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민중적 입장에 서야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다


1. 입장의 동일함이 관계의 최고형태 


노동자 민중의 스승들은 인류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라 했다. 반추해보면 계급적 관점을 갖추지 못하면 역사가 바로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를 보는 눈은 다양하다. 독립군의 눈으로 보면 지옥이고, 일제

의 눈으로 보면 천국이며, 친일의 눈으로 보면 비굴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생존이다. 그러니 서 있는 자리마다 달라 보이는 현실에서, 즉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계급적인 관점이 담기지 않는 눈과 글은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는 방법일 수 없다.


일전에 귀천한 신영복 선생은 이런 말을 남겼다.[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사물 파악에 냉철하되 사람에 대한 사랑은 열정적이야 하며, 열정은 속에 남는 것이 아니라 손과 발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관찰은 관심과 사랑으로 사랑은 실천과 연대로 나가야 하며 그 중심엔 노동자 민중의 입장에 서서 동지가 되는 것이 사람됨의 최고라고 설파한 것이다. 입장의 동일함. 이것이 바로 계급적 관점의 최고의 형식이다. 


최근 우리는 입장의 차이가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생생한 역사의 시간을 살고 있다. 이른바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는 현 권력이 서 있는 지금의 입장, 그들이 계급적 관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일본은 일제 강점기 그 군국주의 시대를 서국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한 것으로 본다. 자기들의 만행 - 침략 수탈 착취 학살 강간 -을 반성 사죄는커녕 대동아공영을 위한 노력이라 치장한다. 남을 더욱 심하게 착취하고 지배할수록 남에게 더더욱 봉사했다고 믿는 것이다. 그 일제에 빌붙어 개인의 영달만 채우고 조국과 민족을 배신한 매국노들은 처음에는 자기들의 잘못을 감추려고 반공을 내세우다, 전쟁의 피 칠을 통해 친일 매국을 반공 애국으로 돌려치기 한다. 그리고 이제 와서는 아예 일제 강점기 친일 행위를 근대화의 노력이고 반공 분단을 건국행위로 강변하며 진실의 은폐를 넘어 역사 자체를 왜곡하여 친일 매국이 정당하다는 지경에 까지 이르고 있다. 이 또한 그들의 계급적 입장이다. 


전체 노동자 민중의 피땀으로 일군 경제를 한사람의 독재자나 재벌에게 공로를 돌리고, 그래서 이만큼 산다는 주장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재벌의 부가 는 것은 민중의 피땀의 그만큼 빼앗겼다는 말이다. 독재가 경제 건설을 통해 민주주의를 만들었다는 것은 강도가 범죄를 통해 방범의식을 신장한 최고 공로자란 만큼 뻔뻔한 주장이다. 독재가 자유민주가 되고, 불통이 애국이 되는 시공간에서 사람들이 제 머리로 제 정신을 가지고 주인답데 판단하고 행동하기에는 정말 힘들다. 특히 요즘처럼 언론 매체가 발전된 세상이라 엄청난 거짓이 배설되고, 기만의 선동이 홍수라 똥과 된장을 가리는 것도 벅차다. 그래서 더더욱 세상을 바로 보기 위해 노동자 민중의 입장에서 보는 계급적 관점은 절박하게 필요하다.  


