 이름이 아니라 미국의 이름으로 정면 돌파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철저하게 실리를 따지는 장사치 정치이자, 걸리면 죽인다는 양아치 정치를 선언한 것이다. 무지몽매 맹목 그리고 의도된 미치광이 놀음에, 미국 판 이명박그네정치를 한꺼번에 볼 것이기에 세상은 아주 후져질 것이다. 그럴수록 ‘평화 친선 연대 그리고 통일’에 대한 주체적 각오가 필요하다.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문재훈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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