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잠의 꽃잠




잠은 휴식이다. 잠의 휴식은 피로에 대한 자연적 욕구다. 잠은 그 사람의 상태를 직접 표현한다. 단잠, 그러니깐 달게 곤하게 잤다는 것은 기분 좋은 피곤과 적정한 시간, 편안한 공간과 상태를 함께 말해 준다. 깊게 들지 못하는 잠, 즉 ‘겉잠, 개잠’에  중간에 깜짝깜짝 깨는 괭이잠이라도 자면 자도 잔 것 같지 않는 상태가 된다. 겁에 질려 깊고 길게 잘 수 없는 노루와 같다 하여 노루잠이라고도 한다. 잠이 편하지 않으면 밤만 괴로운 것이 아니라 다음 날이 더 괴롭다. 피곤과 짜증은 쉽게 우울과 분노로 변한다. 반복되는 잠 못 이룸은 사람이 당하는 최고 강도의 ‘고문’에 다름 아니다. 자기를 자기가 조절할 수 없는 착란의 시간이 일상이 된다. 


우리는 단잠이 사라진 시간을 살고 있다. 기업형 인간이 되기 위해 인간적인 삶을  희생시킨다. 이른바 스펙 쌓기가 대표적이다. 예전에는 ‘어학연수 자격증 취득, 사업적 기능의 습득’ 등 업무에 대한 구체적 기능의 습득도 기업이 제공하는 의무였다. 우리는 성실하고 또 천재는 아니어도 아둔하지 않으면 됐다. 그런데 지금은 회사의 의무가 개인의 몫으로 됐다. 회사의 비용과 책임과 부담이 개인에게 전가된 것이다. 예를 들면 인터넷뱅킹이니 카카오은행이니 참 편리하다 하는데 실은 은행이 감당해야 할 사무기능의 몫을 소비자인 우리가 대신해 주고 있을 뿐이다. 일해주고 돈까지 내는 바보 같은 짓이 편하다고 말이다. 이전에는 한 사람의 일자리였을 그 일을 뺏는 것인데도 말이다. 결국 웃고 있는 것은 자본이다. 편하다고 웃지만 피땀을 빨리고 있는 것은 우리들이다. 그러고 보니 편리함은 24시간 내내 기업을 위한 노동시간이자 노동 대기 시간을 만드는 만능 주문이다. 아니면 실직. ‘과로사로 죽을래, 굶어 죽을래.’라는 질문 앞에 죽음만을 답으로 말해야 한다. 질문 자체를 부정하는 전복의 꿈을 잃은 세상, 적응과 순응 아니면 고립 배제뿐인 세상에서 사자 앞에 노루가 된 우리 노동자 민중이 노루잠 아니면 무슨 잠을 잘 수 있을까?      


일하는 사람들에게 단잠을 뺏어간 계기는 IMF환란과 정리해고 비정규직이다. 그것은 ‘안정적 일자리, 좋은 일자리’를 용인할 수 없다는 돈의 독재의 선포였다. 총칼이 강제한 강제적 복종이 은밀하고 내밀화된 돈 중독의 자발적 복종으로의 전화였다. 돈 독재의 특징은 민중들에게 ‘꿈도 꾸지 마라’다. “개천에서 용 나는 시절은 지났다.” “부의 세습” “금 수저 흙 수저” “3포, 7포, N포 세대” “헬조선”이라는 유행어들은 꿈의 종언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그것은 더 나은 세상, 질 좋은 삶을 꿈꾸지 말라는 돈과 권력의 치명적인 협박의 결론이자, 존엄을 꿈꾸는 개인들의 생, 인간 본연의 공동체적 사랑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한시적이고 특별한 형태라 안정과 복지는 없지만 일급은 아주 높았던 것이 임시직 일자리였다. 그래서 장기적인 인간적 삶의 고려 없이 초단기적 초과 착취를 해대는 형태가 바로 임시직 일자리였고 그 대표적인 형태가 이른바 ‘노가다’다. ‘모든 노동자의 노가다화’는 정리해고 비정규직 경제 논리의 핵심인데 문제는 더 높은 일당을 반값 일당으로 강제한 것이다. 그 결과, 특권과 반칙이 일상다반사가 되고 빈곤과 차별이 당연한 세상이 되었다. 


