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터전에서 


 어릴 때 책읽기는 마음의 쉼터 같은 역할을 했다. 평범한 집안의 둘째였던 나는 그다지 잘난 것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고 늘 공부 잘 하는 오빠에게 괜한 주눅이 들어 자신감 없는 태도가 몸에 배었으나 책읽기만은 늘 내 마음의 위안처였다.

결혼을 하고 생활에 떠밀려 아이들과 책읽기 글쓰기를 시작했건만 예전의 그 행복하던 책읽기는 온데 간 데 없었다. 아이들이 늘고 줄고 하는 것에 웃고 울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피곤한 몸으로 서점에 들른 어느 날, 작고 하얀 책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주영 선생님의 <어린이 책을 읽는 어른>이라는 책이었다. 그 책을 계기로 금천동화읽는모임 <함박웃음>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어린 시절에 느꼈던 행복감을 다시 맛보게 되었다. 책을 읽고 다른 이와 감상을 나누고 ,게다가 이어지는 활동들은 아이들과 함께 하기에 더없이 즐거운 것들이었다. 처음 쓴 대본과 처음 한 연극공연은 내가 지금껏 풀지 못했던 한을 해결한 것 같았고 어린 친구들이 환호하는 짜릿함은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것이었다.

 공부하기 좋아하는 엄한(?) 선배들과 함께 공부발표회를 준비하면서 머리를 싸매던 기억, 의견이 달라 격렬한 토론을 하던 것도 생각난다. 

 이런 열정에도 불구하고 공부할 장소는 늘 일정치 않아 동사무소, 구립도서관을 돌며 공부를 했다. 처음에는 구립도서관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어린이열람실에서 보고 느낀 것이 많았다. 일단 신발을 신고 들어가는 구조라 아주 어린 아이들은 오기가 힘들다는 것, 어린이 책을 다루는 이의 자세, 어린이의 특징을 배려하지 않음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다. 지금은 많은 부분이 개선되었지만 2000년 초반에는 어린이도서관이 거의 없었던 터라 어린이의 상황과 입장을 배려한 도서관이 정말 절실했다. 

 도서관은 ‘가르치지 않아서 더 큰 배움터’라는 수지의 느티나무어린이도서관 박영숙 관장을 만나고 온 몇몇 회원들 덕분에 우리는 더욱 고무되었다. 아이 업은 엄마가 편히 와 아이와 책을 읽고 쉴 수 있는 공간, 집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도서관, 고민을 함께 풀어나가는 도서관, 무엇보다 아이들의 즐거운 열정을 고스란히 사랑하는 그런 도서관이 필요했다.

 절실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엄청난 일은 마음만 갖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회원들 간에 격렬한 토론이 이어지고 몇몇은 앞서서, 몇몇은 뒤에서 주춤주춤 일을 시작했다. 다들 공감하겠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지금에서야 이야기지만 우리 집만 보더라도 돈을 백만 원씩이나 낼 형편은 아니었다. 2000년대 초반의 백만 원은 큰 돈 이었다. 선배들은 (선배라고는 하지만 나이도 비슷하고, 생활도 비슷했다) 선배라고 삼백만원을 내고 나머지 후배들은 알아서 하라고 했다. 그 때는 내가 내는 돈에도 힘이 들어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선배들이 참 대단했다. 거기에 집에 소장하고 있는 피 같은(?), 어쩌면 돈보다 소중한 어린이 책을 백 권씩 내기로 했다. 당시에 우리는 공부할 때 책을 꼭 사서 읽곤 했다. 아이들 생각해서도 그랬지만 귀한 책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에 겨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정성이 모아져 2002년, 작은 공간을 마련했다. 

 그것이 첫 번째 공간이었고 이어 두 번의 이사가 있었다. 2012년, 낮게 고개를 숙여야 들어가는 도서관은 첫 인상에서는 실망이었지만 오히려 방문하는 아이들이 늘었고 골목이 많이 나 있는 조건이라 뛰어놀거나 이웃을 만나기 좋았다. 그런 행복에도 불구하고 공간이 좁아 활동에 제약이 많았다. 아이들은 자기 집 같다며 좋아했지만 사실 공공성을 갖추어야 할 도서관으로서는 아쉬움이 많은 곳이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공간에서 우리는 그 제약에도 불구하고 ‘은행나무 정신’을 다듬고 꽃피웠다고 본다. ‘은행나무 정신’ 은 좋은 책을 다른 이와 함께 읽는 정신이다. 나는 단순한 이 표현에 많은 것이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책을 읽는 개인적인 행위가 발전하여 함께 읽거나 읽어줌으로써 다른 이의 삶을 위로할 수 있고 행복을 줄 수 있다는 단순하지만 중요한 믿음이다. 다른 이와 뭔가를 나누려는 이들은 어떤 것이 옳은가를 항상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정의로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2014년 7월 24일... 역사적인 날이다. 우리의 열정을 이해하고 보듬어준 고마운 이의 도움으로 우리는 마당이 있는 집을 마련해 이사했다. 지은 지 30년 넘은 집, 리모델링이 늦어지면서 애를 태웠던 것, 안전문제와 도시가스 문제로 전전긍긍하면서도 더위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회원 대부분이 흥분한 상태였다. 이사와 정리로 또 한바탕의 회오리를 거치고 나니 이제 우리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생각이 많아진다.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은 스무 명 남짓한 회원들이 회비를 내어 운영한다. 중요한 일은 운영위에서 결정한다. 관장은 2년에 한 번씩 선출된다. 이런 상황이니 뭐 하나 할라치면 참 걸리는 것도 많고 말도 많다. 그래서 느리다. 결정이 되려면 다들 알아야 하고 함께 판단해야 하니 한 사람이 책임을 지는 구조보다 시간도 정열도 많이 필요하다. 일을 하면서 이런 구조가 참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어떻게 현판하나 다는데 모두의 의견을 물어야 하나, 결정을 후딱 하고 일을 빨리 진행해야 할 때에도 우린 운영위부터 열어야 하나...그런데 지금의 은행나무는 이런 구조 때문에 생명력을 갖고 있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효율을 생각하는 곳은 우리 사회에 너무도 많다. 아니, 사회 자체가 효율이냐 아니냐로 가치를 매기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는 책은 우리에게 효율을 보여주지 않는다. 끈기 있게 책의 마지막 장까지를 넘겨야 책이 갖고 있는 매력과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다른 이들과 나누려하는 것이니 애초에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효율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우리는 비효율이 어울리는 사람들이었다. 또 결정에 참여함으로써 도서관에 애정을 한층 더 갖게 되는 점도 생명력을 연장하는 계기가 된다. 

 새로 단장한 화단이 있고 예쁜 색으로 칠한 도서관, 이층이 있어 낭만적이고 다락방의 매력이 있는 도서관, 이런 조건들은 이전에 우리가 꿈꾸었던 것의 일부이다. 이제 이런 조건들을 어느 정도 갖춘 이 새로운 터전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앞서 이야기한 은행나무 정신을 퍼뜨리고, 비효율적인 운영구조를 힘들지만 유지하는 것,더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는것이 필요하다. 새로운 싹을 다시 틔워야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이들이 그 싹을 구경하러 또는 응원하러 ‘사랑’이라는 거름을 주머니에 넣고 우리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에 한 번 놀러 오길 바란다.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회원 민경아

www.eunhaengnamu.org   

☎ 892-7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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