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의 책읽는 어른모임 ‘함박웃음’에서 함께  읽고 올린 글입니다.  




설흔 작가의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는 조선의 문장가 이옥과 김려의 우정과 삶에 대한 탐구이야기이다. 필자는 어떤 위협 속에서도 자신의 문체를 포기하지 않은 이옥보다 바람 앞에 등불처럼 흔들리는 마치 변절자라 할 김려에게 더욱 마음이 끌렸다. “왜 변절자의 삶을 산 김려에게 더 애착을 보일까?” 란 물음에서 답을 찾기 위해 다시 책장을 넘겨보았다. 

정조시절 성균관 유생이었던 김려와 이옥의 두 문장가는 서로를 존중하며 깊이 있는 글쓰기를 하였다. 특히 이옥의 글은 가히 천재라 할 만큼 멋진 문장과 문체였고 김려는 그런 이옥의 글을 닮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들이 썼던 글은 패관소품체로 나라에서 금지 하게 됐고, 문체반정으로 이옥이 정조로부터 형벌을 받자, 김려는 형벌을 피하기 위해 소품체를 버리고 정조가 원하는 고문을 따르게 된다. “이옥에게는 미안하지만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되려 문체를 바꾸지 않고 고집한 이옥이 바보같다. 글이 대체 뭐라고.” 문체를 바꾸지 않는 이옥을 비난하며 김려 본인은 안전하다고 생각했지만, 임금은 김려를 이옥과 한패로 보고 북쪽 땅 부령으로 유배를 보낸다. “이 모든 게 다 이옥 때문이다! 이옥만 아니었으면 내가 유배를 당할리가 없다.”

이옥과 임금을 원망하며 유배길에 올랐지만, 김려를 진정 고통으로 내몰은 건 자신을 인간취급하지 않는 양반들과 아전들이었다. 그들의 추악한 행태는 이루말 할 수 없을 만큼 잔혹했다. 추위와 배고픔, 멸시와 환대를 받으며 지내는 유배 생활은 김려의 마음을 갈갈이 찢어놨다. 그런 그에게 따뜻한 손을 내민 건 온갖 핍박을 견디며 뼈만 추스린채 살아나가는 가련한 백성들이었다. 권세가들의 탐욕스런 욕망에 살점이 뜯기고,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백성들에겐 세상은 한(限)으로 들끓는 세상이며, 죽음이 항시 옆에서 도사리고 있는 삶이었다. 성군이라 할 임금의 치하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임금의 눈치만 보며 울고웃고 한 자신이 어리석음을 죄인이 되어 백성들의 옆에 서보니 깨닫게 되었다. “아, 나는 도성안의 개구리였구나!”

김려는 그들의 고통스런 생활을 글(이야기)로 표현해 주었다. 백성들에게 글이란 별천지와 같은 것인가. 그들은 자신들의 글(이야기)을 듣고 울고 웃고 하며 위로를 받았다. 글이 대체 무엇이길래 ‘글’로 인해 형벌을 받고 또 ‘글’이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인가... 김려는 백성들을 보며 가슴을 죄는 무언가를 느꼈다.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가 왕이 되었고, 최고권세를 누리고 있는 김조순(김려의 친구)의 배려로 김려는 논산의 현감이 되었다. 유배생활의 끔찍했던 과거는 깨끗이 잊어버린 듯 평안한 삶을 살며 벗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글을 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게 이옥의 아들이 찾아와 이옥의 ‘글’을 넘겨준다. 정조 형벌 앞에서도 문체를 바꾸지 않았던 이옥의 글이다. 김려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이옥의 글을 읽는다. 이옥의 글은 집요하게 묻는다.

“나는 여기 있다. 너는 어디에 서 있느냐?” 

유배시절, 백성들과 서로 힘이 되어주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젠 내 한 몸의 평안을 위해 그 백성들을 등지려 한 것이다. 이옥을 등지고 이번엔 백성들마저 등지려하는 자신의 나약함에 김려는 한없이 어깨가 웅크려졌다. 속수무책으로 자신의 비겁함이, 졸렬함이, 거침없이 까발려짐을 느낀다. 그들을 등진채 언제까지 희희낙락 거릴 수 있을까, 이젠 뒤돌아서서 자신의 과거를 마주보아야한다. 고통스럽더라도 끌어안아야 한다. 김려의 글은 백성들과 함께였을 때, 가치(價値)의 꽃을 피웠다. 

“마음이 담겨있는 글이 진정 나의 글이 아니던가.” 그래서 김려는...

귀밑머리 희끗한 나이에 여행길에 오른다. 이 여행길은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는 일이자, 본연의 ‘나’가 되기 위해 떠나는 길이다. 도망치고 싶었던 과거, 영원히 잊고 싶었던 과거와 마주하기 위해 ‘김려’는 떠난다.

필자가 고심 끝에 마주한 답은, 누구나.. 나 역시 ‘변절자’ 김려처럼 감추고 싶고 도망치고 싶은 것이 있고 그곳으로부터 등돌린 과거가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것이었다. 김려를 마주하며 우리 모두는 비겁하고 비참한, 부정하고 싶은 어리숙한 시간을 경험하지 않았을까...

늙은 나이에 변절자라는 껍질을 벗고 김려는 상처깊은 과거와 대면을 했고,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찾아나간 사람이다. 그 어리숙함을 인정하고 끌어안고 가야만 한다는 걸, 김려를 마주한 책상 속에서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마흔쯤에 또 다시 깨닫는 부끄러움을 덤덤히 받아들이며, 나와 같은 부끄러움을 마주할 이들과 함께 그 ’길’을 걸어 가보고 싶다. 

지난(至難)한 시대를 살았던 이옥과 김려가 우리들에게 말한다.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 이렇게 멋진 것이 없었다면 이렇게 와 보지도 않았을 게야.”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박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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