보이는 대로 남이 원하는 대로 살면 노예다. 숨겨진 것, 감추는 것을 보며 불의에 맞서는 것이 인간의 영역이다. 현실과 다른 다음을 꿈꾼다는 의미에서 ‘저항’은 다양하다. 또 다른 지배자를 만드는 과정, 나만을 위한 과정, 모두가 함께 잘사는 방향에서 역사적 사회적 구조에 맞서는 과정 등등. 따라서 저항도 그 지향에 따라 결과가 천지차이다. 노동자 민중의 가장 큰 존재적 특징은 ‘개인의 저항도 전체의 좋음’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 민중은 저항을 통해 특권을 강화하지 못한다. 최근 노동자 민중의 투쟁에 독을 뿌리는 가진 자들의 보검이 ‘특권 귀족 강성 노조론’이다. 비판의 초점인 기아차나 현대차 노조의 경우도 그것은 강성이 문제가 아니라 노조가 투쟁과 연대 대신 실리와 고립을 선택한 결과다. 그러니 특권 귀족 강성 노조가 있다면 그것은 돈과 권력에 본성을 잃고 매수된 노조의 어용화의 결과다. 노동자 민중의 투쟁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강성이 아니라 제대로 된 저항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불의에 대한 저항을 통해 함께 사는 평화로운 공동체를 꿈꾸는 것이 노동자 민중의 투쟁이다. 투쟁의 과정에서 분열과 배신과 패배는 돈의 회유와 생계의 협박이 만든 결과다. 특권을 대표한다는 민주노총 위원장은 정의와 연대를 외치면 구속을 당한다. 현장에서 민주노조는 아직도 해고를 당할 각오다. 구속과 해고를 끼니 때우듯 당하는 귀족이라니, 터무니없다. 예수님 석가님 수준의 인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지경으로 노조를 만들어 놓고, 인간 존엄의 최저 기준인 노동법이라도 지키는 힘을 유지하면 귀족이니 특권이니 난리는 치니 기가 막히다. 그러니 아직도 투쟁에 나선 노동자 민중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군이요 군사독재시대의 민주투사다. 그래서 투쟁하는 노동자 민중들은 한뎃잠을 잔다. 덕석잠이고 칼잠이다. 선잠의 시간을 견디고 견디는 삶이다. 


발칫잠이나 말뚝잠을 자며 개인의 정규직화가 아니라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꿈꾸던 이들이 있다. 그들이 비록 365일이 아니라 364일 한뎃잠 발칫잠을 자다가 하루 이틀이라도 편하게 ‘귀잠 속잠’ 발편잠을 자자는 제안을 해서 만들어진 공간이 꿀잠이다. 장기 투쟁하는 비정규직 정규직 노동자들, 우리 사회를 연대라는 사람으로 만드는 무수한 마음 선한 사람들, 평생을 불의에 저항하여 삶 자체가 모든 이의 의지처인 백기완 선생과 문정현 신부님, 자발과 헌신과 봉사가 만든 ‘내일을 함께 꿈꾸자는 손내밂이다. 그 꿀잠이 오랜 준비 끝에 8월 19일에 정식으로 문을 연다. 꿀잠의 자자는 ’하룻밤의 단잠‘은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깊게 새겨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역사가 있다. 높아지고 강해지는 것만 추구하다 남의 삶만 파괴하는 세상에서 꿀잠의 꽃잠(신랑 신부가 첫날밤에 자는 잠. 첫잠)은 손길은 자체로 아름답다. 꿈은 우리가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는 다는 것을 확인하는 희망의 한 모습이다. 함께 나비잠이든 갈개 잠이든 함께 자고 ‘돈이 아니라 사람이 행복한 세상’의 꿈을 꾸자.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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