2. 적대 모순과 비적대 모순 엉킨 사회


세상은 모순적이다. 그래서 현인들은 진실을 알기 위해 현실 사회 모순의 다양한 존재와 측면을 고찰했다. 기본모순과 주요모순을 구별하고 모순의 주요 측면과 부차적 측면을 나누어 성찰했다. 그래서 “모순의 해결은 주요 모순을 우선 해결하면 차요 모순이 다시 주요 모순이 되는데 이를 하나하나 차근차근 해결하는 것이 전략 전술이다.”라고 했다. 또한 모순을 적대 모순과 비 적대모순으로 분류하며 차이에 의해 형성된 모순, 즉 민중 내부의 모순은 시비를 가리고 그 과정에서 교양과 설복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옳고, 적대적 모순 즉 적과 아의 모순은 생과 사의 판가름으로 해결되기에 결사투쟁을 통해 적을 안팎으로 와해시키는 것 외에 다른 해결책이 없다고 했다. 이렇게 적아를 구분하지 못하고 소통이니 공존이니 화합이니 하는 것은 일제 강점기 친일파가 되자는 말과 같다. 지금 정권이 보여주고 있는 반북 반공 전쟁불사 분단의 모습은 평화와 통일 민주와 인권 민족 상생과 완벽하게 다른 편에 서있다. 지금의 정책 흐름을 반전시키지 않는 한 한반도의 전쟁 정세는 풀리지 않는다. 


3. 진정한 공동체를 위해  


그러면 우리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애국을 하나 된 공동체일까? 계급적 이해가 다른 계급사회일까? 이에 대한 나의 소견을 말해 본다.

공동체는 지향과 입장이 같은 이들이 마음을 모아 이룬 단결체다. 존중과 존경 이외 지배와 피지배의 강압으로 공동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부자와 빈자, 지주와 농노, 노자간이 진정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없는 이유다. 예를 들면 기업은 공동체로 보이지만 이익체다. 한 가족이라 떠들다가도 회사가 어려워지면 정리해고를 하고, 그 자리에 이등 삼등 머슴 비정규직을 고용하는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함께 살고 함께 죽는 것이 공동체라면 이익이 있으면 뭉치고 없으면 흩어지거나 아예 잡아먹는 것이 이익체다. 이익체에는 의리나 진실이 없다. 오직 힘에 의한 지배관계, 싸늘한 이해관계만 있다. 그래서 공동체는 구성원 존재자체가 목적인데 이익체는 서로가 서로에게 수단이자 도구일 뿐이다. 노자 간에 이해가 함께 할 수 없는 근본적 이유다. 


현 정권은 경제위기에 맞서 국민적 단합을 말한다. 그런데 그 정책을 보면 노동자 민중을 더 값싸게 고용하고 더 오랜 시간 부려서 재벌들에게 더 많은 이익을 넘겨주겠다는 것 이외에 없다. 결국 현 정권이 국민행복을 말할 때 그 국민은 재벌이고, 현 정권의 단합을 말할 때 그 단합은 부자들이다. 결국 현 정권의 계급적 입장은 부자들의 편에 선 것이다. 민주노총이 모든 민중과 함께 민중생존과 민주주의를 요구하자 단 한 번의 집회 및 시위를 이유로 수천 명이 구속 수배 연행 조사를 받고 있다. 민주와 인권을 외쳤다고, 수억 원의 손배를 때린다. 수갑과 돈으로 가난한 노동자 민중의 입을 틀어막고 손과 발에 족쇄를 채우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대한민국을 하나의 공동체로 보는 것은 허위와 기만에 불과하다. 지금의 사회 구조에서 애국이라는 이름의 묻지 마 공동체란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민족의 단결을 외쳤다. 그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상황에서, 전체 민족이 식민지 노예를 강요당하는 조건에서 ‘저항적 민족 단결체’가 절박했기 때문이다. 약자 피해자의 입장에서 강자의 폭력에 저항할 때 단결은 가능하다. 애국주의 탈을 쓴 극우 민족주의가 반동인 이유는 그들이 특권을 위해 노동자 민중을 동원하는 강자들의 입장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단시대를 살고 있다. 분단은 남북 지배층에게 지배와 통치의 전제가 되었다. 특히 친일매국을 분단 반공으로 가려야 했던 남한 지배층들에게 분단은 지배의 가장 큰 무기다. 이런 상태에서 분단은 노동자 민중에게 가장 가혹하게 피땀을 요구하는 체제가 된다. 그래서 통일은 노동자 민중의 생명 줄이다. 만약 우리 사회가 진정한 공동체를 향한다면 한편에서 노동자 민중의 편에서 분단을 극복하는 통일의 길에서 만들어 질 것이다. 나아가 모순을 극복하고 억압을 타파하는 과정에서 진보적 인류는 진정한 공동체를 만들어 갈 것이다. 


