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상담센터가 만난 세상


문빠 정치에 대한 넋두리


민주당 정치를 진보라 하는 것은 민주당 역사에 대한 모독이다. 잘해서 ‘중도보수’정치다. 그래도 파쇼독재와의 투쟁에서 야당이기에 겪은 질곡을 알기에, 사대수구세력들의 정치 폭압의 실체를 알기에 그들의 정치가 집권 이후 ‘자신들의 약속을 지키는 정치’는 될 줄 알았고 그렇게 성공하길 빌었다. 김대중의 정치가 한국 사회의 주류가 되어 제대로 된 보수와 진보가 대결하는 정치를 바랬다. 하지만 그는 총칼을 돈으로 바꾼 자본 독재의 길, 신자유주의로 갔다. 노무현의 성공을 원했다. 하지만 그도 파병을 통해 그의 갈 길을 분명히 보여주며 아예 신자유주의를 제도적으로 완성한다. 두 정권의 통치 토대는 결국 자본주의 최악의 퇴행체제 ‘신자유주의’였다. 당시에 성공하길 바라기 위해 성공을 비는 이들이 손에 들어야 하는 것은 당근인가 채찍인가 논쟁이 있었다. 필자는 당연 비판으로 ‘정치적 공황’을 예방하라고 했다. 하지만 결과는 두 여중생의 죽음이 만든 촛불로 집권한 이가 보수대연정을 말하고, 서민들의 대통령이라며 정리해고와 파견 비정규직도 모자라 노동법을 민법으로 함몰시킨 ‘노동 쟁의에 대한 손배 가압류 시대’를 열었다. 그 파행과 역주행의 결과가 이명박근혜 시대다. 




노무현의 죽음을 새긴 지지자들은 독기를 품었다. 노무현이 죽음을 통해 말하려는 성찰은 비탄과 분노로 뒤 덮여 기존 체제엔 과유(過猶)하고, 노동자 민중과 진보엔 불급(不及)’한 정치적 감성을 만들었다. 좌우 양방향에 대한 피해의식은 좌우 양방에 대한 무차별 혐오를 나갔다. 특히 민주노총과 진보정당에 대한 배제와 혐오는 실은 한국에게 미래를 삭제하는 저주였다. 귀족 떼쟁이 민주노총을 혐오 대상으로 만들고 그나마 새로운 정치였던 민주노동당을 탁란(托卵)을 통해 와해시켰다. 통합진보당의 해산은 그것의 설거지였을 뿐이다. 한국 지배 구조의 한계가 만든 요행으로 민주당은 다시 집권했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미래로 향한 소통대신 더 단단한 내적 응집과 외적 단절을 정치를 하기 시작했다. 그를 위해 스스로 어용이 되고 광신이 되고 정의가 되고 진리가 되어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규정하며 힘을 과시한다. 자기들의 비판은 열려있고 남의 비판엔 닫혀 있는 소통부재는 더욱 단단해 졌다. 그 결과 불거진 사회적 현상이 ‘문빠논쟁’이다. 모든 빠에겐 집착이 있다. 대상 자체에 대한 애호라면 피해가 덜 한데 비교 대립하는 빠라면 안으로는 더욱 증오가 단단해지고 밖으로는 더더욱 가해로 강해지니 그 해악은 가늠하기 어렵다. 문빠 논쟁의 핵심은 ‘소통과 해결’의 문제지만 그들은 그저 승패의 문제일 뿐이다. 소통과 해결을 향한 지지와 옹호가 아니라면 도대체 문빠와 박사모가, 촛불과 태극기가 어떻게 무엇이 다른 것일까?  


그래서 필자는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을 기대했다. 남북문제 한미 문제만큼 남한 내부의 소통과 단결도 중요하고, 그것이 민주와 인권, 진보적 미래에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어설픈 기자의 질문에 답변을 했다. 나보다 더 많이 악플을 당한 정치인은 없다며 "저는 저와 생각이 같건 다르건 유권자 국민들의 의사표시라고 받아들인다. 그런 부분에 대해선 조금 담담하게 그렇게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고 한다. ‘담담하게’... 이 표현의 강자(强者)스러움에 대해 한숨을 쉬었다. 절박한 사람 앞에서 담담한 사람들이란 구경꾼 아니면 강자다. 악플이라도 그것을 무시해도 되는 조건을 가진 자와 악플이 생존 자체에 대한 위협이 되는 이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악플에 자결까지 하는 현상에 대한 최소한의 통찰이 없는 대답,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에게 침착하라며 수영법을 설명하는 이의 말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절대 맞는 것도 아니다. 왜냐면 ‘말을 하나 안한 것과 같은 격’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의 문빠 현상을 대통령은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필자는 문재인 정권이 자주와 평화 통일과 민주와 인권의 역사에서 소중한 정권이길 바란다. 민주주의가 활기가 군사독재의 일사분란함보다 민주주의와 인권이 큰길이자 지름길임을 보여주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 ‘어용’을 불사한다는 문재인 지지자들에게 다시 한 번 묻는다. 진정으로 성공한 정권이 되기 위해 지지자들이 손에 들어야 할 것은 칭찬인가 비판인가? 어떤 이는 이를 비판적 지지와 전략적 지지로 구분하면서 성숙한 민주시민 능동적인 모습이라 한다. 하지만 이른바 전략적 지지라면 그것은 약자의 방어논리일 때 가능하다. 책임을 지고 힘을 휘두르는 문재인 정권과 그 지지자들이 할 말이 아니란 말이다. 막내의 심정으로 부모의 역할을 할 수 없다. 귀를 열고 맘을 열고 머리를 차게 하는 것은 비판자들의 몫이 아니라 지지자들의 몫이다. 아니면 그것은 임금의 자리에 앉아서도 과거의 피해에 망상으로 빠지는 폭군과 간신의 모습일 뿐이다. 칭찬으로 크는 것은 아이의 시간이다. 비판으로 강해지는 모습이 책임을 지는 이들의 성숙된 모습이다. 그래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지만 비판의 문을 통과하지 못한 비판은 상대의 눈을 가리고 진부(陳腐)의 길을 가게 만든다. 봉건시대에도 충언과 충신은 쓰고 감언 간신은 달다며 경계를 한 이유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연나라에서 일이다. 왕이 신하에게 좋은 인재를 등용하여 성공한 정치를 할 수 있는 법을 물었다. 그때 곽외라는 이가 한 말이다. “천하의 제왕은 승승과 함께 합니다. 일국의 왕은 친구와 함께 합니다. 제후라면 간신히 신하와 함께 합니다. 그러나 나라를 망치는 정치가는 발 아래로 부리는 자들, 찬양하는 자들만 찾습니다.”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큰 정치는 스스로 겸손하여 배우는 정치를 한다. 배운다는 것은 자랑이 아니라 성찰을 통해 가슴을 열어 소통하는 정치다. 나쁘지 않는 정치는 뜻이 맞는 친구들과 의리의 정치를 한다. 지역정치를 하는 이들은 이익을 같이 하는 부하의 정치를 하고, 최악의 정치는 노예들의 정치다. 다른 이들을 미워하고 성내고 무례하고 핑계를 대며 비난만 하며 자기 찬양만 열중하는 정치가 노예정치다. 문재인 정권과 그들을 지지하는 이들은 지금 남한의 정치는 어떤 정치로 흘러가고 있는지 돌아보고 돌아 볼 일이다. 그래서 뉘우치는 모습이 아니라 깨우치는 모습으로 한국 정치사에 빛나는 한 역사를 만들기 바란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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