4. 신자유주의 시대 우리들의 관점 

기업하기 좋은 나라, 비즈니스프랜들리, 규제 없는 사회... 등등 뭐라 부르든 거기에는 오직 돈 중심의 세상에서 돈 가진 자들의 이득만 챙기겠다는 강도의 논리가 숨어있다. 그래서 빈부격차는 커지고, 민생은 자살이라는 죽음의 길로 내몰린다. 이런 세상을 자본주의 중에서도 고삐 풀린 자본주의, 시장근본주의 승자독식주의 정글자본주의.. 다양한 이름으로 말해지는 최악의 자본주의를 ‘신자유주의’라 부른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여기서 자유란 민주와 인권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오직 돈과 부자들의 자유, 착취의 자유다. 그 속에서 노동자 민중의 피와 고름으로 가득한 삶을 살 뿐이다. 그러니 여기에 무슨 민주주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 사회는 총칼이 독재가 돈의 독재로 나아갔다가 돈의 독재가 대공황이라는 늪에 빠지자 다시 총칼의 독재로 회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퇴행을 변화 발전이라 믿고, 정치적 경제적 독점의 강화를 다원주의라 파악하는 것은 현재의 권력에 대한 비과학적 분석이 아닐 수 없다. 독재와 독점에 의한 지배의 강화는 노동자 민중의 저항의 파괴이자 다원주의 뿌리를 절단하는 것이다. 다양 다원화가 불가능한 조건에서 이를 외면하는 것은 지성적 자세의 부족이다.


총선이 다가오고 있다. 사람들은 선거가 민주주의 꽃이라고 하지만 제비뽑기나 사다리타기가 아닌 선출은 오직 권세와 백 있는 자, 돈 많은 자, 유명한 자라는 현대판 귀족들의 잔치일 뿐이다. 오직 투표하는 3분만 주인이고 나머지는 머슴이자 구경꾼이 대의제 선거 제도는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제도로 작동되지 않는다. 게다가 사회 모든 영역을 돈이 장악한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선거란 종종 유신시대 선거나 히틀러 나치즘을 만든 선거처럼 악용될 뿐이다. 대한민국은 집권당이 나라를 팔아먹어도 지지한다는 층이 30%라고 한다. 돈과 권력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언론의 목줄을 쥔 상태에서 진실과 진리를 허위와 거짓으로 돌려 조작과 선동을 맘대로 하고 있다. 눈앞에 현실을 뒤트는 것을 지나 역사적 진실마저 조작하겠다고 나선 정도다. 그러니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믿으며 사회 전체적으로 소통과 화합을 말하는 것은 저들의 왜곡과 폭거를 비판은커녕 인정을 넘어 굴복하고 마는 것이다. 


반 신자유주의, 반 분단주의에 맞서 돈이 아니라 사람이 주인인 민주와 인권, 평화와 통일이라는 분명한 기본 정치노선이 모색되는 것이 옳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노동자 민중의 계급적 입장을 먼저 세우는 것이다. 그 기반아래 진정한 민주주의 민족 통일과 평화 번영을 위해 나가야 한다. 

이런 전제 없는 중도 공존 소통 화합은 그 화려한 표현 속에 텅 빈 공허가 놓여있다. 


신문에서 지속적으로 연재된 이윤로씨의 글을 보며 느낀 소회지만 젊을수록 원칙은 종종 낡아 보이지만 ‘한 결 같이 지키되 나날이 새롭게’ 연구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런 견해도 전적으로 나의 견해이고 여러 견해 중 하나일 뿐이다. 누구에게 나의 견해가 강압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들의 생각과 견해가 조금 더 깊어지길 바라면서 강호제현의 비평을 기대한다.            


우영흠  시흥3 동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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